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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TKsV38y8bHg?t=268

 

 

2022814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7

강한 적들로부터의 승리

(사무엘하 101~19)

 

[들어가는 말]

 

9.11 테러 공격이 발생한지 20년이 넘었고 다음 달이면 21년이 됩니다. 테러 공격 발생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미국 의회는 대통령이나 관련 부서 공무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한국 사람들은 아무래도 많이 감정적입니다. 감정적인 면이 많이 앞서서, 어떤 사건이 터지면 여론이 들끓습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이나 SNS가 있어서 각 개인이 다 자기 소리를 쏟아내니까 엄청난 비판과 비난의 소리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그때뿐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주로 가장 최하급 관계자 한두 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그 전에 들끓었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 또 다른 사건이 나오면 바로 이전 것이 잊힙니다. 그래서 사실은 정권에 따라 새로운 사건을 일부러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정치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스포츠계나 연예계 사건들을 터뜨려서 그 전 것을 잊어버리도록 했고, 거기에 국민들이 넘어간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수도권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을 뉴스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피해가 발생하면 일단 마음을 모아서 해결부터 해야 하는데, 누구 탓이냐를 따집니다. ‘시장 탓이다.’ ‘아니다, 이전 시장 탓이다.’ ‘시의회 탓이다.’라고 하며 서로 싸우기만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일단은 문제를 해결해놓고, 그다음에 정확히 이게 누구 책임인지도 물으며, 더 중요한 것은 다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미국도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즉히 성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 오랫동안 끈질기게 조사를 벌입니다. 유럽도 그런데, 지금도 나치 전범이 잡혔다고 하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잡힌 사람을 보면 90대이거나 젊어도 80대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추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만, 21세기 들어 경험하는 전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일단 전쟁터가 있었고 상대할 적군들을 직접 대면하여 싸웠는데, 이제 테러와의 전쟁은 전쟁터가 없습니다. 세계 어디나 전쟁터가 됩니다. 또 적군도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은 드론을 띄워서 공격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조심하면서 미리 테러를 예방하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군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오랫동안 싸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쟁은 적군이 안 보이는 전쟁이고 전쟁터가 따로 없는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좀 간단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영의 세계로 하나님 나라도 있고 사탄의 세력도 있음을 성경이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라.’ 하지 않습니까? 마귀가 없다면 왜 싸우라고 하겠습니까? 있으니까 싸우라고 합니다. 또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귀신들을 쫓아내셨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적도 베푸셨지만, 귀신을 쫓아내신 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세력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보면,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끼리 너무 대화가 잘되고 기분이 좋고 참 행복하게 있는데, 갑자기 한순간 감정이 확 상하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어 천국이 갑자기 지옥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가 사람들 사이를 벌려놓으려고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의심을 품게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경향이 조금씩은 다 있는데, 그런 의심을 더 자극해서 자기방어를 넘어 상대방을 향해 공격적으로 되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더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주의하며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래야 생각하지도 못한 공격이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담대하게 또 능력 있게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암몬의 새로운 왕 하눈이 다윗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탄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인데, 그러한 하눈이 어리석은 결정으로 전쟁이 일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1.   모욕당한 다윗의 신하들 (1~5)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1-2)

 

암몬은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세 나라 중 하나인데, 가장 남쪽이 에돔(지금의 요르단쪽)이고, 그 위가 모압이며, 모압 바로 위가 암몬입니다. 이전에 암몬 사람들이 와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공격했다가 사울 왕에게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삼상 11). 그러나 이후에 암몬 왕 나하스는 다윗과 동맹을 맺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조문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신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다윗이 나하스에게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 보답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언제 암몬 왕 나하스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다윗이 피난 시절에 나하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과 나하스가 친족으로 얽혀 있는 관계일 수 있다고 하는데, 다윗 어머니 쪽으로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어떤 은총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호의를 베풀었던 것은 사실인데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다윗이 자기가 받은 은총을 기억하고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총을 반드시 갚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본문인 9장에 이어서 은총이라는 단어가 여기 또 나옵니다. 지난주 사무엘하 91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은총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은총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인애, 자비, 능력, 사랑등으로 번역됩니다. 다윗은 이러한 헤세드를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베풀었습니다. 이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은 사울의 모든 유업을 이어받게 되고, 심지어 다윗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다윗은, 이제 암몬의 새로운 왕이 된 하눈에게도 같은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나하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선한 마음에 대한 반응이 므비보셋 때와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3-4)

 

다윗의 신하들로 구성된 조문객을 맞이한 암몬 왕 하눈은, 그것이 다윗이 암몬을 엿보고 공격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는 자기 신하들의 말에 넘어갑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수염을 깎고 옷의 절반을 잘라 돌려보냄으로 다윗을 모욕합니다.

 

암몬 관리들이 속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 이 사람들은 친선 조문 사절단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염탐하려는 스파이를 보낸 것입니다.’ 하고 엉뚱하게 조언합니다. 그러자 하눈은 사절단의 수염을 깎고 의복을 자르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하눈은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왕이지만 왕으로서 판단력이 없습니다. 주변 신하들의 말에 그냥 넘어갑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수염은 남자들에게 권위의 상징이며 남자의 명예를 상징했습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은 수염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지만, 옛날에는 다 수염을 길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당시 관습뿐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수염을 기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19:27). 그런 상황에서 수염이 잘렸다는 것은 노예처럼 취급당한 것을 말합니다. 한국의 이발소에서 면도해주는 서비스를 받은 게 아니라 완전히 모욕을 당한 겁니다. 노예 같은 취급을 받은 겁니다.

 

또한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잘렸습니다. 당시는 속옷을 입지 않았는데 옷을 엉덩이까지 죽 자르면 걸을 때마다 다 속이 보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수치를 주고 모욕하는 일이었으며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다윗의 호의를 악으로 갚고 전쟁을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5)

 

다윗은 먼저 신하들에게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머물다 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니들은 창피하니까 거기 좀 있다가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수치를 당한 그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로 가 있으라고 하는데, 여리고는 다윗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8마일 정도 떨어진 성입니다.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도 가장 먼저 공격했던 성이 아닙니까?

 

아주 멀지도 않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그곳에 가 있으라는 겁니다. 암몬에서 돌아올 때 거치는 성이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빙 돌아서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오는 길에 있는 그 성에서 머물러 수염이 자랄 때까지 있다 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신들이 가족들이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수염이 다 자라기까지 그곳에서 머물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주면서 배려해준 것입니다.

 

9장에서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총을 받아들여 재산이 회복되고 왕의 상에서 같이 먹는 그 풍성함을 함께 누리는 가족과 같은 위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10장에서 암몬의 하눈은 그 은총을 거절함으로써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도 이겼으면 다행인데 패배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참 어리석습니다. 므비보셋은 은총을 받아서 축복을 누렸고, 하눈은 잘난 체하고 까불다가 큰코를 다치고 굴욕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런 암몬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의심하면서 자꾸 은혜를 악으로 갚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뭔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열등감의 상처가 있습니다. 의심이 많고 늘 경계하며 자기방어적입니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며 틀어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때 다윗은 신하들을 배려해주었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준 겁니다. ‘내가 보기에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며 거기에 머물도록 해준 배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식으로 하면 사랑의 언어입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면, 상대방에게 분명히 사랑을 베풀어주었는데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끼리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 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의 삶> 공부를 할 때 자기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점검하고 자녀의 것을 점검하고 배우자의 것을 점검합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자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랑의 언어로 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상황에 맞추어서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눈은 자기 안의 열등감 등의 상처 때문에 다윗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오히려 전쟁으로 나아가다가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다윗은 암몬 왕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도리어 모욕을 당하는데, 이것은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인과 우리의 주인이 다릅니다. 그리고 삶의 전 영역에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선한 의도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할 때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회와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신자들의 선한 의도까지도 왜곡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로, 세상 사람들은 때때로 선을 악으로 바꾸어 갚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됩니다.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행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나올 수 있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6:9).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겠습니까?

 

첫째로는, 낙심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16:33). 만약 내가 잘해주었는데도 저쪽에서 이상하게 나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세상에 나를 미워했으니까 나를 따르는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8-19).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에서 모욕을 당하고 오해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아무런 잘못 없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인내하면 아름다운 결과가 반드시 나타날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19).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면서 결국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셋째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겠습니다(5:44).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도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은 사랑하고 내가 싫은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고, 아니면 슬그머니 관계를 끊습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인데, 요즘은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원래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해도 나를 죽이는 사람조차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고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있다고 저쪽에서 이상하게 나오면 나도 힘으로 누르고 반격하는 게 아니라, 희생하고 견뎌주고 오히려 사랑으로 대해줄 때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또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2.   암몬과의 전쟁과 승리 (6~14)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6)

 

여기서 고용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몬 자손들은 다윗이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분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군대뿐 아니라 용병을 고용해서 다윗을 대적합니다. 여기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벧르홉, 소바, 마아가, 돕 중에서 작은 도시 국가인 돕을 제외하고는 모두 암몬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국가들입니다.

 

암몬 왕 하눈은 다윗과 적대 관계에 있던 아람 군대들을 동원해서 연합군을 이루어 다윗의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려고 한 것입니다. 역대상에서는 하눈이 은 천 달란트를 주고 이 군대들을 사왔다고 기록합니다(대상 19:6).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7-8)

 

암몬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대로 한 떼는 성문 어귀에, 다른 나라에서 데리고 온 군사들은 들판에 배치를 해서 이스라엘 군을 협공하는 전략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요압은 이스라엘 군 역시 두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한 떼는 자기가 맡고 다른 한 떼는 자기 아우 아비새에게 맡기어 서로 협력하면서 싸우도록 전략을 짭니다.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9-10)

 

요압은 적들이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취하니까 자기도 군대를 둘로 나누는데, 선발한 군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용사들을 다시 엄선하여 33천 명이나 되는 아람 연합군과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는 동생 아비새에게 맡겨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두 개의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암몬과도 싸워야 하고 암몬이 용병으로 고용한 아람과도 싸워야 합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11)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싸우지만, 한쪽이 전투에서 밀리면 다른 한쪽이 와서 도와주기로 동생과 약속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아주 위험한 작전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요압은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입니다. 한쪽이 밀리면 다른 쪽이 와서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쪽이 비게 되지만 모험을 걸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순간 요압은 정말 요압답지 않은 놀라운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12)

 

요압이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믿음의 고백을 한 곳이 바로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의 고백과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여기서 세 가지로 자신의 군대를 격려합니다.

 

첫째, 담대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군인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해 담대히 하자라고 격려합니다. 그들이 이 전투에서 질 경우,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큰 피해가 올 것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셋째, 요압은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군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이 싸움에서 담대할 것과 또 이 싸움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이름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긴다고 놀라운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원래 피의 사람이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아브넬을 슬쩍 불러 죽였고, 나중에도 똑같은 일을 또 합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이고,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이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은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압이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아무리 잔인하고 악한 요압이지만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것이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을 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자기 힘으로만 열심히 하는 것도 당연히 믿음이 아닙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압이 이 순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딱 이때만 그러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13-14)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간 요압과 이스라엘 군대에게 하나님은 암몬과 아람 군대로부터 승리를 거두게 해주십니다. 요압이 비록 이때만 믿음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참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형편없는 요압인데도 불구하고, 믿음의 모습도 딱 이때 한순간만 보인 요압인데도 불구하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람 군대는 별 목적이 없이 그냥 돈 주니까 나온 겁니다. 돈을 받고 용병으로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군사 중에도 뽑힌 용사들이 나온 것이니 얼마나 잘 싸우고 얼마나 용맹하겠습니까? 그 장수들이 결연한 의지로 공격하는 그 앞에서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간 겁니다. 사실 별 목적 없이 돈 버니까 나와서 싸우는데, 저쪽에서는 죽기 살기로 나오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니 도망가는 겁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굉장히 비슷합니다. 러시아에서 용병을 고용해서 우크라이나로 보낸다고 그런 뉴스도 보았는데, 우크라이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자기 나라가 넘어가게 생겼으니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을 갖게 되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여기 치고 저기 치면 함락되고 가볍게 이 땅을 먹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벌써 6개월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력과 애국심을 간과한 것입니다.

 

별 목적도 없이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와서 싸우는 사람과, ‘죽더라도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싸우는 쪽 중에 어디가 더 용맹하겠습니까? 그러니 갈수록 상황이 바뀌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어렵지만, 우크라이나가 아주 잘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옛날에는 더합니다. 돈 받고 와서 대충 싸우려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상대가 안 됩니다.

 

비록 요압은 악한 사람이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아름다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맞이하는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렇게 지혜를 잘 사용해서 위기 상황에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담대하게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그것이 믿음이고, 그때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아람과의 전쟁과 승리 (15~19)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15-16)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이 아람을 정복하는 사건입니다. 완전히 아람을 누르고 다윗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비록 암몬과의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아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람의 하닷에셀 왕은 암몬을 돕다가 자신들이 다윗에게 패한 것을 보니까 모든 아람의 도시 군주들을 불러 모아서 더 크게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17-18)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갑니다. 전쟁에 참여하여 아람을 치고, 하닷에셀과 아람 군대의 싸움에서도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요압의 군대가 암몬과의 싸움 그리고 아람 용병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니까, 아람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이때 왕인 다윗이 직접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아람의 군사령관인 소박의 죽음에 대해서 굳이 안 써도 되는데 왜 썼느냐 하면, 그들이 완전히 패배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군사령관이 죽었으니 그들은 완전히 궤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닷에셀과 연합한 아람 왕들은 다윗에게 조공을 드리고 화친하게 되고, 두 번 다시 암몬을 돕지 않게 됩니다.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19)

 

암몬 왕 하눈은 아무리 봐도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다윗에게 대항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역한 겁니다. 은총을 베풀겠다고 할 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서 괜히 싸우다가 졌습니다.

 

용병을 고용했다는 것은 자기가 직접 싸우는 것보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인 것을 보여줍니다. 역대기에 의하면 은 천 달란트를 사용했는데, 그래도 졌습니다. 그 정도를 썼으면 이겼어야 했는데도 졌습니다. 돈만 크게 낭비하고 패배한 겁니다. 차라리 다윗이 은총을 베풀겠다고 했을 때 감사함으로 받고 조공을 바쳤다면, 일천 달란트 들어간 것보다 훨씬 적게 들어갔을 겁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쓰고도 졌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온 나라가 비탄에 빠지고 고통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왕입니까?

 

지금도 자기가 가진 것이나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잘 잡아야 하는데, 그것을 놓치고 자기 힘으로 해보려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미치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것을 이룬 사람이 바로 다윗이 된 겁니다(15:18; 11:24).

 

우리가 오늘 기억할 것은, 영적 전쟁은 항상 있다는 겁니다. 의외일 때, 생각하지 못할 때 올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휴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배웁니다.

 

첫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그게 항상 사탄의 공격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시련을 주시는 것도 있고, 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는 시험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탄은 두려움과 속임수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두렵게 하고, 자꾸 속입니다. 과장하게 해서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요압의 군대는 소수였지만 많은 수의 아람 군대 앞에서 담대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둘째로 배우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압과 아비새는 각기 다른 적들과 싸웠지만, 이들은 자기가 약해지면 분명 상대방이 자기를 도울 것을 신뢰하면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겼습니다.

 

우리도 영적 공격을 받을 때, 또는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그냥 가만히 있거나 쉬쉬하는 것이 성도의 일이 아니라 다른 성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기도로 돕는 겁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실 사역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 카드를 많이 써서 내시기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면 좋은데 뭘 숨길 게 있다고 자꾸 쉬쉬하며 숨깁니까? 곪아서 터집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같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묶어 주셨습니다. 함께 이기는 겁니다. 혼자 이기는 게 아닙니다.

 

셋째, 말로 승리를 선포하면서 서로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압이 말로 선포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특히 영적 전쟁 때, 믿음의 싸움 때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말이나 실패와 낙담의 말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를 두신 분들은, 위선이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녀들 앞에서 말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속에 있는 생각이 말로 나올 때 그게 다릅니다. 말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보니까 직장이나 사업이나 세상에서 잘 안 풀린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열심히 해봤자 소용없네.’라고 합니다. 이게 아주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해봤자 소용없네. 기도해봤는데 별 볼 일 없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생명 걸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기도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 그래? 내가 뭔가 보여줄게.’라고 하시며 솜씨를 보이시는데, 그러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울수록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감사의 언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망 언어가 아니라 생명 언어를 써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감사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큰 힘을 얻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문제가 닥쳐오든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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