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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6일 주일예배
✦ 믿음 19 ✦
요셉에게 내려주신 풍성한 복
(창세기 49장 22~26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국에서 자녀 교육 문제로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많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한국은 사교육비가 엄청나고 실제로 학원에 다니느라 어린아이들이 굉장히 바쁩니다.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어린이도 굉장히 바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청년들이 잘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또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아졌고, 그래서 지금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1월에 다른 해에 비해 출산율이 약간 올랐다고 해서 좀 다행이긴 한데, 지금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비롯하여 요즘 유명한 일론 머스크(Elon Musk) 같은 사람도 한국은 곧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한국은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80년이 되면 인구가 반토막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굉장히 우려가 높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아이들은 학원에 많이 다니느라 힘든데, 자녀 교육 문제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요즘 인성 교육 문제가 심각합니다. 계속해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교육 위주, 대학 입시 위주로 하다 보니까 인성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 특히 부모님들이 기억하셔야 할 것은,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성과 성품입니다. 지능은 정말 엄청난 천재가 아닌 다음에는 대개 비슷합니다. 그런데 감성과 성품에서 갈린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지능지수(IQ)가 높아야 좋다고 했지만, IQ가 1이나 2 정도 높다고 그게 뭐가 좋겠습니까?
21세기에는 감성지수(EQ)와 관계 지수(RQ)가 높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리더로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독불장군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일수록 잘 놀아야 합니다. 아이일수록 뛰어놀고 자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책도 들고 학원 다니고 하는 것보다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녀의 성품과 인격이 훌륭해지도록 교육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여전히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머리에 넣어주려는 지식 위주 교육을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인터넷으로 교육시키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을 풍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남자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갑자기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급히 뛰어 들어오더니 엘리베이터의 열림 단추를 계속 누르고 있는 겁니다. 아이가 그것을 누른 채 밖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빨리 와, 엄마! 엘리베이터가 기다려!” 계속 그러고 있으니까 같이 탄 남자는 은근히 짜증이 났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이의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자마자 엄마가 아이를 꾸짖습니다. “너, 엄마가 그렇게 하지 말랬지?”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속으로 ‘그렇지, 아이가 잘못한 것은 혼낼 줄 알아야지.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엄마가 아직은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그 엄마가 자기 아들에게 말하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야, 너, 그렇게 하지 말랬지! 그렇게 가르쳐줘도 또 그래? 엘리베이터가 뭐야! 자, 따라 해. (혀를 굴리며) 엘리베이러.” 그래서 그 남자는 기가 막혀서 뒤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아니, 문을 잡았다고 꾸중한 게 아니고 영어 발음을 잘못했다고 꾸중하다니...
정상적인 부모라면 이제 자기 자녀가 잘 성장해서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자녀가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그의 후손들을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귀한 복이 우리 모두와 또 우리 자녀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1.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는 복 (22절)
오늘 본문은 요셉에게 임하는 복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2절)
이 복의 특징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가뭄이 심한 지역이기 때문에 웬만한 웅덩이는 가뭄에 다 말라버리고 강에도 물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비가 오는 우기에나 물이 있지, 건기에는 땅이 바짝 말라 있습니다.
하지만 근원이 깊은 샘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샘 곁에 심긴 나무는 계속 무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다 말라 죽어도 샘 곁에 심긴 나무는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요셉은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즘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나라의 지도자들이 관세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2일에 했던 관세 발표에서 이 나라 저 나라에 상호 관세를 매겼는데, 15개 나라를 뽑아서 팡 때려 버렸습니다. 거기에 한국도 들어갑니다. 관세 때문에 지금 다들 어렵다, 어렵다 하며 당장 여러 말들이 많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조금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07년에서 2010년 사이에 미국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사실 항상 어렵다고 말합니다. 옛날에 제가 일기 쓴 것을 보면 “요즘 경제가 어렵다.”라고 안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제는 계속 어렵습니다. 그런데 2007년부터 2010년 사이, 특히 2007년에서 2008년 정도에 미국에서 서프라임 몰기지 위기(Sub-prime Mortgage Crisis) 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전까지 아주 위풍당당했고 엄청나게 고층 빌딩에 사무실이 있었으며 대단하게 보였던 미국 유명 은행들과 대기업들이 줄줄이 정부에게 돈을 구걸하면서 꾸어다 써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기 침체에도 만약에 돈 걱정 없이 계속 성장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것을 가리켜서 마치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온 세상이 다 물바다가 되고 물로 가득해집니다. 여기도 가끔 그런 적이 있지만, 남부에 살면 갑자기 소나기가 오는데 그칠 줄 알았지만 계속 오는데다 심지어 엄청난 폭우가 와서 주변이 금방 물바다가 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오면 전부 말라 죽고 결국 살아남는 것은 샘 곁에 심긴 나무뿐입니다.
샘 곁의 무성한 나무처럼 되는 것이 바로 요셉이 받은 복입니다. 이 나무의 뿌리는 하나님께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켜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에 가뭄이 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얼마든지 무성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이 세상 복이 나쁜 게 아니고 좋은 것인데, 그렇게 좋아 보여도 사실은 다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우리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을 붙들지 말고 영원한 것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붙들면 일시적으로 누리다가 끝나버립니다. 오래 못 갑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붙들면 정말 끝이 없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오늘 22절이 그런 말씀인데, 그와 비슷한 내용이 시편 1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다.” (시편 1:1-3, 새번역)
복 있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잘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나무가 아주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물론 나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결과를 다 얻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면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주시는 우리 주님 곁에 있는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주님 곁에 있으면 아무리 이 세상이 뒤집어져도 안전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받은 복입니다.
주식 투자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지난 며칠 사이 굉장히 열받는 일주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다들 손해를 보셨을 겁니다. 지금 아무리 세상에 있는 것들이 괜찮아 보이고, 호황이고, 언제까지나 호황일 것 같지만,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막 뒤집어질 수가 있는데, 주님 곁에 붙어 있으면 그래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받은 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 곁에 붙어 계십니까? 지금 샘 곁에 계십니까? 무한한 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요즘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입니다. 특히 요즘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인기인데, 간혹 카톡을 보면 은 자기 프로필 사진(프사)을 바꾸는 분들이 종종 보입니다. 자주 바꾸는 분도 있고, 가끔 바꾸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톡 등에서 ‘프사’를 바꾸시는 분들을 보면 만화 비슷하게 된 걸로 바꾼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프사’를 지브리 스타일, 슬램덩크 스타일, 드래곤볼 스타일, 심슨 스타일같이 만화 같은 것으로 바꾸느라 난리입니다. 챗GPT에서 그렇게 바꾸는 기능이 나오니까 폭발적으로 사용자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데 사용되는 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내 사진 한 장을 만화처럼 바꿔주는 데 사용되는 전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환경 보호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런 것을 하면 안 됩니다. 환경 보호하면서 저쪽에서는 저걸 하고 있으면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전기가 없으면 재밌다고 해도 이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못 합니다. 우리가 지금 스마트폰 갖고 있고, 컴퓨터도 얼마나 편리하고 좋습니까? 그러나 번개가 번쩍 쳐서 전력이 다 나가 보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할 수 있는데요?”라고 할지 모르지만, 번개가 뻥 쳐서 송전탑을 때려 그게 고장 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게다가 배터리가 영원합니까? 충전해야 계속 가는 건데, 한참 쓰다 보면 꺼져버립니다. 전기를 충전해야 최신형 기기도 유용한 것이지, 충전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는 이렇게 잘났다. 난 스펙이 이렇게 좋다. 이렇게 성공했다. 이렇게 돈이 많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아무리 해봐야, 전력이 딱 끊어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워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전기가 나가도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남아 있으니까 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도 당장은 괜찮은 것 같고 별일 없는 것 같고 벌받는 것도 아니고 잘되며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해지고 삶이 곤고해지며 그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아무리 최신 컴퓨터의 위용을 자랑하고 최신식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빠르기와 성능을 자랑하더라도 전기만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나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하며 자랑해도, 우리 삶의 공급자가 되시는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결국은 아무 쓸모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2. 어려움을 당하다 강한 자가 되는 복 (23~24절)
요셉이 두 번째로 받은 복은 어려움을 당하다가 강한 자가 되는 복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어도 나중에는 힘이 아주 강해질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23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3~24절)
여기서 ‘활 쏘는 자’는 이 세상의 힘센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치 요셉의 생애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힘센 형들로부터 심한 미움과 구박을 받았습니다. 미움이 지나쳐서 형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했다가 나중에 “죽여서 뭐 하냐? 팔아서 돈을 남기자.”라고 하며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는 애굽에 팔려 와서 보디발이라는 바로 왕의 시위대장 집으로 팔려 갔는데, 보디발과 그의 아내 같은 강한 자들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에서도 강한 자들의 시중을 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강해진 후에는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다른 모든 사람을 살릴 만큼 그는 강해졌습니다.
힘이 강해졌을 때 요셉은 자기를 괴롭혔던 강한 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보복하지 않고, 세상을 살리는 데에 자기의 강한 힘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의 원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학생이나 교수이거나 연구하시는 분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부하며 연구한다고 해 보십시오. 사실 남들은 매일 공부하는데 나는 교회에 와서 이렇게 예배드리고 또 교제하고 봉사하며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 보겠다고 그렇게 애를 쓰며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방법으로 비즈니스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나와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뿐만 아니라, 돈까지 내면서 다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려고 하면 사실 당장 잘 안 될 수가 있고 또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그렇게 인생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은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목회도 그렇습니다. 이전에 참 충격적인 말을 들었는데, 성경대로 하면 목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성경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은 성경이고 그 위에다가 세상의 방법을 도입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마케팅 방법을 도입하고 엔터테인먼트를 강화해서 찬양팀 같은 것을 화려하게 만들고, 또 교회 디자인도 엄청나게 멋지게 해야 사람들을 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라고 조언하는 것도 들어봤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들과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자체로 ‘우리는 이렇게 좋은 교회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훌륭하다.’ 하며 자랑하고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방법대로 공부하고 일하고 사업하고 목회하고 선교하고 그러면, 처음에는 그렇게 해도 잘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강한 사람들이 화를 마구 쏘아댑니다. 괴롭힙니다.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조롱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합니다.
그것은 마치 요셉의 생애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요셉이 받은 조롱과 핍박과 어려움이 지금 말한 이런 것들보다 훨씬 큽니다. 그는 엄청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정말 강한 자들이 화를 마구 쏘아대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생을 잘 견디고 올라서게 되면 그때부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 삶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무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놀라면서 그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은 그의 강한 힘의 도움까지도 받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성경에 의하면 ‘야곱의 전능자’께서 그 손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께서 그 손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합니다. 우리가 못 볼 뿐입니다.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늘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교만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 외부에서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서 내가 무너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은 외부의 어떤 어려움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는 것은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되고 망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교만입니다. 교만해서 자기도 잘못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항상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겸손하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정말 그걸 알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100이라는 나의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50, 이 될 수도 있고 20이나 30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100이라는 최선을 다했을 때 120, 150, 200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취직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구하는 것, 사업을 하는 것에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치르는 미국의 대학 입학시험은 크게 SAT와 ACT가 있습니다. 특히 ACT 같은 경우는 상대 평가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학생이고 수학 과목을 치르는데 시험을 별로 잘 못 봤습니다. 그런데 마침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다 잘 못 봤습니다. 그러면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굉장히 잘 봤는데, 전국적으로 다른 학생들도 다 잘 봤다고 해보십시오. 그럼 오히려 점수가 낮아지는 겁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내가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이런 것을 어떻게 내가 결정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정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취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지금 심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그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뭘 기준으로 누구를 뽑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곳은 내가 생각해도 여긴 좀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 회사인데, 심사하는 사람들이 지원서를 보다가 내 지원서의 어떤 한 가지가 그들의 눈에 확 꽂힐 수가 있는 겁니다.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그냥 심사위원의 눈에 그게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게 괜찮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네. 다른 건 조금 부족해도 가르치면 되니까 이 사람을 뽑아야겠다.”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최선을 다한다고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멘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유혹이 와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에서 특히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아주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다음에도 이집트 파라오 왕의 바로 다음 자리인 이인자가 된 다음에도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보디발과 그 아내를 잡아 가두지 않았습니다. 사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누명 씌워서 감옥에 보냈는데, 그때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괘씸합니까? 그러면 “그때 네가 거짓말했잖아. 빨리 고백해!”라고 하면서 추궁하고 감옥으로 보내거나 고초를 겪게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자기를 죽이려다가 팔아 버린 형들에게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겪었던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훈련하시는 과정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원한을 품거나 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 주변에 인재가 모여들고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제 생각에 누가 가장 요셉에게 충성했겠습니까? 보디발과 그 아내였을 것입니다. 보디발과 그 아내는 얼마나 그 속에 찔리는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징계하지 않으며 오히려 잘 대해주는 요셉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한국의 이전 정권들을 보면 권력을 잡고 나서 어려워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권이 굉장히 어려웠던 원인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 보복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잡고 나서 보복했습니다.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솔직히 복수의 성격이 다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자기가 좀 약해지면 자기를 위해서 목숨 바쳐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집니다. 보복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같이 동조하더라도, 그 힘이 사라지면, 아니 그 이전에라도 자기 역시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복하지 않는 사람, 푸근한 사람, 품어주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인재가 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보복해서는 안 됩니다. 원한을 품어서도 안 됩니다. 나에게 까칠하게 굴거나 톡톡 쏘는 사람을 미워하고 복수하는 것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잡고 정치적인 보복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해당하지 않지만, 나에게 항상 이상할 정도로 까칠하게 구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굉장히 거북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똑같이 갚아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더 잘 해주고 사랑해 주고 품어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사랑을 안에 갖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주변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놀랍게도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 미운 감정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보기만 해도 껄끄러워서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왜 서로 그렇게 섭섭해하며 왜 서로 미워합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 “네 이웃을 네 자신(몸) 같이 사랑하라”, 더 나아가 “원수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잘 알면서도, 왜 우리는 이웃에게 여전히 섭섭한 감정을 품고 또 원수에게 보복하기를 꿈꿉니까?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관계인데 그 관계에서 실패하면 다 실패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아무리 예배에 매번 참석해도, 관계가 잘못되면 전체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라는 것은 사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미운 사람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사랑과 용서를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되면 또 해 보고, 또 안 되면 또 해 보고, 될 때까지 계속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영적 내공이 쌓이게 되고,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습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모여서 우리가 그냥 겉도는 얘기만 하다가 흩어지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우리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을 훈련하기 위해 우리는 목장으로 모이는 겁니다. 목장 모임 참석은 목자 목녀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보복하지 않은 태도, 오히려 품어주면서 자신의 강함을 좋은 일에 사용한 그 태도를 가질 때 요셉이 받은 복을 우리도 받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받는 게 아닙니다. 요셉처럼 살 때 요셉이 받은 복을 우리도 받게 되는 겁니다.
복을 원하면서 복을 받을 만한 자세는 갖추려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복을 받겠습니까? 사실 매번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 그릇이 있는데 가뭄에 비가 오면 그릇을 바르게 놓아야 빗물이 여기에 담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리 비를 부어주셔도 그릇을 거꾸로 닫아 놓으면 어떻게 빗물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출 때 하나님의 은혜를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 그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주셔도 내가 그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보기 싫은 사람이 생기면 ‘이것은 훈련의 기회다. 오히려 축복이다.’라고 생각하시고, 기도하며 용서하는 훈련, 사랑하는 훈련을 하며 나아갈 때 그게 정말 되고, 그럴 때 주변 사람들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복입니다.
3.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 (25~26절)
야곱은 요셉에게 주어질 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것임을 약속합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5절)
읽기만 해도 얼마나 기분이 좋아집니까? 요셉에게 임하는 복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 복을 주시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야곱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와 함께하시며 복을 내려주신 분입니다.
야곱은 스스로 자기가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하필 쌍둥이로 태어났고, 또 그 쌍둥이 중에도 첫째가 아니라 몇 분 차이로 둘째가 되어서 얼마나 억울합니까? 불과 몇 분 일찍 태어난 형 에서는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뛰어났고 아버지의 사랑도 독차지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꾀를 부리다가 이게 발각되어서 빈손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해서 갔을 때 거기서 결혼을 위해 무려 14년 동안 무보수로 종살이했습니다.
그런데 그렇ㄱ 형편없었던 야곱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는가? 야곱의 삶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손길, 즉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다가 잘 데가 없어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잘 때,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앞으로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모든 가족과 재산을 얻고 그것을 다 챙겨서 몰래 도망칠 때(정말 야반도주할 때), 라반이 그것을 알고 쫓아와서 그를 거의 따라잡았습니다. 얼마든지 야곱에게 해코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야곱을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네가 죽어.”라고 하시며 막아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게 야곱이 노력해서 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또한 형 에서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기 전에 하나님이 천사 두 부대를 보내셔서 야곱을 위해 행진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야곱이 ‘마하나임’이라고 이름 지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에게는 항상 결정적일 때 그 도움의 손길이 임했다는 겁니다. 사실 그 손길은 항상 그와 함께 있었는데, 야곱이 그때마다 그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아시고 택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야곱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복을 받을 그릇인가 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도 복을 주시고 의심할 때도 주시며, 정직할 때도 복을 주시고 거짓말할 때도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했습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기로 작정하시면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렇게 복을 그냥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복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주셔도 받지 못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거꾸로 닫혀 있는 것을 뒤집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바꿔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시키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셔서 복을 받게 하시고, 그릇이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너무 잘 풀리고 잘되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될까?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아닐까? 아무 데도 나를 써주지 않게 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내가 가장 형편없다고 느꼈던 바로 그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으며 복을 주고 계셨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은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고 결국 당신의 뜻에 따라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지 않는데도 어려움이 없다면, 그게 더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신 거면 어떡합니까?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하는 사인이 됩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면 어떻습니까? 대개는 ‘그렇지. 역시 내가 열심히 해서 됐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 됐지.’라고 착각하는데,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했다고 해서,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학생으로 학점이 높다고 해서,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또 내가 건강하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막 복을 부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나도 열심히 해야 하고 건강 관리도 잘해야겠지만, 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일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사실 내가 그것을 잘해서 복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물론 내가 받아야 할 훈련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모든 일이 안 풀리던 순간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셨으며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것은 모두 나를 만드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복을 부어주십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드디어 그때가 되어서야 복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속 복을 부어주고 계셨는데, 내가 복을 받지 못할 그릇으로 있었기 때문에 못 받았고 이제는 받을 그릇으로 바꿔주셔서 받게 되는 겁니다.
요셉은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도 받는데, 이것은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의 복은 비가 오는 것을 말하고, 깊은 샘의 복은 샘이 마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은 샘이나 우물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샘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동물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샘과 같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한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샘물을 팽개치고 가서 다른 일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무엇을 해도 금방 말라 없어질 것들인데, 거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샘만이 영원히 마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샘이 솟아나면 우리 영혼은 절대 고갈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힘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상황이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사실 우리 직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 않습니까?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튼튼해 보이는 회사가 갑자기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경기의 변화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돈의 흐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우리가 하지 못할 것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예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돈이 없어지고, 주식이 폭락하고, 직장에서 해고되고, 사업이 망하고,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거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부터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것, 고갈된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살아있으면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고갈되면 영혼의 만족이 사라지고 방황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가서 많이 해 보십시오.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그 삶에 말씀이 없으면 계속 목마르고 만족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붙든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설교 내용이 길지만, 이 중에 한 가지만 잡으시면 됩니다. ‘내가 이번 주에는 이걸 해보겠다.’라고 한 가지만 잡아서 이번 주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매일 말씀 묵상하시는 분들은 그 묵상 내용 가운데 한 가지를 잡아서 ‘오늘 내가 이걸 실천해 보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하나를 하던 사람이 3일에 하나를 하고, 그러다가 매일 하는 등 신앙이 점점 자라가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애매한데, 말씀의 요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주신 ‘대사명’인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 하신 것을 우리가 함께 모여서 교회로서 함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요셉이 받은 복을 받고 풍성하게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6절)
이 구절은 요셉의 복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기 아버지가 받은 복, 이전의 조상들이 받은 그 모든 복을 다 합친 것보다 요셉이 받는 복이 더 크다는 겁니다. 영원한 산이 받은 풍성함보다도 더 크다는 겁니다. 이 모든 복이 요셉에게 돌아오며 또 그는 형제들에게 으뜸이 되니까 바로 그에게 이런 복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듦으로써, 요셉의 복이 우리 모두와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