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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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0UvkDI9R5SQ?si=y2Wl6_tVa7CMpqt6&t=112
2024년 12월 8일 주일예배
✦ 믿음 4 ✦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보는 믿음의 사람
(히브리서 11장 1~7절)
[들어가는 말]
우리 중에는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고, 얼마 전부터 교회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 중간에 쉬다가 다시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의 ‘신앙’이라는 것은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신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무신론자도 다 믿음이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신은 없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 뿐이지, 뭔가 다른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특히 지금 여기에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분들이나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영생에 대해,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는 분들이 계시면 이것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쉬운 예로, 운전하고 가다가 빨간불이 켜져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앞에 멈추어 섭니다. 왜 가지 않고 거기 서 있습니까? 물론 법을 지키느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이 빨간 불이 곧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믿기 때문에 가만히 기다리는 겁니다.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못하고 둘러봐서 차가 안 오면 그냥 갈 겁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빨간불이 몇 초 또는 길어도 1~2분만 지나면 녹색으로 바뀔 것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분명히 아직 녹색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빨간 불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 볼 수 있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우리 모두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멀리 여행 가면 다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습니까? 지금도 한국을 가거나 미국 내의 먼 도시로 여행을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저도 지난 11월에 잠시 한국을 다녀올 때 당연히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며칠 만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여기 다 비행기를 탔으니까 미국까지 와서 계신 것인데, 뭘 믿고 비행기를 타셨습니까? 혹시 내가 타는 비행기 기장의 얼굴을 보았을 수도 있고 직접 인사를 나누었을 수도 있을 텐데, 비행기를 정비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내가 탈 비행기를 완벽하게 정비해 놓았기 때문에 내가 안심하고 그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만나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릅니다. 또 승객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승무원들이 알고 보니 강도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탄 비행기 기장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정확하게 데려다 줄 것을 믿기 때문에, 비행기 정비사들이 정비를 잘했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공항에 들어갈 때 검색하는 보안요원(TSA)들이 승객들을 잘 검사해서 테러리스트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또 승무원들은 이미 항공사에서 검증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쿨쿨 잠을 자기도 하면서 편안하게 타고 가는 겁니다.
아직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지금 보고 있기 때문에, 확신 가운데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날 때 뭐라고 연락합니까?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몇 시간 후에 보자.”라고 합니다.
몇 시간 후에 거기서 볼 수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인데도 이루어진 것처럼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조금 이따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믿음이고, 이런 믿음이 없으면 사실 이렇게 여행하거나 특히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직 하나님을 본 것도 아니고, 영원한 천국을 가본 것도 아니고, 천국이 완성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또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증언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여 우리도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보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분이 돌아가시면 그냥 ‘장례예배’라고 하지 않고 ‘천국환송예배’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조금 후에 봅시다. 이제 조금 지나면 우리 거기서 봅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천국에 가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
성경에는 별명이 붙은 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 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데 믿음은 시간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절)
이 구절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고 바로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풀어서 보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신이며, 지금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확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아직 시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하나의 점처럼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태초’라는 시간을 만드시면서 그때부터 우리가 아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시간을 다스리시며 시간을 붙들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머리로 이것은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고 그 위에 계시기 때문에 시간 안에 잡아넣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주님께 천 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 하루가 천 년 같기도 한 것은, 하나님이 시간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태어나신 사건은,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엄청난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으신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는 곳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 가두시면서, 그렇게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시간 위에 계시던 분이 시간 속으로 오셨습니다. 공간을 손에 쥐고 계시던 분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죄로 망가진 인류 역사를 고치시고 아름답게 회복시키기 원하셔서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아주 가까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으시고 기쁨과 슬픔도 맛보시고, 마침내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과 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고 있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런 내용으로 같은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미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정말 찬란하고 엄청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류 역사는 완벽한 회복과 아름다움을 이룬 그림 같이 그려졌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새로운 세상이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 큐티 본문이 요한계시록인데, 교회 웹사이트 나눔터에 매일 본문이 올라와 있으니까 그것을 보시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튜브 라이브 영상 목회편지도 그것으로 진행하니까 그것을 보셔도 좋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후에 이루어질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기 때문에 사실 1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모세가 기록했다고 하는 시편 90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0-12)
참된 지혜는 시간 안에 갇혀 살고 있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인생의 남아 있는 날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특히 젊은 청년들은 죽음을 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늙어서 내가 죽어 이 땅을 떠난다.’라는 생각을 별로 많이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만 해도 별로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끝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끝은 분명히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그 한계를 늘 기억하면서 인생에 남아 있는 날을 항상 생각하고 계산하며, 오늘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앞을 미리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점쟁이를 찾아다닙니다. ‘지금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가?’라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앞을 내다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연수가 길다고 자랑하더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이 무엇입니까? 시간을 초월하여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시간 아래 갇혀 살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함께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자고 초청하시는 스토리입니다. 그러니까 유한한 한계 속에서 그냥 살다 죽을 수밖에 없고 그냥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를 저 무한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데려가 주시겠다는 초청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 손을 직접 붙잡으시면서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여행을 나와 함께 시작하자.’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손을 붙잡게 되면, 이 땅에서 한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가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리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손을 탁 붙잡고 그리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서 따라가면 거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고 그 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시간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격입니다. 그런데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시간 위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붙들고 같이 가자고 초청하시는 데 대하여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따라나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로 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고 열어주시고 같이 들어가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냥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그리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만 초청해 주시는 것에 대해 ‘알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고 응답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사이에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 있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한계가 있는 이 땅에서 영원한 세계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시간을 미리 앞당겨 보는 눈을 가졌던 믿음의 선배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3절)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과 선배들은 시간을 앞당겨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겁니다. 즉,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그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믿음의 선진(선배)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한참 나중에 나타날 먼 미래의 일들이었지만,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의 시각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미리 앞당겨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하시는 모습을 오늘로 미리 앞당겨서, 마치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감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믿음의 선배들이 죽 나오는데, 아벨도 있고 에녹도 있고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도 나오지만, 그중 노아만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7절)
지난번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아만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분들도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는 다 들어보았습니다. 저 남쪽의 신시내티를 지나서 조금 더 내려가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제 모형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굉장히 사이즈가 큽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아직 비가 내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미리 앞당겨 자기 눈앞에서 엄청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큰 배인 방주를 열심히 건축했습니다.
노아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큰 홍수는커녕 큰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얼마 후 큰 홍수가 내려 온 세상을 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그런 비가 내린 적도 없고 홍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멸망시킬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고 자신의 모든 삶을 투자하여 홍수를 대비한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의 이런 행동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비는 무슨 비냐? 해가 이렇게 쨍쨍한데 비? 무슨 방주를 이 산에서 짓느냐? 배를 지으려면 바다나 강에서 지어야지 무슨 산에서 짓느냐?’ 하고 비웃었습니다.
실제로 배를 만들던 120년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무려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고, 결국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의 믿음이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노아는 비를 내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가 전혀 안 보이지만 마치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처럼 미래를 현실로 미리 앞당겨 보았고 또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냥 ‘그렇구나’ 한 것만 아니라 거기에 맞는 행동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라고 평가합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그렇게 했다고 칭찬합니다. 그 외에 아벨도, 에녹도,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인 사라도, 또 다른 사람들도, 믿음의 사람들은 시간을 앞당겨 약속을 현실로 이해하는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완벽한 타이밍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해줍니까? 가장 정확한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의 표현이 믿음이라고 알려줍니다. 액션 영화 같은 데에 보면, 주인공이 결정적인 위기에 빠졌을 때 어디선가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서 결국 우리의 주인공을 구출해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더 완벽하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확한 때에 등장하십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주인공이 쫓기고 위기를 당하는 것을 보면 가슴 졸이면서 봅니다. 손에 땀을 쥐고 흥미진진하게, 때론 깜짝깜짝 놀라면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시 보면 어떻습니까? 전혀 긴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소설이 있으면 끝에 미리 어떻게 되나를 본 다음 앞에서부터 보면, 전혀 걱정할 필요도 없고 긴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끝이 어떻게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인도해 주십니다.
살다 보면 신호등이 가끔 고장 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빨간불에서 녹색으로 바뀌지 않고 몇 분씩 지날 수가 있습니다. 전기가 아예 나가서 작동하지 않음으로 큰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비행기도 고장으로 인하여 불시착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추락하거나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위에 계시며 시간을 컨트롤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완벽한 타이밍에 우리의 삶의 위기 속으로 들어와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결코 헛된 말을 하지 않으시고, 신실하시고, 절대 지각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하신 일들, 우리 식으로 하나님의 이력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완벽한 이력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분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를 자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살다 보면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하나님께서 늦게 오시는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잊으셨나?’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안 되어서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신실하심 등 그분의 이력서를 다시 확인해 보면서, 아직 하나님의 시간이 안 되었을 뿐이지, 또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이지, 하나님은 분명히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냥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베다니라는 곳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누이가 둘인데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즉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신 게 아니라,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나사로가 죽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동생 마리아도 똑같이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두 자매는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자기들의 오빠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으면 그를 충분히 낫게 하실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 지각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안에 서운함도 담겨 있습니다. ‘진작 오셔서 살려주시지, 왜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는 서운함과 원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베다니에 늦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늦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서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그 자리에 오셔서,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썩고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며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죽었다가 살아나실 부활을 미리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어가던 시체가 살아나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 아픔 속으로 찾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나?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하실 수는 없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방법은 그게 아닙니다.
안 좋은 일과 나쁜 일과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해주실 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그게 아니라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결해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문제가 없도록 다 막아 주시면 우리가 약해집니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를 맞서 싸우면서 그것을 이겨낼 때 우리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함과 배고픔의 아픔 속에 허덕일 때 주님은 어디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주님은 ‘너의 인생을 직접 책임져주겠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주님의 성품과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시간을 앞당겨 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안 계신 게 아닙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고 나아갈 뿐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향한 주님의 완성된 그림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한, 우리 각 가정을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그림은 시간을 넘어 그 위에 초월해 계시는 주님 앞에 멋진 그림으로 하늘나라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미술관에 가보면 얼마나 감동이 옵니까? 뉴욕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유명하다는 미술관에 가서 유명하다는 그림들을 보면, 미술을 잘 몰라도 뭔가 감동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그런 명화들, 엄청나고 세계적인 작품들보다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신 작품이 훨씬 더 고귀하고 가치 있으며 바로 그것이 천국의 미술관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주인공은 다른 어떤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그 피 값으로 구원받은 바로 나와 내 가정과 내 주변과 또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것이 이루어지지는진 않았습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시간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이 시간 속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그 주님을 신뢰함으로 시간을 미리 앞당겨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과정 중에 아픔들이 많이 있지만, 그 스토리의 마지막 장은 이미 다 아름답게 완성되어 하늘나라의 전시장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만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조금 전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국 성경으로는 조금 다른데, 영어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영어로 하는 성경 퀴즈에 많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What is the shortest verse of the Bible?”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Jesus wept.” 예수가 우셨다. 여기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까우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를 곧 살리실 주님이 아니십니까? 이제 금방 살아나게 해주실 것을 다 아시는데,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뭐 하러 눈물을 흘리십니까? 바로 그겁니다. 우리의 아픔에 동참해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의 현장 가운데 함께하셨고, 우리의 슬픔과 고통의 현장에도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능력의 주님이시지만 우리와 함꼐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려 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항상 여유 있고 달콤한 인생이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락해서 믿음으로 살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었고 믿음을 포기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과 자기들을 향하신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을 미리 앞당겨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지식이나 경험을 믿지 않고, 비록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신 데에는 분명히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게 많아도 그것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는 것, 그리고 상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절)
[나가는 말]
믿음이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엄청난 간격을 메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여기서 한 번이라도 “이따가 봐.” “이따가 뵙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십니다. “이따가 봐.” 그런데 어떻게 보장합니까? 이따가 볼 수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므로, 지금 비록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아 있는 우리 인생의 시간을 믿음으로 붙잡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고 계획을 세우더라도 그대로 될지 안 될지, 또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시간을 다스리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또 시간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 사이의 간격을 믿음으로 메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보장된 미래가 없이 오늘의 시간에 평생 갇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사는 인생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알아서 해야 하는데 보장이 없기에 항상 불안합니다. 열심히 해도 불안하고, 또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염려와 공포 속에 살아갑니다. 다른 세계, 더 높은 차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인생은,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 속에 갇혀 살지 않게 됩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자기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아픔과 실패와 좌절이라는 것들도 있고, 또 어두운 부분도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여정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성하셔서 하늘나라 벽에 걸어놓으신 그림,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그 그림을 하늘 미술관에 걸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완성해서 걸어놓으신 내 인생의 완벽한 그림을, 미리 시간을 앞당겨서 오늘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원을 향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이러한 눈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이것을 계속 자기에게 상기시키고 리마인드해주는 절기가 바로 이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대강절을 통하여 우리는 소망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시간 아래 갇혀 사는 제한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오늘 내 것으로 삼는 이 믿음의 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