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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K5EyAzVV5BM?si=NGveM4mzUnZhKiPL&t=116

 

 

202532일 주일예배

믿음 14

믿음의 순종이 가져온 큰 복

(창세기 2215~19)

 

[들어가는 말]

 

오래전부터 중동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미국 사람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실수로 한 아랍 사람의 아들을 치어죽이게 되었습니다. 법정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의 처벌도 원하지 않고, 물질적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판사가 묻자, 자기 아이를 죽인 그 사람의 아들을 자기도 똑같이 차로 치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오래전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대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미국인은 차라리 자기가 죽지,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A. I. 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중동에서 내려오는 일화이며,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세 개의 AI에게 물어봤는데 세 개 다 비슷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아버지가 느낀 고통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겪었던 고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사건은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겪었던 그 어떤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힘든 고통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너무 괴롭고 말이 되지 않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를 부활 신앙으로 잘 극복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절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순간순간 아브라함을 그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15~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들었을 때 천사가 그를 말렸습니다(11). 그런데 그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5~16)

 

이것은 이제 그가 전하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천사는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16)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에 364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딱 두 번 외에는 모두 예언(선지)서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 두 번이 바로 이곳 창세기 22:16과 민수기 14:28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이제 하나님은 친히 맹세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16)라고 하십니다. 이 말도 창세기에서는 유일하게 여기 나옵니다. 구약에 딱 한 번 더 나오는데, 출애굽기 32:13에 나옵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2:13)

 

여기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을 이야기하면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인 창세기 22장이 사실은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40일 동안 대면하면서 십계명을 받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며 반역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다 진멸하고 모세를 큰 나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오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제발 벌하시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출애굽기 32장입니다.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도 해주셨던 말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그런데 이전에 약속해 주신 복과 여기서 말씀하시는 복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복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유일하게 큰 복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되 반드시, 기어코, 정말로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100% 확실하다는 표현입니다. 그의 자손도 틀림없이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크게 불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놓고서도 무슨 책이 나온 것도 있고, 이것을 굉장히 확대해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적으로는 가나안 정복을 오래전부터 이렇게 암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큰 복을 내려주겠다고 하십니까? 그 까닭은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님께 드리려 했기 때문입니다(16).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아들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바쳤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바치게 된 그 마음, 즉 순종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8)

 

여기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저번에 살펴본 것처럼,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지금 이삭이 죽어도 살려주실 것이라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이삭을 향해 칼을 들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흐름과 움직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랬을 수도 있을까요? 이제 칼을 탁 들었는데 ,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그래서 하나님, , 이제 갑니다.’라고 하는데 아무 이야기를 안 하시니까 뜸을 들이면서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며 시간을 끌고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으니까 진짜로 칼을 들고 잡으려 하는데 그때 천사가 말렸습니다.

 

그는 순종했던 겁니다. 이런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에도 순종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아브라함이 보여 줍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고, 또 그의 후손들을 통해 천하 만민 즉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8). 세상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아브라함이 필요한 겁니다. 여기 세상 모든 민족에 우리도 포함되는데,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은 아브라함 덕분입니다.

 

왜 복을 받는 데 아브라함이 필요합니까? 그가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에도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 사람입니다. ‘이런 명령을 주실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하실 것이다.’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며 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복을 전달하십니다.

 

여러분, 복의 근원,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럼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내 삶 자체가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그저 그가 말을 잘 듣나 안 듣나 보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모르시다가 이제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12). 모르다가 아신 것이 아닙니다.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확실히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서, 그 후에야 진정 복의 근원 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그런 마음을 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오히려 그것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신뢰가 있는지, 그것을 자기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내가 믿긴 믿는데, 잘 모르겠다.’ 이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인입니다.’라고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1부터 100까지 점수로 내 믿음을 따져보면 내가 몇 점이나 될지, 그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을 탁 주시는 겁니다. 테스트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유혹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세워 주시려는 테스트를 하실 수 있고, 또는 시련을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나에게 어려움을 주시거나 어려움을 막지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큰 복을 주신 후에 그것을 받아서 전달할 사람은 이제 이삭입니다. 그렇다면 이삭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 이삭도 영적으로 눈을 떴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이삭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충격입니다.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번제에 쓸 제물로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통 일이겠습니까? 여기서 자기 아버지가 ,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너를 좀 잡아 바쳐야겠다.’라는 것을 경험하신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이때 이삭의 나이는 10대 소년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나이가 최소한 110세가 넘었을 텐데, 그런 노인에게서 10대 소년이 도망치기가 어렵습니까? 어린아이가 도망가도 잡기가 어려운데 10대 소년을 어떻게 잡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삭은 순순히 아버지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려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자기가 죽는 대신 수풀에 걸려 있던 수양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이삭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어쩌면 이 시험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더 이삭을 위한 시험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시험을 통해 이삭은 엄청난 신앙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진짜로 죽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포기하는 순간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실제로 죽었다 살아난 건 아니더라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삭은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했고, 앞으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통해 ,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이론으로 아는 것과 진짜 체험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다가 실제로 그곳에 갔을 때 많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명한 곳에 여행도 가지 않습니까? 사진으로 보고 연구하고 역사가 어떤지 다 조사해 보고 공부를 많이 해도, 실제 거기 딱 한 번 갔다 온 사람만 못합니다. 실제로 가보면 느낌부터가 다릅니다.

 

이삭은 이론적인 신앙, 아버지의 신앙이 아니라, 이제 자기의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삭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면 살려주신다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의 삶이 복이 되어 복의 근원, 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반대로, 순종이 없이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우리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해줘야 합니다.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게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복의 삶을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자기 삶 자체가 복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복을 받기 싫은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복을 받기 싫고 저주받고 싶어.’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가 복을 잘 경험하지 못합니까? 아니면 주시더라도 왜 그것을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합니까? 그것은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순종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내 상식과 경험과 지식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나 나름대로 판단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가끔 영상을 보면 급류에서 하는 래프팅(rafting)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무보트로 급류를 내려가는 래프팅에 심취했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고물, 즉 배 뒤쪽에 앉아서 배를 지휘했는데, 래프팅은 강을 상대로 한 싸움이고, 물살을 제어하는 기술과 능력의 시험장입니다. 그런 래프팅을 끝내고 나면 강한 물살과 싸우고 나왔기 때문에 완전히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흥분되고 재미있긴 하지만, 너무 피곤해지기 때문에 조금 덜 지치게 될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하루는 강을 따라 걷다가 무심코 나뭇가지 하나를 강물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다가 금방 물 위로 떠올라서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강물을 맞서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따라 흘러가면 되는 것이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그 후 다시 래프팅하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항상 급류를 피해서 안전한 방향으로 배를 이끌었지만, 그날은 다른 방식으로 배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배가 나아가도록 유지하면서, 강물이 자기 팀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배가 바위를 피해 물길을 따라서 안전하게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때와는 달리 전혀 지치지 않고 래프팅을 잘 끝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 세상이 험한 물결과 싸우며 나아가는 래프팅과 참 닮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하는 일은, 모두 고물(배 뒤쪽)에 앉아서 자기 방식대로 지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려고 고집하는 것은 급류타기에서 자기 자신을 오히려 탈진하게 만드는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삶을 지휘하겠다는 태도는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는 것과도 같습니다.

 

순종이란, 나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그분의 방식대로 행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고, 또 오른쪽으로 가라 하시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 하시면 왼쪽으로 가고, 뒤로 가라 하시면 뒤로 가고,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는 겁니다.

 

저를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내 삶의 운전대를 내어드렸다고 말합니다. 운전대를 내어드렸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운전하고 주님이 옆에 앉으셔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하며 지시하시는 대로 자기가 운전하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아무리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셔도 거기는 아닌 것 같아요. 왼쪽으로 가야겠어요.”라고 하고, 주님은 앞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저기는 좀 막혀 있는 것 같아요. 뒤로 가야겠어요.”라고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주님께 자기 삶을 내어드렸다고 하면서도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지 않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가다 보니까, 오히려 더 길이 막히고 또 더 일이 꼬이는 겁니다.

 

 

2.   집으로 돌아가는 아브라함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19)

 

모리아 산에서 놀라운 믿음의 체험을 한 아브라함은 이제 산 아래로 내려와 종들과 다시

만나서 저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19절을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 종들에게로 돌아가서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뭐가 이상합니까? 이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전에 살펴본 6절에 보면 분명히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되어 있고, 8절에도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갔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둘이 함께 내려왔는데 이삭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까 생략하고 기록한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돌아갔다라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분명히 돌아갔다라는 동사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복수로 아브라함과 이삭이 돌아온 게 아니라 아브라함 혼자 돌아왔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어떤 유대인 학자는 이 구절을 보고,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였고 그랬기에 혼자서 내려왔으며, 이삭은 나중에 부활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죽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22장 앞부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두 종이 길을 떠난다고 나오고 사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가 죽었다고 결론지을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이렇게 아브라함만을 기록했겠습니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도저히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도로 힘든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아브라함은 그래도 순종하여 이삭을 실제로 잡아서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제로 이삭을 잡아서 드린 것과 똑같았다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똑같이 봐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실제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봐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산에서 내려왔지만 마치 아브라함만 내려온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삭이 실제로 죽어서 제물로 바쳐진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마치 그렇게 된 것처럼 받아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순종입니다. 이삭도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상 15장인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이 금방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무엘이 와서 꾸중하는 장면입니다.

 

“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새번역)

 

얼마나 순종이 중요합니까? 번제나 화목제, 즉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가 중요하지만, 순종 없이 드리는 예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 성장’, 즉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때 다른 것보다 예수님의 성품 두 가지만 닮으면 믿음이 성장한다고 배웁니다. 그 두 가지가 뭔가? 바로 순종과 섬김입니다. 순종과 섬김이 삶에 있을 때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절대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야 하고 신실한 제자로 자라야 하는데, 순종과 섬김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제가 우리 교회에 제가 와서 사역한 지 만 2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와서 했던 공부가 <일대일 제자 양육>이었습니다. “양육자반을 시작해서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을 세 반으로 나누어 16주 정도 공부하고, 그다음에 또 양육자반으로 14주를 공부하며 실제로 나가서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치신 분들이 11 또는 12 정도로 짝을 이루어서 공부를 인도하셨습니다.

 

<일대일 제자 양육>에서 공부하는 내용이 여러 가지인데, 그리스도,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속성, 성경. 기도, 교제, 전도, 성령 충만, 시험을 이기는 삶 등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맨 끝에 순종이 있고 그다음으로 사역이 나옵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기막히게 이 순서를 짰다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종과 사역, 즉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역할 수 없다는 것, 순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순종 없이 사역하게 되면, 실제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즉 겉으로는 뭔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뜻대로 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와서 다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고집하는 실수를 우리가 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같은 데를 읽어보면, 얼마나 그런 구절이 많습니까? “손뼉 치며 찬양하라.” “두 손 들고 찬양하라.” 이런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찬양할 때 손을 안 드십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안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옛날 문화 그대로 지금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혹시 내가 예배드리는 방식도 내 방식만 고집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예배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것인지, 그것을 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예배 때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왜 거기에만 앉으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에 생전 처음 나온 VIP가 교회 예배당에 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분이 와서 여기 내 자리예요. 비키세요.”라고 해서 그분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옆에 앉아도 되고 뒤에 앉아도 되고 앞에 앉아도 되지, 꼭 그 자리에만 앉아야 한다는 건 뭡니까? 다른 사람이 먼저 앉아 있으면 다른 데 가서 앉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제가 하나님을 정말로 예배하겠습니다.”라는 게 중요한 겁니까, 아니면 내가 내 방식대로만 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 겁니까? 정말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오래전 제가 어딘가에서 읽고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오래전 조선시대 때 한양에 돌쇠라는 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대감 집의 종이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인 대감마님이 불러서 , 돌쇠야, 네가 오늘 제주도에 좀 다녀와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돌쇠는 , 알겠습니다.” 하고 즉시 출발해서, 산 넘고 물 건너 고생고생하다가 마침내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걸렸겠습니까? 거기 딱 도착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감마님이 나를 여기 왜 보내셨지?’ 모르고 온 겁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왔으니 얼마나 열심이 큽니까? 얼마나 잘 순종하는 것 같고, 얼마나 제대로 말씀을 들은 것 같고, 얼마나 명령에 잘 순종해서 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정작 무엇을 하라고 했는지를 모르고 그냥 간 겁니다. 가긴 갔는데 뭘 할지 모르고 가서, 다시 돌아와 엄청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봉사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회에서 함께 섬기고 서로 섬기며, 가정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섬기고, 또 일터에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왕에 그렇게 사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열심히 한다면 그것처럼 낭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열심히 하긴 하는데 주님은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낭비입니까?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순종할 때 기뻐하십니다. 순종할 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순종한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도록 그에게 큰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아브라함의 삶을 몇 주 동안 살펴보았는데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삶을 한마디로 말해보라면,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바로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의 성품 두 가지를 닮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순종과 섬김이라고 했습니다.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섬깁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순종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왜 예배를 드립니까? 순종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왜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며, 또 왜 그렇게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불순종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그러기에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도 여러 번 불순종해서 실패했구나.’ 하며 위로받는데, 위로만 얻으면 안 되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때그때 은혜로 그를 붙드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위험에서 막아주셨습니다. 그랬을 때 아브라함은 그때마다 깨닫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복 그자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보는 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 순종은 관계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끗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일어나고, 또한 형제자매 사이의 회복이 일어나서, 깊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을 통해 보는 순종의 결과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때, 순종할 때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 ‘왜 나는 기도 응답을 잘 받지 못하나?’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받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의 비결은 세게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순종하면 성령 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게 됩니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충만하게 성령을 받게 되고, 순종은 더욱 깊어 가게 됩니다. 결국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얻는 복은 어떤 물질이나 명예를 얻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복입니다. 찬양대의 찬양 가사 그대로 더 가까이, 주께로 더 가까이”.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는데 하나님과 멀리 있다면, 그게 어떻게 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더 큰 순종을 낳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순종의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몇 주 동안 살펴보면서, 결국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각자를 또 그러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셔서 지금도 우리 삶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우리도 순종을 배우고 순종하는 참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진정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놀라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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