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pAxgI7VRGbQ?si=kAIkBMJPMu02x1s0&t=105
2025년 1월 12일 주일예배
✦ 믿음 7 ✦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
(마태복음 17장 14~20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 거대한 수력 발전소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댐이 건설되면 그 마을은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부는 그 계획을 발표하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다른 장소로 옮겨 살 수 있도록, 또 그들이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댐이 건설되기 바로 얼마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 마을에서 진행되던 모든 보수 공사가 중단된 것입니다.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 없어졌고, 건물이나 길이나 도로를 고치고 보수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면서도 매일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을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 이사하기 전이었지만, 물이 들어오기로 한 날보다 한참 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의 마을을 돌보지 않았고 그냥 버려진 채로 두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서 한 마을 주민이 불평하면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곳에는 현재에 아무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Where there is no faith in the future, there is no power in the present.).” 정말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미래가 없으면 지금 별 힘이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다양한 면을 보여주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신자,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인인데, 세상에서는 보통 기독교 신자라고 부릅니다. 신자는 믿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을 믿고 어떤 믿음이라는 것입니까? 또 믿음의 삶, 즉 믿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능력 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병을 고치지 못한 제자들
마태복음 1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건이 있습니다.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변화산이 어느 산의 이름이 아니고, 그 산의 이름은 모르지만 한 산에 올라가서 변화되셨다고 해서 보통 그렇게 부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이 사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뛰어나와서 예수님에게 달려와 간청합니다. 그런 내용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4~16절)
그냥 읽어만 봐도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한지가 느껴집니다. 이 사람은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면서 아들의 간질병 발작 증상을 설명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이 아이의 상태가 좀 더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은 말을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이 아들을 데려왔는데 거품을 물고 넘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주 간절히 요청합니다. 새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5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5~16절, 새번역)
마가복음 9장을 계속 읽어 보면 우리가 아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아들을 고치지 못하니까 예수님에게 이 남자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고쳐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거기 나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시며 고쳐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7~18절)
예수님이 이제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셔서 데리고 왔더니 꾸짖으시니까 귀신이 금방 나갔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마태(레위)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입니다. 로마에게는 중요한 게 힘입니다. 힘으로 정복했으니까 힘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구세주시라고 할 때 ‘뭐, 구세주? 그러면 힘이 세냐?’ 하고 물어볼 때 ‘그래, 힘이 세다.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하고 답하기 위해 기적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썼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히 기적에 관해 쓸 필요가 없어서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 예수님이 금방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고 당황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조용히 자기들끼리 있을 때 예수님께 여쭤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19절)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제자들의 질문이지만,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병이 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도 잘 낫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감기에 걸렸거나 무슨 검사를 받게 될 때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중보기도실에도 기도 제목을 내고 기도하고, 목장에서도 기도하고, 또 주보에도 내고 기도하는 등 우리가 열심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잘 치유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니까 거의 죽어 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놀라운 기적들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왜 제자들은 이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까? 제자들은 ‘설마 하나님이 이런 병도 낫게 하실까’ 하며 의심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나가서 그런 일을 행하도록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가서 병자를 만나면 기도하고 낫게 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전도도 했고 귀신도 쫓아내는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그런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기들이 기도해서 아이가 낫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도하며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기도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비슷한 기적을 행했었는데 왜 이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아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이를 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후에 예수님이 아이를 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이번처럼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어떤 수련회 같은 데에 가면 굉장히 뜨거워집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내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제 학창 시절을 생각해 봐도 수련회에만 가면 엄청나게 뜨거워져서 돌아왔습니다. 또 철야기도라든지, 교회에서 무슨 특별 집회나 부흥회가 있을 때 참석해서 믿음으로 결단합니다. 또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도전하시면 은혜받고 ‘우리도 선교지로 나갑시다. 선교를 열심히 합시다.’ 하며 굉장히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 뜨거워지고 충만했다고 계속 충만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대단했다고 해도 지금 그렇지 않으면 별 것 아닌 겁니다.
2주 전에 나누었던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신 말씀은 성령의 충만을 한 번만 받고 끝내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받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한 번만 마시고 안 마시는 것을 보셨습니까? 술도 그러한데, 성령의 충만은 한 번 뜨겁게 받고 그게 계속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내가 왕년에 이랬다.’라는 것은 별로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사한 기억입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내가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할 때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100%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 한계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길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방심하지 않고 계속 성령의 충만을 받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 하나님께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 잘했다고, 두 번 잘했다고, 계속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 항상 붙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잠깐 주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면 대부분 그때 넘어지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붙어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해 주신 것 중 하나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와 또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일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형제자매간에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이 우리 삶에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성령으로 계속 충만하여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렇게 예배에 오신 분들은 참 복된 분들이십니다.
2.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0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이를 낫게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아이를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 크기보다도 더 작아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겨자씨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래전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겨자씨를 보여주신 적이 있는데, 깨알만 합니다. 굉장히 작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큼 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작은 믿음도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당시 문화에서, 겨자씨는 크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제자들이 겨자씨 크기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좀 더 크게 한다면, 그래서 이 산에게 ‘움직이라’고 말할 때 그 산이 움직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시 사회에서 아주 흔한 격언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불가능할 것 같이 보이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는 산을 옮길 수 있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정하고 그 길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는 산을 움직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산을 옮긴다기보다는, 그 당시 그런 표현을 많이 썼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인용하신 것이고, 또 일종의 과장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산을 옮긴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하다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겨자씨만 한 크기의 믿음만 있어도,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바로 너희를 통해 행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하신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도 못하다’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그들의 믿음이 작다는 말씀입니다. 겨자씨가 아주 작은데 그보다도 작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믿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음의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이라기보다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을 보면 오늘 본문처럼 믿음을 신실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마 23:23, 새번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그들이 정원에 심은 식물(박하, 회향, 근채)에 대해서까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면서,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문제에는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 자비, 신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가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은 ‘신실함’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태도가 신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신실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한 것은 믿음이 작아서 그런 것인데, 믿음이 작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의 태도가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을 보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17절, 새번역)
예수님은 제자들과 거기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비뚤어진) 세대’라고 하십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비뚤어진 것, 안으로 꼬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이 꼬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기를 원하셨지만, 아직 그들은 그렇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제자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그 앞뒤에 무슨 이야기가 있나 잘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7장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16장 16절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마 16:22-25, 새번역)
베드로가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로 그렇게 고백했을 때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고난당하고 죽임당하고 또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게 못 합니다’(16:22)라고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
그러면서 이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24).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25)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하는 말 중에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영화에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과 약간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약간 다른 것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즉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다가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18장을 보면, 1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야 하는데, 18장에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내가 메시아(그리스도)다.’라고 선포하시며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 같은데, 그때 누가 권력의 제2인자가 되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내가 크다’라고 하면 또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크다’ 하며 싸우고 있어서, 예수님께 “누가 큽니까?” 하고 여쭤본 겁니다. 자기 명예, 자기 영광, 자기 권력, 자기 부유함을 얻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큰지를 미리 정해놓으려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 전에 미리 서열을 정해놓으려고 질문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제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여전히 관심은 나와 내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이것을 주님이 싫어하실까?’라고 물으며 살기보다는, 그냥 내가 좋으면 하고 내가 싫으면 안 하며 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독설을 날리시거나 야단치신 것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없는지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이 아직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되지 않는다고 탄식하십니다.
아직 우리 마음이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데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합니다. 자기주장만 통과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 유익만 구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보다 내가 잘되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아파해도 내가 조금 아픈 게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영광보다 내 영광을 구하는 일에 급급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어려움이 생길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특히 관계의 어려움이 생겼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내가 억울하게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그때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지, 아니면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아니면 보복하려고 뛰어다니는지?
그러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켜 주님은 ‘작은 겨자씨만큼도 되지 않는 믿음’이라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통해서는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을 행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3. 겨자씨만 한 알만 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믿음이 겨자씨 크기까지 이르러서 산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믿음이 커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그것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답을 말씀하시는데, 그 답은 21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없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답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니까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21절에 대한 각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21절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를 보시면 “어떤 사본에, 21절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당시 마태복음을 손으로 복사하면서 가져가 읽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복사하여 가져가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이것을 빼고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어 성경은 그 21절이 빠진 사본을 번역해서 빠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본에는 이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신학교 구약학 교수님을 제가 페이스북(Facebook)에서 팔로우(follow)하는데, 그분이 얼마 전 송구영신예배에 참석하여 올해의 말씀을 뽑았는데 2년 연속 같은 말씀을 받았다고 하시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쓰셨습니다.
그분이 뽑으신 말씀은 사도행전 8장 37절이었는데, 제가 그 구절을 찾아보니 정말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없음.” 사도행전 8:37절도 ‘없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주가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 37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가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이 전도할 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믿고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일은 믿음의 일인데, 그것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계발되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와 금식 같은 것은 그냥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이 신실해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자세,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이 진짜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은 바로 이런 기도와 금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와 금식의 목적은 그냥 내 영성을 더 고상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고자 결단하는 신실함(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늘 기도하시며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늘 깊은 영적 교제를 하셨으며, 그런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산을 옮기는 일, 즉 불가능해 보이는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잡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합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들의 신실함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만난 그 사람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행하실 때 기도의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사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구약에서도 그런 예가 많이 나오는데, 한 예로 엘리야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는 어느 날 아합의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고, 그의 아내 이세벨도 가장 악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악한 왕 부부가 있는 궁으로 엘리야가 들어가 선포합니다. “내 말이 있기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서, 아합과 이세벨이 가져온 우상 숭배, 바알 숭배의 결과를 보았고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마음을 엘리야가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신명기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가나안의 이방 신들을 따르면, 하늘이 닫히고 땅은 붉게 변하고 단단해지고 식물은 죽을 것이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기근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그가 경험했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서 선포한 말씀은 엘리야의 기도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산을 옮기는 일, 불가능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그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간절히 기도했을 때 비가 오지 않았고 또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약 5:17-18).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엘리야를 통해 산을 옮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되어도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십니까? 바로 우리를 통해서 하십니다.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바로 우리를 통해서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던 한 영혼이 “제가 이제 예수님을 제 구주와 주인으로 믿겠습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제 제가 믿고 세례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게 기적이 아닙니까? 어떻게 안 믿던 한 사람이 “이제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사실 저처럼 아기 때부터 교회에 다닌 모태 신앙인이나 몇십 년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그것이 별로 마음에 잘 와닿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삶>공부나 <예수 영접 모임>을 할 때,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관심도 없고 믿지 않았던 분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목장에서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교회에도 오고, 또 <생명의 삶> 공부도 듣다가 “이제 제가 믿겠습니다.”라며 결단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어떻게 저렇게 할까? 참 신기하네. 정말 신기하다. 정말 기적이다.’라고 항상 느낍니다.
바로 그런 일을 이루시는 데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 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통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믿음을 최소한 겨자씨 한 알만큼은 되도록 성장시켜야겠다.’라는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거기에는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삶아감으로써 산을 옮기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데 쓰임 받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