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4GkAEyeGDDg?si=hTf6BdGRHI7R57fx&t=125

 

 

202515일 신년주일예배

신년 및 임직 메시지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

(마가복음 11~11)

 

[들어가는 말]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인 1914년 영국에서는 한 신문에 이런 구인 광고가 실렸습니다.

 

아래와 같은 조건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보수가 아주 적음. 수개월 동안 혹독한 추위 및 어두움과 싸워야 함. 이 일을 하는 동안 끊임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 무사 귀환을 보장하지 못함. 하지만 성공했을 경우 명예와 찬사를 얻게 됨.”

 

이러한 내용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최악의 조건 아니겠습니까? 요즘 말로 ‘3D 직종이 있는데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광고를 보고 지원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이 광고를 보고 무려 5천 명 이상 지원자가 몰렸습니다. 그 바람에 누구를 선택할지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구인 광고는 도대체 누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내보낸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남극 탐험가였던 어니스트 섀클턴 경(Sir Ernest Shackleton)이 남극 탐험대원을 모집한다는 광고였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심지어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었음에도, 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한 것입니까? 그것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새로운 땅을 개척한다는 매력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원한 것을 보면, 인생이 1 + 1 = 2라는 공식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매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   새 시대를 여신 예수님

 

새 땅을 개척하고 새 시대를 연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와 보람을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 시대를 열고 쓰임 받는다는 것은, 남극 개척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엄청난 가치와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을 깨달은 대표적인 분들이 바로 선교사님들입니다. 위험하고 힘든 줄 알면서도, 선교사님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애를 선교 사역에 바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뭐 하러 그런 위험한 데 나가서 무리하나?’라고 할지 몰라도, 이전에 오셨던 선교사님들과 대화하며 교제할 때 놀랍게도 모든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 선교지에서 고생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왜 이 미국에서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계세요? 선교지가 너무 좋습니다. 빨리 오세요.라고 모든 분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 특히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크리스천들이 그저 안전한 곳에만 머물며 살다가 자신의 생애를 마치려고 합니다. 새 시대에 대한 기대도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겠다는 열정도 없이, 오히려 그런 것은 적당히 피해 가며 현실의 안락과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맞설 패기도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열정과 능력도 없으니, 그런 모습으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꿈과 주신 사명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교회가 힘을 합쳐서 하라고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즉 제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모든 민족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믿게 하고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들이 이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그저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의 위기입니다. 보통은 양적으로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물론 열심히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다 보면 그 결과로 숫자가 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숫자나 크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와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땅끝까지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날이 오는 것에 대한 꿈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렇다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중요시할 것은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오게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도 제자로 자라가며 또 그분들이 믿은 후에는 그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가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결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자랑하는 정도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지내며 축복과 성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적인 영성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걸맞은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새 시대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새 시대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이것은 예수님이 개인적,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구약에서 약속하신 그 메시아의 시대가 이제 예수님의 등장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세례 사건이 있기 약 30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이미 이 땅에 와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완벽한 인간이셨던 동시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 앞에서 공적으로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임을 드러내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단강에서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이때부터 새로운 시대, 즉 메시아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 시대를 여시는 순간입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며, 한국말로는 구원자입니다. 물론 직역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지만, 바로 그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의 조건

 

예수님은 어떻게 새 시대를 여시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을 볼 때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자기 자신을 장사 지낸 사람

 

첫째,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으로서 필요한 것이 자기 자신을 장사 지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물속에 잠기셨습니다.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 새 시대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장사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먼저 자아가 죽어야 새 시대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어서는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려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례를 생각할 때 그때 강에 푹 잠기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침례가 맞는다.’라고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를 비롯해서 침례를 행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 세례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꼭 물에 잠길 필요는 없다.’라고 우리 장로교를 비롯한 다수 교단들이 세례를 행합니다. 물을 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맞고 뭐가 틀리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똑같습니다.

 

물론 물에 푹 잠겼다 나오면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의미가 더 크게 와닿을 것 같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의미가 있고 물을 머리 위에 뿌려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미국장로교의 예배 지침에는 놀랍게도 침례를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침례를 못 하는 게 아닙니다. 편의상 이렇게 세례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전에 말씀드렸던 여호수아 때처럼 우기가 되어서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을 때는 함부로 물에 못 들어갑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물에 잠기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요단강이 평소에는 도랑 같이 물이 얕게 흐르기 때문에, 거기에 완전히 잠긴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침례도 괜찮고 세례도 괜찮고 다 괜찮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강에 들어가서 했는데, 일단 하반신은 들어가 있고 위에서 물을 뿌려주는 식으로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방식에 대해서 너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세례나 침례 이야기만 나오면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래전 제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 어떤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했습니다. 그때 옆 사람과 인사하는 시간이 있어서 옆에 계신 목사님에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장로교회 전도사였고 그분은 침례교회 목사였습니다.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디서 목회를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몰라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시나 했더니, 이전에 세례냐 침례냐 하고 토론하다가 다툼으로 번지며 이단옆차기가 나온 경우가 있어서 자기가 되도록 조심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그런 것을 갖고 이단옆차기를 날리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방식을 정말 중요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9)

 

여기 보시면 세례라는 단어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주를 보면 , 또는 침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도 세례라고 해도 되고 침례로 번역해도 괜찮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당연히 침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무슨 회개의 세례를 받겠습니까?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회개하면서 받는 세례가 요한의 세례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9절 맨 앞에 보면 그때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때를 말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나와 있습니다.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4-5)

 

요한은 이렇게 미리 준비된 사람으로서, 2~3절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온 사람,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요한입니다. 이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7-8)

 

이제 곧 새 시대가 오게 될 것이므로, 회개하며 그 새 시대를 준비하라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다다른 어느 날,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 타이밍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앞에 등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로 사람들 앞에 나오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바로 물속에 자신을 담그신 일이었습니다.

 

세례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밥티조(baptizo)’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물에 잠기다혹은 물감을 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요단강에 들어가셨고 물에 잠기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앞으로 어떻게 사역하실지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자신의 삶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인격이 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많이 하는 말 중에 나는 이제 다 죽었다. 다 깨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부흥회에 가서 은혜받고 와서 나는 너무 큰 은혜를 이번에 받았고, 그래서 나는 이제 다 깨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렇게 말은 하지만, 어떤 상황이 탁 벌어지면 죽었다고 해놓고서는, 다 깨졌다고 해놓고서는 또 살아납니다. 그래서 관계가 깨지고 가정이 깨지고 교회가 분열됩니다. 깨진 건 좋은데 그 깨지고 날카로운 조각으로 남을 마구 찌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어떤 거창한 일을 벌이기 전에, 캠페인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아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도 담뱃값이 오를 때 담배를 끊겠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요즘도 물가가 많이 오르고 담뱃값도 올라서 담배를 이번 기회에 끊어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배를 어떻게 끊습니까? 담배를 손에 잡고 담배를 끊어야지, 담배를 끊어야지그런다고 끊어집니까? 담배를 들지 않고도 담배를 끊어야지, 끊어야지, 끊어야지라고 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담배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담배를 백 번도 더 끊을 수 있다.” 무슨 말입니까? 백 번 끊었다가 도로 백 번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끊고서 계속 안 피우는 게 어렵지, 끊었다 다시 피우는 건 쉽습니다. 그러니 100번도 더 끊을 수 있는 겁니다.

 

어떤 나쁜 습관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좋은 습관을 들이면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자아도 자꾸 죽여야지, 죽여야지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돼, 내가 죽어야 돼라고 하면 자기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해야 합니다. 은혜로 그런 것을 덮는 것입니다. 자아, 옛사람을 죽이려면 자아를 죽여야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닮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그것이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자아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아가 펄펄 살아서 성질을 부리며 신경질 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닮으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삶> 공부에도 나오고 올해 ‘333기도로 부탁드린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딱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순종과 섬김입니다.

 

삶 공부를 하는 분들에게만 제가 특별히 극비 사항을 알려 드리는데, 그것은 이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뭐가 된다? 그렇습니다. ‘잡종이 됩니다. 또 섬김을 안 하면 뭐가 된다? 튀김이 됩니다. 세상의 더러운 물에 튀겨집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것은, 직장에서 윗사람이 나에게 이것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 ,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르신이 저것 좀 집어주시겠어요?”라고 하면 알겠습니다.”라고 해드리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당연히 순종해야 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으로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나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순종할 때 예수님을 닮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또는 복종이라는 것은 obedience라기보다 submission입니다. sub이라는 것은 밑으로 내려가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밑으로 내려가 미션을 행하는 것입니다. , 남의 밑으로 들어가서 자발적으로 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셨지만 가장 밑으로 내려오셔서 자발적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사건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뒤에 있다고 생각된 사람이 와서 이것 좀 해요.”라고 할 때 속에서 욱하고 네 까짓 게 뭔데 나에게 시켜?’라는 마음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아니지, 못 해줄 이유가 뭐가 있나. 그냥 내가 해주지.’라고 하면서 해줄 때, 예수님을 닮습니다.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연히 섬길 사람을 섬길 때 예수님을 닮는 게 아니라, 내가 섬길 필요도 없는 사람, 섬기기 싫은 사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섬길 때 예수님을 닮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있으면서 예수님을 닮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섬길 필요가 전혀 없으시고 섬김을 받아야 하실 분이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순종하고 섬길 때 예수님을 닮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자아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새 시대를 위한 일꾼이 됩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텐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섬과 육지를 다니던 페리선에 불이 났습니다.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급히 헬기가 날아와서 밧줄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밧줄에는 한 번에 열 명까지만 매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니까 열한 명이 매달렸습니다. 열 명은 남자이고 한 명만 여자였습니다. 이것을 본 조종사가 다급히 마이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중 한 명은 밧줄을 놓아야 합니다. 열 명까지 밖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밧줄을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바다에 떨어져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다 보다 못한 여성이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고생만 하며 살아 왔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희생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들이 너무 기뻐서 와 하고 손을 들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다가 다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죽으려 했던 여자만 살고, 살려고 했던 남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것이 역설적인 신앙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나를 포기할 때 오히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비우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릇을 놓고 빗물을 받을 때 그 안에 더러운 것이 차 있으면 새로 깨끗한 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속에 든 것을 깨끗이 비워야 새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깨짐과 비움을 통해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

 

둘째로,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이 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물속에 자기 자신을 담그고 또 물에서 올라오신 것처럼, 우리도 자아가 죽고 다시 올라올 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0)

 

여기 보면 하늘이 갈라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새 시대가 왔다는 상징입니다. 지금까지 어두움과 무기력함의 시대를 살아왔던 유대인들에게 드디어 새 소망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때 무엇이 임했습니까? 바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때는 비둘기같이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메시아(그리스도) 시대를 여는 열쇠이며 결정적인 사인(sign)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성령의 능력을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에는 분명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능력으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능력이 나타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분열이 사라지고 가정과 교회가 회복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성령님의 능력보다 세상의 방식으로 사역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원리가 교회 성장의 원리인 것처럼 들어오고,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그러한 모습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들이 조금 부족해 보여도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필요합니다. 거룩함과 진실함을 보여줄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이라고 해서 갑자기 무슨 힘이 강해지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나 안 받았나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성령으로 충만한가 아닌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진실하게 말과 행동을 하는가, 내 생각이 바른가, 그것을 점검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

 

셋째로,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새 시대를 위한 일꾼, 새 시대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칭찬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사역하신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을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으셨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2:24-25).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작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

 

여기서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메시이(구원자)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것을 분명하게 해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대개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달려갈 때가 많습니다. 남들이 박수를 쳐주고 칭찬해 주면 기뻐하며 웃고, 조금만 뭐라고 하면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하느냐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의 칭찬은 얼마든지 야유로 금방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겉옷을 땅에 깔며 호산나를 외쳤는데, 그러던 사람들이 바로 며칠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박수갈채를 바라보면 위험합니다. 인기에 속으면 안 되겠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뜻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영어권 담당 부목사로 사역할 때 종종 한국어 예배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본당을 나가면서 악수할 때 몇몇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은 진짜 궁금해서 어떤 집사님이 오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며 가시려는 것을 잠깐만요. 무엇에 은혜받으신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진짜 궁금해서 무엇에 은혜를 받았는지 알고 싶어 그랬더니 , , 그게... 제가 좀 바빠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분을 보면서 저는 , 내가 실수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임한 후 초기에 또 똑같이 오늘 무엇에 은혜받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분도 역시 황급히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받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진짜 그럴 수도 있지만, 격려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진짜로 당신의 설교가 최고입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제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칭찬을 받으면 그게 진짜인 줄 알고 좋아할 게 아니라 , 격려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별로 잘못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진짜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실망하게 되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도 보십시오. “은혜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좋다. 나를 칭찬해 주네. 내가 잘했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주에는 그분이 그냥 지나간다면 오늘은 내가 뭔가 잘못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기분이 확 다운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한 분, 위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칭찬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겠다는 것에는 실망할 때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실망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때 우리를 평가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평가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칭찬과 존경을 다 받아도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작년에도 우리 중 두 분이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 중에도 몇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또 그 전 해에도 돌아가신 분들이 계십니다. 또 오래전에도 몇 분이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한 분이 계십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입원해 계신 그분을 방문했는데, 침대에서 계속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마취 상태에서 눈을 감은 채로 힘겹게 숨쉬고 계셨는데 제가 집사님, 예수님을 믿으시죠?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으시죠?”라고 했더니, 계속 눈을 감고 마취 상태에 계시던 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시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는 겁니다. 그때 정말 놀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에도 이번에는 꼭 교회 갈 거예요. 그동안 아파서 못 갔는데 이번에는 꼭 갈 거예요.”라고 하셨는데, 결국 그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래도 여기보다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칭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몰라주고 공격한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면 충분합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실패했다고 조롱해도 주님 한 분을 기쁘시게 하면 성공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며 달려갈 때, 우리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는 새 시대를 위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 시대에 새로운 일꾼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하나님 나라를 향해 새롭게 달려갈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죽이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만을 위해 달려갈 그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 우리들입니다. 오늘 임직하신 직분자들을 비롯해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 11:8-16) - 믿음 11 (02/09/2025) admin_p 2025.02.09 54
510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수 24:14-28) - 믿음 10 (02/02/2025) admin_p 2025.02.02 111
509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누리는 복된 인생 (수 24:1-13) - 믿음 9 (01/26/2025) admin_p 2025.01.26 126
508 말씀 x (믿음+순종) = ? (수 23:1-16) - 믿음 8 (01/29/2025) admin_p 2025.01.19 131
507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 (마 17:14-20) - 믿음 7 (01/12/2025) admin_p 2025.01.12 177
» 새 시대를 위한 새 일꾼 (막 1:1-11) - 신년 및 임직 메시지 (01/05/2025) admin_p 2025.01.05 179
505 지혜로운 사람답게 세월을 아끼라 (엡 5:15-21) - 믿음 6 (12/29/2024) admin_p 2024.12.29 220
504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밝게 빛난 별 (마 2:1-12) - 성탄절 메시지 (12/22/2024) admin_p 2024.12.22 150
503 영원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고전 15:50-58) - 믿음 5 (12/15/2024) admin_p 2024.12.15 275
502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보는 믿음의 사람 (히 11:1-7) - 믿음 4 (12/08/2024) admin_p 2024.12.09 298
501 주님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는 믿음 (마 24:35-44) - 믿음 3 (12/01/2024) admin_p 2024.12.01 345
500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골 3:15-17) - 추수감사절 메시지 (11/24/2024) admin_p 2024.11.24 346
499 기적을 불러온 믿음의 순종 (수 3:7-17) - 믿음 2 (11/17/2024) admin_p 2024.11.17 504
498 믿음이란 무엇인가 (롬 4:13-25) - 믿음 1 (11/10/2024) admin_p 2024.11.10 657
497 구원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눅 19:1-10) - 예수와의 만남 14/최종 (11/03/2024) admin_p 2024.11.03 230
496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 18:35-43) - 예수와의 만남 13 (10/27/2024) admin_p 2024.10.27 258
495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눅 18:1-27) - 예수와의 만남 12 (10/20/2024) admin_p 2024.10.20 364
494 주님을 정말로 따른다는 것은 (눅 9:57-62) - 예수와의 만남 11 (10/13/2024) admin_p 2024.10.13 554
493 불같은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 (눅 9:49-56) - 예수와의 만남 10 (10/06/2024) admin_p 2024.10.06 349
492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49-56) - 예수와의 만남 9 (09/29/2024) admin_p 2024.09.29 561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