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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vyUz4xBlWQ?t=1863

 

 

2021103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32

순종과 사랑의 상관관계

(요한복음 159~17)

 

[들어가는 말]

 

매년 가을이 되면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따게 됩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모세목장에서 사과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지난 4월에 날씨가 따뜻해지던 시점에 갑자기 서리가 와서 사과가 나오다 얼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흉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년만은 훨씬 못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과들이 달려 있었고, 또 사과나무에 달려 있는 걸 보니까 다른 사과들이 죽어서 경쟁이 죽어들어 그런지 엄청나게 큰 사과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크기는 컸습니다.

 

매년 가서 사과들이 나무에 죽 달려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열매가 매년 지속적으로 때를 따라 열리는지, 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사과들이 달려 있고 매년 한 번도 빠짐없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보며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과가 그렇게 달려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농장에서 사람들이 관리를 잘해주고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에 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정말 가지는 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왔습니다.

 

가지들이 땅에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떨어진 가지에는 열매를 맺히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가지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열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1.   계명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하는 삶 (9~11)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열매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 번에 죽 하시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인데 우리가 편의상 본문을 나누어서 살피는 것뿐이지, 사실은 한 번에 그대로 하시는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 내 안에 거하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여기서는 약간 다르게 표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9-10)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순종)과 사랑이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하시고는 10절에서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하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함께 머문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부담스러운 명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결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아이를 키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라면서 그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아이를 키우면 아이가 사랑을 많이 받아서 자기도 아빠 엄마를 사랑하는 표현을 합니다.

 

사실 아기가 스스로 먼저 알고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기도 전에 발 벗고 나서서 부모를 사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아빠 엄마를 사랑하는 표현을 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참 슬픈 소식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학대하거나 재혼해서 배우자의 아이를 학대하는 뉴스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학대를 많이 받고 사랑을 못 받으면 사랑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서툴게 되고 삶이 이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 너는 무조건 나를 사랑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먼저 사랑을 알려주시고 베풀어주신 후 그 다음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믿고 누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리다 보니까 가만,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지 이러고 있어서 되겠나?’ 하는 마음이 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사랑을 받았는데 가만히 시치미 떼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더 파렴치한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것을 표현하라는 겁니다.

 

놀랍게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사랑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사랑을 받으셨고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또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9)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정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을 받는 일도 어렵습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것도 교만이지만 사랑을 거부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하고 섬기려는 것을 탁 자르고 거부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삶> 공부 때 섬김을 받는 섬김도 있다고 배웁니다. 내가 열심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만 섬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섬기려고 할 때 그것도 섬김이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섬기지는 않고 나를 섬겨, 나를 섬겨라고만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섬겨주려고 하는데 됐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나이스한 게 아니고 잘못된 겁니다. 물론 늘 받기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섬길 기회를 주는 것도 사랑이고 섬김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해야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괜찮다고 하며 나이스하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상대방이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도 사랑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을 주게 되고, 그러면 주고 또 받고, 주고 또 받고, 그런 것을 위해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훈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9)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어떤 식으로 응답하신 겁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10a). ,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하셨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뜻을 아들 예수님께 알려주셨고, 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사랑을 받으니까 그 사랑에 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무슨 멋진 말을 하거나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건물을 지어드리거나 엄청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으로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다른 사람들, 형제자매들을 향해 사랑을 표현할 때에만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유행가 가사에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감정적인 사랑만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을 받기만 하라고 하면 그렇게 반발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사랑은 상호적입니다. 그러니까 혼자만 사랑해서는 사랑이 아닙니다. 혼자만 사랑을 받아서도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자기보다 남을 먼저 사랑하면 그 사랑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게 바로 그 부분입니다. 막 섬기려고 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참 드뭅니다. 사랑을 받고는 싶은데 나의 사랑을 주기는 싫으니까, 그래서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하다가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면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작년이 2020년이었는데 숫자가 아주 좋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냥 확 지나가버렸습니다. 올해 2021년도 여전히 코로나 상황 때문에 10월이 되었는데 시간이 후딱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그 다음 또 한 해가 가고 하는 것이 몇 번 쌓이면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무런 사랑의 실천을 하지도 못한 채 그냥 끝나고 말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삽니까? 대부분 내 것을 움켜쥐는 데 모든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가질까 애씁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도 하고, 노력도 하고, 심한 경우 남을 속이기도 하고, 사기도 칩니다. 왜 요즘 들어 사기 사건이 그렇게 많습니까? 인류가 발전하는 것 같은데도 지능범죄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 자기가 더 많이 가지겠다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자기 것을 막 움켜쥐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고, 그저 나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 편한 삶을 위해서, 또 내 편을 위해서 사랑하는 삶을 사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거기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기쁨과 만족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삶을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1)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은 결코 한가로운 때가 아닙니다. 이 고별설교를 마치자마자 곧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을 때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랑을 내 기쁨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 사랑을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기 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 기쁨이 충만해진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이 진실해지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십자가의 사랑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거기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거기서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기쁨이 오는 게 아닙니다.

 

물론 100만 달러 로토에 당첨되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세금을 다 떼고 자기 은행 구좌에 100만 달러가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너무 좋아서 자기가 평소에 사고 싶었던 것을 막 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쉼표 앞에 ‘1’ 자가 있었는데 하나가 줄면서 ‘9’로 바뀝니다. 그러자 사람의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실 90만 달러가 넘게 있어도 얼마나 부자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이것을 어떻게 지킬지, 어떻게 불릴지를 생각하니 염려가 오고 근심이 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정한 기쁨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가 사랑이고 그 다음이 희락 즉 기쁨입니다. 온유도 있고 양선도 있고 많은데 왜 사랑 다음에 기쁨을 썼겠습니까? 서로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홉 가지가 다 연관되지만, 사랑하면 기쁨이 온다는 겁니다. 기쁨이 없는 사랑은 진짜 사랑일 수 없고, 사랑이 없는 기쁨은 진짜 기쁨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괴로운 길이 아니라 기쁨의 길입니다. 지금 자기를 내어주고 희생하면서 막 사랑하고 섬김을 베풀 때, 그것이 물론 힘든 길이지만 이상한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섬겨보신 분들은 다 느끼실 겁니다. 안 섬겨보면 모릅니다. 섬김의 기쁨, 사랑을 실천하는 기쁨은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바로 그런 사랑의 실천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이 곧 기쁨의 삶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재물과 성공과 권력이 주는 기쁨밖에 모르는 세상은 결코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기쁨은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1:2). 순종과 사랑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 (12-15)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그 후에 말씀하시는데, 물론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랑의 삶을 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얼마만큼의 사랑입니까? 어느 정도까지 사랑해야 계명을 지키는 사랑이 됩니까? 그에 대한 답을 이제 주십니다. 우선, 계명을 지키는 것과 사랑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2)

 

13:34-35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십니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모델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편할 때만 하는 사랑, 내가 시간 있을 때만 하는 사랑, 내가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고 하기 싫은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면서 우리가 너무 좋아서, 우리가 너무 잘나서, 또 희생할 만해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까? 우리 한 명, 한 명을 보실 때 저런 사람을 위해서 내가 뭐 하러 목숨을 버리나?’라고 하실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조금 더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종종 사람들이 정말로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그것을 적용하셨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당시 어떤 주인도 자기 노예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가 주인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지, 어떻게 주인이 노예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여겨주신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4)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하면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처럼 예수님께 순종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종이 받는 정도가 아니라 친구에게나 어울릴 만한 영광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목숨을 바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 보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종인 우리를 너는 내 친구다.’라고 불러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자격에 걸맞지 않은 신분을 주시고, 또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주십니다.

 

그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싫은 사람은 안 하고, 자격 있는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내가 이 사람에게 이렇게 해주면 이 사람이 그것을 이 정도로 돌려주겠지?’ 하고 계산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꼽으라면 아마도 요한복음 3:16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새번역)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절이 바로 요한일서 3:16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새번역)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하시는 친구로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종은 누리지 못하는데 친구로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

 

여기서 이 헬라어로 둘로스라는 단어인데, 사실 노예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 친구라고 하십니다. 친구와 종의 결정적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아는 것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것을 친구인 우리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친구로 불린 사람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라고 하셨습니다. 또 장차 그를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는다는 계획도 알려주셨습니다. 또 모세도 하나님은 친구로 불러주셨고, 그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언약의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또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뜻을 알려주시는 대상이 하나님의 친구인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듣는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듣고 마음에 받아서 깨닫는 것이 아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바로 그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사랑하라고 강요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지를 먼저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비유(18:21-35)를 이야기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조금도 용서를 못하는지 말씀하시는 겁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깨달았으면 자기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정말 사람을 사람 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만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사랑만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사랑으로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사랑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받아 오셔서 줄기차게 이 땅에서 외치며 가르치셨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그래서 남을 섬기는 사랑, 다른 사람이 잘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깨닫는 앎의 축복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저 왜곡된 사랑, 뒤틀린 사랑, 사랑 비슷해 보이는 거짓 사랑,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랑만 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힘써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깨달음이 있는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받았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 하십니다.

 

 

3.   예수님의 택하심과 우리 삶의 열매 (16-17)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시면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6)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친구를 삼았다는 것을 여기서 택하여 세웠다라고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히 은혜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더라도 구원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우리가 감사합니다.’ 하며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예수님을 믿으신 분들이 많은데,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셔서 우리 교회에서 믿으신 분들은 생각해보십시오. 미국 땅이 이렇게 넓은데 왜 이 오하이오 그것도 콜럼버스로 왔을까? 이곳에도 교회가 많은데 왜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사람들과 연결되었을까? 초대받아서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다 보니까 여기가 목장이라고 하는데, 양이나 소는 없지만 목장이라고 하니까 그러냐고 합니다. 마음이 점점 열리다 보니까 교회에 나와 보실래요?’ 하니까 그러죠하고 나오고, 그 다음에 ‘<생명의 삶>이란 게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라고 하니 다들 좋다고 하니까 해봅니다. 그러다 , 이게 그거구나. 나도 믿어야겠다.’라고 결정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순간순간이 어떻게 다 내가 결정한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값비싼 은혜에 어울리는 삶은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고(14),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12) 하셨습니다. 그게 진짜 제대로 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로,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간다는 말을 볼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맺는 열매는 어떤 열매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열매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하여 거기서 믿고, 그 믿은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가 한 번 맺는 일회적인 열매가 아니라 항상 있는열매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런 신앙의 인격으로 증거할 때 지속적인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말로만 예수 믿으세요가 아니라, 평소의 삶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정말 존경할 만하고 저 사람이 믿는 예수는 진짜야.’라는 말을 듣는 삶일 때 저희 교회에 나와 보실래요?’ 하면 그 마음이 움직이지, 삶은 엉망이고 전혀 본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삶을 사는데 우리 교회에 오세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외면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또 하나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7절에서처럼 열매를 맺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전도의 열매,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맺되 지속적으로 맺게 하려고 주님께서 주신 방법이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고 전도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기도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삶을 살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7)

 

지금까지 죽 말씀하신 것이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겁니다. 자신을 희생해가며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물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결국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위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우리가 아무리 이것저것 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 감정으로 하는 사랑이나 내 마음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주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바로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어떤 엄청나고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작은 친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올바른 삶을 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정직한 삶을 살고, 남에게 베푸는 삶, 내가 조금 귀찮고 피곤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내어주는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어떤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입니까? 혹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을 때 좋은 교회를 찾아야겠는데,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이겠습니까?

 

매주일 좋은 설교가 선포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요즘처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유튜브 교회에 가시면 훨씬 좋은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헌금의 50-60퍼센트를 구제와 선교에 쓰는 교회도 아닙니다. 사랑 없이도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배 때마다 엄청난 은혜와 감격이 있는 교회도 꼭 좋은 교회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살짝 은혜만 받고 가서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분명히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삶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하는 교회, 그래서 모두가 마음을 합쳐 주님이 사랑하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회, 그리고 오래 믿은 사람들이 밑으로 내려가 새로 믿은 사람들을 섬겨주면서 사랑의 본을 보이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 아니겠습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제자임을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가라!’ 하십니다. 우리는 예배가 끝날 때마다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를 친구로, 제자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며, 또 그렇게 순종하며 나아갈 때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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