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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 주일예배
✦ 믿음 13 ✦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
(히브리서 11장 17~19절)
[들어가는 말]
옛날부터 사람들은 ‘과연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가?’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최근에 돌아가신 분들이 계시고, 저의 부모님도 다 최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우리가 많이 생각해 보게 되는데, 죽음에 대해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말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인생이라는 연극은 아무리 즐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사람의 대본이라고 해도, 그 마지막 장면은 운명적으로 비극적이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 한 줌의 흙이 던져질 때 모든 것은 결국 끝장이 아닌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19세기 유명한 시인이었던 헨리 롱펠로우(Henry Longfellow)는 “인생은 참되고 진지한 것이며, 무덤은 결코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19세기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은 “모든 것이 무덤에서 끝나야만 한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도,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인류 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옛날 유명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다 아는데, 죽음을 왜 두려워합니까?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 다음이 확실하면 두려워할 게 없는데,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다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그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면서도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과연 진짜로 없는가, 아니면 있는가? 또 있다면 무엇인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답을 얻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부활 신앙의 길을 열어주시기 훨씬 오래전(예수님보다 약 2천 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
엄격히 말하면 ‘부활’이라는 것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사람 중 나사로가 죽었는데, 죽은 그를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다 살아난 후 어느 정도 살다가 또 죽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부활 신앙이라고 할 때, 세상에서 죽었다 살아난 것뿐 아니라 또 영원히 살 것을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브라함이 바로 그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는 그의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존재합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가끔 사람이 죽은 줄 알고 관에 넣었는데 갑자기 관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지만, 그건 진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바로 그러한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오늘 보여줍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지난 두 주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조금 늦게 낳아도 귀한데 100세에 낳았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약속의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99세가 될 때까지 24년 동안 그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00세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수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그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무효가 되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까?
이 순간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모순이 된다고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의문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말씀이 다릅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러한 어려움을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부활 신앙을 통해 해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만약 이삭이 죽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끝나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이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면 뭡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자, 이삭을 통해 많은 수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삭을 바쳐서 그가 죽은 다음에 이삭을 통해 계속 후손이 이어나가야 하니까, 그럼 그가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삭이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이삭이 다시 살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며 그를 테스트하신 내용이 나오는 창세기 22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가는데, 종들과 같이 갈 때 나중에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자기와 이삭만 산에 오릅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중 한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라고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이 바로 지금의 예루살렘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과 둘이 산에 오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5)
아브라함은 여기서 종들에게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말합니다. 종을 몇 명이나 데리고 갔는지 모르지만,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들을 두고 아브라함이 이삭과 단둘이 산에 올라가면서 “예배한 뒤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겠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면서도 죽여서 제물로 바친 이삭이 죽어 없어지고 자기 혼자 돌아온다고 말한 게 아니라, 분명히 “우리가 함께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활 신앙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는 그가 인간적으로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밤중에 아브라함을 밖으로 부르십니다.
“저 하늘의 별을 보아라. 저 별들을 셀 수 있겠느냐?”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습니다.”
“네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 생각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믿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활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아들은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은 말씀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큰 소리로 “주여, 믿슙니다! 믿슙니다!” 외친다고 진짜 믿음이 꼭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합니까?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부활을 약속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여주고 또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부활을 약속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슬퍼하는 그의 자매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 것이고 부활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개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도할 때 안 믿는 분들에게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거나, 조금 전에 사도신경으로 고백한 내용이 이게 어떻게 그냥 믿어지는 얘기겠습니까? 동정녀에게 잉태되어서 태어나신다는 등의 내용은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예, 그렇죠. 믿기 힘들죠. 그런데 믿지 못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러면 대개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면서 못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부활이나 창조나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 위를 걸은 사건 같은 기적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인터넷 점이 엄청나게 성행하고 있고, 인터넷 부적도 있습니다. 무슨 중요한 일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또는 영화나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보십시오.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그것도 웃는 돼지여야 한다고 하며 그 코에 돈까지 집어넣고 거기에 절을 합니다. 그래야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든, 드라마나 영화를 하든 대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사실은 잘 풀린다기보다는, 이것을 안 하면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서울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 파고다 공원이 있는데, 그 파고다 공원 앞길인 낙원상가 앞에 가 보십시오. 예쁘게 생긴 움막 같기도 하고 무슨 작은 집같이 생긴 그런 것들이 쫙 있습니다. 이게 뭔가 물어봤더니 타로 점집이라고 합니다. 타로점을 보려고 젊은 커플들이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합니다.
성경은 못 믿겠다고 하면서 그런 것은 믿겠다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문가가 와서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전문가가 확률을 계산하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는 것이 그런 것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확률이 높을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성경의 그러한 기적들이 안 믿어지십니까? 그것은 대개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연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그냥 읽다가, 그것도 영어 성경을 읽다가, 그중에서도 주로 Thy, Thou 같은 고어가 나오는 킹제임스 번역(King James Version)으로 읽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비판할 목적으로 읽고 연구해도 좋습니다. 읽어보시고 연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법률가였고 역사학자였던 프랭크 모리슨(Frank Morri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에는 부활이나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 기적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너무 많으니, 그런 것들을 다 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화적인 요소를 다 빼면 성경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히 예수의 부활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률가답게 1세기의 재판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가 생각한 것이 ‘시체 도난설’입니다. 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정황을 볼 때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마자 무서워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가룟 유다 빼고 나머지 열한 명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 시체를 훔쳐 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로마 역사를 알면 그런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고통이 심해서 기절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줄 알고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바위를 깎아서 구멍을 내어 시신을 넣고 큰 돌로 막아놓는 것입니다.
그쪽 지방은 낮에는 더워도 해가 지면 굉장히 싸늘해집니다. 여름에도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때는 봄입니다. 그래서 기절한 예수님을 무덤에 넣어 놓았는데,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퍼지니까 예수님이 기절해 있다가 ‘에취’ 하고 재채기하며 ‘여기가 어딘가?’ 하면서 깨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는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로마의 십자가형에서 살아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역사학자들과 의사들이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정도로 끔찍한 형벌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가장 천천히 죽게 만드는 처형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로마 시민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단칼에 목을 베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 고통 없이 목을 베어 죽게 하는 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모리슨이 여러 가정을 해보았지만 말이 되는 게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정말로 부활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받아들여 모리슨은 참된 크리스천이 되었고, 자기가 연구한 경험을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이라는 책입니다. 겉표지에 “원래는 쓰이기를 거부했던 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역사를 통해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경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활도 약속해 줍니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습니다.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창세기 1장 1절과 우리가 사도신경 맨 앞부분에 나오는 한 가지를 정말로 믿는다면 나머지는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에게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데 그냥 생각과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습니다.
2. 시련을 극복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은 그의 삶 속에서 시련을 극복한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정말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삶의 전부인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소중한 외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낳은 서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훨씬 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라.” 그러셨을 때 “알겠습니다. 이스마엘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딱 지명해 주십니다. 얼마나 마음이 쿵 떨어지게 하는 말씀입니까?
사랑하지 않는 아들이라도 아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요즘 자녀가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녀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와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자녀를 죽는 데로 내어주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의 그냥 아들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여러 명의 자녀가 있어도 자신의 아내를 통해 낳은 한 명의 아들인데, 여러 명의 자녀가 있어도 한 명을 희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주 친한 친구에게는 자녀가 없어, 한 아들만 양자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친구와 의리도 있고 또 다섯 명 중 한 명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어느 아들을 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니까 장남은 아무래도 대를 이어가는 장남이라서 줄 수가 없습니다. 둘째를 줄까 했는데, 제일 똑똑하니까 줄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늘 몸이 아프니까 그런 아이를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넷째를 보니 가장 잘생겼기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막내이니까 차마 주지 못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저히 줄 수 있는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여러 명도 아니고 단 한 명인 외아들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남의 손에 죽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비극인데,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시련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마침내 순종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함께 산으로 올라가면서 이삭이 묻습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창 22:7-8, 새번역)
이때 차마 ‘사실은 너를 잡아서 제물로 바쳐야 한단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은 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겪게 된 이 극심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준 비결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내 아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분명히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그래야 말이 된다.’라고 믿은 것입니다.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8~19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 겁니까? 굳이 이렇게 마음이 상하도록 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을 괴롭히려고 하시는 겁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해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들 때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렇게 칼로 이삭을 막 잡으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창 22:11-12, 새번역)
천사를 통해 하나님은 칼을 든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다급하게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네가 나를 진짜로 믿는(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서 자기 아들 대신 그것으로 번제를 드리며 그곳을 ‘여호와이레’(하나님이 준비하셨다)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것이 좀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전에는 모르셨는데 이때야 아셨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다 아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도 삶 공부를 할 때 왜 시험을 봅니까? 시험 문제를 풀면서 이게 뭔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서 복습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시험은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창세기 22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험을 겪었는데, 실패한 적도 있었고 성공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시험을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때 그 힘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의 부활 신앙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은 단지 ‘내가 이 땅에서 살다 죽으면 천국에 가고 나중에 부활한다.’라는 미래의 소망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삶에서 용기 있게 결단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정말 믿는 사람은 정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한 유혹이 올 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없으면 타협하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의 삶이 전부니까 타협해도 상관없고, 그러다 보면 타락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선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고, 이 땅에서는 혹시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떠나더라도 저 영원한 하늘나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하게 자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야생화처럼 힘 있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폭풍우와 비바람을 허락하십니다. 비바람을 맞고 폭풍우를 견딘 나무들이 튼튼하지, 아무 그런 것 없이 그냥 곱게 자란 나무들은 그냥 쓰러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저 소꿉장난이나 하며 노는 유치원생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위험과 죽음이 있는 전선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그 밑으로 포복하며 나아가 싸우는 용감한 군인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때로는 포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밑으로 기어다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저 풀장에서 물놀이나 즐기는 정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센 바다의 풍랑과 파도를 헤치며 넓은 바다를 건너가는 선장같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물결과 파도를 때로 우리 삶에 보내십니다.
계속 잔잔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물결과 파도를 보내시고, 또 그것을 뚫고 나갈 능력을 주셔서 그러한 경험을 통해 더욱 성장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련을 주실뿐 아니라, 시련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지금 내게 어떤 어려움이 왔다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를 막 괴롭히시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때로는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올 때, 우리가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은 중요하지만, 예수님에게 역사한 부활의 능력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주님의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사실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바로 그 똑같은 능력이 임할 수 있다는 것, 2천 년 후에 사는 우리에게도 임하고 역사할 수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절망으로부터 우리가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얼마나 힘이 중요합니까? 물론 지식도 중요하지만 특히 이 시대는 힘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입니까? 역사를 통해 가장 무서운 힘은 바로 죽음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냥 사라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음의 공포가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병원 가는 것을 왜 싫어합니까? 혹시라도 뭐가 나올까 봐 그렇습니다. 뭔가가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죽을까 봐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이 왕 노릇 한다.’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죽음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음에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살기는 사는데 죽음의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권세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를 위협합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강력한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결박을 끊고 부활하신 순간, 죽음보다 더 무섭고 강력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파워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소위 ‘부활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뭐라고 외쳤습니까?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고전 15:55, 57)
‘부활’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 ‘다시 일어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지면 다시 일어섭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암 환자도 소망을 가지며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어려움 속에 절망하던 사람들이 다시 활기를 찾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 삶 속에 새로운 힘을 주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고 해서, 내가 걸린 어떤 치명적인 질병이 갑자기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질병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뀝니다. 그 전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절망과 낙심 속에만 살았는데, 이제는 ‘소망이 있다. 괜찮다.’라고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내가 바뀝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으로 유명한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렇게 겁쟁이였던 베드로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작은 여자아이 종이 와서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라고 할 때, 그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아니라고 부인했고, 결국 그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던 베드로였는데 바로 그 예수님을 잡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이 불러서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는데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작은 여자아이가 와서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 그랬을 때 그랬더니 아니라고 하며 무서워하던 겁쟁이가 어떻게 서슬이 퍼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선포할 정도로 변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얼마 후 성령을 받고 부활 신앙을 가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움이 있습니까? 앞이 잘 안 보입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어려움이 아브라함이 당한 것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더 혹독합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렇다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도 부활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품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최선을 드리는 믿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존재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쳤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지금 바치는 것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무모한 낭비가 아니라 위대한 헌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참된 드림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 때 헌금하고 봉헌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돌려서 걷지 않고, 오래전부터 들어올 때 미리 준비한 헌금을 넣도록 하고 있습니다. 돈을 걷어서 우리가 교회를 운영하는 차원도 물론 있습니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 여러 가지 사역을 할 수 있고, 또 여러 일들을 감당하며, 선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돈을 쓱 내는 게 아닙니다. 이 헌금 정신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를 내든지 상관없이 자기 형편대로 낼 때 바른 헌금 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 정신을 가르치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라”(고후 8:5)라고 했습니다.
그냥 돈을 내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헌금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자기 생명을 드린 것처럼,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이라든지 여호수아 1장이라든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야로 묵상하는 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야로 돈을 묵상합니다. 또는 성공을 묵상합니다.
돈은 정말 우리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돈이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그 생명과도 같은 돈을 헌금으로 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나의 생명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들어와서 이렇게 내실 때마다 사실은 자기의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둘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도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헌금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하는 겁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삭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그가 순종하고 이삭을 바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신앙 때문에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부활 신앙 때문에, 신앙을 타협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주후(AD) 114년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유명한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있습니다. 그가 로마 황제의 박해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성도들과 또 믿지 않는 사람 중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까지 연합하여 그를 살리려는 구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때 조금만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고 양보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그나티우스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발 저를 살게 해달라는 구명 운동을 중단해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저의 최선을 주님께 바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바치기를 원했던 최선의 것은 바로 그의 생명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자꾸 드리라고 하니까 지나친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 부활 신앙으로 지금 나에게 닥친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 교회에 닥친 상황이 어떠하든지,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