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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7zv0-PCh91g?si=6CbHgUCzj-uZmm2t&t=158
2025년 4월 27일 주일예배
✦ 믿음 21 ✦
용서와 사랑 위에 세워지는 미래의 비전
(창세기 50장 15~26절)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설문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 중에서 40%는 이미 끝난 과거에 대한 것이고, 50%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것이며, 10%만이 현재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0% 정도만 조금 염려할 만하고, 나머지 90%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나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1년 전에 무엇을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가? 1년 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제 생각에는, 뭘 걱정했는지 기억을 못 하실 겁니다. 1년 정도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닌데, 1년 전에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했습니까? 지금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을 가지고 뭘 그렇게 걱정하고 있었습니까?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불안과 염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통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전쟁으로 죽은 군인들의 숫자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남편, 또는 형제를 전쟁터로 보낸 후 본국에서 근심과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국민의 수가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세 배 넘게 많았다는 겁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미 끝난 일이나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마음 졸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심장병이나 다른 질병으로 아프거나 죽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과거에 이미 끝난 일, 생기지도 않을 일에 대해 너무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의 형들입니다.
1. 불필요하게 두려워하는 형들 (15~18절)
아버지 야곱의 죽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어져 내려온 위대한 족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전환점이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들 사이에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인데, 그것이 사실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5절)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뒤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요셉이 악을 갚으려 하고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이미 과거에 다 끝났고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지금 걱정하며 그것 때문에 너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당시에는 자식들 사이에 원한 관계가 있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서로 복수하지 않고 참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장례가 끝나면 그때부터 무서운 복수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예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쌍둥이였고 에서가 장자였는데, 야곱이 자기를 속였다고 해서 그토록 미워하며 죽이려고 했지만, 그가 도망가는 바람에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야곱을 죽일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더구나 이삭이 금방 죽지 않고 오래 살았기 때문에 더더욱 기회를 놓쳤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 ‘요셉이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그동안 우리에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참고 있었던 것이지, 우리를 진정으로 용서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요즘 전문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소설 쓴다.’라고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상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언젠가 날을 잡아 무서운 피의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자 두려움에 떨던 그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해를 요청합니다.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6~17절)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들은 아직도 40년 전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40년 정도 지난 이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40년 동안 사회의 발전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 지은 죄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각자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40년 전에 자기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모든 악을 요셉이 갚지나 않을까 걱정한다는 말이 뭡니까? 그들도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너무나 생생하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해결을 못 했습니다. 상황은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사실 피해자였던 요셉은 이미 오래전에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에게 보복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17년 전인 45장에서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낼 때 이미 모두 다 정리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집트 바로 왕의 그다음 위치인 2인자 자리에 올라갔을 때, 여러 정책을 잘 펼치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또 기근을 잘 극복하는 정책들을 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났는데, 그때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이미 그때 다 과거를 정리한 겁니다. 더 이상 보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원한은 그때 하나님 앞에서 청산하고 그들을 만났던 것이지,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고 가서 그들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들은 청산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죄가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요셉은 사람을 통해 화해를 청하는 형들의 말을 전해 듣고 웁니다(17). 형들은 처음에 직접 가는 것보다 사람을 먼저 보내서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요셉이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울까요?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울었다고만 나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요셉 자신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다 정리된 일인데 형들은 거기서 전혀 해방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전혀 해방되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서 풍성한 곡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 자녀들을 돌봐주고 그들과 가축들이 먹을 음식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렇게 풍성한 은혜를 입으면서도 두려워하고 불안해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이렇게 두려워합니까? 그들은 요셉의 사랑을 그대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정도가 됩니다. 나는 순수하게 사랑으로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것을 의심하고 오해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했는데 자꾸 비틀어서 보려고 하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합니까? 과거의 죄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그 죄가 자기 발목을 잡아서 쓰러지게 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뭡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셨는데, 그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장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은데, 즉 똑같이 중요한데, 네 이웃을 네 자신(몸)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래서 십계명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 계명을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이웃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으면 그 삶은 계속 발목이 잡히는 겁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관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가면 그 삶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안과 염려와 뭔가 캥기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그것이 자꾸 자기를 방해하고 발목을 잡아 쓰러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속이 병든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고 위기 때 책임을 회피합니다. 똑똑하다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내면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즉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기 싫고 귀찮은데 억지로 하라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묵상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산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더 중요하고 이웃 사랑이 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아무리 호의를 받고 사랑을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지?’ 하며 불안한 겁니다.
요셉은 그동안 형들과 그 가족들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기근이 나서 굶어 죽게 생긴 가족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잘살도록 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또한 그들이 조금도 섭섭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해 주었고, 왕에게서 땅까지 허락받아서 따로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러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불안함 속에서 지내왔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풍족하고 편안하고 다 좋은데 항상 불안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요셉은 그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워서 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이 좋은데 저들은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구나.’ 하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동안 자기가 형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그 사랑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니까, 즉 요셉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풍족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살아도 그 풍성함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냥 보자마자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우리를 용서해다오.”라고 울면서 이렇게 잘못을 고백했으면 거기서 끝나고 평안하게 살았을 텐데, 그걸 못 하고 계속 질질 끌다가 지금 환경은 너무 좋은데 마음은 지옥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요즘 많습니다. 환경은 좋고 풍족한데 마음은 지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평생 불안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도 그릇을 거꾸로 놓거나 뚜껑을 닫아 놓으면 그릇에 빗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형들도 마음이 닫혀 있으니까 아무리 풍족하고 풍성하게 살아도 풍성함을 모릅니다. 요셉의 눈치만 살피는 초라한 신세가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서도 불안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그 놀라운 사랑의 손길로 늘 인도해 주시며 엄청난 은혜를 쏟아부어 주시는데도, 나는 정작 마음이 불안해서 밤에 잠도 못 자며 안절부절못합니다.
바로 그러한 불안함의 한가운데 관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가 나를 꽉 짓누르는 것 같은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그렇게 마음을 계속 짓누르는 뭔가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해결하지 못한 관계의 문제가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잘 살펴서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보며 우는 요셉은 그렇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런 불쌍한 모습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8절)
왜 이들이 친히 왔겠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한 끝에, 결국 요셉을 직접 찾아가 용서를 빌면서 그의 종이 되기로 결정합니다. 그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서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용서하라 그랬으니까 좀 용서하십시오.” 이 얼마나 참 쩨쩨합니까? 참 창피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안 됩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사람을 보내서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다녀온 사람들이 전해줍니다. “어떻게 잘 해결됐습니까?” “울기만 하던데요?” 그 말을 듣고 더 고민됩니다. ‘아니,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왜 울지? 뭔가 이상하네. 분노의 눈물인가? 울분이 막 차오르나? 괜히 우리가 가만히 있던 벌집을 쑤셔 놓은 건가?’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불안해지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하고 뭔가 말하면 좋겠는데, 또는 벌을 받으라고 하면 차라리 낫겠는데, 그냥 울기만 했다니 더 이상하고 불길합니다.
형들이 처음에는 격식을 갖추어 사람을 통해서 요셉에게 말을 전달하며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17)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종이니까 용서해달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하셨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이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기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면서 원한을 품고 있구나.’라고 해석하고 더욱 걱정됩니다. 그래서 이제 직접 달려가 요셉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가지 않고 계속 ‘왜 그러지? 왜 그러지?’ 했으면 소설만 쓰게 되고 이상한 상상만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계속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찾아간 것은 조금 늦기는 했지만 아주 잘한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20대 중반이었는데, 하루는 감기가 걸려 몸이 아파서 클래스 때 조를 짜서 하는 조별 모임에 못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몸이 아프니까 기숙사 방에서 누워 자다가 늦게 일어났는데, 모임에 못 갔으니까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나가면 다른 학생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고, 미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또 저를 보면 ‘너 어디 갔었냐?’라고 핀잔을 주며 무시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너는 같이 안 했으니까 빠지고 우리끼리만 하겠어.’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푹 자고 약도 먹고 몸이 약간 나아진 기분이 들기에 늦었더라도 밖으로 나갔습니다. 학생들이 저쪽에서 오며 저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같은 조에 속하지 않은 학생들이었기에 저는 속으로 ‘저 친구들은 내가 빠진 것을 모르니까 괜찮겠지.’하고 생각하며 지나가는데, 저쪽에서 같은 조에 속한 친구들이 오는 겁니다.
그들이 저에게 뭐라고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려 하는데 저에게 오는 겁니다. 저를 부르더니 “왜 안 왔어? 얼굴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라고 물으며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별것 없었어. 뭘 했는지 다 알려줄게.”라고 했습니다.
저는 혼자 침대에 누워서 온갖 상상을 다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저 혼자 걱정하고 저 혼자 시나리오 쓰며 저 혼자 상상하며 최악을 생각한 겁니다. 밖의 세상은 똑같았는데, 괜히 저 혼자 엉뚱한 방향으로 상상하고 염려한 겁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게 요셉의 형들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삶 공부를 할 때도 말씀드리지만,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게 있다. 그게 뭔가? 잠수 타지 않는 것이다. 잠수 타지 말라.”
좀 어른들은 그런 경우가 많지 않은데, 종종 청년들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잠수 타는 경우가 있습니다. SNS ‘프사’를 싹 바꾸면서 그런 걸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거나, 아니면 까맣게 해서 아예 아무것도 없게 합니다. 그러면서 잠수 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합니까? 바로 이런 마음인 겁니다. 자기가 뭔가를 좀 잘못하고는 혼자 상상을 막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겠지? 내가 저렇게 하면 저렇게 생각하겠지?’ 하며 혼자 상상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잠수 타자고 하며 다 끊어 버립니다. 남들은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의아해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남들은 전혀 그런 이유를 알지를 못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바로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이도 많고 청년도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요셉은 이미 오래전에 형들을 다 용서했습니다. 아무 원한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형들은 불안합니다. 그렇게 불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되지 왜 사람부터 먼저 보내고 남아서 상상합니까? 괜히 혼자 있으면 엉뚱한 상상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요셉이 자기를 드러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했을 때 ‘요셉이 우리를 용서했구나.’ 하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니까 또다시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요셉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자기들이 그의 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이것은 사실 이미 다 용서한 요셉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요셉은 다 용서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계속 빈곤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도 과거의 죄에 매여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의심이 가거나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몇 번씩 계속 확인해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회개했더라도 또 의심이 생기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데, 용서해 주신 죄를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회개했더라도 내 마음에 계속 의심이 있다면, 확신을 주실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계속 회개하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혼자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래서 잠수 타게 되는 겁니다. 밖으로 나가서 직접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고 막상 나가보면 별것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남들은 신경도 안 씁니다. 괜히 혼자서 그러는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특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혼자 상상하고 있으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저쪽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계속 상상하다 보면 그가 나를 안 좋게 보는 것 같고, 그 사람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험담하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자꾸 느껴지게 됩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직접 찾아가 대화를 해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겸손하고 부드럽게 다가가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면서 상상으로 소설을 쓰고 영화 시나리오까지 써서 상대방을 이상한 괴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잠깐 외출하고 오겠다고 하며 저녁 때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두워지는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밖이 깜깜해지는데도 들어오지 않고 연락해도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가 들어오지를 않네. 혹시 어디서 지금 교통사고가 난 거 아냐? 어디 응급실로 지금 실려 간 거 아냐? 아무래도 지금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진 것 같다. 그러면 지금 생명이 위독하고 이제 며칠 안 남은 것 같아. 그러면 잠깐, 장례는 어디서 해야 하지? 장의사를 알아봐야겠구나. 우리 애들은 어떡하지? 키워 줄 사람이 필요해. 그러면 누구와 그다음 결혼을 할까?’
그러는데 바로 그때 아내가 쓱 들어옵니다. 완전히 쓸데없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혼자 상상하면서 그런 생각의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2. 형들을 위로하는 요셉 (19~21절)
형들이 두려워 떨면서 용서를 구할 때, 요셉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합니까?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19~21절)
얼마나 훌륭합니까? 형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요셉의 말을 잘 보십시오. 요셉은 인간적인 말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아이 형님들, 다 지난 일인데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리도 쩨쩨하게 걱정하고 왜 그러십니까?” 하는 식으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세상에서 겪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서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반드시 선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실수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자기에게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요셉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이처럼 인정하며 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위기 가운데 항상 죄를 범하지 않고 바르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신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겼고, 또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용서할 수 있고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 했고 심지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못되고 악하게 굴었기 때문에, 요셉은 인생의 그 아까운 젊은 시절, 10대 후반에서 20대를 통째로 날려버렸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인생의 황금기, 그 아까운 젊은 시절을 인생 밑바닥에서 종으로 살고 ㄸ에 갇혀서 살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제가 요셉이라면 형들이 와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라고 했을 때 이렇게 외쳤을 수 있습니다. “내 청춘을 돌리도!” 이렇게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여기서 두 시간 정도 북쪽에 있습니다. 톨리도(Toledo)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큰일을 행하시려는 것, 즉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용서했으며, 오히려 진심으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셉의 형들이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추궁하고 벌을 내린다면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19)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악함도 바꾸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자꾸 후회하고 자책하며,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자꾸 따지며 추궁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며 후회하고, ‘그 사람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하고 후회합니다. 또 ‘어떻게 그 인간이 나에게 그럴 수가 있지?’ 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 다 끝난 일을 들추어내며 자기 가슴을 치고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상황은 이미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심판을 다 끝내셨는데도 우리는 그때부터 심판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심판주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이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만일 내가 자꾸 심판하려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려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엄청난 교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셨을 때 바로 이것을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게 바꾸시고 끝내셨으면, 그때부터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끔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쓰는데, 안 좋은 일이 오히려 복이 되었다는 말이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지 않으면 전화위복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은 항상 악으로 남을 뿐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도 요셉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미래를 향한 비전 (22~26절)
요셉은 자기를 과거에 가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래의 사람이었고, 꿈과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노예로 살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계획하신 내 삶의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이것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넘어간다면 진짜 비참한 삶이 되고 만다.’
요셉은 바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이러한 비전이 결국 자기 자신을 살리고 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데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꿈을 자기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죽으면서 이 비전을 자기 몸에 새겨 놓습니다.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24~26절)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어야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땅에 묻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죽으면 아버지처럼 즉시 가나안 땅으로 메고 가서 장사를 지낼 것이 아니라 미라로 만들어서 입관만 시키라고 합니다. 그랬다가 그들이 완전히 이집트를 떠날 때 자기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거기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비전이고 놀라운 믿음입니다. 아니, 지금으로부터 한참 후인 몇백 년 후에 자기 유골을 매고 갈지 안 갈지 그것을 어떻게 개런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셉은 정말 놀라운 믿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의 관을 볼 때마다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자기들이 언젠가 이 이집트를 떠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요셉의 삶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늘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요셉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단순히 흉년에 자기 식구들이나 애굽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려웠지만 잘 극복하고 우리가 풍족하게 살았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골은 그 후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희는 가야 한다. 여기 눌러앉아 있으면 안 된다.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 세워가라.”
[나가는 말]
위대한 족장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는 요셉의 용서였습니다. 그의 용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크게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한 용서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 나라로 초청해서 양육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용서입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미래를 향해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나를 감옥에 가두어 둔 채로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교도소의 환경이 좋아도 교도소 안에 갇혀 있는데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용서가 없으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과거를 청산하느라 한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을 만큼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불행한 노예의 삶을 이국 땅에서 살게 된 것은 모두 형들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요셉은 결코 과거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잘못을 깨끗하게 용서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해서 죽이려 했던 형들에게 계속 원한을 품고 있었으면, 그 과거가 족쇄가 되어서 비전도 미래도 하나님의 약속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용서하고 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비전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창세기’(Genesis)라는 말 자체에 ‘시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시작하는 책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창세기가 있기에 그다음 출애굽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열쇠가 바로 요셉이고, 무엇보다도 그의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도 요셉처럼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철천지원수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있더라도, 우리 가운데 그렇게 엄청난 원수가 있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불편한 사람, 내가 껄끄러운 사람, 그래서 보기 싫은 사람, 저 사람과는 말도 나누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우리 삶에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그냥 두고 계속 살아가면 아무리 내 환경이 좋고 내 삶이 풍족해도 마음이 계속 잡혀 있는 겁니다. 발목이 잡혀 있고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해로운 일을 했어도, 그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괴롭혔어도, 보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한 번의 행동에 그치지 않고 그 용서의 약속을 계속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용서하는 행동을 반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작아 보이면 우울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쑥 자라 있는 자기를 발견하면, 더 이상 작은 일로 우울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셉은 여러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엄청난 신앙의 거인으로 자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작은 일에 우울해지거나 분노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 자기 형들을 용서하고 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이 이렇게 나아갈 수 있었고,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돌아보면서, 나를 위해서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도 용서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비전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