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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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DgMyYihydnk?si=Dlovrn2ZpnRoMLmH&t=109

 

 

20241215일 주일예배

믿음 5

영원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고린도전서 1550~58)

 

[들어가는 말]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하고 소셜 네트워크(SNS)도 발달하여, 이메일이나 문자로 금방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저도 요즘은 종이보다 파일로 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종이로 된 편지나 카드를 보내거나 받을 때 색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오래전에는 전부 편지나 카드로 보냈고, 오래전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학보를 주고받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학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편지나 쪽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편지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기 말은 안 적고 시를 적는 경우였습니다. 자기 할 말은 안 적고 시를 적어 보내면 그건 종이 낭비이고 전부 쓸데없다고 생각하며 시를 별로 읽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자분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특히 남자들은 사추기라는 게 있습니다. 중년이 넘어가면서 갑자기 남편이 음악을 듣는데 가만히 보니까 슬픈 음악을 들으며 혼자 무게를 잡습니다. 또 갑자기 악기를 새로 배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은 드라마 같은 건 보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식으로 40대 중후반이 넘어가면서 이전에 안 하던 짓을 한다면 바로 사추기가 온 겁니다. 청소년은 사춘기가 있지만, 중년은 사추기가 있습니다저도 그것을 지나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시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와닿기 시작하는 겁니다. 특히 요즘 눈도 오고 날씨도 추워서 겨울에 대한 시로 뭐가 있는지 찾아보니까, 그중 오래전에 마음에 와닿아서 적어놓은 시가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백창우

 

     겨울이 오기 전에

     얘야,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몇 장의 편지를 쓰자

     찬물에 머리를 감고

     겨울을 나는 법을 이야기 하자

     가난한 시인의 새벽 노래 하나쯤 떠올리고

     눅눅한 가슴에 꽃씨를 심자

 

     이제 숨을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 보자

     큰 것만을 그리느라

     소중한 작은 것들을 잃어온 건 아닌지

 

     길은 길과 이어져 서로 만나고

     작은 것들의 바로 곁에 큰 것이 서 있는데

     우린 바보 같이 먼 데만 바라봤어

 

     사람 하나를 만나는 일이 바로

     온 세상을 만나는 일인데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린 참 멍청했어

 

     얘야, 오늘은 우리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자

     겨울이 오기 전에

 

특히 유학을 와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청년들, 또 부모님이 한국이나 멀리 계신 분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지금 이미 왔지만) 빨리 카드나 편지를 보내 드리시길 바랍니다. 저처럼 편지나 카드를 보내 드리고 싶어도 받을 부모님이 안 계신 때가 언제 올는지 모릅니다.

 

시인은 지금 겨울이 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큰 것만 잡으려고 달리다가 작은 것을 놓치고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소중한 것에 마음을 두고서 살자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을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운 사람들에게 작은 편지라도 써서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1.   떠날 준비를 하면서 쓴 편지

 

놀랍게도 바로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쓰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기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인데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바울은 사도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언제나 마지막 날을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며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사역이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별명이 있는데 소위 부활 장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이 강하게 외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은 지나가고 썩어버린다라는 사실입니다.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0~52)

 

이것은 사실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장례, 즉 천국환송예배 때 제가 많이 사용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15장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다가, 그 결론 부분인 여기서 무엇을 말합니까? 썩을 것, 즉 유한한 것이 있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고 남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잡으려고 따라다녔던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잊고 사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거나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 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그런 것들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합니까? 지금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언론도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있고, 언론도 수사에 대한 것들이나 또 여러 가지 뉴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또 각 정치인이나 정당마다 최대한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되도록 굉장히 애를 쓰며 거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20년 정도만 지나면 지금 하는 일들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었을까?

 

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것들이 다 쓸데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중 정말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대개 다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게 될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있고,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함께할 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다가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하면서 지나가면 별 의미 없는 것, 그냥 기억에만 남아 있는 그런 것, 그냥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해 줄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을 붙잡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래전 수요예배 때 같이 동영상을 본 적도 있고 <새로운 삶> 공부에도 나오는 순교자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겨우 29세의 나이에 에콰도르의 식인종인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갔다가 동료 선교사 4명과 함께 공격받아 모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총이 있었는데 발사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하면서 보니까 총이 있는데 발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 전에 이미 자기 자녀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물어봤습니다. “아빠, 혹시 식인종에게 공격받으면 이 총을 사용해서 보호해야죠?” 그러자 아빠는 말했습니다. “총을 가지고는 가지만 쏘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가지만, 저 사람들은 내가 총을 쏴서 죽으면 지옥에 가거든.” 그들은 그런 마음이었는지, 전혀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짐 엘리엇이 졸업한 시카고 근교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가 있는데, 그는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 시절부터 적었던 글과 일기들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깜짝 놀랄 만한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들을 쓸 때 짐 엘리엇이 겨우 19세의 대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글들을 썼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는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조롱하고 손가락질합니다. “아니, 왜 저렇게 쓸데없이 죽었냐?” 그런데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내어준다면, 그것은 바보가 아니고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날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붙들고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그 다마스쿠스를 지난주 시리아 반군이 점령하고 정부가 무너지며 난리가 났습니다. 2천 년 전 바로 그 길을 가다가 원래 사울이라고 불리던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장 귀한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추구해 왔던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 좋은 것들이었지만 사실은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 영원히 자기와 함께 해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것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추구하게 된 것을 가리켜 그는 오늘 본문에서 각각 썩을 것썩지 아니할 것으로 표현합니다.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3-54)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두 가지가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안타깝지만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모두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 강하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냥 봐서는 차이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늘과 땅 차이보다 큽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또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이 둘의 차이는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종말론적 신앙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우리는 대부분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둘, 즉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의 차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짐 엘리엇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볼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썩을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하면 썩을 것을 위해 썩지 않을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만 믿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예수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며, 또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이 많아도 진짜 최고의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것을 놓아두고 그냥 적당히 좋은 것을 선택한다면 그게 얼마나 바보입니까?

 

찬송가 85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연애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애인을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애인의 얼굴을 볼 때야 얼마나 좋으랴.’ 생각만 해도 좋은데 진짜 만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조금 있으면 또 싸우고 티격태격하며 별로 안 좋은 것이 반복되긴 합니다. 그래도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애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생각만 해도 좋고 만나면 더 좋은 분이십니다. 그 주님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는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며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영광과 감격을 알아야 오늘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과 감격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 패배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원하신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감격을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일’, 즉 주님의 날입니다. 그 감격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일을 주셨고 예배를 주셨습니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그것을 잊지 말기 위해 하라고 하신 것이 제사였습니다. ,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롭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주시고 예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이 되거나 짐처럼 느껴지십니까? 저도 모태 신앙이지만, 교회를 어릴 때부터 오래 다닌 사람들일수록 사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서 교회에 다니는 경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그냥 어릴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다니거나, 또 오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를 빠지면 뭔가 찝찝하고 뭔가 벌 받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되거나 짐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음번에 <새로운 삶>을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하는 것은 결코 무슨 부담이거나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대로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또 예배는, 주님을 만나 누리게 될 그 감격과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해주시는 은혜의 사건이며 선물입니다. 토요일 밤쯤 되면 아휴, 내일 또 교회 가야 돼?’라고 하는 게 아니라, ‘, 내일 또 교회를 가서 함께 예배드리게 되니 기쁘다.’라고 되어야 사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회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미리 맛보기(foretaste)’입니다. 미리 맛을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미리 맛봅니까? 영원한 천국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물론 우리가 혼자서도 예배를 드리지만, 왜 이렇게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 가면 혼자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요즘 큐티 본문이 요한계시록인데, 거기에 보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혼자 따로 가서 예배드리는 게 아닙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중 한 장면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옵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9-10)

 

여기서 가사를 따서 지은 곡이 <비전>이라는 곡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따와서 가사를 지었습니다천국과 지옥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다 같이 모여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찬양하고 경배하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 그것이 천국입니다.

 

지옥은 무엇이겠습니까? 절대 함께하는 게 없습니다. 다 혼자 떨어져 있습니다. 지옥에 가면 죄인들이 득실득실하고 거기서 다 같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물론 죄인들로 가득한데, 모두 각자 따로 있습니다. 같이 모여서 괴로워하는 게 아닙니다. 따로따로 있습니다. 그게 지옥의 특징입니다.

 

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흰옷을 입은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성도들과 함께 여기서 모여 미리 맛보는 것이 공 예배입니다.

 

그것을 함께 맛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미리 맛보라고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혼자 잘 믿는 신앙생활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부활 장이고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재림에 관하여 알려줍니다. 생명의 시작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생명의 끝을 말해줍니다. 이 대강절의 메시지도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해 선포하는 동시에, 두 번째 오심인 재림을 선포합니다. 시작을 말씀하면서 마지막을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소위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특징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곡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것과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고 선포하는데, 두 번째 곡이 마라나타였습니다. 마라나타는 찬양곡 제목만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우리가 외치는 선포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에 어떤 VIP가 예배 때 우리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예배가 끝나고 나서 아까 불렀던 곡에서 미리나타가 뭐예요?”라고 물어봤다는 겁니다. ‘마라나타인데 헷갈려서 미리나타라고 잘못 기억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라나타라고 할 때 겉으로는 다 아는 척(?)했지만 사실은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아는 척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원래 아람어인데, 발음과 의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란 아타’(Maran atha)라고 하면 이 말은 주님이 오셨습니다’(The Lord has come)라는 뜻이고, ‘마라나 타’(Marana tha)라고 하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아까 우리가 불렀던 가사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예배에는 바로 이런 두 가지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란 아타도 있고 마라나 타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또한 앞으로 다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며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것이 대강절 정신인데, 바로 이 정신이 대강절 뿐 아니라 매번 예배 때마다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 두 시점 사이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예수님이 오셨고 이제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했고 또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좋다고 할 때,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 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시작된 것처럼 마지막이 있고, 또 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을 정말 아는 사람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으며, 늘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3.   영원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

 

신앙생활은 지금 이 땅에서 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그날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동시에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썩지 아니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또한 새 생명을 허락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훈련과 양육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이 있고 이 세상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정말로 알고 믿으며 훈련할 때 가능해집니다.

 

제가 조금 전에 우리의 예배는 종말론적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자세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이라고 하면 좀 어려울 수 있으므로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여기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학창 시절 때 시험을 치르던 생각을 해보십시오. 시험을 치를 때 시간이 다 되어 당일치기, 분치기, 초치기를 우리 모두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해본 사람은 종말론적 자세가 뭔지를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도 프로젝트를 하는데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어서 그때까지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종말론적 자세가 뭔지를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세탁소 사업을 하는 분은 고객과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옷을 세탁해서 돌려주기 위해 애써보았다면, 식당을 운영하는 분은 몇 분 안에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거나, 사업을 하는 분은 약속된 날짜까지 자금을 마련해서 갚아본 경험이 있다면, 종말론적 태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설교자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여러 과목을 들었는데, 그중에 설교학이 있었습니다. 노 교수님이 은퇴하시기 직전 저희 학년을 마지막으로 가르치셨는데,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다른 과목들은 무슨 사정이 생기거나 뭔가 어려움이 생기거나 과제 내용이 조금 부족하면, 교수님을 미리 찾아가서 금요일까지 내라고 하셨는데, 그날까지는 힘들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내겠습니다.”라고 요청할 때 대부분 오케이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학 교수님은 과제를 금요일까지 내야 되는데 월요일까지 내게 해달라고 하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지 수업 시간 때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다 목사가 될 텐데, 목사가 되어서 예배 시간이 되었다고 합시다. 예배 시간이 되어 성도들이 모였고 여러분이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시작하면서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설교 준비가 다 안 끝났기 때문에, 지금이 11시인데 이따 12시에 다시오세요.’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절대 연기를 해주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다 괴로워하면서도 거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지금 예배드리러 1115분에 오셨는데 제가 아휴, 여러분, 저의 설교 준비가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따 1시에 다시 오세요.’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처럼 끝내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그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여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끝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는 것입니다.

 

일할 시간, 공부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면 쉬거나 여유 있게 하거나 놀게 될 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는 날이 다음에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대충하거나 슬쩍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입니다. 그런데 딴짓하거나 빠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 날입니다. 그런데 대충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섬기는 마지막 봉사입니다. 그런데 핑계 대고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전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안 하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내 자녀를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내 말을 안 들었다고 마구 야단치고 화를 내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저 형제나 자매와 함께 교제할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들거나 밉다고 해서 피해버리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서 감당해야 할 일을 대충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자세이며, 그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6:34)라고 하셨습니다. 하루하루 감당하라는 이야기인데, 다시 말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하고 또 오늘 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음에 하지 말고 오늘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채 넘어가지 말고 오늘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또한 바로 그것이 58절에서 말씀하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늘 우리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기에만 집중하며 살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시간만 내면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만남을 미룰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처럼 느슨하게 주님의 일을 할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하지.’라고 할 게 아닙니다. 다음이 없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무 때나가 아니라 항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에 대충 하지 말고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지난 1130일에 있었던 The Game에서 오하이오 스테이트(Ohio State)가 미시간(Michigan)에게 졌습니다. 4년인가를 연속으로 졌는데, 올해는 사실 오하이오 스테이트 랭킹이 당시 전국 2위였고, 그때까지는 1위 팀에게 원정을 가서 1점 차로 딱 한 번 진 것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미시간은 작년에 전국에서 우승한 팀이지만, 올해는 그때까지 65패였고 랭킹에도 못 들어가던 약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오하이오 스테이트 팀이 실력 발휘를 못 하고 무기력하게 하다가 그냥 졌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대로 해서 졌기 때문에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그날만큼은 실력에서 뒤져서 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실력에서 뒤져서 지면 괜찮지만, 경기에서 심판이 최악에 오심을 해서 지면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닙니까? 이전에 올림픽을 보면 펜싱이나 복싱에서 한국 선수가 오심으로 인하여 패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나라 전체가 들끓면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무너지고 내가 지면 나도 속이 상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도 속상해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억울하게 당해서 질 때 나도 속상하지만 주님께서 나와 함께 속상해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실수로 무너져도 속상해하십니다.

 

이 세상의 경기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도 그렇게 억울한 판정을 당해서 질 수도 있고, 스스로 실수를 저질러서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달리는 영적 경주는 끝까지 잘 달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끝까지 가느냐고 중요합니다. 우리가 뛰어난 영성을 지녔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잘나서입니까? 아닙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5-57)

 

사망(죽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끝을 알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승리의 결과를 알고 경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가 딴짓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이 길을 갈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4.   오늘은 최선을 다해 달려갈 시간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하게 살다 보면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두 주 정도만 있으면 이 해가 끝납니다. 매년 이때가 되면, 아무리 젊더라도 한 번쯤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 아니다.’라고 하며 거부하고 싶어도, 언젠가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찾아옵니다. 우리 중에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전부 다 죽습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역사를 끝내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고 또 이번이 마지막 대강절과 마지막 성탄절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또 어떻게 살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하나도 손해 안 보려 하며 살고, 미워할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모든 일을 오직 , , 에게만 집중하며 이기적으로 살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계속 그렇게 이 땅에서 썩어질 것만 따라서 살아가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9, 11, 21)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쓰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바울 곁에 사랑하는 누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 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느끼기에 이번 겨울이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를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데, 겨울이 되면 그때 여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말합니다. 지금 게다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라고 하는데, 오래전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질 때 바로 이 마가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마가는 당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사람인데, 바나바는 다시 한번 기회를 줍시다. 데리고 갑시다.’라고 하고,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이 사람을 데리고 가면 자기도 힘들고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그가 준비된 다음에 데리고 갑시다. 지금은 데리고 가지 맙시다.’라고 하다가 이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마가에 대해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죽을 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이때는 마가를 데리고 와라. 그가 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마가에 대한 것을 다 풀어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꽁 해서 관계가 계속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다 털어버리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이 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 내 모습을 기억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해 주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58, 새번역)

 

바로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았던 사도 바울은 삶을 마감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새번역)

 

바로 이것이 인생을 마감할 때 우리 각 사람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바울과 같은 이 고백을 하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러기 위하여 오늘은 힘차게 달려야 할 시간이며,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가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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