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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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2TmV4JBKJYA?si=rK4c6UTmycC0wDuw&t=81

 

 

20241229일 주일예배

믿음 6

지혜로운 사람답게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5~21)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24년의 52번째 주일이자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 이제 새해구나하며 시간이 많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올해도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렇게 연말이 되면 항상 느끼는 게 있습니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듯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에도 출생이 있었듯 죽음이 있습니다. 역사도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있었듯 세상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들뜬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특히 요즘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이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요즘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길어야 100년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악한 일에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이 매년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생생하게 와 닿습니다.

 

어제 밤에 인터넷 신문을 검색했더니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한국시간으로 주일 아침 9시경, 그러니까 이곳 시간으로는 저녁 7시경에 전라남도 무안(목포 약간 북쪽)이라는 곳의 공항에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 거기 탑승했던 승무원과 승객 181명 중 179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입니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 35일 정도 일정으로 태국 방콕에 여행을 갔다가 방콕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원인을 찾고 있고, 대책을 마련하며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있는데, 지금은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여기 콜럼버스 공항이 있는데 내 가족이 멕시코 캔쿤(Cancun) 휴양지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놀러 갔다가 오늘 아침 9시에 돌아온다고 해보십시오. 그래서 9시에 픽업하러 공항에 나갔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뻥 터지더니 그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 중 두 명 빼고 다 죽었다면,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정말 너무나 충격적이고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유족 입장으로는 가족을 데리러 왔는데 시신을 수습해서 가게 됐으니까,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처음에는 맨 꼬리 쪽에 있던 승무원 두 명이 구조되었고, 20명이 죽었다고 했다가, 조금 후 30명 죽었다고 하다가, 70명이라고 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나머지 179명 다 사망했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 충격적인 일입니다.

 

누군가가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영상을 찍은 것을 보니까, 비행기가 땅에 동체 착륙을 했는데 랜딩 기어가 안 나오는 바람에 동체 착륙을 한 것입니다. 동체 착륙을 한 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활주로를 쭉 미끄러져 갔고 그때까지는 사람들이 다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항 끝에 있는 콘크리트 외벽에 쾅 부딪히면서 그대로 폭파되고 불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피해가 컸다고 일단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방콕 휴양지에 놀러 갔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잘 놀고 그 비행기로 돌아오던 사람 중에 지금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빨리 이것이 잘 수습되고, 또 유족들에게 주님의 큰 위로가 임하기를 같이 기도합니다.

 

인생이 이렇게 짧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혜롭게 시간을 사용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도 시간이 짧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중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입니까? 이 세상이 끝나면 같이 끝나는 것 말고, 영원히 남을 가치를 지닌 일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그 아까운 시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유익하지 않은 일이나 악한 일에 낭비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줍니다.

 

 

1.   세월을 아끼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5)

 

먼저 어떻게 행할지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하여 자세히 주의하라고 합니다. 대충대충 하거나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고, 자세히 살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기록했다고 해서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바리새인들의 치밀함과 철저함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인의 종파 중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그중에도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파 석학의 문하에 있던 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22:3)라고 합니다. 원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이 자세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 치밀함과 정확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지, 그들의 치밀함과 철저함을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교훈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그것은 본받지 않아야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자체는 굉장히 옳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 데에 그런 치밀함과 정확함과 철저함을 가지고 하라는 말입니까? 지혜롭게 행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그 철저함과 정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자세하게 또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세상은 이리와도 같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양처럼 연약합니다. 그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을 주고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불의한 것이라도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 갑니다. 알면서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하며 나아가려면 특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열심과 정성만 가지고는 이 시대를 이겨 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뱀이라는 단어를 들어서까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먼저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삶,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둘기의 순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지성이 필수적이며, 이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순결 또는 순결한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2.   시간을 구원하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6)

 

15~16절을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시간을 사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자 같이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십시오. 왜냐하면 날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할 때 아끼다라는 동사는 사다’(purchase)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속량또는 구속’(redeem)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는 노예를 사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 속량인데, 그런 것처럼 시간을 사서 속량하라, 구속하라, 구원하라는 명령입니다.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날들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악한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여 악해져 있습니다. ‘시간을 구속(구원)하라는 것은 이 악한 날들을 다시 사서 주님의 것을 만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월을 아낀다는 말은, 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을 사라는 것은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악한 시대 가운데 악해진 시간을 다시 사들여 주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기회나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을 가리키는 카이로스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어로 ‘killing time’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할 일이 없으니까 그냥 시간을 때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아무렇게 하지 말고,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하루 24시간이며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천재적인 사람, 엄청난 재벌이나 부자, 또 대통령 같은 사람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나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만한 사람에게도 하루 24시간은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릅니다. 주인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코로노스는 누구에게자 하루 24시간이 똑같지만, 카이로스는 사람마다 길이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의미 있게 사는 시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긴 카이로스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짧은 카이로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러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인생을 제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하루 24시간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기회로 사서, 구속해서, 속량해서, 구원해서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허비되고 흘러가 버리니까, 그것을 붙들어 구원하고 바꿔서 의미 있는 시간을 활용하라는 겁니다. 그 시간을 산 제사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제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인생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혹시 성공하고 엄청나게 돈을 벌고 엄청나게 높이 올라가더라도 결코 제대로 산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보실 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 너 참 성공했구나. 잘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네가 성공한 건 좋은데 내가 살라고 한 대로는 안 살았네.’라고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 제대로 산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어리석은 것입니까?

 

혹시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아유, 우리 애가 이렇게 순해 빠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지 모르겠네.” 아니면 얘는 아주 영악해서 제대로 살겠네.” 순해 빠져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걱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살벌한 세상을 살다 보니 자녀가 약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른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정말로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약삭빠르지 못한 것입니까? 줄을 잘 서지 못하면 그게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약삭빠른 것은 잠시는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결국은 망하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시각, 영원의 차원으로 보면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나와 있습니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부러 악을 일으키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악함도 선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바로 그런 뜻을 찾아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에 따라서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 알면서도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이건 하면 안 돼.’라고 하는데, 자꾸 마음이 끌려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 사실 어쩔 수 없이 한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말로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라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것들이 다 논리에 따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자동차를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 사려고 하면 미리 얼마나 연구하고 갑니까? ‘내가 이런 차를 사겠다.’라고 생각하며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한참 봅니다.

 

그러다 막상 살 때가 되면 가서 정말 그 차 그대로 사 오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 가서 보면 세일즈하는 사람들이 참 머리가 좋습니다. ‘나는 이런 차를 사러 왔다.’라고 하면 알았다고 하면서 , 조금 전에 팔렸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일단 내가 말한 차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이것을 하나 더 붙이면 그렇게 좋고, 급을 조금 높이면 또 이게 좋고...’라고 하며 자꾸 좋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나는 분명히 저것을 사러 왔는데 다른 것들을 보니까 훨씬 좋아 보이고 마음이 동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자기도 모르게 더 비싼 것을 삽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게 되면, 항상 그런 건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 자신의 뜻, 내가 원하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결정들을 내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죽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실 사람은 똑똑합니다. 짐승에 비해서 얼마나 똑똑합니까? 인간의 지성으로 이루어낸 학문의 업적을 보면 그 깊이가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정말 놀랍습니다. 또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곳에 가 보면 그 지어 올린 건물들이 아름답고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일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차원과 하나님의 차원이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분들이 있는데, 박사를 영어로 Ph.D(Doctor of Philosophy)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스갯소리로 Permanent Head Damage라고 합니다. ‘영원히 머리가 상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닙니다. 박사라고 해도 자기가 연구한 분야에서 박사인 것이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분야에서도 자기가 깊이 파고 들어가 연구한 그 부분에서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지, 자기 분야라고 전부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철학 박사라면 그 분야에서는 잘 알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끔 뉴스 같은 데 보면 의학박사인 의사가 나왔을 때, 또는 과학 계통 박사가 나왔을 때 요즘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그러는데, 의학박사나 과학 박사는 의학이나 과학에 대해서는 알지만 다 알진 못합니다. 사회가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는 아닙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를 천재라고 또는 수재라고 치켜올려 주면 우쭐해서 자기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런다면, 그것은 교만이며 동시에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자기 분야도 다 모르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크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서 그것을 우리가 볼 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을 신학 용어로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알려주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시해 주신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여주시며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구속하고 짧은 인생을 보람차고 가치 있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1-2)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일단 접고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도이고 말씀 묵상이고 예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떠난 성경 공부는 위험합니다. 이단들이 다 그렇게 합니다. ‘여기 좋은 성경 공부가 있는데 해보시겠어요?’ 하며 밖에서 합니다. 물론 학생 선교 단체 같은 데서 건전하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단들이 따로 자기들끼리 교회 밖에 모여서 하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문제가 많으니까 나갈 필요가 없고 혼자 믿겠다고 하며 성경을 읽다가 잘못되어 이단이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혼자 한다고 그러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영적 분별력이 없는데도 자기주장만 내세우게 되면 잘못된 길로 빠집니다자신의 것을 버릴 때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고, 자기 뜻을 접을 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몸을 드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리는(바치는) , 바칠 헌()’ 자에 몸 신()’ , 바로 이것이 헌신입니다.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헌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계속 찾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그것도 물론 헌신이지만,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데 내가 열심히 하겠다고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끊임없이 찾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헌신입니다.

 

 

3.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

 

이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굉장히 걸림돌이 되고 제일 싫어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또 제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목사님,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뭡니까?”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마시는 건 괜찮다는 게 아닙니까? 취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술을 마신다고 무조건 죄라는 건 아니지만, 이것을 아십니까?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다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사실은 취한 건데 자기는 안 취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경계가 애매합니다. 하지만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여기서 술 이야기를 합니까? 성령에 취한 것, 즉 성령 충마한 것과 술에 취한 것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얼마 후 오순절이 되었을 때 120명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님이 내려오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보고서 낮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데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베드로가 일어나 잘 설명을 한 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종교들은 환각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의 음료수 박카스가 있는데 원래 로마 신화에서 박카스가 술의 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같은 신이 디오니소스입니다. 이 디오니소스 종교가 있었는데, 그 신도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향연을 즐겼습니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이 그들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술 같은 물질의 주입이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도록 해주십니다. 이 에베소서에서는 특별히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받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일을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심령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고린도전서 2장에 죽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안에 계십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성령님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혼자 공부한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성령님을 통해 계시해 주실 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술에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술 외에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특히 젊은이들뿐 아니라 40대나 50대 중에도 게임에 중독돼서 몇 시간씩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령 충만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게임 자체가 죄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너무 심취해서 다른 것들을 못 하고 성령 충만과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면 죄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에 신경 쓰다가 정작 성령 충만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니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모르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되니까 때가 악한 데도 세월을 아끼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사건은 딱 한 번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었을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단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는 명령형 동사는 헬라어에서 계속성 동사입니다. , 계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계속해서 받으라는 것이며,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계속하여 받으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다섯 개의 분사형으로 여기 나와 있습니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9~21)

 

이 다섯 가지 중에 노래하며 찬송하며’(19)를 하나로 묶어서 보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 충만을 계속 받으며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9).

 

성도의 교제와 사귐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세워주는 일들을 말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화답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찬송을 부르고 혼자 잘 믿고 혼자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화답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필요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혼자서도 예배할 수 있지만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모여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을 계속 받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해야 합니다(19).

 

찬양이 곧 노래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래로 하는 찬양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찬양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 높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을 계속해서 받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20).

 

감사가 곧 믿음이며 예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불평 불만만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그게 믿음이 좋은 거겠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곧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영혼이 죽기 시작합니다.

 

물론 믿지는 않으면서 감사만 한다면 안 되겠지만, 정말 믿은 사람이라면 감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불평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믿음이 떠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또 미련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상실한 대로 내버려두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양심도 잃어버리고 윤리도 잃어버리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아주 좋은 비결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넷째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지속하려면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21).

 

곧 서로 사랑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어서 말을 듣고 따르는 맹종이나 굴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동등한 입장이지만 상대방의 밑으로 자원해서 들어가 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Submission, 즉 밑으로 내려가 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서로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복종은 원래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노예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노예처럼 되어 서로 섬겨주라는 말씀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 그렇게 서로를 섬겨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종이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써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월을 아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나가는 말]

 

두 주 전에 종말론적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시험 시간이 다 되었거나 마감 시간이 다가왔을 때, 학생이 공부하든, 직장에서 일하든, 사업체를 운영하든,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 마감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최선을 다해서 그 시간 전까지 마무리하고 끝내는 자세가 바로 종말론적인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주일 아침이 되어서 교회에 오기 전에 예능을 보고 뉴스를 보고 그럴 것 같으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할 것을 계속 보다가 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지금 끝내야 하는 일의 마감이 다가왔는데 엉뚱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자세가 아닙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종말론적인 자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밤 1159분까지 끝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내가 좋아하는 운동 경기 중계나 보고 놀러 나가고 인터넷 방송이나 본다면 그것은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다 끝냈더라도 보고 또 보면서 실수가 없는지 몇 번씩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아침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는 것을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직장이나 학교에 갈 때 후다닥 나가며 아침도 못 먹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에 맞추어서 도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괜찮지만, 정해진 시간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침에 새벽기도 끝나고 보면 앞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려고 차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나오기가 힘듭니다. 출근하거나 수업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해도, 아무리 평소에 운동을 좋아해도, 도착해야 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그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목적지까지 달려갑니다.

 

바로 그런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어도, 아무리 해야 하는 다른 일이 있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사무실에 나가야 하는 사람이 중간에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TV 뉴스나 보고 있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사무실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 그가 할 일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다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를 앞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한가하고 나태하게 사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내가 원하는 아무 방식으로나 살 수 없습니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실 때, 이민을 왔든, 유학을 왔든, 주재원으로 왔든, 또 다른 이유로 왔든, 이제 미국에 갈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곧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 있던 달러를 다 원화로 바꾸고, 땅을 보러 다니고, 아파트나 집이나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그런데 혹시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가서 살 곳이 어떤 곳인지, 애들이 다닐 학교나 학군은 어떠한지, 동네는 어떠한지, 그 환경은 어떠한지, 그런 것을 다 조사해 보고 또 갖고 있던 원화를 달러로 바꿀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준비는 하지 않고 전부 이 세상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에 정말 올인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만 하며 지낼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치가 있는 일을 지금 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다 관두고 그것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와 믿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인생,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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