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9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4

이는 로마 시민이라

(사도행전 2222~30)

 

[들어가는 말]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읽었습니다. 하루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목구멍에 가시가 돋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술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존경하는 은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술꾼은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었는데, 은사가 주신 그 책에는 술이 사람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 얼마나 독약인지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다 읽은 이 술꾼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내가 이것을 절대로 안 하겠다. 이걸 또 하게 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결코 다시는 안 할 것이다, 책 읽기를.’

 

술을 끊겠다고 할 줄 알았더니 책을 안 읽겠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 많습니다. 정말 중요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놓치고, 엉뚱한 것을 중요하다고 붙잡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성이 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히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을 듣게 되면,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분별하고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냥 거부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냥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확신과 반대된다고 보이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분노하고 아예 없애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면서 행동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21장 끝부분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없애버리자고 소리치며 난리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소위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는데, 바로 그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사실은 그런 모습이 요즘도 많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우리도 정신 차리고 깨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해로운 술을 끊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한 책을 끊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엉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유대인들의 소동 (22-23)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2-23)

 

읽기만 해도 얼만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도 바울의 구원 간증을 잘 듣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저 놈을 없애버리자! 죽여버리자!” 하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은 것은 바로 앞 21절에서 바울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셨다는 바울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땔감 정도로 생각했고, 개라고 무시했으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부정한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런 형편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종을 보내신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게다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더러운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에서 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철저히 신봉하는 유대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에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는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하고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11:17)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56:7)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바울 시대로부터 약 700년 전(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 사람인데, 그때 이미 하나님은 성전을 가리켜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믿음의 조상이며 유대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너는 복의 근원이다.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라고 처음부터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자기들만의 것이고, 하나님도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는 그러실 리가 없다는 잘못된 종교적 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에는 없는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신앙적으로 맞는다고 하는 게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말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앙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전해도 호응하는 사람들도 있고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반발과 저항이 굉장히 심해지고,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아닌 척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자기가 기지고 있는 관점과 반대되는 의견을 감당할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합니다. 가끔 저 사람은 참 쿨(cool)하다. 저런 소리를 듣고도 동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겉으로는 쿨한 척하는 것이지, 마음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격자와 비인격자의 다른 점은,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잘 소화하고 인내하며 잘 해결하려 애쓰는 사람이 인격자이고, 그렇지 못하여 그대로 표출하는 사람은 비인격자입니다. 사실 인격자이든 비인격자이든,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관점을 접할 때 그것을 감당할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대화가 필요하고, 특히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확신이 다를 때, 종교 때문에 전쟁이 많이 일어나고,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추석 때 가족들이 모였다가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경우 더욱 강한 편견을 보이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제가 설교 때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사실은 일부러 안 하는 겁니다. 성도님들 가운데에도 의견이 다른데,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다른 분들은 소외감을 갖게 되고 불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적당히 중간에서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도, 아니 이사야를 비롯해서 자기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율법과 선지서들에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오래 전부터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저 더러운 이방 죄인들에게 거룩한 종을 보내실 리가 없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저 놈을 없애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마태복음 5~7) 마무리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께 주여, 주여하지만, 또 같은 시간에 같은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께 주여, 주여하면서 예배를 드리지만,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세례도 받았고, 주일성수도 하고, 헌금도 하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교회의 궂은일을 맡아 봉사도 하고, 직분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갈 리가 없다.’ 하고 생각하며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와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 나오는 게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정말 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직분을 맡고, 봉사를 하고, 종교생활을 잘하는 게 진짜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얼마든지 그런 활동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으면서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종교생활은 얼마든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관계가 있어야 순종도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고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비울의 구원 간증을 잘 듣고 있다가, 자기들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사명 간증에서 탁 나오니까 소리를 막 지르며 없애버리자고 소동을 부립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똑같이 저항하고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소위 보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을 볼 때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자기와 안 맞으면 막 욕을 하고, 또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막 독설을 퍼붓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이 맞습니다. 그 확신은 참 좋지만,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선택받지 못한 저 이방인들은 개다. 저것들은 지옥불의 땔감이다. 부정하다. 더럽다.’ 하는 논리와,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리가 없다.’라고 하는 데에까지 가는 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논리적인 생각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라고 확신하면서 헷갈리면 안 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논리적인 것이 성경과 안 맞을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적 진리는 우리 인간의 논리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게 말이 되나?’라고 할 만한 것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서 이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이 뭘 말씀해주는 것인지, 그 사이에서 혼동되면 안 되겠습니다.

 

지난주에 아주 귀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말씀도 듣고, 상담 받으신 분들은 좋고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곧 열리지만, 매년 이곳 콜럼버스에서 연합부흥성회를 가지면서 귀한 설교자들을 모시고 말씀을 듣습니다. 지금까지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내 생각과 다른 말씀이 들리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여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닫고 그것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곧 내 생각을 지지해주는 설교자를 찾습니다. 요즘에 유튜브(YouTube)만 보아도 엄청난 설교들이 올라와 있고 설교자가 차고 넘치게 많기 때문에, 그 중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듣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기 오류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베뢰아 사람들이 이것이 정말인가?’ 하고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던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설교자 개인의 생각은 아닌가? 이것이 과연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인가?' 하는 것들을 묻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과 전혀 다르고 엉뚱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게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뭔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제게 오셔서 따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닫아버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따라가게 되면, 자기에게 해로운 술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유익한 책을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혹시 하나님의 보내신 사도 바울의 복음 앞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무리와 닮은 모습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설교를 들을 때,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을 때, 또 간증집회나 연합부흥성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얼마나 설교를 잘하나 들어보자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올바른 말씀인가?’ 하고 생각하며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믿는 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을 보이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은 신앙의 열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다른 내용을 접할 때에는 무엇이 정말 옳은가를 살펴보는 태도가 필요하고, 서로 대화하며 생각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합니다.

 

 

2.   로마 시민권의 사용 (24-25)

 

이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해서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 당황한 천부장은 신속하게 바울을 로마군대가 있는 안토니오 요새로 압송하라고 지시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4)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 시민인데다가 헬라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바울의 요청대로 천부장은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더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아무래도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천부장이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군대 영내로 데려가게 한 다음에 도대체 이 바울이란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밝히고자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백부장에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5)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의 심문은 고문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심문하라는 상관의 명령대로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 태형 틀에 가죽 줄로 묶었는데, 바울 입장에서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울이지만 일이 이렇게 급하게 돌아갈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 보장이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은 채찍질이 무서워서 내가 로마시민인데 때리면 안 되지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많이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채찍질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채찍질을 당하면 심하게 다치기 때문에 제대로 기동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여기서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급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기 시작한 겁니다.

 

게다가 이것은 불법적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 서 있던 장교인 백부장에게 즉각적으로 항의를 합니다. “당신들이 로마 시민인 나를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이렇게 채찍질이라는 처형을 가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결코 잘못된 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시민을 정당한 재판 과정을 거쳐서 분명한 유죄 판결이 나오기 전에 때리고 채찍질하는 등 체형을 기하는 것은 로마법상 아주 부당한 일입니다. 그것이 발각되면 유죄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때린 모든 책임자가 문책을 당하고 다 잘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태형 등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로마시민이다.’라고 했으면 잡힐 일도 없고 맞을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로마시민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에서 딱 한 번 자기가 로마시민인 것을 밝혔는데, 그것도 맞기 전에 한 것이 아니라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고생을 다 한 다음에 풀어줄 때 그렇게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서 수입이 끊어진 주인들이 고발했고, 그래서 옷을 찢어 벗기고 몽둥이로 때린 후 투옥했습니다. 그때 등이 다 찢어졌으니 발이 벽에 붙은 사슬에 묶여서 엎드려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갇혔습니다(16). 그런데 그때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로 풀려나게 되었으며 간수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풀려날 때가 되니까 내가 로마시민인데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나를 이렇게 때린 게 말이 되느냐?’라고 했을 때 빌립보 지도자들이 와서 벌벌 떨며 제발 나가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지금까지 내세우지 않았던 로마시민권 이야기를 왜 이때 하는 것입니까? 채찍질이라는 것은 살짝 톡톡 치는 게 아니라, <Passion of the Christ>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가죽 끈의 끝에 짐승 뼈나 쇳조각 같은 것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휘두를 때 맞으면, 특히 쇳조각이 등에 박혀서 확 빼버리면 살점이 뚝 떨어지고 뼈까지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몇 대만 맞아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심한 경우에는 죽기도 합니다.

 

그렇게 잔혹한 고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할 사명이 있는데 여기서 죽음을 당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죽 줄로 묶여서 채찍질을 당하기 직전, 여기서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까지 가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드디어 백부장에게 내가 로마시민권자다.’ 하는 것을 밝힙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재판과 유죄 판결이 나기 전에 이런 태형에 가할 수 있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 없는 것을 제발 봐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로마시민권자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정당한 재판받을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자기를 여기서 빼달라는 게 아니라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어떤 위험이나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힘 있는 사람이나 높은 사람을 생각합니다. ‘누구를 만나야 해결될까?’ 또 반대 극단도 있습니다. ‘다 필요 없고 기도만 하면 된다.’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안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만 다닙니다. 쫓아만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믿음을 잘못 이해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님보다 자신의 특권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면해 보려는 얄팍한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어린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주셨는데, 바울은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기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는 죽을 자리가 아닙니다. 아직 자기에게는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므로,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불법이라는 지적하고, 자신이 가진 로마시민권자의 권리로서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믿음 없는 행동도 아닙니다. 진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 다음으로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사람만 찾아다니며 애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은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도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무조건 우리가 잘못된 압박을 당할 때 당하는 것이 잘하는 게 아니고, 가서 기도만 하겠다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상황 속에서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3.   천부장과의 대화 (26-30)

 

바울의 정당한 재판 요구에 대해 백부장이 상당히 당황합니다.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6)

 

백부장이 신속하게 자기 상관인 천부장에게 달려가 보고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천부장도 큰일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합니까?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27-29)

 

여기 보면 백부장의 보고를 받은 다음에 그럼 바울을 데려와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찾아갔습니다. 천부장은 큰일 났으니까 자기가 바울에게로 갑니다. 재빨리 와서 바울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로마시민입니까? 말해보시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로마법 집행을 위반한 사항에 해당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바울은 자기와는 달리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라는 겁니다이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천부장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말합니다. ‘나는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태생부터가 로마시민이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왕실이나 고위 귀족에게 많은 선물이나 후원금을 바쳐서 지금은 소위 스폰서라고 할 수 있는 후견인(patron)이 되어 시민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천부장의 이름이 나중에 나오는데 글라우디오 루시아(23:26)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Claudius)였는데, 그 이름을 얻은 것을 보면 많은 후원금을 통해서 횡제가 후견인이 되어 준 것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로마시민인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는 경우 당연히 로마시민이 됩니다. 그런데 외국인인 경우에는 로마군대에서 계급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20년에서 25년을 복무한 다음에 로마시민권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군대에 간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모가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말인데, 바울의 성이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인 그의 부모가 어떻게 로마시민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추정하는 것은, BC 60년경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유대 지역을 정복했는데, 그때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자유인으로 풀려나면서 로마시민권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부모가 그런 경우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교육 배경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적어 보입니다.

 

가장 높은 가능성은, 바울의 부모가 로마의 속주였던 길리기아 지방 다소에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로마 정부에 큰 기여를 해서 그 대가로 시민권을 받았을 가능성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권이 있었고 로마의 시민권도 있어서 이중 시민권을 보유한데다가, 민족적 배경으로는 유대인입니다. 그것도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고, 유대교 최고 스승이었던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 가문 중에서도 강력한 배경을 가졌던 집안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집안이 그저 그런 집안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얻었든지 간에, 당시 로마 시민권자를 정식 재판도 없이 함부로 잡아 가두고 쇠사슬을 채우고 채찍질 같은 벌을 가하는 것은 완전히 불법이었습니다. 누군가 그 부분을 말해서 밝혀지면 큰일 나고 엄청난 벌을 받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범죄 여부의 확인과 재판 과정이 없이 함부로 고문하고 폭력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두려움에 휩싸인 겁니다. 왜냐하면 로마시민권자를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함부로 다루면 자기가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가혹한 심문과 처벌을 당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 책임자이니까 벌이 가장 큽니다. 비울이 고발이라도 하면 천부장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천부장이 그래도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에 대해 두려워 할 줄 알았습니다. 보통 두려워해야 할 일에 두려워하지 않으면 상당히 문제인데, 이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부분이 올바른 삶을 향한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힘이 영원할 줄 알고 행동하게 되면 그 마음을 돌이킬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어리석은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바울을 보호해준 로마군 장교 천부장이나 바울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른 유대인들은 두 쪽 다 바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뭘 하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는데, 유대인 군중은 바울로부터 자신들이 그렇게 존중하던 구약 성경이 말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지난 번 어떤 일로부터 배운 바가 있는지 천부장에게 조심스럽게 처분에 대한 상의를 하며 보고했고, 천부장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이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다 실수를 합니다. 저도 실수를 하고 여러분도 실수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실수를 한 것을 깨닫게 될 때, 유대인 군중의 태도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천부장과 같은 태도를 가질 것인가, 우리는 잘 선택해야 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로마 천부장은 아주 합리적이고도 올바른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격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바른 신앙 안에는 인격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좋은데 욕설만 한다든지, 믿음은 좋은데 어떤 이상한 행동만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진짜 신앙인은 그 삶도 인격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정직한 분이시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나 천부장이 자기에게 있는 힘을 가지고 약한 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대로 눌러버리고 싹 없애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법대로 따라갑니다. 사실 천부장 입장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바울을 죽여 없애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이해가 안 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말로 자기가 로마시민이라고 한 것을 어떻게 믿고 천부장이 벌벌 떨며 쩔쩔 매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을 알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이 자기가 로마시민이라고 한마디만 뻥긋 하면, 그런데 그것이 가짜라고 밝혀지면 사형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자기가 로마시민이라고 사기 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자기가 로마시민이라고 밝혔다면, 조금만 알아보아도 시민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위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방향으로 바꾸는 데 이 천부장이 사용됩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30)

 

천부장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보여주는데, 그 행동 중 첫 번째가 바울의 결박을 풀어준 것입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신속한 대응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로마식 재판을 하기 전에 먼저 고발한 유대인들의 공회를 소집시킵니다. 우리의 국회와 같은 기관이며 종교문제만 다루던 유대인들의 공회(산헤드린)를 소집시키고 그들 앞에서 로마의 권한으로 보호를 해주면서, 정당한 고발과 피의자의 변호를 보장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 천부장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또 정확하게 일을 진행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경우들이 많았는데, 이 천부장은 인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실 지도자의 용기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행동을 바꾸는 것이 인격자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하면 체면은 떨어집니다. 내가 한 것이 잘못된 거라면 제가 실수했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인정하며 바꾸려 하면, 사실 자기 체면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인격자이고, 신앙인이라면 그런 인격자가 더욱더 되어야겠습니다.

 

로마시민인 바울을 적절한 재판 절차도 없이 가두고 채찍질 같은 형벌을 가하려고 형틀에 묶는 잘못을 자기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민권자인 바울이 그것을 지적했고, 그것을 깨달은 천부장은 즉시 자신의 잘못을 시정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유대인들의 공회로 데려갔습니다.

 

이 천부장은 당시 위치와 신분상 로마 법정이나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를 열 수 있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법정으로 바울을 보내기 전에, 적어도 유대인들의 이 고발과 고소가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을 불러와서 사실을 확인하고자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할 것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감정적 비난과 군중의 소리침과 무리한 고소와 모함과 거짓이 판치는 상황 속에서, 정확하게 또 공정하게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는,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이방인 지도자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21, 22장에서 계속 유대인들의 극악무도한 모습에 비해 하나님을 모르는 로마 지도자들의 올바른 모습을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를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여기서 우리에게 도전해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아까 제가 처음에 했던 술꾼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자기 제자가 여전히 술독에 빠져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은사가 찾아와서 그를 만났습니다. “자네 그렇게 살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네. 다른 책을 줄 테니까 이걸 잘 읽어보고 여기 써 있는대로 했으면 좋겠네.” 하며 책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비록 자기는 절대로 책을 안 읽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래도 은사가 찾아와서 그렇게까지 해주었으니까 또 읽어보았습니다. 다 읽고 나서 이번에는 정말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제는 내가 정말 결단하고 나아가야겠다.’ 하며 그는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저 선생님과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

 

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삶 속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뭔지,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여전히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버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붙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