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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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JGUCRRVGQo0?si=PgHkE8XEcVhamIeL&t=282

 

 

2025126일 주일예배

믿음 9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누리는 복된 인생

(여호수아 241~13)

 

[들어가는 말]

 

아주 오래전인 초등학교(국민학교) 5~6학년 때쯤 어릴 때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가 있는데, <뿌리(Roots)>라는 티브이 미니시리즈였습니다. 작가인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가 자기 집안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는데, 거기서 주인공인 쿤타킨테(Kunta Kinte)는 아프리카 감비아의 한 부족 출신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장차 자기 마을의 추장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흑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혀서 졸지에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노예로 팔립니다. 쿤타킨테는 신대륙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에게 아프리카의 자기 조상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고, 그것을 통해 아프리카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중년 이상 되시는 분들은 이 <뿌리> 드라마를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때 시청률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소설이 티브이 극으로 나와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그때 흑인을 비롯한 미국 사람들에게 족보에 대한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볼 때 미국의 흑인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의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용사의 뿌리입니다. 노예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게 되지만, 아프리카 용사에 뿌리를 두고 용사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뿌리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뿌리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대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하나님 덕분에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그 뿌리를 잊어버리고 자기들과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온 가나안 민족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울려 사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들의 삶의 방식과 종교를 자꾸 따라가며 타락하려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이스라엘의 뿌리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이야기하며 가르쳐줍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1)

 

여호수아는 이제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을 세겜에 모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이라는 한 장소에 모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군사적으로 나가 싸울 때는 항상 길갈이라는 곳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세겜이라는 장소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느슨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결단하던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나태해지고 세상으로 빠졌다고 생각될 때 세겜에서 모였습니다.

 

세겜 옆에는 두 산이 있는데, 에발 산과 그리심 산입니다. 처음 모세의 인도로 이곳에 왔을 때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신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마음대로 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게 하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남쪽 유대 땅에서 북쪽 갈릴리로 돌아가시다가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십니다. 사마리아의 수가 성이라는 곳에 가셔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 대화하시면서 구원해 주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마리아의 수가 성이 바로 이 구약의 세겜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언어가 바뀌었기 때문에 수가로 바뀌었지만, 구약의 세겜이 바로 그 수가 성입니다.

 

우리 한국말로 해도 세겜이라고 할 때 자음이 ㅅㄱ이고 수가도 자음이 ㅅㄱ입니다. 히브리어는 자음에 모음을 붙여서 단어를 만들기 때문에, 자음이 같으면 어원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해도 세겜과 수가는 자음이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도 자기만의 세겜이 필요하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나태해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것을 느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다가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있거나 생활이 바쁘거나 해서 좀 멀리 갔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곳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나침반과 같아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곳은 이렇게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자기 집에 있는 어떤 방일 수도 있고, 마음속의 어떤 곳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한 상태가 될 때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될 때 빨리 깨닫고 눈치채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실패하거나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비록 넘어지고 무너질 수 있지만 빨리 회복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세겜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은 구정 연휴가 되고 또 월요일이 대체 공휴일이 되다 보니까 최소 6일 연속 놀게 됩니다(토일월화수목). 그러니까 금요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9일 연속 놀게 됩니다. 한국은 참 노는 날이 많은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귀성길 고속도로가 꽉꽉 막히고 기차도 엄청나게 사람이 많습니다. 비행기는 지금 인천공항에 역대 최대 인원이 몰렸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그렇게 꽉 막혀서 가지를 못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고속도로가 뻥 뚫린 것과 같습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은혜와 축복이 끊임없이 삶 가운데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와 복을 내려주셔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가 은혜인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아주 작은 것도 ,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항상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가? 그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 하는 사람은 눈이 닫혀서 볼 수가 없습니다. 보질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항상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듣긴 듣는데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눈이 있긴 있는데 보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상황이 어렵더라도 괜찮습니다. 견딜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작은 틈이 생기면 작은 일에도 흔들립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세겜으로 나아갈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 삶이 평범하게 가다가 갑자기 어려움이 탁 생기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대개 교회를 다니며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럴 때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옵니다.

 

하나는 어려움이 탁 생길 때 갑자기 안 나오던 사람이 새벽 기도를 나옵니다. 그러면 , 저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물어보고 같이 기도하며, 또 중보기도실에도 기도 제목을 내고 기도하고 또 목장에서도 기도를 부탁하여 같이 기도합니다. 그렇게 더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며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소수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집니다. 교회에 안 나오는 날짜가 점점 더 많아집니다.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권면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작은 일만 일어나도 굉장히 흔들리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렇게 하나님을 더욱 찾아 나오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세겜입니다. 그때는 세겜으로 나갈 때이지 다른 데로 갈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뿌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좋기는 하겠지만, 걱정도 더 많아집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세상 복은 될 수 있지만 진짜 복은 아닙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일이 잘된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곧 잘못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귀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것을 알아보며 깨닫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며 말씀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제가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목사로서 볼 때 가장 불안하게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파트 타임 전도사로 시작했을 때부터 따지면 올해 놀랍게도 벌써 사역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30년 동안 제가 교회에서 사역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접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 가장 불안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과 전혀 동행하지 않고, 말씀이나 기도 생활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세상에서 일이 정말 잘 풀리고 잘되는 사람입니다. 정말 불안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불안한 겁니다.

 

반면에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도, 어떻게 저런 상황에 신앙생활을 저렇게 할까 할 정도로 꾸준히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놓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유, 저 답답한 사람. 지금 이 상황에 뭘 저러고 있나? 나가서 막 뛰어야지.’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분명히 하나님이 인도해주실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랍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 75년 동안의 삶에는 별로 놀라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순종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기서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2~3)

 

강 저쪽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인 메소포타미아를 말합니다. 데라는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인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고, 심지어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 또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팩트(fact)는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셨고,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같으면 이런 우상 숭배자의 가정에서 일꾼을 부르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교회의 일꾼인 장로와 안수집사를 세운다고 할 때, 무당의 아들, 무당의 딸 같이 이상한 집안 출신이 나온다면 꺼림직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에 두 가지 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상을 섬기던 데라의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의 뿌리입니다. 창세기에는 이 사실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안이 원래 우상 숭배자 집안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이것은 숨기고 싶은 사실입니다. ‘제가 목사인데 사실은 원래 제가 무당 집안 출신입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왜 굳이 여기서 그런 사실을 밝힙니까? 이스라엘 백성도 이 가나안 땅에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육신의 조상인 데라와 같이 우상 숭배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 숭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그의 본을 따라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살았던 그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후손들을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죄에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바로 이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그런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위대한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부르신 게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변화시키며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똑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 한민족은 신들을 많이 섬기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도 미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이렇게 과학 기술이 발달한 사화에서 우리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하면 콧방귀를 뀝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있느냐? 무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 명, 즉 수만 명을 먹였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 그런 걸 어떻게 믿냐? 그건 신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기 위해서 점집에는 갑니다.

 

성경은 안 믿는데 그런 것은 왜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논리적으로 보면, 이쪽이 안 믿어지면 당연히 그것도 안 믿어져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이쪽은 안 믿는데 저쪽은 믿는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논리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는데, 이제는 인터넷 기술을 사용하는 등 점집도 진화했습니다. 인터넷 부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했다. 이제는 조용히 혼자 지내겠다.’라고 하며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그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강물이 흐를 때 강가에 떠 있는 배를 줄로 매어 놓습니다. 그런데 묶는 줄이 없이 그냥 놓아두면 그 보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물에 따라서 흘러 내려가 버립니다.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떠내려가 버립니다. 밧줄이 붙들고 있으니까 배들이 거기 있는 것이지, 밧줄이 없으면 다 떠내려가 버립니다.

 

그 밧줄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강물에 떠 있는 배처럼, 배는 분명히 물 위에 떠 있지만 물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물에 속해 버려서 물이 들어오면 가라앉아 버리고, 배로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가라앉아 버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데, 지금 흐르는 강물 속에 나를 딱 붙들고 매는 밧줄,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어야 우리가 그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지, ‘내 맘대로 하겠다. 나 좀 쉬고 싶다. 나 좀 내버려둬.’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가 버리는 겁니다. 떠내려가다가 저 폭포 끝에 가서 떨어지는 비참한 최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냥 가만히 놔두면 괜찮은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잘하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흘러가게 됩니다. 아니면 물이 자꾸 들어와서, 즉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서 그냥 같이 가라앉아 버림으로, 분명히 모양이 배는 배인데 물 밑에 가라앉아서 배로서 역할을 하나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모양만 배인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 위에 떠 있으면서 그 밧줄로 평소에 나를 붙들어 매고, 힘차게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계속 움직이면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5:5, 새번역)

 

이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잘 보십시오. 여기서 핵심 단어가 무엇입니까? ‘많은 열매를 맺는다.’가 아닙니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입니다. 여기서 머물다라는 동사는 원래 신약 성경이 쓰인 헬라어의 용법에서 한 번 하고 관두는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머물렀다 떠나는 게 아니라, 계속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머물러 있을 때 괜찮은 것이지, 즉 밧줄에 묶여 있을 때가 괜찮은 것이지, 그냥 내가 혼자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가 버리는 겁니다. 그게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 밧줄이 나를 붙들어주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속받는다. 말씀대로 살면 자유가 없다.’라고 하면서 자꾸 밧줄을 풉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떠내려가 버립니다. 그래서 파선합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자신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붙들고, 또 힘을 내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답답한 삶이 아니라 안전한 삶입니다. 축복된 삶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주셨지만, 그것이 금방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무려 430년을 이집트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셔서 되었습니다.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4)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이지만 각각 삶의 길이 달랐습니다. 에서는 이 세상에서 쉽게 자기 땅을 얻었습니다. 일찍부터 에돔 땅을 차지했습니다. 여기 세일 산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요르단 지역입니다.

 

에서의 후손이 에돔 민족이 되었고,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그 에돔 지역이 이두메 지역이라고 불렸고, 이두매에서 나온 유명한 사람이 바로 헤롯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헤롯 가문에 대해 요즘 수요예배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를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이집트로 아들이 이민 초청을 해줘서 갔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400년 이상 그곳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5~6)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셨고 그 후에 백성들은 그곳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고 요구하게 하셨는데,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바로(파라오) 왕에게 이스라엘을 가게 하라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고, 재앙 하나하나가 마치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만큼이나 애굽 땅을 황폐화시켰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오던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엎어버리셨습니다.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7)

 

여호수아는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들은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부르짖었다고 했는데, 부르짖은 건 맞습니다. 막 절규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죽게 하냐?’ 그러면서 마구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아이고, 우리는 다 죽었네.’라고 하는 게 솔직히 무슨 기도입니까? ‘아이고, 나는 다 죽었네.’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굉장히 포장(?)해 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해줍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를 별로 많이 안 합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기도를 별로 안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왔을 때 아이고,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솔직히 이런 게 무슨 기도 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들으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려움이 오면 아이고, 내 팔자야.’라든가 전생에 어쩌고저쩌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한 번 외쳐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입니다. 세상에서 일은 어떻게 됩니까? 1+1=2가 되고, 2+2=4가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자기가 열심히만 하면 어느 정도는 노력한 정도의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30년 동안이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고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내 계산과 내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십니다.

 

물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며 힘드니까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고 출애굽기에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했어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한순간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 아무것도 지금 되는게 없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 이거 큰일났다. 나는 죽었구나.’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때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사람에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해주시고, 부르짖지 않으며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 해주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데 부르짖는 사람은 그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게 보입니다. 그러나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안 붙드는 사람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해주고 계시는데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자는 겁니다.

 

우리가 당연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고, 또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꼬박꼬박 봉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적인 신앙에 이런 식의 기복 사상이 많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성공한다.’라는 사상입니다. 물론 복을 받고 성공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복이 어떤 복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보통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게 몇 년을 갑니까? 길어야 몇십 년을 가는데, 그 몇십 년 가고 다 없어질 것이 어떻게 진짜 복이겠습니까? 100, 200, 천 년, 만 년이 가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진짜 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늘 복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합니다. 세상의 복과 성공을 하나님의 복과 성공으로 착각합니다.

 

이전에 제가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이나 대학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 후 미국에 온 후에도 그런 얘기가 많았습니다. “고지를 점령하라.”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높은 데에 올라가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자는 것, 그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하면, 그러한 고지론이 간과한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잘될 줄 알았지만, 올라가면 대부분 타락합니다. 그걸 놓쳤습니다.

 

높이 올라간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고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었는데 성공하고, 사회에서 기업으로 성공하고,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사회에서 높은 데에 올라갔는데, 그다음에 이상한 짓을 하고 지탄받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세상에서 잘 풀리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풀리지 않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열심히 해 봤자 소용없네. 기도해 봤자 소용없네. 신앙생활을 잘해봤자 소용없네.’라고 하면서 그만둬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세상의 성공을 복이라고 한다면, 가장 실패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성공하시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실패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끝까지 목숨을 내어주며 사람들을 섬기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모든 사람이 죄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마음껏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나와서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휘장이 쭉 찢어져서, 원래 대제사장 한 명만 1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데를 우리는 아무 때나 마음껏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성공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스빈다.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남들을 구원한 삶, 그것이 참된 성공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외국인에 한국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빨리빨리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빨리빨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그만한 시간이 걸려야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위대한 구원이며,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위대한 구원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정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건짐받은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공격해서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 이겨서 땅을 차지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거나 땅만 주시려는 게 아니라, 악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아무도 없는 빈 땅에 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그 땅은 꽉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악을 정복하고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싸워서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땅을 자동으로 차지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죄와 싸우며 나아갈 때 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사탄의 공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9~10)

 

모압 왕 발락이 나오고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릴 수 있지만, 발락은 모압의 왕이고 발람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면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르게 그들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불러왔는데, 요즘 식으로 보면 무당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발람은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락 왕이 아무리 발람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했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발람이 타고 오던 나귀가 말까지 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막으려고 하셨는데, 발람에게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저주가 축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다른 꾀를 내었는데, 모압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게 한 것입니다. 이 미인계 작전이 성공해서 이스라엘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진영에 전염병을 내리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모압 여자를 데리고 자기 장막에 들어가서 성관계를 가지다가 아론의 손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였고, 그제야 병이 그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단 하루 만에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이상하게 나가지만 않으면 하나님의 복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른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교만하게도 만들고, 다른 세상의 복이 더 크게 보이도록 하여 남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실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셔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된 게 아닙니다.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1~12)

 

여기서 왕벌이라는 것은 진짜 벌일 수도 있고,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엄청난 두려움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미리부터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미리 다 길을 준비해주시고 정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고 저리로 가라고 하실 때는, 이미 다 준비하셨기 때문에 가서 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건축하지도 않은 성읍을 가지게 하시고, 또 심지 않은 과수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짓지도 않은 것을 다 차지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다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가면서 줍기만 하면 되는데, 영적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대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주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구하고 나면 나머지는 다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꼭 기억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실제로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둘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제가 우리 교회에서 목회하는 가운데 두 번인가 세 번 밤에 자고 있는데 12시에, 또는 어떤 때는 밤 1시인가 2시에 갑자기 전화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전화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전화를 받았더니 교회에서 Fire Alarm이 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이름이 명단의 가장 위에 있기 때문에 저한테 먼저 오는 겁니다. 제가 안 받으면 2번에게 전화하고, 2번이 안 받으면 3번에게 가는 식으로 됩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교회에 와 보니까 소방차가 와 있고 소방관들도 많았습니다. 불이 번쩍거리는데, 소방관들이 도끼를 가지고 우리 교회 문을 부수려고 하고 있어서 제가 빨리 문을 열어줬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더니 문제 없다. False Alarm이다. 잘못 울렸다.”라고 하고는 갔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불이 번쩍번쩍하고 소리가 울리며 난리가 났습니다. 엄청나게 불도 번쩍이고 소리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결국 그때 점검을 했지만 불이 난 곳은 없었는데, 경보 장치가 고장이 나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 후 잘 고쳐서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졌기에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토요일 밤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을 코앞에 둔 토요일 밤에 이렇게 잘자고 있는 그 소중한 시간, 휴식의 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또 조금 짜증도 났습니다.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나도 다른 날 나지, 왜 토요일 밤에 나냐?’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이런 게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잘못될지 알지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언제 갑자기 끝나버릴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 자체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갑자기 쓰러지거나 갑자기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제는 좀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겠습니다.’라고 순종하려 해도 순종할 수 없는 그런 때가 금방 올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제는 예배를 열심히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예배에 오지 못하는 때가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좋은 세상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언제 갑자기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무섭고 떨리십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축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제대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또 제대로 산다는 것은 뭡니까?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때 주님이 너는 뭐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놀다 왔는데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다 왔습니다.’ ‘인터넷을 열심히 하다 왔습니다.’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기다 왔습니다.’ ‘고급 식당에서 잘 먹다 왔습니다.’ ‘명품 쇼핑을 즐기다 왔습니다.’ 뭐 이런 말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이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애쓰다 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나름대로 사는 인생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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