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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mKFueEogKG8?t=2178

 

 

202127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

많이 용서받고 많이 사랑한 여인

(누가복음 736~50)

 

[들어가는 말]

 

우리가 예배당에 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지가 어느덧 11개월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작년 9월부터 30명까지 제한을 두고 넓게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어, 소수라도 매주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그것도 아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 의자에 턱 앉습니다. 그 사람의 옷은 다 낡아 떨어졌고 몸 전체가 아주 더럽고 냄새가 납니다. 딱 보아도 그는 homeless라는 것을 모두가 느낍니다. 우리와 같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빨리 나가주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그는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광고시간이 되어 방문자를 소개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왜 자기는 소개를 안 시키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 이름을 소개합니다. 또 아주 불량하고 뻔뻔한 자세로 “I need your help. Give me money.”라고 하며 집에 갈 돈을 달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굉장히 당황스럽고, 불편하고, 불쾌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오래 전에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영어예배를 담당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예배당으로 걸어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 겁니다. 딱 보아도 거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막 떠들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다가 상당히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와 아주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갑자기 그 자리에 한 여인이, 그것도 모두가 죄인이라고 아는 여인이 들어와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작년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지난주까지 오랫동안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았는데, 오늘부터 몇 주 동안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삶이 회복되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오늘 본문의 한 여인을 통해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회개한 죄인의 경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세리나 창녀나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같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밑바닥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누구의 집으로 가십니까?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6)

 

여기 보면,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십니다. 40절에 보면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위선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러나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셨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고 책잡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고소할 근거를 찾기 위해 자기 집에 초청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그 자리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7-38)

 

그 당시에는 어떤 집에 잔치가 벌어지면(특히 이런 유력한 사람의 집에 잔치가 벌어지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거나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었고, 또 손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자도 사람들이 몰려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7절에서 이 여자를 가리켜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하는데,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던 여자라는 말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여기 나와 있지 않지만, 평소에 사생활이 문란하고 행실이 부도덕한 거리의 여자였을 것이고, 그 동네 모든 사람이 볼 때 죄인이라고 아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오는데, 그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니라 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그 비싼 향유를 붓습니다.

 

만약 제가 이 여자라면, 아무리 예수님의 발이라도 절대 발에 입을 맞추지는 않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길이 얼마나 먼지투성이였겠습니까? 지금 포장된 도로라도 샌들을 신고 다니면 먼지가 다 묻는데, 그 당시는 다 비포장도로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균이 많고 더럽습니까? 그런 길을 걸으시던 예수님의 발은 아주 더러운데다가 냄새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심지어 값비싼 향유까지 붓습니다.

 

내가 이 여자라고 생각하고 이 장면을 한 번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눈이 어떻겠습니까? 깜짝 놀라면서 경멸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키면서 서로 수군거립니다. 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저 여자 좀 봐. 자기가 누구라고 뻔뻔하게 여기를 들어와? 저런 더러운 죄인이 지금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지금 그런 상황이 이 여자라고 마음이 들겠습니까? 빨리 빠져나와 도망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수치스러움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자기를 경멸하는 눈길로 쏘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 앞에 와서 울며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고 닦았습니다.

 

왜 이 여자는 굳이 이런 행동을 합니까? 왜 지금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 앞에 굳이 나와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이것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여인이 행한 이런 일들을 보면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지으며 살겠다. 문란하게 살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여기 왔다면, 이처럼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러한 예배의 행위를 결코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주님을 향한 예배인데, 진정한 예배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 이곳까지 구경하러 들어올 수는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경멸하며 뭐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분명히 이전에 예수님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었고 형편없는 죄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부은 향유도 아마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되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언제 어디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었는지는 성경이 말해주지 않으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여인이 언젠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 사건을 보면서,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때 이 자리에 와서 주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변화된 마음을 나타내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인하여 감격했고, 그렇게 인도해주신 예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 같은 것도 변화시켜주시다니! 나를 받아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며 욕을 하고 경멸해도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 경배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의 변화를 보여드리고 싶고 또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신이 회개하고 변화되도록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체험했다면, 이처럼 겸손하고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정말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를 체험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변화된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삶이 바뀐 게 없다면 그것은 진짜 변화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성경을 읽기도 하고, 말씀묵상/큐티도 하고, 기도도 하고, 11독으로 성경통독이나 100일 안에 읽는 <말씀의 삶>도 하고, 삶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합니다. 또 교회에서 봉사도 합니다. 봉사자들의 섬김 때문에 이러한 예배도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합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합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에 예배드리고 봉사한다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들이 나오는데, 저번에 이야기했던 엘 샷다이’(전능하신 하나님)도 있고, 또 다른 이름이 엘 로이입니다. 이것은 보고 계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감찰하시고, 그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섬기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조금 오해해도 그래도 주님은 아시지. 주님은 다 보셨으니까 다 아시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니까 다 아시지.’ 하는 마음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반응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려움을 이기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 시몬의 비난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39)

 

이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을 본 집주인 시몬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굉장한 선지자라고 해서 자기가 비록 바리새인이고 고상한 사람이지만 특별히 저 떠돌이 랍비인 예수를 초청한 것인데, 지금 전혀 선지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정말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온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 것을 알았을 텐데. 죄인인 것을 알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이십니까? 선지자는 선지자이지만 선지자 이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바리새인 시몬이 어떤 사람인가도 아십니다.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시고, 시몬이 어떤 사람인지도 아십니다.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네.’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0)

 

여기에서 시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것을 못 알아본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 바리새인 시몬의 문제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저 죄인을 저렇게 못 알아보네. 저 여자는 죄인인데.’라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죄인인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한 개의 손가락은 남을 가리키지만 다른 손가락들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저 여자를 향해 저 죄인!’이라고 할 때, 자기도 죄인이라는 것은 전혀 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저 여자는 죄인이다.’라고 할 때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겁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할 때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겁니다. ‘나는 저 여자처럼 형편없는 죄인과는 다른 선한 사람이다. 의인이다. 의로운 바리새인이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1-42)

 

빚을 진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500 데나리온, 또 한 명은 50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노동자가 버는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50일 분의 빚을 졌고 한 사람은 500일 분이니까, 한 사람은 두 달 정도이고 또 한 사람은 거의 2년치 연봉 정도의 빚을 진 겁니다. 그런데 두 명 다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 누가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몬은 정답을 말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3)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짓는 죄의 양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무거운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은 가벼운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죄를 아주 많이 짓고 어떤 사람은 죄를 적게 짓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다 빚진 자라는 것,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500 데나리온이든 50 데나리온이든, 빚을 얼마나 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빚을 진 사람들은 스스로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이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시몬, 너도 죄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나 시몬이나, 주님이 보실 때는 둘 다 엄청난 빚을 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빚은 많은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50 데나리온은 500 데나리온에 비해 아주 적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 정도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잘 쓴 책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입니다. 필립 얀시(Phillip Yancey)라는 분이 쓴 책인데, 정말 놀라운 책이니까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어로는 <What's So Amazing About Grace?>이니까, 자녀들과 영어권 교우들도 읽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 책에서 얀시는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이며 신앙인이었던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는데, 파스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가 많은 것은 분명히 악이다. 그러나 죄가 많으면서 그것을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은 더 큰 악이다.”

 

그러면서 얀시가 그 말을 가지고 계속 설명합니다.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죄인과 의인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죄인으로 나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과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 바로 이렇게 보십니다. 사실 다 죄인인데, 자기 죄를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시몬도 죄인이며 영적으로는 지금 주님이 보실 때 완전히 파산한 상태입니다. 자기는 의인인 줄 알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의인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저 여자에 비하면 나는 너무 의인이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여인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너무 감사해서 주님께 나와 경배했지만, 시몬은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고 지금 저 여자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예수님 믿으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안 믿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왜 괜찮으냐 하면, 아주 악한 사람들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주로 형편없는 죄인들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만족해하며 난 저들에 비하면 참 괜찮은 인간이야. 이 정도면 됐어.’라고 합니다. 역사에 나오는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악한 독재자들, 또 테러리스트들을 보면, ‘나는 참 의롭다.’ 하고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왜 자기를 선한 사람과는 비교하지 않습니까?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과 비교해보면, 그래도 나는 의인이다.’라고 자신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훌륭한 역사의 의인들과 비교해볼 때 내가 그래도 더 괜찮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등 많은 책을 썼던 영국의 지성인 씨에스 루이스(C. S. Lewis)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만 너무 바빠서 위를 보지 못한다.”

 

아래를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밑에 있습니다. 거기 만족하며 살다 보니까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은 자기를 다른 죄인들과 비교하면서 ,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의인이다.’라고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놓쳐버린 채 의인인 줄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이 여자는 자기 밑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최악의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위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습니다. 그 손을 붙잡고 올라온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고, 그러나 그 내밀어주신 손길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그것을 붙들고 올라와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자기가 구원받을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3.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4-46)

 

지금 예수님이 이제 기회가 왔다고 막 불평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발을 닦아주니까 마사지 받아 기분이 좋아지셔서 그러신 것도 절대 아닙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놓고서도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할 의무를 전혀 하지 않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문화로 볼 때 이렇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려면 초대를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초대를 했으면 손님에게 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도 안 한 겁니다. 손님에게 당연히 할 것을 안 했다는 것은,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하긴 했지만 얼마나 우습게보고 있었는지, 자기 밑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시몬이 예수님께 해주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다 행했고 그 이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

 

<새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구절을 우리가 볼 때 조심해야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었기 때문에 구원받고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여자가 와서 많은 사랑을 표현했기 때문에 죄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사랑함이 많았다는 것, 많이 사랑했다는 것은 죄를 사함받은 결과로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48-50)

 

이것을 보면, 이 여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예수님은 구주이시며 자기 같은 끔찍한 죄인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 행하심을 통해 여인은 저분이 정말 메시아이시구나.’ 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 죄가 아무리 끔찍하고 그 동안 너무나 형편없이 살았다 할지라도, ‘저분은 분명히 나를 사랑으로 용서해주실 것이다.’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셔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가장 비싼 것을 들고 와서 자기의 사랑을 예수님께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경험한 분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계실 겁니다. 저처럼 태어나 보니까 교회를 다니고 그러던 사람도 중간에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 있지만, 믿지 않고 있다가 주님을 믿게 되어서 이 사랑을 성인이 되어서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오래 전 청소년 사역을 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있었는데 소위 문제아였습니다. 눈에도 독기가 보이는 학생이었는데, 10학년에 제가 있던 교회에 와서 12학년이 되었는데 변화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졸업하기 전 마지막 겨울수련회가 있었고 마지막 날 밤이 되었는데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숨어서 이상한 짓을 하고 혼내기도 했는데, 마지막 날 아침 예배를 할 때 그 전날 밤 기도하던 시간에도 아무 변화가 없어서 속으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 밝은 시간이 강사 목사님이 설교 후 기도를 인도하는데, 기도시간이 끝나고 나오는데 이 아이가 엎드려 있고 일어나지를 않는 겁니다. 뭘 하는가 봤더니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다들 노래하고 있다가 예배가 끝나고 다 나가는데도 계속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두 시간쯤을 혼자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저를 보는데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제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눈에 있던 독기가 사라졌습니다. 정말 은혜에 부딪히니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 후에도 그 학생이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순서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잘 보십시오. 탕감을 받은 다음에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42). 다시 말해, 사랑을 하니까 탕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을 받은 그 감격 때문에 너무 감사해서 사랑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또 여기서 조심해야 할 두 번째는, 47절을 볼 때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다 사랑하십니다. 믿는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은혜라는 말은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공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값을 지불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그 참혹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구원이 공짜로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거저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물이 선물로 받아들여져야만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선물을 들고 있는데 받는 사람이 안 받으면 자기의 선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는 것,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회개이고, 회개는 은혜로 가는 통로입니다. 회개하면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본문의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고 , 나도 용서받을 수 있구나.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용서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회개를 통해 그 한없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 중에 <The Message> 번역이 있는데, 영어 성경이지만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47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 여자는 많고도 많은 죄들을 용서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많이많이 감사했다.”

 

이게 맞습니다. 많고도 많은 죄들을 용서받았기에 많이많이 사랑한 것입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고, 거기에 자기를 욕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요한복음 3:16을 잘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317절도 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회개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자기가 아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고, 용서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죄인이 아니니까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왜 자기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몰랐습니까? 자기가 용서를 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데 뭘 용서 받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나가는 말]

 

뉴욕이나 시카고에 가보면 빌딩들이 아주 장관을 이룹니다. 높은 빌딩들도 많고 그 사이사이 낮은 빌딩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위를 보면 100층짜리와 10층짜리의 차이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도시를 지나갈 때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떻습니까? 100층짜리나 10층짜리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낮은 데 있습니다. 다 똑같이 낮게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의롭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눈물로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왔던 여인처럼, 우리도 주님께 나와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그분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부족하지만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지금 계속되는 이 코로나 사태 가운데 여기서 예배를 드릴 때 매주 오는 분들도 있고 가끔씩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예배를 드리시는데,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고 오히려 편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내가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를 측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많은 용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주님을 어떻게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회복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으로서, 오늘 주님을 향해 우리는 어떤 사랑의 행동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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