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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QYnGt2QXY6o?si=UErxTZCiGs_EpHZj&t=227

 

 

2025413일 주일예배

믿음 20

야곱의 죽음과 성대한 장례식

(창세기 4929~5014)

 

[들어가는 말]

 

항상 경제 위기가 있지만, 특히 몇 년 전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남대문시장 상인 몇 명이 포장마차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요즘 경제 상황을 얘기하며 누구 장사가 더 불경기인가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스포츠용품점 주인이 말합니다. “나는 88 올림픽 이후 최대불황이야.” 그러자 주유소 주인이 이야기합니다. “어유, 뭘 그걸 갖고 그래? 말도 마.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최대 불황이지.” 그 말을 들은 전자 대리점 사장이 말합니다. “뭘 그 정도 갖고 그러나? 난 일제강점기 이후 최대 불경기야.” 그러자 마지막으로 서점 주인이 한마디 합니다. “여보게들, 우리 가게는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후로 최대 불황이라네.”

 

요즘 경제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발 관세정책 때문에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게다가 정책이 며칠 만에 자꾸 바뀌다 보니 더 큰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다. 조금만 기다려라.’ 하는 의견도 있고, ‘큰일 났다. 이거 미국이 망할 징조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솔직히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만 붙들고 신뢰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죽음이 나오는데,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내려오던 족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이기며 살 수 있을지, 그 길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야곱의 죽음 (49:29-33)

 

야곱은 자신을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4929)

 

사실 야곱 개인으로 볼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추억이 담긴 곳이 어디였겠습니까?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그에게 가장 추억이 있는 곳은 하란 땅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인 라헬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라헬과 함께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멋진 사랑 이야기를 써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을 하란에 묻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추억이 가득했던 하란 땅이 아니고, 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묻힌 베들레헴 땅에 묻어 달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입니까?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0~32)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할 곳이 없어서 가나안 땅에 있는 헷 사람 에브론의 밭을 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가지를 쓰고 샀습니다. 그래도 그곳을 산 것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사라를 위해서 샀는데, 그 후에 자기도 역시 그곳에 묻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바로 그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합니까? 자신의 조상들이 거기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만일 야곱이 이집트에 묻히기를 원했다면 얼마든지 이집트의 명당에 묻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 요셉이 그 나라의 이인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자손들도 자주 그의 묘를 찾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기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이 무덤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번에도 살펴본 것처럼, 단지 내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 내 고향에 묻혀야 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으로 그렇게 유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자기는 거기에 묻히겠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힌다는 것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손들도 똑같은 약속을 붙들며 살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나는 고향에 가서 묻히고 싶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나는 한국에 가서 묻히고 싶어.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벨라 굴은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같은 소망을 품은 채 묻힌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거기에 장사했고, 아들 이삭에게 자기도 거기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거기에서 장사했고, 자기도 거기 묻혔습니다.

 

야곱도 레아를 거기 묻었고 자기도 거기에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 라헬은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여행 중에 죽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막벨라 동굴 무덤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결정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그 땅을 사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그의 땅이 되었고, 가나안 사람들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33)

 

드디어 야곱이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모든 사람은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저도, 여러분도, 언젠가 때가 되면 다 이 땅을 떠납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대략 주전(BC) 1800년대 정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처럼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이든 아니면 지금이든 사람은 다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젊어도 또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순서대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는 다 떠납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죽음은 단순히 야곱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족장 시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어 계속되다가 이제 화려한 막을 내리고,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되는 전환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는 개인 중심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며 어떻게 말씀을 자기들의 삶 가운데 실천하며 살아가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그전까지는 아브라함 개인, 이삭 개인, 야곱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들을 조금 낳았는데, 야곱은 아들을 열둘이나 낳아서 열두 아들들을 통해 이제 민족으로 번영하는 길을 놓은 것입니다. 실제로 앞으로는 공동체로 살아가라는 뜻이 거기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야곱에게 아들을 많이 주신 것입니다.

 

족장이라고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살았던 족장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들은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앞을 바라볼 때 어떠십니까? ‘내 미래가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됩니다. 연세가 좀 드신 분들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까?’ 분명히 생각하실 겁니다. 또 중년도, 청장년도, 청년도, 모두 내가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약간 막연하게 걱정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던 시대는 지금 우리가 막연하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 걱정하는 정도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불확실한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괜찮은데 갑자기 몇 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시대에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고, 아주 불확실하고, 안전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것도 자기 땅도 아니고 이방 땅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로 빚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가족 친지들과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나안 땅으로 가서 말씀 하나만 붙들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가족 친지와 같이 살면 그래도 조금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나만 붙들고 나아가라. 나만 신뢰하고 나아가라. 나만 믿고 따라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대다수 사람들은 싫어요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덥석 잡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기회를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들면서 하나님, 제가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이렇게 주일예배 참석을 대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믿음이란 결코 예배 의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가면 주일 성수했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은 삶 그 자체이며,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만 붙들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학벌도 없고 직장도 없고 사업도 없고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이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것이 믿음이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상황, 모든 것을 다 쌓아놓고 안전하게 해놓은 후 편안하게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서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당시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들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직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돈이 많거나 자기들의 능력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단지 살아남은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편안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에게 이익일까?’ 하며 산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까?’ 하고 고민하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그들도 실패할 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변화시켜 나가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했고,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현실의 삶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은 특히 전 세계적으로 굉장한 위기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상의 변화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즘 영상만 몇 개 찾아봐도 AI라든지, 그런 변화에 대한 것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것을 안 하면 뒤처진다는 말도 많습니다.

 

이전에는 학벌이 높거나 자격증이 있거나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는 사회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AI의 발달로 우리가 하는 일까지 대체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AI가 우리의 일자리를 대체해서 어떡하냐? 이제 직장이 없어질 것 같다.’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전문가들 말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AI가 앞으로 우리가 하는 일을 대체한다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설마 그래도 AI가 목사는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AI가 목사보다 지금 설교를 더 잘합니다. ‘이러이러한 설교를 만들어줘.’라고 하면 설교문이 쫙 나오는데, 저는 그것을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몇몇 목사님들이 자기보다 설교를 잘한다고 그랬습니다.

 

AI가 지금 법대 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의대 시험도 아주 우수한 성적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 말로는, 정확히 이야기할 때 AI가 우리 일자리를 대체하는 게 아니고 AI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AI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을 대체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정확한지는 좀 지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정말 위기이고 망할 징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무슨 기회입니까? 이제야말로 올바른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그런데 살아가시면서 어렵다, 어렵다하십니까? 어렵지 않으면 괜찮지만 어렵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운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붙들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기도해야만 살아남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신앙생활을 별로 안 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의 삶이 정말 믿음의 삶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앙적으로 은퇴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다시 믿음의 경기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삶이 놀라운 믿음의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항상 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실수를 여러 차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와 실수 가운데서도 결정적일 때 잘한 것이 있습니다. 결정적일 때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냥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은 소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손자인 야곱이 죽을 때까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 소망을 품고 동일한 막벨라 굴에 장사됨으로 하나님이 분명히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지, 단순히 고향에 가서 묻히고 싶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 지금 당장 되면 좋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 나라도 당장 임하면 좋겠다, 하나님이 당장 악인들을 다 물리치고 세상을 평안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장 뭔가가 이루어져야 안심이 될 텐데, 족장들은 가나안 땅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한 채 막벨라 굴에 장사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엄청난 우주를 만드시는 데에는 얼마 걸렸습니까? 창세기에 의하면 단 6일이 걸렸습니다. 사실 그것도 우리 식으로 말이 6일이지, 하나님은 단번에 다 만들 수 있으셨지만,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6일 동안 만드셨습니다. 높은 산이나 깊은 바다는 말씀 한마디로 즉시 만들 수 있으셨지만,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와 그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려면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금방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장 뭐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저처럼 크리스천 가정에 태어난 모태 신앙인들도 사실은 각자 다 어떤 계기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믿는 사람이 어디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할 때,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믿게 하도록 애쓸 때 사실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는 낙심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기도하며 애써도 잘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열매가 안 보여도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계속 기도하며 나아가면 언젠가 하나님이 열매를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려주셨습니까? 지금도 나를 빚으시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까? 아무리 말씀하셔도 말을 잘 안 듣는 나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지금도 계속 기회를 주시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려는 VIP의 영혼을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리며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오늘 1초 만에 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저는 다른 교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 보면 몇천 명이나 몇만 명 되는 초대형 교회들이 있습니다. 여기도 미국 교회들 중 큰 교회들이 많습니다. 한인 교회들 사이에서도 큰 교회도 있고 잘된다는 교회들도 있지만,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교회가 크다, 사람이 와글와글하다, 프로그램이 많다... 그런 건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부러운 게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컨퍼런스를 가면 가정교회를 하는 목사님들이나 앞으로 하기 위해서 배우려고 하는 목사님들이 모이는데, 그중에 영혼 구원의 열매가 정말 많이 일어나는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이나 목자 목녀들이 간증하시는 걸 들어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고 너무 부럽습니다. ‘, 너무 부럽다. 저렇게 안 믿던 영혼이 주님을 만나게 된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그렇게 해보자고 하며, 지난번 <목회편지>에도 썼듯이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셔서 그동안 많은 영혼이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아직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최근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한인 교회 중 하나에서 이번 부활절에 어린이를 포함하여 무려 13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그 교회에 이전에 없었던 일인데, 물론 유아 세례도 있지만 이번에 13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으니 놀랍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꺼번에 13명을 세례 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명 세례를 주기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이번에 그렇게 세례를 주는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참 부러웠습니다. ‘, 우리도 좀 저런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교회가 그렇게 되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사실 그동안에는 주변 교회들에서 영혼 구원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저렇게 일어나니까 놀랍다. 기쁘다. 감사하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러우면서 우리도 좀 저렇게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한결같으십니다. “하나님, 저희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뻐하시면서 사용해 주십니다. 그런데 저희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 그래. 알았어.” 하시고는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한다고 그러면 계속 사용해 주십니다. 우리가 안 한다고 그러면 다른 데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2.   성대하게 치러진 야곱의 장례식 (50:1-13)

 

이제 야곱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주관하게 됩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치러지는데, 먼저 애굽(이집트) 방식입니다.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501~3)

 

여러분, 사실 요셉이 얼마나 굉장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요셉보다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 우리 중에 있겠습니까? 그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그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울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고 , 하나님 나라에 갔으니까 됐지.’라고 하며 그냥 덤덤하다면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왜 안 슬픕니까?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슬프지 않습니까? 이것은 노력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눈물이 나고 그냥 우는 겁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것은,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 슬프지만, 그래서 울지만,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서 분명히 다시 볼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여기서 몸에 향 재료를 넣었다는 것은 시체가 썩지 않게 미라로 만든 겁니다. 이집트 미라가 얼마나 유명합니까? 당시 애굽 장의사의 수준은 세계 최고입니다. 한 번 미라를 만들면 몇천 년씩 보존되지 않습니까? 요즘도 미라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대단합니다.

 

그 최고의 장의사들이 야곱의 시신에 향 재료를 넣는 일에 무려 40일이 걸립니다. 그리고 따로 70일을 정해서 모든 이집트 사람이 타지인인 야곱의 죽음을 위해서 애곡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70일이 얼마나 긴 기간입니까? 두 달이 넘는 기간인데, 그렇게 애곡합니다.

 

당시 아무나 죽으면 몸에 향료를 넣은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귀족 이상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당시에 왕이 죽을 때 이집트 백성은 72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장례식은 거의 애굽 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화려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살아서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바로 왕 앞에서 고백했지만, 죽어서 장례식이 가장 화려했던 사람이 바로 이사람 야곱입니다.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4~6)

 

애곡 기간 후에 요셉은 사람들을 통해 바로 왕에게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가서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이에 바로는 요셉에게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런데 여기 잘 보면, 요셉은 바로 다음의 이인자인데 자기가 직접 가서 요청하면 되지 왜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지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죽었고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거기에 입을 맞추고 울고 시신을 만졌습니다. 시체를 만졌기 때문에 지금 이집트에서도 부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왕 앞에 부정한 몸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바로 왕을 배려해서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예의 바르고 태도가 굉장히 부드러우며 바른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장례식에 어떤 사람들이 수행했는지 보십시오.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7~9)

 

요셉은 야곱의 장례에 각계각층의 이집트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적인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애굽의 방식을 따릅니다. 40일에 걸쳐 미라도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더운 날씨에 광야를 통해 시신을 운반해 가려면 썩지 않게 보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야곱을 애굽에 장사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가서 장사함으로써, 자기들은 약속의 사람들이며 애굽에서는 아무리 잘 적응하고 살며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본질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여기서 증거한 것입니다.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0~11)

 

아벨 미스라임이집트의 통곡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운반해서 간 요셉은 그곳에서는 가나안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요단강을 건넌 후 아닷 타작마당이라는 곳에서 7일 동안 애곡한 것은, 가나안 방식으로 한 번 더 장례를 치렀다는 의미가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장례식이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소망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빠른 지중해 길이 아니라 광야 길을 택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길이 나중에 모세 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지낸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의 길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처럼 요셉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번 가나안 방식으로 장례를 치름으로써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이 자기들의 가나안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2~13)

 

마침내 요셉과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나안 땅에 있는 막벨라 굴에 그를 장사합니다. 요셉이 애굽과 가나안의 장례 방식을 모두 수용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든 가나안에서든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어디 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세상 어느 나라든 결국 나그네로 삽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로 살면서 굳이 이 세상 사람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자기의 신앙을 지킨다고 해서 굳이 안 믿는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복장이나 싫어하는 일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조사한 통계에도 자주 나오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기독교를 배척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말이 안 된다거나 교리 문제가 아니라, 주로 믿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서로 사랑하라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 것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리로 나와 띠를 두른 채 피켓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잘 먹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과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인정해 줍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믿지 않는 분들에게 다가갈 때, 그분들은 우리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나도 저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모임에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친절을 베푼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의 옷을 속에 입고, 겉에는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같이 했다는 것처럼 그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해주어야겠습니다.

 

 

3.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남은 과제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를 장사 지낸 후 애굽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5). 그리고 장례가 끝난 후 약속대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14)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 정도 사람들이 갔으면, 어느 정도 미리 자리를 잡아두고 돌아와서 금방 이사하여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그냥 다시 돌아옵니까?

 

이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죽음이 곧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죽음은 위대한 족장 시대가 끝난 의미이지, 그것이 곧 이집트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야곱에게 많은 아들들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요셉은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역사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자신들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그들은 승리자가 되어 막벨라 동굴에 누웠습니다. 그러한 시점에 요셉은 이제 새로운 믿음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새로운 시대란, 지금까지 조상들이 개인적으로 실천했던 믿음을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그들은 개인적인 윤리를 넘어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갈 때가 된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공동체로서, 제사장 나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과제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을 개인으로 부르셨고 이삭을 개인으로 부르셨고 또 야곱을 개인으로 부르셔서 믿음의 길이 어떤 것인지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변화시키셨으며,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야곱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서 나갈 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자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을 그냥 보면 요셉이 가족 이민 초청을 해서 가족 이민으로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하나의 민족과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가장 좋았던 이집트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개인, 개인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순종해 가야만 합니다.

 

이제 야곱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 안에 갈등이 있고 해결하지 못한 상처도 있습니다. 또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시기가 언제인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로서, 한 민족으로서, 공동체로서, 믿음으로 삶을 실천해나가는 시대적 사명이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 가족만의 삶도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나 혼자서만 그렇게 살다가 그냥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고, 그렇게 사명을 다하다 오라고 하십니다. 특히 다른 믿는 형제자매들과 힘을 합쳐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교적인 생각이고,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교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Believing and Belonging, 믿고 속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공동체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정말 크리스천이라면,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혼자서만 믿는 것이 아니고 같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이고, 또 목장으로 모여

함께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특히 이런 다니엘 금식기도 같은 것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은 결코 나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의 이 작은 인생에 하나님이 큰 세상을 안겨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사용하십니까?

 

내 인생은 이 세상에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살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립니다. 내 것만 움켜쥐고 나를 위해서만 살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주는 삶을 살면 행복해집니다.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복이 우리 각자의 인생과 가정과 목장과 우리 교회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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