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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uO1kiXjdcrQ?t=2950

 

 

202212일 신년주일예배

신년 메시지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11)

 

[들어가는 말]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한 여자가 있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옛 애인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 오래 사귀던 사이라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고, 헤어진 후에도 종종 만나면 아주 편한 사이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남편보다도 자기를 더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더 편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결혼 후에도 계속 옛 애인을 그리워하면서 남편 몰래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고 문자도 했습니다. 게다가 가끔씩 만나서 식사도 하며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호젓한 공원에서 함께 만나 손을 잡고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포옹을 하면서 상대방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아내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던 남편이 몰래 따라왔다가 바로 그 순간 서로 껴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며 이거 봐,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자 아내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 여보,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뭐 별 것 아니야. 잠깐 손만 잡다가 살짝 포옹한 것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난리야?”

 

여러분, 이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남편을 배신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바로 우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1.   위의 것을 찾으며 생각하라 (1~4)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또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 처녀의 비유를 드시면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신부로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결혼한 것으로 성경에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1)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3)

 

바로 앞의 22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 나오고 여기 33절에도 "너희가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31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었는데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식은 결혼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종종 사정이 있어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한 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랑과 신부는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식을 안 해도 법정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선서만 하면 부부가 될 수 있지만, 결혼식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축하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아직 안 받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었으면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우 부부가 결혼식을 통해 자신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포하듯,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믿음의 지체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세례를 통해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이 교회로 들어오는 통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 함께 살았다는 표시입니다. 침례교인들이 여기에 대해서는 더 자부심이 강합니다. 침례교회나 순복음교회에서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하는데, 우리 장로교에서도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의상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를 합니다. 머리 위에 물을 뿌리는 것은 물 밑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나는 죽었고 또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다는 것,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죄 속에서 살던 내가 이제 영원한 길, 생명의 길로 들어섰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옛 애인과의 관계는 다 끝났고, 이제 예수님을 남편으로 맞아들여서 그분과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례를 받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합니다(1). 또 뭐라고 합니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2)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제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고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것, 즉 이 땅에서 끝나고 마는 것들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것,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옛 애인은 끊고 남편만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나라를 의미합니다(1). 하지만 이 말은 1세기 당시 헬라 철학에서 말하던 이분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 땅은 나쁘니까 천국만 생각하고 세상에서 분리된 삶을 살라는 것이나 육신은 나쁘고 영만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은 놀라운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땅의 것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이 땅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땅의 것 생각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땅의 가치로 살지 말고 천국의 가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사람은 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기 전이나 세례를 받은 후나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천지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영광 가운데 주님과 함께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로마시대 때 장군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개선장군이 되어 행진을 합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늠름한 모습으로 갈 때 그 주변으로는 그와 함께 전쟁터에서 싸운 군대도 같이 행진해 나갑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행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나타나시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개선장군 옆에 함께 가는 군사들처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함께 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위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의미입니다. ‘이미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천국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구원도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것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옥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천국으로 갑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는 받은 구원또는 영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났을 때 태어나면 끝난 게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잘 먹고 자며 잘 자라야 합니다. 만약 10살인 아이가 1살 정도밖에 안 되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영적으로도 그렇게 죽 자라가야 하는데 그 자라는 과정을 신학적 용어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죄의 영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받는 구원’, 받아가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격이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혼의 구원이라고도 합니다. 영의 구원(칭의) 다음에 혼의 구원(성화) 즉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죄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는 구원의 과정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영화’(glorification), 즉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몸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인데, 이것이 앞으로 받을 구원이고, 천국에는 죄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처럼 구원도 세 가지 시제로 있지, ‘예수 천당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오히려 시작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성화의 과정, (인격)의 구원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매일매일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썩어질 가치를 바라보며 나아가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천국의 가치를 지닌 일을 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2.   옛 사람과 새 사람 (5~10)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삶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런 것들을 안 하는 것이 곧 위의 것을 찾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5-7)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죽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은 성적 타락과 자기 쾌락과 유익만을 위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특히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이것이 다 이기적인 삶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삶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삶이 땅의 것’(2)이고 땅에 있는 지체’(5)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8-9)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은 주로 언어와 관련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로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죽여야 한다, 즉 없애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없애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것을 못 보고 그러한 땅의 것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치 결혼하고도 계속 옛날 애인과 만나서 즐기는 불륜의 관계를 갖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 특히 구약에서 남편을 떠나 방탕하게 사는 여인을 이스라엘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아름답게 세워주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는 주요 통로가 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상처가 되는 말을 함으로써 다투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자녀와도, 부모님과도, 친한 사람들과도, 교회 성도들과도 치고받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주로 말로 싸웁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은 진짜로 얻어맞아서가 아니라 말 한마디 던진 것이 비수가 되어 상처를 받는 겁니다.

 

인간이 동물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언어 구사 능력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아무리 똑똑해도 말을 못합니다. 앵무새는 훈련되어 따라하는 것이지 진짜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짐승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요즘 문화는 자꾸 인간을 짐승처럼 되도록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5절에 나와 있는 것들(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행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인 우리가 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화내고, 뒤에서 욕하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옛 사람의 모습을 죽이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고 믿어서 천국에 속한 자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시 옛 사람과 그 행위가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비록 영생을 얻은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매일 치열한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 사람과 그 모든 행위를 벗어버리라.” 하고 거듭해서 말한 것입니다. 저절로 그런 것들이 다 된다면 왜 이렇게 계속 명령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그런 식으로 살았다는 겁니다(7). 그저 자기밖에 모르고 악한 말만 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옛날 문화는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된 그들은 옛 사람과 이 땅의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과 위의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옛날부터 아이들도 어른들도 좋아하는 이야기가 신데렐라입니다. 백마 탄 왕자가 신데렐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신데렐라는 가난한 집 출신이라 아무리 아름다운 새 옷을 줘도 나는 옛날 입던 누더기 옷이 편하다.’라고 하며 계속 그것만 입는다면, 왕비가 될 사람으로서 맞지가 않습니다.

 

결혼하고도 누더기 옷을 입겠다고 고집한다고 해서 왕자의 아내인 것이 취소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맞는 모습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기 신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하고 맞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새로운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전의 누더기가 좋다고 하거나 초라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왕자비로 맞이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됩니다.

 

자기 삶의 옛 방식을 새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동시에 신데렐라는 남편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도 옛 애인을 못 잊어 남편 몰래 전화하고 또 만난다면, 그것으로 인해 아내인 것, 왕비인 것이 즉시 취소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배우자를 속이는 일입니다. 부정한 짓입니다.

 

결혼했으면 옛 애인을 잊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았어도 과거의 일로 끝내야 합니다. 이전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다 끝내고 최선을 다해 남편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전에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이전의 삶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살았다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끝낸 다음 새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고 천국 시민이 된 후에도 왜 우리는 계속해서 옛날에 살았던 죄의 방식들대로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옛 애인에게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0)

 

이 구절을 조금 더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이미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고 있는 중이다.’

 

전혀 쉽다고 느끼시는 표정이 아닙니다. 조금 쉽게 풀이하면 이렇다고 했는데 별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을 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지만, 그것은 한 번에 끝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두 번쨰인 성화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 ‘인격의 구원의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새롭게 되었습니다. ‘이미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완전히 새롭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는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끔 보면 내가 옛날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너무 많이 다녀서 이제는 졸업했습니다.’라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새롭게 됩니까? 주님을 아는 지식, 즉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10).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신앙 성장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먼저는 듣고 읽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꼭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성경을 별로 많이 안 읽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집에 가서부터라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먼저 갖고 와야 합니다. 그 다음에 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티브이를 틀거나 인터넷을 하는 것은 쉬운데, 성경을 가져다 펴는 게 이상하게 어렵습니다.

 

요즘은 성경 읽기를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YouTube를 보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우리 모세목장에서는 <공동체 성경읽기>라는 것을 작년 1년 동안 같이 했습니다. 11일부터 1231일까지 성경을 나누어서 신구약 전체를 한 번 읽게 하는데, 앞에서는 목회자들이 나와 설명해주고 뒤에는 성경을 죽 읽는데, 그림이 나오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 15분 정도면 다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는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하면서 성경을 그 정도도 읽을 시간이 왜 없습니까? 성경을 다 쓰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분들은 요한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나중에 하는 게 좋습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냥 읽는 것보다 펜을 들고 기록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짧은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것과 한 번에 여러 장을 읽는 통독이 다 필요합니다. 처음 읽는 분들은 일단 짧게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매일 그렇게 해보십시오. 별로 시간도 많이 안 걸립니다. 그러나 계속 해나가다 보면 자신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의 새로운 삶의 기준 (11)

 

이처럼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삶, 새 사람을 입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구분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1)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 스구디아인은 야만인 중에도 가장 야만적인 종족의 대표 격이었습니다. 그런 야만인 중의 야만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사람도 꺼려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안에만 계시거나 유대인만의 주님이 아니시라, 어떤 민족 출신이든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시고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 할례를 받은 사람이냐 안 받은 사람이냐, 야만인이냐 문명인이냐, 종이냐 자유인이냐를 따지면서 끼리끼리 모이고 서로 적대시하며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세기 당시 여러 군데에 있던 교회들, 특히 이방 지역의 교회들을 보면 평민층이 많았지만 분명히 높은 사람들도 있었고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예가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들을 다 허무시고 하나가 되도록 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여전히 담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따질지 몰라도 주님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지역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나와 같은 고향이냐? 지위가 비슷하냐? 돈을 얼마나 버느냐? 어느 동네 사느냐?’ 이런 것들을 따지면서 자꾸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며 편을 가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남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거나 깔보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 그런 차별과 구분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그런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담대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자꾸 구분을 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catholic이라고 하니까 가톨릭인 줄 아는데, 그 말은 원래 보편적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톨릭이 그 말을 가져다 쓴 것이지, 그들이 곧 이 공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다 모일 수 있는 교회, 누가 와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나와 배경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이 와도, 내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와도, 내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와도, 내 전통과 다른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이 주님을 찾아 나오기만 하면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는 교회가 바로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렇게 매주 사도신경에서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오지 않기를 원하거나 미워하거나 배척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 때는 공교회를 믿는다고 해놓고 사실은 안 믿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오더라도, 그런 사람도 받아들여줌으로써 우리가 정말 주님의 거룩한 공교회라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거나 도저히 여기 들어와서는 안 될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만 오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우리만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만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시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혹시라도 우리가 아무리 거지 옷을 계속 입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운다 해도, 아무리 이전의 죄악 된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살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확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과 불륜을 저지르며 당신께 상처를 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끝없이 용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해서, 우리가 잘나서 그런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셨고 우리는 그냥 받았습니다. 값없이 천국 시민이 되는 특권을 받고 새 사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라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에 나옵니까? 감사해서 나오는 겁니다. 왜 성경 읽고 기도하고 사역하고 섬기고 봉사합니까? 감사해서, 구원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만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캠핑을 할 때는 텐트를 치고 잡니다. 그런데 텐트는 집처럼 편안한 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텐트가 불편하다고 집에서처럼 침대를 들여놓지 않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엄청난 돈을 들여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루 밤을 거기서 잘 잘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 텐트의 내부 장식이 가장 호화로운가, 누구 게 가장 비싼가를 따질 필요도 없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초라하게 생겼나 상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텐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튼튼하고 안전하게 치고 하루를 자는 것입니다. 또 자고 일어나면 다시 텐트를 걷고 또 다시 갈 길을 가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진짜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한걸음씩 우리의 진정한 집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산길을 가는 등산객처럼 매일 짐을 짊어지고 수고하며 열심히 산을 타야 합니다. 집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2022년의 두 번째 날이자 첫 번째 주일입니다. 아직 363일이 남아 있습니다. 2022년의 뉴스를 보면 올해도 쉽지 않겠지만, 이 한 해 동안 매일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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