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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WjzEHJj_KR4?si=2OwQQ5YgJ1exUk5V&t=133

 

 

202529일 주일예배

믿음 1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118~16)

 

[들어가는 말]

 

제가 어릴 적 어린이 주일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찬양곡들이 많은데 그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대요. 오른팔 들어요, 왼팔 들어요, 고개를 흔들어요, 히프를 흔들어요...”

 

먼저, 아브라함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고, 또 나중에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재혼한 그두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6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25:2). 이들만 봐도 8명입니다. 그들 중 하나는 키가 크고 나머지는 작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아합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그 아들에 대해 노래하면서 왜 우리가 오른팔, 왼팔, 고개와 히프까지 흔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릴 때 그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부르며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나오는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데,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곳 히브리서에서도 살펴보고 또 구약 성경에서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의 근거는 말씀

 

그런데 놀랍게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주 전에 살펴보았던 여호수아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24:2)라고 알려줍니다. ‘다른 신들을 섬겼다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 숭배를 하던 우상 숭배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선택받을 만큼 어떤 위대한 일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물론 부르셨을 때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들이 나오는데, 구약의 창세기 11장 이후에 주로 나오고 또 신약에도 몇 군데 나옵니다. 그중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설교한 내용에 아브라함이 언급됩니다.

 

“2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3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하셨습니다.” (7:2-3, 새번역)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이며 집사라고도 하는 스데반이 죽기 직전 설교한 내용에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과 부르심은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심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은 것 같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지만, 내가 결단하고 믿은 것이 맞지만, 놀랍게도 내가 결단하게 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것이 우리 장로교 신학, 개혁 신학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알아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 중에 먼저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없다고 로마서에서도 말씀합니다(3:10-11).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부르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어디인지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미리 정보를 주시고 떠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직 보여 주신 것도 아니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신 것도 아닌데, 앞으로 보여 줄 땅으로 무조건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진로를 놓고 기도하거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사업을 하다가 다른 사업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음성으로 들려주실 수도 있고, 마음에 확신을 주실 수도 있고, 또 환경으로 인도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길이 열리는데 저 멀리 서부로 직장을 옮길 수 있도록 길이 열리는 겁니다.

 

그러면 직장이 어느 지역에 있고 이제 어디 살아야 할지 알아보며 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디로 갈지 알고서 이사를 하지, 모르고 이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너는 그냥 가라라고 하시면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다가 저기 서부가 좋은 것 같다고 하며 무조건 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지금 거의없다고 했는데, 한 번 그런 경우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는 게 정상인데, 오래전 제가 플로리다에서 사역할 때 갑자기 왔던 청년들이 있습니다. “여기 왜 왔냐? 어떻게 해서 왔냐?”라고 물었더니 모르겠다. 그냥 가다 보니까 여기 왔고, 여기 와서 보니까 괜찮아 보여서 이제 여기 살겠다.”라고 하며 교회에 나온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서로 가족이었는데 세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목적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가라라고 하시는 응답을 주신다면 어디로 갈까요? “무조건 가라하실 때 하고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8)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판단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가라고 하셨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해서 보니까 가나안 땅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땅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생각할 첫 번째는 믿음의 근거는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환상을 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둡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당시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라크 지역)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이 믿음이라고 성경이 가르쳐줍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맹목적인 신앙이나 어떤 광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거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거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환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환상이나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잘 따져 봐야 합니다. 전혀 일치하지 않는 어떤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우리처럼 성경을 책으로 갖고 있지 않았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인데, 그는 그것을 듣고 따랐습니다. 다른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2.   믿음의 표현은 순종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믿음의 표현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었고, 그것은 순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참믿음은 언제나 행동을 낳습니다. 정말 믿으면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이 참된 믿음일 수 있겠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그것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하지 않으면 그것이 참된 믿음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분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고 또 책임져주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결단은 정말 놀랍고 대단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자기의 남은 모든 인생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같은 도시 안에서 이사하는 것도 얼마나 복잡하고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킵니까? 우리 여기서 임시로 살다가 다른 데 집을 사서 옮긴다는 것도 사실 상당히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 짐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은 대략 주전(BC) 2천 년 정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보는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정도 전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4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 이사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가족 몇 명이 함께 이사 가고 짐을 약간 챙겨서 가는 수준이 아니라, 가축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최소 수백에서 수천 마리나 되는 가축들을 다 끌고 가야 하는데, 가족과 종들뿐 아니라 가축들까지 다 데리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게다가 갑자기 강도가 올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 보호하면서 옮겨야 했는데, 이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전혀 모르는 땅을 향해서 떠난다는 것은 정말로 굉장한 믿음이고 그것이 순종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12:2-3, 새번역)

 

무조건 가라고만 하신 게 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엄청난 약속 앞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떠나라 하셨을 때 분명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떠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자세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알려주는 것을 통하여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이 순종의 행위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믿으면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가? 그것은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이 땅을 다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똑같은 복을 약속하시면서, 왜 그렇게 해주시는지 이삭에게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26:5, 새번역)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받은 율법, 즉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없던 시대에 살았고, 모세보다 약 500년 정도 앞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의 명령, 계명, 윤리, 법도를 아브라함이 잘 지켰기 때문에, 그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을 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의 교훈이 바로 순종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도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순종을 배웠고 실제로 순종했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순종하지 않으면 잡종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짜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사람이 이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완전한 순종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 그 과정을 통과하는 가운데 순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후에 계속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실수할 때도 있었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 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성공과 실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12:1) 가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고향은 떠난 것은 맞지만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원어 상 친척태어난 곳을 의미하고 아버지의 집은 집안사람들, 즉 가족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라크)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그 후 가나안 땅으로 간 것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죽음 후에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겠다고 약속하신 곳이 바로 이 가나안 땅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기근이 왔을 때 점점 남쪽으로 가다가 결국 이집트로 옮겨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온전하지 못한 순종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그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참 많습니다. 특히 구약에는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왜 이렇게 명령이 많은가?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나? 하나님을 믿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편하고 그래야지, 뭘 자꾸 하라, 하지 말라고 하며 왜 이렇게 사람을 옭아매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렇게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게 많으니까 자유가 없어지고, 나를 옭아매기 때문에 믿기가 싫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인 경우, 믿기는 믿지만 적당히 믿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완전히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이렇게 떠나라고 하시거나 버리라고 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대안을 가지고 그렇게 명령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버리고 떠나야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서, 우리를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나고 버릴 때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고 행복해지고 더 큰 유익과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신 매뉴얼이 바로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하신 그대로만 살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땅을 떠나고 버렸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가나안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산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떠난다고, 버린다고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망하는 게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버려라. 떠나라. 그만두어라. 이것을 해라.”라고 명령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망설이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너무 좋아하는데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 이것을 제게서 가져가려고 하십니까?” 사실 자기도 압니다. 이것을 그만두고 저리로 가야 잘될 수 있는데 포기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 더 좋은 가나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아직도 갈대아 우르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당시 갈대아 우르가 환경적으로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척박하고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이 아니고 앞으로 볼 때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가나안 땅이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바로 그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시는데 당장 눈앞에 보기에는 그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해서 거부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버리라고, 떠나라고, 정리하라고 하시는 어떤 죄가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라면 상관없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지 않다.’라는 게 다 있지 않습니까?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자기도 압니다. 죄를 짓고 모릅니까? 뭔가를 하고서 , 이거 하나님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이것은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것 같은데?’라고 어느 정도는 다 느낍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이제 그만하고 떠나라 하십니다. ‘그것을 그만둬야 네가 산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면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는데 이게 포기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포기하라는 부담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되게 하려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려야 할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끊어야 할 죄를 끊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야망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냥 쥐고 있으려 고집을 부립니다. ‘제가 이것을 가지고서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대로 살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지난번 살펴볼 때 거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신들을 섬기면 다 망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지만, 하나님만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들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우스운 소리로 자주 하는 얘기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 제일 사랑해. 그런데 미스 김도 사랑하고, 미스 리도 사랑하고, 미스 박도 사랑해. 그래도 나는 당신을 제일 사랑해.”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런 것은 온전하고 신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딱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고, 너무 사랑하는 게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짜 사랑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우리가 위로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믿으면 믿는 대로 행동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자주 전화하고 문자도 합니다. 방금 만나고 헤어졌는데도 또 전화하고 영상 통화도 하고 문자도 합니다. 서로 통화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속삭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자가 남자에게 오늘 저녁 만나자고 하니까, 남자는 바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저녁 식사를 만들어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같이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까 너랑 같이 먹으면 불편해라고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까?

 

다음 날 여자가 남자에게 또 만나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자는 또 바쁘다고 합니다. 뭘 하는데 그러냐고 하니까, 같이 재미있게 노는 그룹이 있는데 거기 예쁜 여자들이 많아서 자기는 거기에 꼭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니까 오빠 믿지?”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게 맞나요?

 

이 남자는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말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합니까? 정말 사랑하는데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만 일부러 골라서 한다는 말입니까? 그가 하는 행동이 진짜 그의 마음입니다. “오빠 믿지? 사랑해.”라고 한 말이 진짜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진짜 그의 마음입니다. 자기 혼자 음식 만들어 먹는 게 편하다는 마음, 다른 여자들과 놀겠다는 마음이 진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진심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믿음과 함께 강조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믿는 것은 사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혀 예배를 안 드리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혀 기도도 안 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혀 하나님의 말씀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지금 무슨 할 일이 있다는 등 핑계가 많은데, 정말 사랑하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만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바쁜 중에 시간을 쪼개서라도 만나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분과 만나서 함께 교제하고 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순종합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안 하면 뭔가 좀 찝찝하고, 안 하면 벌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일에 예배를 나오고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얼마나 짐이 됩니까?

 

어떤 사람은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순종이겠습니까? 성경이 알려주는 순종은 믿음으로 인한 순종, 자발적 순종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참 기쁨과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첫걸음을 내디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배우라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3.   믿음의 결과는 축복

 

믿음의 근거는 말씀이고, 믿음의 표현은 순종이며, 믿음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곳은 결코 가나안 땅이나 이 세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곳은 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입니다.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5~16)

 

여러분, 사시면서 뭔가 좀 애틋하고 뭔가 그리운 그런 마음이 가끔 드실 때가 있습니까? 고향을 그리워한다든지, 아니면 별 이유 없이 마음이 쓸쓸한 적이 있습니까? 그냥 행복하게 잘 사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데도 그러는 겁니다. 싱글 청년들은 부모님과 행복하게 잘 사는데 이상하게 가을이 되면 자꾸 추남’(가을 남자)이나 추녀’(가을 여자)가 된다고 하거나 또 봄이 되면 봄을 탄다고 합니다.

 

이런 이상한 마음, 자꾸 뭔가 그리워지는 그런 마음이 드는데, 그게 왜 그런지 아십니까? 평생 그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평생 왜 그런가 하면, 인간에게는 본향을 향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서 다 그런 그리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지금 행복하게 살고 마음이 꽉 자게 살아도, 뭔가 그리워하는 부분, 빈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을 향한, 본향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그곳에 가면 그것이 다 채워집니다. 그때는 그런 그리움이 없어집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그곳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이곳을 떠나라.”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민했겠습니까? 그때는 요즘처럼 이사하는 것이 쉬운 시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삿짐 센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한 번 떠나면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걸고 떠난 행동은 모험이며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분명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3~14)

 

아브라함이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그가 힘들게 살았다는 뜻도 되지만, 사실은 그의 본향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천국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는 외국인으로 살았으며,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실제로 이민자와 유학생의 경우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미국에서는 우리가 늘 외국인이고 나그네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우리 2세들이나 2세들에게 태어난 3세들도 지금 있지만, 2세나 3세를 보며 미국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너는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from?” 여기서 태어났는데도 그럽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고 나그네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미국 내에서도 좋은 곳이 많습니다. 뉴욕, 시카고, LA같이 큰 도시도 있고, 또 국립공원들이 얼마나 좋은 데가 많습니까? 한국에도 좋은 데가 많아서 여행 가고, 동남아와 유럽의 좋은 데도 많습니다. 여행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여행하게 되면 참 마음이 벅차고 내가 저기를 간다는 마음으로 기쁩니다.

 

그런데 왜 여행이 즐거운지 아십니까?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이 여행해 보십시오. 하나도 안 즐겁습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라고 하며 최고로 좋은 데에 가서도 걱정만 하고 근심만 됩니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즐거운 것이 여행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외국인과 나그네 삶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 외국인이고 나그네이지만, 여행객은 돌아갈 집이 있기에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 목적 없이 어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데로 여행을 가더라도 여기가 내 집이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의 삶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게 살아야 합니까?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그 영원의 시각으로 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어리석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 안 보인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막에 거했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9)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하기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이 자기의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돌아갈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후손인 요셉도 이집트에서 총리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으면서도 자기가 죽으면서 왜 자기의 뼈(유골)를 가지고 나가 달라고 했습니까? 그곳이 자기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땅으로 자기 뼈만 돌아가면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징적으로 이 땅이 자기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감으로써 선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0)

 

장막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언제든지 옮기기 쉬운 것입니다. 장막은 텐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막(텐트)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성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을 향해 믿음으로 떠났고 그 과정을 믿음으로 걸었고 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던 결과가 무엇입니까?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1~12)

 

미쁘시다라는 말은 신실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이었고 함께 믿음으로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닿은 곳이 어디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 비교도 안 되게 좋은 하늘나라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여행해 보신 곳 중에서 가장 좋은 데가 어디였습니까? 세상에 좋은 곳들이 참 많습니다.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데, 지난 2015년에 릴리 재단에서 주는 목회자 지원금에 뽑혀서 거액을 받아 이곳저곳을 많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것으로 수련회도 하고 아주 잘 썼습니다.

 

미국 내에서 좋은 여행지로 뉴욕, 캘리포니아, 국립공원 등을 많이 가봤고, 캐나다의 밴프(Banff) 국립공원이 굉장히 좋다는데 거기는 못 가봤습니다. 하지만 안식월 당시 저희 가족이 좋은 데를 아주 많이 갔습니다. 런던, 파리, 로마, 베니스, 피렌체, 아테네, 비엔나, 잘츠부르크, 스위스 알프스(융프라우 산), 독일(뮌헨,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이곳의 더블린과 자매결연 관계인 아일랜드의 더블린도 가봤습니다. 안식월 지원금 덕분에 그렇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들이 다 좋았지만, 천국은 그런 데보다 몇백억 배, 몇천억 배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그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여 하늘나라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갈대아 우르는 떠나기는 했지만, 중간에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하란 땅에서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고, 하란은 지금의 터키 남부 또는 시리아 북부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반만 순종했을 때, 그것이 그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대충 따라갔을 때 오히려 그것이 안 좋은 것이었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순종 때문에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 적당히 하고 대충 하면 시간을 버는 것 같고 돈도 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의 낭비일 뿐이라는 겁니다. 실제로도 시간 낭비, 돈 낭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온전히 순종할 때 그것이 축복입니다.

 

작년에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4년여 전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지만, 장례식 때 종종 보면 돌아가신 분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불의의 사고나 좋지 않은 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장례식은 분위기가 아주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을 믿는 r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분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분명히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행하다고 합니까?

 

사실 그 자리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미 천국에 들어가신 분의 시신 앞에서 참 안 되셨다. 불행하시다.’라고 생각하면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게 될 텐데도 먼저 천국에 간 사람을 향해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최대한 천국에 안 가려고 버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다고 이 땅을 무조건 빨리 떠나라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진짜 소망이 있다면 완전히 무너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거하면서 이 땅이 무엇이고 천국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산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카톡소리, 스마트폰, 문자, 전화 소리 등이 많습니다.

 

처음 셀폰이 나왔을 때는 벨소리가 참 다양하게 울렸습니다. 어떤 분은 그냥 따르릉 소리가 났고, 뽕짝짝 뽕짝소리도 있었고, “전화받으세요!”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다들 잘 묵음으로 해놓으십니다. 또 인터넷으로 드라마니, 영화니, 유튜브니, 우리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도 여러 가지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많아서 목표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 크게 부풀려져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많은 지도자들이 왜 존경받지 못합니까? 초심에서 빗나가버린 삶 때문입니다. 부부가 불행해지는 것도 초심에서 크게 벗어나 버린 애정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인 중 한 사람이며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이 있는데,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그렇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암처럼 치솟는 열정의 사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과 관계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이 땅의 복도 많이 누리며 살게 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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