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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H5d4AW9CWNc?si=vVZI24qu4OAwRpiZ&t=175

 

 

202539일 주일예배

믿음 15

야곱의 마지막 부탁

(창세기 4727~ 487)

 

[들어가는 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시작은 용의 머리처럼 거창한데, 끝은 뱀의 꼬리처럼 보잘것없고 초라하다는 뜻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의 많은 정권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좋았고 인기도 높았는데, 끝이 별로 안 좋았던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중에는 자기 인생이 용두사미처럼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은 아주 화려하고 좋은데 끝은 별 볼 일 없이 초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처음보다 끝이 좋아야 하고,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 중요합니다. 끝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작도 과정도 끝도 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비록 인생의 초기 단계에는 보잘것없고 또 중간에 살아가는 과정에도 실패와 실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좋게 끝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들인은 무조건 끝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또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세상에서 힘들게 살았든지 편안하게 살았든지, 우리의 끝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끝에 성공이 이미 보장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속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의 인생이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용두사미가 아니라 거꾸로 사두용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거짓말을 잘하는 속임수의 전문가였습니다. 약삭빠른 사기꾼이었습니다.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나아가서는 자기도 속으면서 살았습니다.

 

47장 앞부분의 9절을 보면 요셉이 이집트 총리인데 자기 아버지가 이민을 왔으니까 이집트 바로 왕에게 같이 갑니다. 그렇게 바로 왕 앞에 갔을 때 야곱은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스스로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왕이 물어보니까 130세라고 하면서 우리 조상들에 비하면 얼마 안 됩니다. 그렇지만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늘 복으로 인생을 잘 마무리합니다. 시작과 중간 과정은 힘들고 험난했지만, 결론을 아주 잘 맺은 사람이 야곱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요셉을 불러 맹세까지 하게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서 지난 몇 주 동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저번에 살펴본 아브라함 다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는 각각 한 절씩만 나옵니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11:20-22)

 

이삭과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2020-21)에 살펴보았으니까,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주로 요셉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며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족속 (47:27-28)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4727~28)

 

2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이주한 지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기는 야곱이라고 나오고 뒤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나오는데,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나중에 불리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라고 나오는 것은 야곱을 가리킵니다.

 

요셉이 먼저 자기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에 팔려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또 그가 성실하게 일함으로, 팔려 온 집에서 승승장구했고, 하지만 또 거기서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성실하게 있다가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바로 왕 앞에 가게 되고 나라의 제2인자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야곱과 자기 형제들을 다 데려오게 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이것이 가족 이민 초청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이집트로 가족 이민 초청해서 가족 이민을 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민을 올 때 야곱은 130세였는데, 이제 147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목축업에서도 굉장히 성공했고, 인구 면에서도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여기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라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센 땅에서 아주 많은 자녀를 낳았고, 위생이 열악했던 고대사회 당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에도 아이들이 죽지 않고 대부분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원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17년간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막상 돌아가려 해도 너무 크게 번성했기에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올 때 모두 합쳐서 7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나라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수가 늘었습니다.

 

이렇게 17년 동안 애굽 땅에 머물면서 야곱에게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가나안에서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가면 텃세를 부리며 공격해 올 것이 뻔합니다. 소수였다면 조용히 살면 되는데, 너무 사람 숫자도 많고 짐승도 많다 보니까 이 가나안 땅에서 받아줄 데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족장(지도자)이었다면 각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을 것입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하다 나중에는 하나만 낳으라고 하며 아이들 숫자 좀 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이 늘어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뭔가를 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에게도 주셨고,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도 주셨고, 또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저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후손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라고 그는 분명히 생각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처럼, 때가 되면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네 후손이 남의 땅에 가서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3-16). 엄청난 민족을 이루어서 돌아온다고 하신 그 약속을 야곱은 기억한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살다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래 생각한 것보다 일이 굉장히 커질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할 때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너무 일이 잘 풀리거나 사업이 크게 번성하거나 직장에서 너무 잘 나가거나 학교에서 아주 잘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자기를 알지 않습니까? ‘내가 그 정도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잘되나?’ 하면서 약간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다 혹시 잘못되는 게 아닌가?’라고 합니다. 사실 아주 잘되고 번영하고 번성한다면, 감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렇게 나에게 풍성함을 주시고 일이 형통하게 해주셨는데, 그러면 과연 무엇을 하라고 지금 이렇게 하시는 것은 아닌가?’ 물으며 그것을 찾아보는 겁니다. 할 일을 하고, 도울 사람이 있으면 돕고, 교회에도 함께 봉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너무 잘되면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를 않고 갑자기 겁이 덜컥 나면서 이러다 혹시 잘못되는 것 아니야?’ 하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우리 삶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대신, 걱정하는 대신, 불안해하는 대신, 이렇게 부어 주신 복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겁니다.

 

특히 이렇게 지금처럼 산불이나 어떤 사고로 피해를 당하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요즘 너무나 많은데, 저런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찾아보고 또 실제로 돕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내가 잘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번영하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찾지 않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하고 나간다면, 결국은 두려운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나를 잘되게 해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이유를 찾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2.   야곱의 소원 (47:29-31)

 

이제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불러서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4729~30)

 

이것이 무슨 부탁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죽은 뒤 장사를 지내는 문제입니다. 맹세하라고 하면서 허벅지 아래 손을 넣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고대사회의 맹세 방식이었습니다.

 

그냥 생각하면 야곱은 자기가 죽고 난 후 형들과 그 가족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은 요셉을 억울하게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화해하고 잘 봐주라고 할 것 같은데, 야곱은 더 이상 애굽 땅에서 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면 너희는 여기서 잘 살아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손들이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자기 무덤을 애굽 땅에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유언인데, 여기에 담겨 있는 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한 노인이 하찮은 유언을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으레 매장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이왕이면 고향 땅에 묻혀야지 타지에 묻히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야곱은 지금 단순히 자기 묘지를 마련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그의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살다가 죽은 후 마침내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와 아들 이삭도 거기 살다가 그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가 묻힌 곳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겁니다.

 

그는 이집트로 이민을 와서 살다가 이집트에서 죽게 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가 자기 삶의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 땅이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 땅이 더 좋은 곳입니까, 가나안 땅이 더 좋은 곳입니까?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이집트 땅이 훨씬 좋은 곳입니다. 문명적으로나 위생적으로나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집트의 장의사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요즘도 미라가 발견되면 몇천 년 된 것이 그렇게 잘 보존된 것에 대해 놀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이집트 관계자를 불러서 미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보존되는 미라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곳이 이집트였고, 게다가 그곳에는 야곱을 장사 지낼 수 있는 땅이 많았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귀족의 무덤에도 묻힐 수 있었고, 그를 위해 피라미드도 세워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을 불러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무덤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합니다. 몸은 애굽 땅에 살고 있지만 자기는 애굽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늘 마음에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약속의 땅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까 미국에 살지만 죽을 때는 한국에 가서 뼈를 묻으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의 축복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집트 땅이 어떤 땅입니까? 너무나 좋은 땅이고 좋은 나라이며 편리한 것들이 너무 많지만, 온갖 신들이 많은 다신교 사회입니다. 거짓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에도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단순히 고향이라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니까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은 요셉은 그것을 약속하면서 맹세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4731)

 

경배했다는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단순히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으니까,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묻히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땅에 묻히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야곱 개인은 이집트에 무덤이 있어도 되고 가나안 땅이든 어디든 아무 데나 묻혀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가나안 땅에 묻히려고 하는가? 그곳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신 땅이고, 또한 자기가 거기에 묻힘으로 인해서 자기 후손들이 그것을 보고 계속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온갖 좋은 보화와 같이 지금도 이 세상의 좋은 보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보화가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그것이 많이 퇴색했습니다. 그러나 이 미국 땅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American Dream이 우리의 꿈이 아닙니다. 요즘은 외국인들이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을 꿈꾸며 한국으로 많이 가려 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선진국이 되어서 너무 좋다는 한국 땅도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곳은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하우스든, 타운홈이든, 아파트이든, 집에 들어가는데 집에 거라지(garage)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는데 정문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또는 차고(거라지) 문을 통해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정문으로만 들어가야 해. 이 집은 정문이 여기인데 정문으로 들어가야지.”라고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반면 다른 가족은 아니, 거라지에 차를 세워 놓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되지, 뭐 하러 정문으로 돌아서 들어가냐? 말이 안 된다. 그냥 거라지 문으로 들어가면 되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정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아니면 거라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정문이든, 거라지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갈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면 미국에서 죽어서 천국에 가든지, 한국에서 죽어서 가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천국에 못 가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지금 나는 정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면서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만일 그것이 낭떠러지라면 큰일 아닙니까? 거라지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그게 집이 아니라 낭떠러지라면 큰일 아닙니까?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디에 있다가 들어가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 어디에서 살다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 땅에 묻혀도 되고, 한국 땅에 묻혀도 되고, 세계 어느 곳에 묻혀도 괜찮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소망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도 한국에서 직업 군인이셨고 국가 유공자이기도 하셨기에 생전에 나는 꼭 현충원에 묻히고 싶다.”라고 얘기하셨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들으며 무슨 한국까지 가나? 돌아가시면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되지, 뭐 하러 그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까 결국은 현충원으로 유골을 안장했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거기가 제일 여건이 좋아서 그리로 간 것이지, 꼭 한국에만 가야 하기 때문에 간 게 아닙니다.

 

요즘 한국은 시신을 매장할 데가 없기 때문에 전부 화장을 합니다. 여기도 화장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괜히 화장했다가 이다음에 부활할 때 못 찾으면 어떡하냐? 그러니 꼭 매장해야 한다.”

 

그러나 시신을 매장해도 되고, 화장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 묻히든, 어떤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꼭 여기에만 묻혀야 한다고 말한다면, 지금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게 아니고,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것을 생각하고 준비해야지, 이 땅의 어디에 묻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후손들에게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후손들은 무덤을 보면서 추도 예배도 드릴 수 있지만, 본인은 죽는 순간 바로 하나님께 가는 겁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묻히느냐가 본인에게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후손에게는 중요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각 가정에서 가장 좋은 길로 정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냐 저기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자꾸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와 약속을 소망으로 붙들면서 매일 살고 있습니까? 이 땅을 살면서 가지고 있는 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디에 내 소원이 있고, 어디에 내가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됩니다.

 

평생 주님만 섬기며 복음 전파에 힘썼던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 L. Moody)는 임종하는 순간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오늘은 나의 승리의 날이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승리의 왕관을 쓰는 대관식 날이라고 했다니 놀랍습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 정신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이곳이 고향이 아닙니다. 나그네는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가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영원히 머물 사람은 여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언젠가는 떠납니다. 먼저 가느냐, 뒤에 가느냐의 차이이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까 2080년이 되면 한국 인구가 지금의 반이 된다고 하며 큰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2080년에 그렇게 된다니 큰일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 제가 이 땅에서 살고 있을 확률은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는데, 물론 후손들이 걱정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의 자녀 세대도 그때 살아 있을지 없을지 모를 시간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껏 2080년에도 살아 있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언젠가 떠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오직 이곳에만 모든 승부를 걸며 나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땅에서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해야겠지만, 언젠가 떠날 것을 생각하며 그때를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거할 곳, 진짜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갈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미국에 올 때 미국으로 오는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습니까? 학생이든, 이민 오든, 주재원으로 오든, 미국에서 자기가 살 곳을 알아보고 미국에 가서 살 것을 준비합니다. 누구나 얼마나 열심히 준비합니까? 미국에 온다면서 한국에 투자하고 한국에서만 집착해서 살지 않습니다. 미국에 와서 살 곳에 대해서 준비하고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간다면서 천국을 준비하고 있는지, 천국 갈 것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보면, 너무나 준비가 없습니다. 이것을 잘 준비한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에 관하여 전에 잠깐 살펴본 구절도 있지만, 히브리서 1113절부터 16절을 보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14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5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11:13-16, 새번역)

 

여기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 즉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다가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산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에 소망을 두고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언젠가 다 없어질 곳이며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은 우리가 살펴보는 믿음의 선배들을 가리킵니다.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 좋은 곳”(‘더 나은 본향’, the better country)인 하나님 나라를 늘 사모하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에 취해서 살지 않고 더 좋은 곳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 부자였지만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산 것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고, 이 땅에 소망이나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떤 가정에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적어놓았습니다. 그분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미국에 살다 보면 분명히 향수병(home sickness)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보니까 홈(home)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home sickness는 있는데 home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한국에 가보니까 한국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삶에서 분명히 우리에게는 어떤 그리움, 외로움, 뭔가 마음이 빈 것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분명히 있는데, 정작 그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심지어 태어나도 이곳이 나의 고향이 아니듯, 내가 어디서 태어났든지 사실은 내가 태어난 곳도 내 고향이 아닙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대학을 다니며 소위 알바를 뛰었습니다. 도매상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셨는데 그 가게와 거래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미국에서 살기가 힘드시니까 에이, 더러워서 미국에 못 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맨날 더러워서 못 살겠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보면 사실 깨끗하신데(?) 항상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서 제가 어린 나이였지만 저분은 참 불행하다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더러워서 못 살겠다, 이래서 못 살겠다, 언젠가 떠날 곳이고 한국에 가리라 하며 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민을 올 때만 하더라도 이제 가면 언제 보냐?”라고 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왕래가 쉽습니까?

 

오래전이지만 저도 신학교 다닐 때 이민 온 후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에 드디어 1년 동안 교환 학생으로 가서 살 기회를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1년 동안 살아보니까 ?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니네?’ 하고 느꼈습니다. 떠난 지 몇 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느꼈습니다.

 

혹시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언젠가 죽게 될 때 영원히 한국에 남습니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곳이 진정한 본향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더라도 우리가 결국 떠나게 되지 않을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디를 가서 살든지 결국은 그곳을 떠나게 될 확률은 100%입니다. 살아서 떠나든 죽어서 떠나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향은 따로 있습니다. 그곳을 성경이 알려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사는 그 아련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특히 젊은 분일수록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봄을 탄다고 하며 마음이 싱숭생숭해집니까? 가을이 되면 가을 남자, 가을 여자(추남, 추녀)라고 하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그립고 그러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천국을 향한 향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우리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그것이 다 없어집니다. 그런 그리움과 외로움이 다 없어집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봄을 타거나 가을을 탄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완벽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그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만족하며 감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과 계획과 고집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도록 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며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어디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곳에 살든 한국에 살든, 콜럼버스에 살든 미국내 다른 도시에 가서 살든 상관없이, 어디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삶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가, 아니면 나는 그냥 여전히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복 (48:1-7)

 

그 후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문병하러 갑니다.

 

“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481~2)

 

연로하고 병들어 아픈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왔다는 소식에 굳이 힘을 내어 일어나 앉습니다. 누워서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힘을 내서 일어나 자기 집안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복과 약속을 반복해서 요셉에게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483~4)

 

지금 야곱의 집안에 흐르는 복은 단순한 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해주는 복입니다. 나만 복을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복을 받게 해주는 복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 야곱의 집안은 자기들만 잘되는 복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씀의 능력을 받은 집안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의 집안이 단순히 한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자기들을 이 애굽 땅으로 내려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달은 것은,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었으면 자기들은 삶에 너무 지치고 또 환경이 안 좋았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그 과정은 험난했지만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이집트 땅에 오게 하셔서, 여기서 번성하게 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야곱의 눈에는 자손들이 이렇게 이집트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된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 복이 지금 전 세계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상처가 치유되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교회는 많은데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복을 나누어주기보다 오히려 욕을 많이 먹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고, 세상의 욕심이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교만이 있어서,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복을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데 우리가 제대로 받아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다른 데로 흘러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숫자나 재정이나 건물 같은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교회들은 많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공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는데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든지, 목장도 갑자기 늘어난다든지, 또 별로 기도하지 않는데 사업이 잘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아이들도 공부 잘하거나 그러면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고 있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면, 그 관계는 살짝 언 얼음 위에 눈이 덮인 것과 비슷해서, 조금만 들어가면 그대로 깨지게 됩니다. 축복이 아니라 사실은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복을 내려주기를 원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릴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욕심이나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나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만, 적어도 이런 차를 끌어야 하고, 이 정도 집에는 살아야 하고, 연봉은 이 정도가 되어야 하고, 아이들은 이 정도 학교에는 가야 한다라는 생각들부터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다음입니다. 먼저 할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그다음 순위에 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때까지,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먼저 추구할 때까지, 내 삶 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원하던 것들이 막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예배를 본다고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보는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보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 본다라거나 예배 봤다라고 그러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구경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라고 결단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 후 나가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결단한 내용대로 살고 와서 헌금에 나의 그러한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겁니다. 돈만 넣는 게 아니라 하나님, 일주일 동안 제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부족했지만 받아주십시오.’ 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말씀이 귀에 들리거나 내 마음을 찌를 때, 가만히 있지 마시고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가 전심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나 자신을 드려 믿음의 결단을 내릴 때입니다. 여기서 그냥 무릎을 꿇으라는 게 아니라, 그럴 때는 속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예배 중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또는 끝나고 그런 일이 있다면,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가 바로 믿음의 결단을 내릴 때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다음에 하겠다고 그러지 말고, 미루지 말고, 당장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손해를 하나도 안 보며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485~7)

 

지금 야곱이 하는 말을 보면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이렇게 인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 두 아들은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 지파라고 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요셉은 두 몫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두 몫을 받았다는 말이 뭡니까?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자로 인정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며 그대로 사느라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하란에서 얼마든지 잘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남편 야곱의 말을 듣고, 고향인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에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낳던 중 길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임신한 라헬에게 그 길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라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 경험하면서 약속의 땅에서 살았습니다.

 

야곱과 가족들은 하란에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형에게서 도망쳐 외삼촌 집에 갔는데, 그곳 하란에서 많은 재산을 얻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안일한 삶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잃는 희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나아갔습니다. 이제 애굽에서도 엄청난 민족을 이루고 번성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곳도 떠나야 한다고 요셉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삶은 결코 우리 생각처럼 편안한 길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큰 희생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아끼는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믿음의 행진을 중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며 주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짜 고향인 하늘을 늘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등산을 가거나 캠핑할 때는 텐트를 치고 자는데, 텐트는 집처럼 편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가구점에 가서 가구를 들여놓거나 최고급 침대나 소파를 사다가 그 안에 들여놓지는 않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내부를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룻밤 잘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 텐트의 내부 장식이 가장 호화로운가, 누가 가장 호화로운 가구를 가졌나 따질 필요도 없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초라한가 상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텐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튼튼하고 안전하게 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잠을 잘 자고 다음날 다시 텐트를 걷고 부지런히 갈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곳은 우리의 진짜 집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산길을 가는 등산객처럼, 매일 짐을 짊어지고 수고하며 열심히 산을 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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