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8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

(사도행전 241~9)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교통법규를 어겨서 간 것 말고, 진짜 재판이 걸려서 법정에 서 본 경험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뉴스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면, 특히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일제 법정에 서는 장면을 보면, 저쪽에서 말도 안 되는 고소를 하고 없는 죄목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울분을 참지 못하다 제지를 당하거나 그냥 참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법정에 서서 억울한 고발을 당하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했다고 죄목을 씌우면 억울함을 느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고발을 당했습니다.

 

 

1.   벨릭스에 대한 아부 (1~4)

 

지난 2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과 대제사장들은 로마군 요새 안에 갇혀 있는 바울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에 대해서 더 물어볼 것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 공회로 불러오도록 천부장의 허락을 구하면, 암살단원들이 로마군 요새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해서 바울을 암살한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모가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졌고, 그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로 그날 밤에 470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여 로마 시민인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로 이송했습니다.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던 대제사장 무리와 암살단원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관련된 한 전설(?)이 있는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던 40여 명의 암살단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맹세 때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약 65마일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그 정도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65마일이나 떨어진 가이사랴로 이송되었다고 해서,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을 없애려는 계획을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1)

 

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된 지 5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몇몇 장로들과 함께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갑니다. 자기들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라는 사람과 몇몇 유대인들까지도 데리고 그곳으로 갑니다(9).

 

주후(AD) 48년부터 59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아나니아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를 몰래 횡령했을 뿐 아니라, 적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는 폭력도 행하고 몰래 암살도 했던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고 영적으로 이끌어야 할 영적 지도자인데 암살까지 서슴지 않았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니까 당시 종교가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타이틀만 대제사장이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배 속만 채우는 종교 장사꾼이었습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요즘 여러 종교에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에도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서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기독교를 내세우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불의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 여러 명의 고소인단을 이끌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총독 벨릭스의 가이사랴 법정까지 온 것입니다.

 

개역성경을 보면 대제사장 무리가 고용한 더둘로를 가리켜 변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나온 레토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rhetoric’(수사법)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웅변가연설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의 시기가 대략 AD 58~59년경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별도의 자격이 없어도 누구든지 돈을 받고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그리스 수사학으로 무장한 웅변가들 중에서 법률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정식으로 전문 법률교육을 받은 정통 법률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법정 변론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법률 자문이나 정책을 세우는 일을 하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 법률가들은 그 당시 웅변가들이 직업적으로 법정에서 변론하는 데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더둘로도 정통 법률가가 아니라 웅변가 또는 연설가로서, 돈을 받고 자신이 가진 법적 지식을 가지고 변론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법정에서 변론한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변호사와 비슷하지만, 나라에서 준 법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웅변가내지 연설가였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변호사와 다릅니다.

 

바울이 로마 총독에게 온 이상, 대제사장 무리가 총독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천부장으로부터 바울을 고소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서 4일 동안 열심히 대책회의를 하고 더둘로를 데려다 변론하도록 하며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들의 종교법만으로도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는 바울을 로마제국의 법으로 옭아매어야 했습니다. 로마법을 어겼어야 로마법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인 바울은 로마제국의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무리는 웅변가이자 법정에서 변호도 하는 더둘로라는 사람을 고용해서 총독의 법정에 온 다음, 바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더둘로의 연설 기술과 웅변술을 이용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또 더둘로는 돈을 받았으니까 최선을 다해 바울을 옭아매서 사형을 받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2-3)

 

총독 벨릭스가 헤롯 궁에 갇혀 있던 바울을 법정으로 데려오니까, 더둘로는 수사학과 웅변술로 무장된 사람답게 총독 벨릭스에 대한 찬사로 먼저 시작을 합니다. 먼저 고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인 벨릭스에 대해 찬사로 시작을 하는데, 이 찬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더둘로(Tertullus)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며 라틴식 이름도 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다가 헬라인으로 바꾼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라틴어를 아주 잘하는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시의 수사학을 잘 사용하여 자신의 변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AD 52년부터 59년까지 유대 지방의 11대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총독으로 있는 동안 유대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소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노예 출신으로 총독이 되어 매사에 뇌물을 밝히던 벨릭스는, 심지어 도둑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도둑 떼를 방관하고 놓아준 사람입니다. 그에 의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좋아진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벨릭스가 로마 황제 네로에게 불려가게 되어 무대에서 사라지는데, 그것도 역시 그가 권력을 남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더둘로가 벨릭스에게 벨릭스 각하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덤덤하게 말한 게 아니라 아주 크게 높은 톤으로 ~~ 벨릭스 각하~~시여!!!”라는 식으로 아부하며 연기를 한 겁니다. 벨릭스 덕분에 백성이 태평을 누리고, 그의 선견으로 많은 것들이 개선된 것을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로”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라고 하며 아부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 마구 띄워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실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벨릭스는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항상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물론 벨릭스 역시 유대인들에 대해 반유대인 감정을 기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네로 황제에게 벨릭스에 관한 탄원서를 올립니다. 그 기록이 요세푸스와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더둘로가 유대인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일방적으로 벨릭스에게 찬사를 보내며 특별히 우리즉 유대인들이 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기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냥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적대감을 해소하고 벨릭스와 유대인들이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지만, 실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벨릭스가 재판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말입니다. 적어도 벨릭스가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쉽게 묵살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54년에 네로가 로마의 황제가 되면서 벨릭스와 그의 형인 팔라스가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덕분에 팔라스가 성공했고 그 덕분에 벨릭스도 그랬으며 원래 노예 출신이었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것인데, 황제가 바뀌면서 위기에 빠졌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자기가 선 줄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위기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그 동안 폭정을 일삼았던 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니까 그의 입지가 아주 좁아진 상태였습니다. 팔라스는 54년에 네로가 황제가 되자마자 잘려서 바로 사라졌고, 벨릭스는 그 후 5년이나 더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59년에 계모를 살해한 네로 황제가 드디어 벨릭스를 파면하고 소환합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59년에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벨릭스 앞에 선 때는 그의 통치 말기인 AD 57~58년 정도 됩니다. 2년 동안 가두어놓았다고 나오니까 이때가 57년 정도가 됩니다. , 그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있고, 황제가 바뀌어 형도 파면당하고 아주 취약한 상태일 때 유대인 지도부가 와서 주장하는 것을 이전처럼 무시하고 강하게 거부하기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것을 알고 이 사람들이 와서 벨릭스를 찌르고 있는 겁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원성을 더 이상 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바울을 죽이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4)

 

이것도 더둘로의 굉장한 수사법입니다. 통치자를 향한 더둘로의 달변이 여기서 더욱 돋보입니다. 그는 벨릭스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더 많이 찬양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우호적으로 생각하는지를 더 많이 말해야 하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을 줄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뭐가 있어야 더 칭찬을 하지.’ 한 게 없으니까 겉으로 조금 칭찬해준 다음에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을 짧게 요약하는 것조차도 너그러이 들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더둘로 자신과 유대인들이 총독을 지극히 위하고 있도록 느끼게 만드는, 아주 기가 막힌 수사법입니다.

 

 

2.   바울에 대한 고소 (5~9)

 

이제 더둘로의 고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5-6)

 

고발 내용은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바울을 로마법으로 옭아매기 위한 핵심 사항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둘로의 첫 번째 고발 내용을 보면, 바울이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요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폭동이나 반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자꾸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의료 수준이나 방역 수준에서 전염병이 돌 때 그것을 막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실 전염병 때문에 그 후에도 역사를 보면 전염병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1세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전염병처럼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왜 위험한가 하면, 전염병이 퍼져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처럼, 바울이 가는 곳마다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종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면 벨릭스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고 나올 텐데, 가는 데마다 이 사람이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연결을 시키니까 벨릭스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총독으로 있는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소요와 여러 가지 소동으로 인해서 골치가 아픈데, 더둘로가 고발하는 내용이 만약 사실이라면 총독 벨릭스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두 번째 고발 내용은,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5)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하이레시스인데, 여기서 이단이라는 영어 단어 ‘heresy’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가 원래는 당파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더둘로는 불순한 무리를 가리키는 도당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나사렛 도당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빗댄 표현입니다.

 

전염병처럼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여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게 하는 바울은 한 개인이 아니라 불순한 무리의 집단인 나사렛 도당(이단)의 우두머리이므로, 바울이 하는 것에 따라서 그를 따르는 나사렛 무리들의 무장봉기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둘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고발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려했다는 것입니다(6). 이것도 벨릭스가 종교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성전을 더럽혀서 소요가 일어났다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더둘로가 고발한 이 세 가지 내용 중에 바울에게 실제로 해당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가짜이고 거짓말입니다. 더둘로는 단지 자신의 웅변술을 사용해서 그렇게 주장할 뿐입니다. 여기는 간단히 나와 있지만 억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연기력까지 더하면서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고발 내용을 가만히 보면, 이때로부터 약 30년 전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던 내용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사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예수님이 받으셨던 잘못된 고발들과 지금 바울이 당하는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이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정치적으로 소요를 일으키고 황제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그래야 로마법에 따라 예수님에 대해서 반역자에게 가하는 십자가 사형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더둘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모함으로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유대인들에게 고용된 웅변가이나 연설가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을 반란과 폭동으로 고소했습니다. 단순히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종교법이 아니라, 무장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정치범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그래야 바울이 로마법에 반역죄로 걸려서, 자기에게 이 사건을 의뢰한 종교지도자들이 원하는 사형 판결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치열한 법정 다툼이나 거짓 주장은 똑같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6절 뒷부분에 괄호 치고 “6하반절에서 8상반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달려 있는 주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24:6 하반절-8상반절에 다음 내용이 더 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으나 7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8 그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

 

이 내용이 어떤 사본에 있는데 그 사본이 적기 때문에 빼고 지금처럼 해놓았습니다. 큰 지장이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입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8-9)

 

더둘로는 자기가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지난주 <생명의 삶> 공부 때의 내용이 성경이었습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조작을 했다거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했다는 등 음모설이 많은데, 다 사실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것들에서 가짜를 뺀 것이지,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것만 가려서 뽑은 게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오히려 가짜들을 뺐습니다.

 

그런데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뭔가 하면, ‘사건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사상만 이야기하는가?’입니다. 1세기 당시 실제로 살았고 직접 보았던 사람은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살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나중에 유다나 빌립이나 도마 등 유명한 사도의 이름을 슬쩍 끼어 넣어서 도마복음이라는 식으로 나중에 나온 것들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상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주로 몽롱하고 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사실이 아니니까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랬다고 주장만 합니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총독 벨릭스에게 당신이 친히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말을 마칩니다. 이것은 이 연사, 이렇게 주장합니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더둘로는 총독 당신이 바울을 직접 심문하면 내가고발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 아니라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고발하는 이 내용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포함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이고, 이 모든 내용이 다 사실이란 말입니다. 자기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본문의 시점은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지 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제사장들은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자기들의 기득권을 더 넓히기 위해서 총독 벨릭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니까 더둘로의 마지막 결론은, ‘총독 당신은 당신에게 오랫동안 뇌물을 바쳐온 대제사장들이 원하는 대로 판결을 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습니다. 사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안 해주었다가 밝혀버리면 위험해지지 않습니까. 역시 더둘로는 노련한 웅변가였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이 말이 옳다라고 하는데, 대제사장들이 유대인들 여러 명을 데려온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응원단이나 박수부대입니다. 항상 뭘 할 때 보면 응원단을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 ~!” 하고 박수를 치며 앞에서 바람 잡고 분위기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려와 일제히 옳소!”라고 박수 치고 난리 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가 더 압박감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저히 준비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3.   이 시대의 더둘로

 

더둘로는 수사학으로 무장한 레토르’, 즉 웅변가였습니다. 웅변가는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이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합니다. 또 상대방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품위와 예의도 있어야 합니다. 부드러워야지, 자기가 아무리 옳아도 당신 말은 쓰레기요!’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주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둘로가 겉으로는 굉장히 예의를 갖추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보면 굉장히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품위 있고 고상하고 지성인이고 다 좋았지만, 속에 든 내용은 다 가짜였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다 거짓말입니다. 흔히 나쁜 말을 하는 것을 가리켜 세 치 혀를 놀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혀를 사용해서 거짓말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이야기하고 고발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는 돈 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재판을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법에 바울을 옭아매어 죽이기 위해, 자기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수사학과 웅변학과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지금 바울이 사형을 받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포장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을 하겠습니까? 요즘 민주주의 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옛날 고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로마가 이런 식으로 법 제도를 갖추어놓아서 이 정도이지, 다른 나라들은 형편없었습니다. 왕이 원하는 대로 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겁니다. 조선 역사만 봐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인이 아닌데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둘로도 나쁘지만 더둘로를 고용해서 바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도록 부추긴 대제사장들도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누가 더 악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둘로도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고, 사실이 아닌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오직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갖 거짓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더둘로와 같은 사람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들만 더둘로 같은 사람들입니까? 나는 아닙니까? 나는 진실만 이야기했습니까? 만약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녹음되어 지금 여기서 튼다면 나는 다 진실만 이야기했다고 100%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가끔 전화가 잘못 걸릴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전화했던 것이 나중에 잘못 눌려서 걸린 겁니다. “여보세요했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서 그냥 끊는 게 보통인데, 가끔은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혹시 저쪽에서 내 욕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십니까? 조금 전까지도 안녕하세요? , !” 하고 끊었는데 그 사람 말이야, 사람이 못됐어.”라고 합니다. 남들이 보고 들을 때는 벨릭스 각하여라는 태도인데, 뒤에서는 저거 뇌물이나 밝히고 말이지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나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둘로는 옛날 벨릭스 법정에만 있던 것도 아니고, 지금 저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바로 더둘로인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6계명이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여기 살인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총 쏴 죽인 것도 없고 칼로 찔러 죽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명한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1-22).

 

라가라는 말은 바보라는 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자매를 가리켜 바보 멍청이다.’ 또는 미련한 놈이다.’라고 욕하는 것 자체가 벌써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격 살인, 언어 살인입니다. 지금까지 상처 받은 것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가 언제입니까? 누가 나를 팍 때렸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상처는 평생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내가 무슨 죄인인가? 나는 죄 지은 게 없는데 자꾸 죄인이라고 하나? 왜 기독교는, 교회는 자꾸 죄인, 죄인 하나?’라고 합니다. 그것은 범죄(crime)를 생각하니까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준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자녀 있는 분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화가 나서 막 소리 지를 때 아이에게 상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그 상처가 아이의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또 나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아니면 어떤 어른으로부터 너는 쓸모도 없는 놈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평생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 한마디도 정말 그런 적이 없었는가? 어떻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앞에서 남이 볼 때는 부드럽고 지적이고 고상하게 하지만, 그 사람과 헤어져서 올 때 인간이 틀렸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겠습니까?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다 듣고 계십니다. 말로 죽이는 게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는 않았다 해도, 말로 살인을 하는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가 그 사람을 욕하는 순간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원래 분노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거가 요한일서 3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며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자.”라고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흉기를 들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그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말로도 하지 말아야 하고, 말로 내뱉지 않았다 할지라도 생각까지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돈 때문에, 자기 이익 때문에 서슴없이 남을 죽이는 일, 그리고 실제로 남을 죽이는 일까지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고 하셨습니다. 왼뺨을 맞는다는 것은 왼손으로 맞는 것인데, 왼손으로 맞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니면 손등(백핸드)으로 맞는 것은 더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욕적으로 맞았다 해도 왼뺨도 돌려대며 여기도 때려주세요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손해 보는 게 아니고 오히려 평안을 얻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샘솟아 오릅니다. ‘, 내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나? 이전에는 말로 상처를 주고 남을 해코지하려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맞으면서도 기쁨을 느끼나?’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주는 삶, 원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줄 때 거기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더둘로라는 사람은 돈 때문에 자기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한 수사학과 웅변학 등을 사용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형을 받게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벨릭스에게 뇌물을 줄 수 없었고(물론 있어도 주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사람을 복음으로 살리려고 하다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함께 있지, 거짓으로 혀를 놀리는 더둘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헤롯 궁에 갇혀 있는 가난한 바울과 함께해주셨고, 그를 통해 인류의 역사까지 바꾸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인생입니까!

 

우리도 평소에는 고상하고 지적이고 문화인이고 현대인이지만, 내 이익이 딱 걸린 어떤 일이 있으면 더둘로 같이 돌변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더둘로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가난해도 영혼을 살리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서의 몇 십 년 또는 100년 정도가 다가 아닙니다. 이후의 삶은 셀 수 없는 영원한 삶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 긴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올 때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해주십니다.

 

어떤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종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