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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8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2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평생소원

(창세기 221~14)

 

[들어가는 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의 가장 절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갈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 끝없이 애씁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웬만한 것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의 간절한 소원, 그토록 바라던 평생소원을 이루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최악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을 하지도 못합니다.

 

애나(Anna)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독신일 때부터 간절히 자녀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애나는 자녀를 낳아 아주 훌륭한 아이로 길러서 행복을 누리고 싶었고, 결국 소원대로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살게 해주고자 하는 의욕이 지나쳐 정작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온 과잉보호와 자녀의 삶을 시시콜콜 다 통제하려는 욕구가 애나의 가정을 불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애나의 큰 아이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며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보였고, 둘째 아이는 늘 분노를 보였습니다.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주고자 했던 애나의 욕심이 오히려 자녀를 망친 것입니다. 마음속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1.   내 마음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

 

왜 마음속 깊은 곳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는 게 오히려 재앙이 됩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것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1:23-25, )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벌은 죄를 지을 때 번개를 맞아서 죽는 것 같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벌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는 꿈을 이루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왜 최고의 형벌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그 갈망을 우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류의 역사를 여기서 한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가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 대상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놓아두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삶의 의미와 행복과 만족을 피조물에게서 바란다면, 결국 그 피조물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우리를 슬픔에 빠뜨리며 망가지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애나라는 여성은 자기 자녀들이 완벽한 삶을 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삶을 망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나는 자기가 자녀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우상이 되어 버린 두 자녀는 엄마의 지나친 기대에 짓눌려 망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성경의 중심인물입니다. 고대의 보통 남자들처럼 그도 가문을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고, 그것이 그의 마음속의 가장 절실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에게도 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면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 땅의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아브라함은 떠나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1-3)

 

하나님은 그를 불러 익숙한 모든 것, 즉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에게 안전과 평안과 형통을 준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정말로 따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이 갈망하는 거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대로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11:8,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자녀가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니까 거기서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12:7)

 

하나님께서 이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시려면 우선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는데, 결국 아브라함이 100세가 될 때 사라는 90세의 나이로 아들을 낳았습니다(17:17). 이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이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 그의 기다림과 인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아들을 바라서였는가?

- 하나님이 정말 주님이신가, 아니면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는가?

- 그가 얻은 평안과 겸손과 용감함과 안정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였는가?

- 그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는가?

-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분께 얻어낼 것 때문에가 아니라 그분 자체를 사랑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Not yet’, 즉 아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자녀를 간절히 바라던 애나는 마침내 임신을 하자 자신이 평생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자녀를 바라는 많은 부부들이 자녀만 낳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뿐 아니라, 이것만 통과하면, 이것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지만, 그게 아닙니다.

 

창세기 12~21장을 읽어보면, 고향을 떠나 아들의 출생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 충성했으니, 이제 행복하게 죽을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그 내용은 이보다 더 놀라울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1-2)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뭐라고 부르시는지를 보십시오. 그냥 이삭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부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애정이 집착을 넘어 숭배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삶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었지만, 이삭이 태어난 후로는 이삭을 사랑하고 이삭을 잘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의 무게중심이 하나님에서 이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절대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거짓 신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녀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거기서 우상숭배 같은 사랑이 싹틉니다. 그 우상숭배의 잘못된 사랑은 자녀를 숨 막히게 하고 결국 망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3)

 

사실 아브라함이 보기에 이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정말 이처럼 잔인하고 난폭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시며 다 빼앗아가는 하나님이십니까?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문화는 지금 우리의 문화처럼 개인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람들의 희망과 꿈은 결코 각자의 성공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집안의 일원이었으며, 아무도 가족을 떠나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공도 가문 전체를 위해서만 추구했습니다.

 

또 하나 고려할 것은 고대의 장자상속법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잃지 않도록 땅과 재산은 대부분 장남의 몫이었습니다. 현대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성인의 정체성과 가치는 대개 실력과 성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개인과 가문의 모든 희망과 꿈이 장남에게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그런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죄 때문에 장자를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다만 정규 제사나, 레위인의 성막 봉사, 또는 성막과 제사장에게 내는 속전으로 속량될 수 있었습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나는 주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축 맏배 대신 레위 사람의 가축 맏배를 구별하여 세워서, 나의 몫으로 삼아라.” (3:41,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던 애굽을 심판하실 때 마지막 형벌로 장자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각 집안과 온 나라의 죄 때문에 애굽의 장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장남이 곧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의 목숨이 속량되지 않은 한 당신의 소유라고 하신 것은, 곧 그 당시 문화의 가장 생생한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빚이었습니다. 그것을 갚기 위해 장자를 속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다면 그는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는 자기가 환청을 들었거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외아들의 생명을 취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대 사회에 살던 아브라함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합리적인 모순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장막에 들어가 그를 그대로 죽이라고 하신 게 아니라, 아들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브라함의 빚을 받으신 것입니다. 집안의 죄 때문에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던 아브라함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고 해서 덜 끔찍해지는 게 아닙니다.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다. 그래서 우리 죄 때문에 이삭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이삭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구원의 약속을 은혜로 이루실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갔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것입니까? 힌트가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5)

 

가 아니라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에 올라갈 때 아브라함은 자기암시를 걸거나 자기 의지로 가득해서 내가 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고 갔습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7-8)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그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신약(히브리서 11:19)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다고 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은 자세한 방법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장자에게 전가된 죄의 빚을 어떻게든 제하시고 은혜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저 하나님을 맹신했거나, ‘이건 정말 미친 짓이고 살인이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만 해.’라고 생각한 게 아닙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나는 안다. 이제 어떻게 하실지 나는 모르지만, 분명히 이번에도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보여주실 것이다.’라고 믿은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분노하며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낙심과 절망으로 인하여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자리에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았을 것입니다.

 

그가 모리아 땅을 향해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동시에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눈에 드디어 제사를 드릴 곳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9-10)

 

이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1-12)

 

그때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거기에서 발견되고,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풀어주고 아들 대신 그 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13).

 

이 사건의 핵심 교훈은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도 아주 잘 알았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잘 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올바른 사랑법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에 대한 테스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에 주님은 그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130:3-4,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할수록 우리가 더욱 주님만을 경외하게 된다는 것, 즉 주님께 전심으로 헌신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세상 무엇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나에게만 헌신하는 줄을 알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지 잘 모르셔서 이제 알아보려고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용광로에 집어넣으시고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정금처럼 되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이삭을 아브라함에 대한 테스트의 수단으로 삼으셨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세상 무엇보다 더 사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런 상태였고 이삭에게 푹 빠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상숭배이며, 모든 우상숭배는 우상과 우상 숭배자를 망하게 만듭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하나님을 가장 첫 자리에 모실 마음이 없다면 이삭은 아주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 명예, 성공 등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둘 마음이 없이 그런 것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아들을 사랑하는 것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이 우상숭배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애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애나가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아이들이 완벽하게 성공해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이기적이다. 사실은 아이들이 그렇게 됨으로써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문제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나는 아이들을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닦달하지 않을 것이다.’

 

애나는 자신의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녀를 과잉 통제함으로써 애나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자녀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막았습니다. 자녀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의 계획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애나가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만족은 자녀에게서 엄마, 제가 이렇게 잘된 것은 다 엄마 덕분이에요.’라는 말을 들으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듣고 싶은 그 말을 결코 듣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자녀에게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욕구가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를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애나는 기꺼이 하나님을 마음의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자녀를 그분께 맡기면서 실패를 허용하고, 그분의 사랑과 뜻 안에서 평안을 찾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애나도 모리아 산을 올라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리아 산을 올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여정을 마친 후에야 이삭을 지혜롭게 잘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삶의 주된 기쁨이고 목적이었다면, 백발노인이었던 아브라함은 이 아들이 완벽해야하기 때문에 그를 심하게 다그치며 훈육했거나, 아니면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으므로 너무 훈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는 둘 다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들을 응석받이로 기르면서도 그가 자기를 실망시킬 때면 지나치게 화를 내고, 매정하게 굴며, 심지어 폭력까지 휘둘렀을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상은 우리를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우상인 이삭이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에서 성공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랑이며 기쁨이 되었을 것이고, 혹시라도 이삭이 자신에게 사랑과 순종을 보이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지나친 분노와 불안과 우울증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100% 만족시킬 수 있는 자녀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결국 이삭은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은 아들이 되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 때문에 이삭은 아버지를 피해 떠나거나 마음이 뒤틀리고 망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속 우상을 다루심으로써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2)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사건에는 아브라함이 몰랐거나 그 당시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의미가 있습니다. 이삭은 왜 제물로 드려지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 가족의 죄는 그대로 있는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그냥 넘어가실 수가 있습니까? 물론 숫양이 대신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빚을 제하여준 것이 정말 숫양의 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먼 훗날 이 똑같은 산에서 또 다른 장자가 나무 위에 달려 두 팔을 벌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아들이 갈보리 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을 때는 하늘로부터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하는 소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참된 대속물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대신 죽임을 당하여 우리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벧전 3:18, )

 

여기에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는 실제적 해답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영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우리의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매달려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빚을 갚도록 요구하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 훗날 아브라함이 올랐던 곳과 같은 갈보리 으로 당신의 장자와 함께 올라가셔서 우리 모두를 위한 제물로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4.   나의 이삭을 바치라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고민거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잘 생각해보면 깨닫는 것이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우리 각자의 이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을 어느 정도 얻어 보려고 투자하는 대상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삭입니다.

 

삶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자신의 우상이 위협을 받거나 없어질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원한과 절망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갖는 감정들은 주로 이런 것들입니다. ‘평생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제 다 날아가 버렸어.’ ‘자식인 자기를 위해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감히 나를 이 따위로 대해?’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처럼 그 산을 오르며 이렇게 고백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이제 주님께서 저를 이것 없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만 함께 해주신다면 제게 정말 필요한 안전과 평안은 다 있는 것이고 결코 잃을 수도 없음을 믿습니다.’

 

일단 내가 만든 거짓 신을 하나님 아래로 강등시키고 나면 그 대부분이 우리 삶 속에 계속 남아 있더라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나를 지배하거나 불안과 교만과 분노와 실망으로 괴롭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의 의미를 착각하여 우상을 버릴 마음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면서 이삭을 정말 내놓지는 않고 제단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이 시험에서 떨어졌을 것입니다. 뭔가가 우리 삶 속에 남아 있어도 괜찮으려면, 그것이 더 이상 우상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정말 그것 없이도 살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는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중인데도 오히려 죽이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중이었지만, 겉으로 볼 때는 아주 매정해 보이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맹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감사에 찬 믿음이고 강건한 믿음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과 같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 같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삶 속의 해로운 우상들을 다루고 계셨던 것임이 판명됩니다. 그것은 고난을 거쳐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절하게 씨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아버지께 다른 길이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결국은 순종해서 갈보리 산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쁜 일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힘들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이미 해주신 일을 즐거워하면, 가장 어둡고 힘들어 보일 때도 꼭 필요한 기쁨과 소망을 얻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거짓 신으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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