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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cVbQHjCF0GU?t=2151

 

 

2021321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7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요한복음 43~30)

 

[들어가는 말]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이자 책도 많이 쓴 저술가인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 시대의 교회에 대해서 이런 비유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 때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날이 참 덥네요. 여러분, 다 목마르시죠?” 그러면서 그림 한 장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아주 멋지게 생긴 컵에 들어 있는 생수 한 잔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다이아몬드 생수입니다. 이것을 마시면 얼마나 시원한 줄 아십니까?”

 

그는 또 한 장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프랑스산 에비앙 생수입니다. 이것을 마시면 온 몸이 짜릿하고 속이 아주 시원하게 씻어져 내립니다.” 또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이것은 일급수에서 퍼온 샘물입니다. 이걸 마시기만 하면 내장이 다 깨끗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물 그림을 보여주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저 물을 마시고 싶다.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싶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목이 안 말랐던 사람들도 물을 마시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그 물을 한 잔만 마셔봅시다.’라고 말하면 오늘 설교 끝!’ 하면서 바로 끝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계속해서 그림만 보여주고 실체인 물은 보여주지 않으며 겉도는 말만 하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특징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또 비싼 생수의 그림만 보면서 마치 시원한 물을 마신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또 우리 자신이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단지 말씀만 듣고 가서는 안 되고, 성경을 읽을 때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생수를 받아 마셔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참 목마른 인생입니다.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목마름의 문제를 지닌 채 살아가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목마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배의 문제를 들먹이고, 메시아가 와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 우물의 역사적인 배경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이 마릅니다. 이 갈증을 채워줄 사람도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 (3~6)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3-4)

 

이전에 살펴보았듯,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다음에, 3장에서는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 구원, 영원한 생명, 거듭남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이제는 유대에서부터 원래 활동하시던 갈릴리로 다시 가십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대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십니다.

 

4절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러나 그분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셔야만 했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 길밖에는 없는 것처럼 설명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다니지 않았습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로 올 때, 남쪽 유대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라가 나뉜 다음,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주전 722년에 멸망합니다. 그때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른 데로 보내며 조금은 남겨놓고, 또 다른 지역에 있는 이방 민족들을 이스라엘 쪽으로 데려와서 피를 섞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반역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정체성을 없애는 민족말살정책이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고 섞이면서 북이스라엘 지역에 많은 혼혈인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만 섞인 게 아니라 종교가 섞여서 이방인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원래는 사마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즉 도시였지만, 나중에는 그 지역을 사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후 포로로 잡혀 갔는데, 70년 후에 돌아올 때 유다 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그 지역에 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 하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을 짐승 취급하는 유대인들이 혹시라도 자기네 땅을 지나가면 그냥 두지 않고 가서 공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지나갈 때는 테러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리고에서 요단강을 건너 요단강 동쪽으로 올라가 벧산이라는 곳에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 서쪽 지역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우회해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통과해서 가셔야 했다는 표현은 반드시 지리적으로 가로질러 가셔야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빠르지만, 빠른 길이라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만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주도 되셔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환영받지 못할 줄도 아시면서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많은 사람을 뒤로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마리아를 향해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역적으로 그곳을 가셔야 했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로 가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5-6)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며 방문하신 곳이 수가인데, 여기가 바로 구약시대의 세겜입니다. 저번에 야곱의 생애를 살펴볼 때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떠나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 성 근처에 머물렀는데, 바로 그곳이 수가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정착하여 살면서 판 우물이 이 야곱의 우물인 겁니다.

 

보통 우물은 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파서 만드는데, 그러니까 야곱이 정착한 곳이 세겜 성 안이 아니라 세겜 성 근처에서 우물을 파고 정착해서 살던 바로 그곳에 있는 우물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또 야곱이 나중에 이름이 바뀐 게 이스라엘 아닙니까? 요한은 이중적 의미를 많이 담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복음서입니다. 왜 하필 야곱을 등장시킵니까? 야곱이 이스라엘입니다. 나중에 여인이 야곱보다 크냐고 물어보는데, 야곱보다 크신 분, 참 이스라엘이신 분이 여기 계시다는 뜻도 되는 겁니다.

 

이때 시간이 여섯시였는데, 이것은 지금의 낮 12시를 말합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낮 12시는 정말 뜨겁습니다. 오전 9시만 되어도 굉장히 뜨겁습니다. 그늘이 없는데 나가면 몸이 익을 정도로 뜨겁습니다. 정말 뜨거운 때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시원한 시간에 나오지 않고 아무도 나오지 않는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나온 것, 그것도 혼자 나왔다는 것은 이 여인이 굉장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하는 대인기피증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그 동네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험한 삶을 살았는데,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진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데, 순간순간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서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꼴좋다.’ 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비난했지만,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절망적인 상태 속에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이 여인에게 일부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 하러 이 땡볕에, 그것도 사마리아처럼 더러운 곳에 유대인으로서 왜 오시겠습니까? 완전히 이 여인 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겁니다. 유대인들이 절대 지나가지 않는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은, 이 지역 중에서도 수가, 즉 옛날 중심지였던 세겜으로 가셨고, 또 하필 뜨거운 낮 12시에 가셨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이 여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이 시간에 여기를 나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때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아까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만든 분이 굉장히 잘 표현했다고 보입니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울고 있었던 네가 있어서.” 이 여인이 있어서 여기 오신 것이 아닙니까. “햇볕이 따갑고 그늘도 없는 낮에 나는 기다렸단다, 네가 내게 오기를.”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여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이 여인이 옵니다.

 

그 노래의 가사처럼, 이 여인은 너무 답답하고 비참하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욕을 하면 자기도 쏘아주고 거칠게 욕을 해대는 아주 난폭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은 썩어 있습니다. 상처로 가득합니다. 밤마다 남들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그런 여인입니다. 바로 그 전날 밤도 그렇게 울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러다가 남들이 오지 않는 열두 시에 나왔는데 그때 예수님은 이 여인이 올 것을 아시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2.   대화를 통해 여인의 마음을 파고드시는 예수님 (7~18)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7-8)

 

예수님은 먼저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며 말을 거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가 이상한 일입니다. 첫째는 여인이 대낮에 물을 길러 온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을 거신 일입니다. 둘 다 그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이상하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우물은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로 위치해 있었으니까, 여인들은 그 먼 데까지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오지 않습니다. 대개 아침에 오든지 아니면 저녁 때 오든지, 시원한 때에 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무도 오지 않는 이때 왔다는 것은, 보기 싫은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자기가 노출되기를 싫어했든지, 그런 이유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사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여자에게,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 당시 요즘 같은 신문이 있었다면 예수, 사마리아 스캔들을 일으키다라는 제목을 뽑을 만한 일입니다. ‘여인과 몰래 만나’, ‘겉으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면서 뒤로는 내로남불이라는 식으로 나올 게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완전히 원수였고, 유대인 남자는 어떤 여자든 밖에서 혼자 만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아내와도 밖에서 말하면 안 됩니다. 한낮에 물을 길러 온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때 오니까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9)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요한이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시각이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지난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도 그렇고, 요즘 들어 엘에이나 뉴욕 같은 데서 아시아계 어르신들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와서 때리거나 밀어서 다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계를 타겟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이 흑인을 죽이는 바람에 큰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런 인종적인 차별과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 말은 당신네는 당신네고 우리는 우리이고,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서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수로 보는 사이인데 왜 말을 거느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같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나눕니다. 구분을 넘어서 차별을 합니다. 다른 것을 구별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게 차별로 갑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차별을 했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했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사람들이라도 한국 같은 곳을 보면 얼마나 계층 간의 갈등이 많습니까? 자꾸 구분하고 그것을 넘어 차별합니다. ‘나는 너희와 다른 사람이다. 너희와 우리는 상종할 부류가 아니다.’ 하며 자꾸 나눕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만나서 이야기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자꾸 벽을 만드느냐?’ 사람들은 벽을 만들어서 쌓아 막고 서로 보이지 않게 하고는 우리는 우리끼리, 너희는 너희끼리 살아라. 여기로 넘어올 수 없다.’라고 하며 선을 탁 그어놓습니다. 이런 것은 지금까지도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를 포함시키셨습니다. 그것도 원어를 보면 유대와 사마리아를 같이 묶으셨습니다. 1번은 예루살렘이고 2번이 유대와 사마리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에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깨달은 사도 바울도 예수님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 없다.’ 하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복음이야말로 차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 외에 이런 차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종갈등, 차별, 계층간의 갈등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지 무슨 정책이 아닙니다.

 

정부들이 정책을 세우는데, 물론 해야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해결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죄성 때문에 자꾸 구별하고 차별하고 나누려는 게 있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책을 세우면 억지로 따라가는 것이지, 그게 어떻게 근본적인 해결이 되겠습니까? 정말 복음만이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단순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당 갈 것만 바라보며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웃이라는 겁니다. 자꾸 구별 짓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사마리아 여자가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물을 달라고 하면 주거나 싫다고 하면 되지만, 이 여자가 벌써 이런 편견에 꽉 사로잡혀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까칠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 보면 이 여자가 대화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이 유대인으로 사마리아 사람인 내게...’라고 길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 싫은데요.’라고 하든지 꺼져!’ 하면 끝인데, 길게 말을 하는 이게 뭡니까?

 

아무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놀랍게도 남자가, 그것도 유대인 남자가 말을 걸어주는 겁니다. 남자니까 경계했을 겁니다. ‘이거 나에게 무슨 수작을 거는 게 아닐까?’ 보니까 유대인입니다. 물을 달라고 했을 때 경계하는데, 말을 걸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던 네게, 아무도 오지 않았던 네게, 그 누구도 찾지 않았던 네게, 내가 지금 간다.” 그 노래 가사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외로운 사람, 소외된 사람이 가장 고마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말을 걸어주는 겁니다. 그때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거나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고마운 겁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찾아와서 말을 건다는 것은 뭡니까?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뿐더러,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에게 절대 말을 안 겁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물 좀 다오.” 그러니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란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물을 가지고 이야기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오지 않았습니까? 니고데모는 굉장히 학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수준에 맞게 대화를 해주셨고, 이 여자는 물을 길러 온 사람이기 때문에 물을 매개체로 삼아서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눈높이에 맞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0)

 

지금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해놓으시고서는 오히려 거꾸로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달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내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 남자라는 문화적, 역사적 한계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사실 이 여인에게 다른 차원의 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매개체로 삼으신 것뿐입니다. 여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물이라는 것으로 대화를 하신 것뿐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1-12)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이 오히려 자기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습니다. 이 우물은 아주 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시 다른 동네 사람이나 외지인이나 유대인이 몰래 와서 우물물을 마실까 봐, 열어놓긴 했지만 물을 길을 수 있는 두레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진 동네 사람들만 가지고 나와서 물을 길을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는 게 무리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서 생수를 구하여 주겠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때 예수님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3-14)

 

그러니까 이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물을 숨겨놓았나 하고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대답입니다. 목마름이 해갈되는 해답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마시는 사람 안에서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제는 물을 가지고 영생으로 이야기 주제를 옮기십니다. 그러자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5)

 

이 여인은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다니까, 그럼 자기에게도 달라고 합니다. 왜 그 물을 원합니까? 그 물을 마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면 다시 이곳에 물 길러 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물을 길러 오고 싶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고,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고, 그들로부터 피하여 조용히 숨어서 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여자가 그런 물이 진짜 있어요? 그럼 저에게 좀 주세요. 꼭 갖고 싶어요. 제발 주세요.’ 하고 믿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겉으로는 거칠게 보이며 불량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마치 껌을 짝짝 씹으면서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래요? 그럼 줘 봐요.’라는 식입니다. ‘아우,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줘 봐요, 한 번.’이라고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이런 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자기가 여기서 계속 물을 뜨고 있는데 그런 물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여자는 그 동안 너무 소외된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게 두렵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아예 걸어 잠그고, 또 상처를 받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세상과 단절되어서 사는 여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시는데, 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주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6)

 

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이 여인은 뭔가가 머리를 꽝 치는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무슨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까? 남편이 궁금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이 여인의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금세 다시 목이 마르듯이, 예수님은 여인의 영적 갈증, 즉 지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 그것이 해결되어야 이 갈증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이 여자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이 여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7-18)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을 때 이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굉장히 뻔뻔스럽게 이야기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작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했을 것입니다. 얼굴이 뻘개지면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상처가 드러날 때 당황합니다. 그런데 당황할 때는 그것을 가리려고 합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수 있었습니까? ‘없긴 뭘 없어? 다섯 명이나 있었잖아. 왜 거짓말 해?’라고 야단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네 말이 옳다. 네가 한 말이 맞는다.”라고 일단 긍정해주십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면 당신, 왜 이래?’ 하며 찌를 텐데, 예수님은 그 말이 맞는다고 하십니다. 이때 야단을 치셨겠습니까? 아주 부드럽게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다. 지금 동거하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는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여자는 왜 남편이 없다고 했을까요? ‘어떻게 알았지?’ 하며 굉장히 놀라고 너무 창피했을 겁니다. 빨리 도망가고 싶었을 겁니다.

 

지금 시대에도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다면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다섯 번 결혼하고 다섯 번 이혼한 것인지? 아니면 사마리아 사람들도 모세오경을 믿었기 때문에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형사취수제도, 즉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남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대를 잇도록 하는 것 때문에 남편이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문란하게 살았던 것인지? 우리는 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남편 몇 명은 결혼했다 이혼하고 몇 명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또 다른 사람과 사는데 그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 동거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정상적인 삶을 사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 당시는 이혼을 한 번만 하는 것도 큰일인데 다섯 번이나 그랬다는 것과 또 여섯 번째 남자가 있다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3.   참된 예배 (19~24)

 

이때 여자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19-20)

 

이것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자는 자기의 아픈 곳을 찔리니까 재빨리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린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정말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이 안 되고 있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선지자이신 것, 자기의 이 모든 것을 알 정도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다면 이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한 답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예배 이야기를 꺼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합니까?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산, 즉 그리심 산에서 사마리아 성전을 세워놓고 예배하는데(주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파괴함), 어디서 예배하는 게 맞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1-22)

 

이것은 유대인 우월주의가 아니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으니까 자신에게서 난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에서 해라.’ 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하며 장소를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예배의 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3-24)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서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과거의 상처와 비밀과 은밀한 죄를 그냥 숨겨둔 채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든지,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든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진짜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그냥 몇 명이 모여 예배를 하든지, 엄청나게 몇 천 명,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에서 예배를 하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영과 진리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모든 죄를 회개하며 드러내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물로 시작해서 점점 더 영적인 세계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게 된 겁니다. 수년 동안 방황했던 여인, 아무 소망이 없었던 여인, ‘나는 매일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며 그냥 숨을 쉬니까 살아 있는 여인,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기 싫고 마지못해 살아가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 삶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4.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 (25~30)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5-26)

 

지금 이분이 그분이 아닌가?’ 하며 물어보는 겁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오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겁니다.” 그러자 내가 그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의 삶이 변화가 됩니다. 어떻게 변화가 됩니까?

 

첫째는, 물동이를 버린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8)

 

물동이는 자신의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한 이 여인의 노력을 상징하는 겁니다. 상처를 안고 있었음에도 삶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우물가에 왔어야 합니다. 그토록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고 마주치기도 싫어서 한낮의 땡볕 정오 시간에 혼자 나왔지만, 그 물동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동이가 있어야 물을 뜹니다.

 

여섯 명의 남자들도 자기 마음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계속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모든 것이 채워지니까, 이전에 그토록 절박했던 것들이 이제는 별 것이 아닌 게 됩니다. 별로 안 중요합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갑니다.

 

두 번째는, 동네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한낮에 물을 길러 나갔는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관계가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29-30)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전하는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여인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됩니다. 여인이 한 말을 보십시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지금까지는 꼭꼭 숨기고 있었고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도 사실은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이 모태신앙으로 부모님 때부터 내려와서 예수님을 만났든, 아니면 중간에 누군가가 전해줘서 만났든,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지금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동이를 놓아두고, 나를 변화시킨 예수님을 전하는 삶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으로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놀라운 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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