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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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XoFNoIczfPU?si=cCGzHQTfR9oRgvW7&t=236
2025년 2월 2일 주일예배
✦ 믿음 10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 24장 14~28절)
[들어가는 말]
지난 2011년 북한에서는 김정일 사망 후 그를 이어 그의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불과 27세의 나이에 북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27세에 대기업 총수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을 이어 김정은이 대를 이어 북한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독재정권에서도 한 사람의 지도자가 가고 그 다음 지도자가 대를 잇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결혼하고 그다음 해에 아내와 같이 한국에 계신 장인 장모님 댁을 방문하고 있을 그 여름에 김일성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전 군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혼자 독재한다고 해도, 한 지도자가 가고 그다음 지도자가 다시 비슷하게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 굉장히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처음 교회를 개척해서 크게 성장시킨 1세대 목사님들이 많이 계신데, 그분들 대부분 은퇴하셨습니다. 그렇게 은퇴하신 후에 후임자가 오는 과정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소위 성공적인 목회를 했던 분들인 경우에는 특히 더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지도자가 물러가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지도자가 이어받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이 쉽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비참하게 지내며 오합지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노예로 살던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던 그들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구원해내셨고, 광야 40년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엄청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또한 굉장히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엄청난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달성하고 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온 노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3주 연속 여호수아를 통해 믿음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여호수아의 리더십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나온 날들
1) 모세 밑에서의 훈련 기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리더가 된 때는 그의 나이가 대략 80세에서 85세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합니다. 그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때보다도 더 늦은 나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 모세와 비교해 보면, 모세도 80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으니까, 모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몇 년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기까지 약 7년 반 정도 걸렸고, 점령한 땅들을 안정시키는 데에 17년 이상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11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30년 정도 이스라엘 지도자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110년이라는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25~30년을 위해 80~85년을 준비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그 전에 그를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먼저, 여호수아는 모세보다 후세대이니까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수모를 당하고 육체적인 어려움도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힘든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나안 땅의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같이 자란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정신을 못 차리지만, 잡초같이 험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조금 어려움이 오는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도 엄청나게 힘든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 힘든 일이 오히려 나중에 이런 힘든 상황을 겪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특히 우리 청년 여러분, 내 삶이 순탄하고 편안하고 그저 탄탄대로만 걷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어려움이 와도 제가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주지 마십시오.’가 아니라, ‘문제가 생겨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이겨 나가는 게 자기 인생에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청년들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고 해서 우리가 찾아가도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그러한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안전하다고 생각된 곳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너무나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한 곳에 비행기가 떨어지고, 또 흥분해서 여행을 가던 길에 비행기가 폭발합니다.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안전한 곳만 찾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과 함께하여 이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 능력과 지혜를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으로서 40년을 지내면서 모세에게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순종을 배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순종하며 따른 것입니다. 모세가 너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랐습니다. 또 여호수아를 불러서 모세의 시종을 들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 밑에서 순종하며 배운 여호수아를 때가 되었을 때 리더로 발탁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과 인내의 기간이 없이 리더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리더의 자리에 오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리더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이런 순종과 섬김과 인내와 연단의 기간이 없이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바로 타락하고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20대의 황금기를 도망자로 계속 도망 다니면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가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저곳에 가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어려운 기간, 죽음의 위협을 받는 그 기간에 계속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 어려움을 다 겪고 나서 왕이 되었을 때, 물론 나중에 그도 큰 죄를 범하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가장 이상적인 왕,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그리스도)가 오는 놀라운 복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도 아무 고통과 인내의 기간 없이 그냥 리더가 된 게 아니라, 모세 밑에서 철저히 훈련받고 순종하고 섬기는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리더가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겸손하게 순종하며 섬긴 것을 본 백성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가 이제 지도자가 된다고 할 때 아무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가 모세를 따른 것처럼, 여호수아 당신도 우리가 따르겠습니다.”라고 반응했습니다. 모세를 향해 존경심을 가지고 순종했던 본을 보여준 여호수아가 리더가 되자, 그것을 다 지켜보았던 백성들 역시 그를 존경하며 따른 것입니다.
2) 지도자로서의 기간
모세 밑에서 하나님의 지도자와 종으로서 훈련받은 여호수아는 25년이 넘는 지도자로서 이 기간에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가 너무도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성공의 비결의 핵심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실 때 어떤 중요한 사건이 있기 전과 일어난 후에 늘 여호수아가 뭘 했는지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중요한 일을 하기 전, 그리고 그것이 끝난 후에 뭘 했습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여호수아는 뭔가를 하기 전에 “하나님, 이렇게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께 여쭈어보았고, 그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웠겠습니까? 모세에게서 배웠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신앙생활을 한지 별로 오래 안 되었고 나는 믿음이 연약해.’라고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분은 믿음이 참 훌륭한 분이야.’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붙어서 그분이 신앙생활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한번 잘 보시고 배워 보십시오.
각 목장의 목자님, 목녀님이나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자들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직분이나 사역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사역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고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내가 보고 배우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될 때 내 믿음의 후배들이나 내 자녀들이 나를 보고 배우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선순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모습이 별로라서 ‘나는 절대 저 사람과 같이 되지 않겠어.’라거나 ‘나는 절대 아빠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악순환’입니다. 우리는 선순환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를 리더로 세우실 때 그에게 명령하신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며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힘과 지혜를 받아 용맹한 장수로서 또 지혜로운 리더로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투 경험이 하나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아가 싸워야 했습니다. 노예로 살았는데 무슨 전투 경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상대는 수백만이나 되는 강력한 가나안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호전적이고 잔인했는데, 그러한 그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또 승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가 강하고 무시무시해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왜 그보다 약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도 바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문제가 더 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문제가 실제보다도 더 크게 보이고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평생 염려와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런데도 염려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 뭔가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있습니까? 지금 ‘이걸 어떡하나?’ 하며 마음을 꾹 짓누르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다른 데나 사람을 찾아가고, 유튜브 보고, 인터넷을 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할 때입니다.
정말 신자라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걱정과 불안과 염려가 나를 찾아올 때 할 일은 다른 데로 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릴 때 제가 실제로 몇 번 본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어릴 때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착하고(?) 너무 성격이 좋아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갈등을 회피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이들끼리 막 치고받으며 싸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아이들이 막 치고받고 싸우거나, 말다툼하고 욕하면서 싸우다가 자기가 딸리는 것 같고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한번은 싸우던 아이가 막 울더니 갑자기 자기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빠를 데려왔습니다. 그랬더니 기세 등등하던 다른 아이가 기가 죽었고 울면서 집으로 갔습니다.
제 친구도 그랬던 적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저희 옆집에 형제가 있었는데 큰 아이가 저보다 두 살 정도 어렸습니다. 한 번은 제 친구가 놀러 왔다가 그 옆집 아이와 싸웠습니다. 제 친구가 나이도 더 많고 키도 더 큰데 막 심하게 소리 지르니까 옆집 아이가 울면서 가서 자기 엄마를 데려왔습니다. 그때 그 엄마가 제 친구를 보고 “야, 네까짓 게 뭔데 우리 아들을 울려?”라고 막 야단치니까 이제는 제 친구가 울면서 갔습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강한 것 같아도 어른을 어떻게 이깁니까? 자기가 다른 아이를 울렸는데, 어른이 오면 자기가 울면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기 아빠나 엄마를 데려온 아이가 자기를 때렸거나 자기보다 강한 아이를 앞에 두고 계속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면서 엉엉 울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기세등등합니다. “우리 아빠야!” “우리 엄마야!” 이러면서 아주 당당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아빠(하늘 아버지)보다 훨씬 약한 존재 앞에서 울고 질질 짜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같이 와 계신 데도 내가 울고 기가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지금 하나님보다 훨씬 아무것도 아닌 것 앞에서 왜 이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합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지금 내 하늘 아버지가 옆에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분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옆에 함께 계시는데 두려워할 게 뭐가 있습니까? 강하신 분이 옆에 계신데 왜 두려워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은 똑같습니다. 지금 나보다 강한 것이 내 앞에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강한 내 아빠가, 내 엄마가 지금 함께하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그 어떤 사람보다, 그 어떤 문제보다 크신 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데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걸 깨닫고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링컨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북 전쟁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을 때 장관 한 명이 대통령에게 와서 “대통령님, 이제 우리가 드디어 전투를 벌이는데, 과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실까요?” 그때 링컨 대통령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하나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주신다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일세.”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항상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가 그걸 모를 뿐입니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이것은 “나 좀 혼자 편하게 살게 내버려 둬.”라고 하는데 괴롭히는 차원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부담을 주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내가 제대로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붙들 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염려와 불안과 걱정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붙들 때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안 하겠습니까? 오히려 안 하면 바보 아닙니까? 하나님을 붙들면 되는데, 그러면 승리할 수 있는데, 왜 그걸 안 합니까? 그게 어떻게 부담이 되겠습니까?
2. 여호수아의 도전과 선포
이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 기억하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놀라운 능력과 기적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하여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히 도전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4~15절)
바로 이 14~15절이 여호수아서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하나님께 대해 믿음의 반응을 보이며 결단해야 한다고 지금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조상들이 강 저쪽(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 그리고 이집트에서 섬기던 이방 가짜 신들을 버리고, 지금 살고 있는 가나안 민족들의 신들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너희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해라.”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선포합니다. “나와 내 집안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며 단호히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6~18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강력한 도전과 선포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집트에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구해주시고, 광야에 나오게 하시고, 거기서 살려주시고, 또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고 다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여호수아처럼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대답입니까? “여러분, 신앙의 길로 가시겠습니까?”라고 하니까 “아멘, 할렐루야! 저희는 신앙의 길로 가겠습니다.” 이 대답이 얼마나 만족스럽습니까? 여호수아가 강력하게 도전했는데 거기에 대해 이렇게 귀한 믿음의 반응을 보였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여호수아는 이렇게 좋은 대답을 듣고도 마치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또 다시 그들에게 강력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19~20절)
여호수아는 지금 도전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니 지금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하겠다고 하는데 ‘니들은 안 돼.’라고 하니 얼마나 김이 빠지게 하고 초를 치는 말입니까?
그런데 여호수아 24장 전체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현실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래, 알았어. 잘 섬겨봐. 그런데 너희는 안 돼.”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게 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가나안 민족들의 신들이 가짜 신들이고 우상들을 만든 것인데, 그것을 보니까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해 주셨지만, 저 신들도 좋아 보인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섬기고 저 신들도 섬기면 되지 않는가? 하나만 섬기는 것보다 100개를 섬기면, 훨씬 더 안전하고 좋지 않겠느냐?’ 이 생각을 지금 하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뒤에 괄호 치고 하는 말이 뭔가 하면 “그리고 여기 있는 신들도 같이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안 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종교 환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자기들도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이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이방의 거짓 신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본 것입니다. 진짜 신은 하나님이시고 저것들은 가짜 신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냥 다 진짜 신인 줄 알고 다 섬기겠다고 한다는 것을 여호수아는 본 것입니다.
백성이 아는 하나님은 자기들을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꺼내 주시고, 광야에서 붙들어 주시고, 이제 이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시고, 민족들을 이기게 하시고, 다 자기들에게 승리를 주시고 돌봐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감사하며 “그분만 섬기겠습니다. 다른 신들은 가짜입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의 종인 것처럼 자기들을 당연히 지켜줘야 하고 당연히 좋은 것을 해줘야 하는 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간파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굉장히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뭘 믿는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성경에 나온 대로 정말 다 믿는다는 말입니까?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란 단어를 들으셨을 때 무엇이 생각납니까?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는 분? 내가 원하는 선물을 갖다줘야 하는 산타클로스 같은 분? 그런 분은 아닌지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난 지 이제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살 만해지니까 교만해졌습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괴로울 때는 “주여,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다가도 조금 살 만하면 해이해집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자기가 죽기 전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확실히 주님 안에서 잡아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그런 자기중심적인 태도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잘못된 태도로 예배하는 것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로,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19). 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다른 모든 신들과 구별해주는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삶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자기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이 뭡니까? 가운을 입고 멋진 옷을 입고 성경책을 경건하게 들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라는 뜻이고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이 다른 주변 민족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는 확실히 달라야 합니다. 그 삶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기에 달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별되었는데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로 다르지 않고 비슷하게 살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셔서 이스라엘을 따로 구별하여 택하셨는데, 그것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면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9). 하나님은 그 백성이 눈을 다른 신들에게로 돌려서 그렇게 나누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려면 오직 그분에게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신들을 쳐다보며 나누어진 마음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질투’라는 단어가 사실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다 보니까 이 단어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인간처럼 유치하게 다른 사람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며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른 신들을 질투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신들이 아니라, 그 백성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다른 신들에게로 나누어지고 그 정성이 다른 데로 나누어져서 그런 조각이 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을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는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저러면 안 된다.’라고 하시는 그 마음입니다. 그것이 질투로 표현된 것입니다.
똑바른 마음, 집중된 마음, 하나님만 생각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우리가 똑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에 그렇게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자동차도 그렇지만, 아주 작은 물건이나 작은 싸구려 시계 하나에도 매뉴얼이 따라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하면서 물건을 만든 회사에서 그것을 넣어 주는 겁니다. 엄청나게 비싼 기계는 매뉴얼만 해도 엄청나게 두껍고 여러 권이 됩니다. 그것을 잘 공부하고 숙지해야 기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더 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인간이 잘못된 길로 가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시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질투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잘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반면 어떻게 살면 망가지고 실패하는지를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신 매뉴얼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잘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데, 같은 일이라도 자기가 하면 괜찮다고 하고 남이 하면 잘못됐다고 하는 이중적 태도를 말합니다.
제가 ‘역대급 내로남불’이라고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습니다. 특히 내로남불에 관련된 노래가 없나 검색에서 ‘역대급 내로남불 노래’라고 쳤더니 한 노래가 딱 떴는데 놀랍게도 아주 오래전 제가 이것이 내로남불의 전형이라고 말했던 그 노래였습니다. 그게 아직도 먼저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나만 바라봐>입니다. 아십니까?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인 태양이 부른 곡입니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지금도 뜨는 것을 보니까 정말 역대급인 것 같습니다.
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마 Baby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마 Lady
가끔 내가 연락이 없고 술을 마셔도
혹시 내가 다른 어떤 여자와 잠시 눈을 맞춰도
넌 나만 바라봐
얼마나 내로남불입니까? 이게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지금 자기는 아무리 딴짓하고 돌아다녀도 너는 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이 태양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얼핏 본 적이 있는데, 춤을 추면서 이 노래를 부르니까 여자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욕심쟁이라서 ‘나는 딴짓 해도 너는 나만 바라봐, 베이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하나님만 동행하고, 하나님만 붙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좀 바람 펴도 하나님은 나만 지켜줘.”라고 하는 이게 우리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말씀도 읽지 않고 기도도 안 하고 예배도 자주 빠지고 그래도 나만 지켜줘.”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는 그 당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백성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형통하고 성공하려면 주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섬긴다면 정말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상의 여러 가지 길들이 함께 주어져 있습니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게 됩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재미있는 것들과 좋아 보이는 것들이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 아모리 족속의 신들, 또는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가 ‘좌’이고 메소포타미아(강 저쪽)이 우입니다. 그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 그리로 따라가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신 말씀이 나중에는 강대국 이집트나 바벨론 같은 나라를 의지하지 말라는 뜻으로 바뀐 겁니다.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 저편에서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 심지어 지금 여기 가나안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이 다 좋아 보이고 재미있어 보이는데, 신앙생활은 재미없어 보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 행복하고 재미있는 일입니다. 천국에 가면 흰옷을 입고 머리 위에 동그라미가 있으며 하프나 켜고 있는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티브이 같은 데에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맨날 흰옷 입고 하프만 켜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이 얼마나 지겨운 삶입니까?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그건 지옥입니다.
그런 게 아니고, 천국은 우리가 너무 재밌고 너무 행복하고 제일 재미있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우리가 이 땅에서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렇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세우는 언약
여호수아가 강력하게 경고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1~22절)
계속 여호수아가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아, 그래, 알았다. 너희가 두 번이나 약속했으니 그렇게 하겠지.’라고 하며 그냥 넘어간 게 아닙니다. 뭐라고 합니까?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3~24절)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했을 때 말로만 하지 말고, 첫 번째로 이방 신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신들의 마음을 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제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찬양합니다.’라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섬기던 이방 신들을 정말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에 가지고 있던 우상들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다음부터 죽 읽어보면, 바로 이런 죄들을 짓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버리지 않은 채로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지금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정말 섬기겠다고 하면 지금 잘못된 것을 버리고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지금 즐거운 오락거리를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자꾸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이웃과 멀어지게 하고 관계를 깨는 것들, 내가 자꾸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미련을 두고 버리지 못하는 게 뭔지, 그것을 찾아서 그것을 단호하게 버릴 수 있어야 진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25절)
지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겜에서 언약을 세우고 그들이 지킬 율례와 법도를 만들어줍니다. 지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26~28절)
여호수아는 모든 것을 율법책에 기록하게 하고, 그다음에 큰 돌을 세워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하는 증거로 삼습니다. 정말 철저히 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철저히 했지만, 그들도 다 하겠다고 언약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가를 봅니다.
그래도 우리가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계속 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입니다. 뭔가를 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으로만, 말로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부족하고,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
초기의 랍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나타낼 때 귀나 입이 아닌 신체의 다른 부분을 사용해서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신체 부위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신체 부위는 귀나 입이 아니라, 즉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 즉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가는 말]
여호수아도 결국 때가 되어 110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위대한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도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언젠가 다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계보가 나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내 자녀에게, 또 자녀의 자녀에게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오늘 택하라. 미루지 말고 오늘 택하라. 섬길 자를 택하라. 누구를 섬기겠느냐? 이것도 섬기고 저것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겠느냐, 아니면 하나님만 섬기겠느냐? 대답하라.”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바로 이렇게 외친 여호수아,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에게 일어났던 이 놀라운 기적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의 역사가 바로 우리 삶과 우리 자녀들의 삶에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