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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3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10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라

(골로새서 31~10)

 

1.   누구에게나 있는 우상

 

이제 그 동안 살펴보던 이 시대의 거짓 신들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우상의 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자기가 우상숭배자라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거짓 신인 우상을 분별하지 않고는 크리스천으로서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것이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단지 많은 죄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문제입니다. 모든 죄의 근본이 사실은 우상숭배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1:21-25, )

 

이 말씀에 이어서 바울은 세상에 불행과 악을 일으키는 죄의 목록을 길게 나열합니다. 부끄러운 정욕으로 인한 성적 문란, 동성애,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림, 중상, 하나님을 미워함, 불손, 오만, 자랑, 악을 꾸미는 모략, 부모 거역, 우매, 신의가 없음, 무정, 무자비 등. 오늘 본문에서도 비슷하게 바울이 죽 나열합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많지만 이것들의 뿌리는 다 악착같이 (우상)을 만들려는인간의 충동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잘못의 원인은 언제나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이것을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십계명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계명으로 시작되는데 왜 그것이 먼저 나옵니까? 루터에 의하면, 율법을 어기는 근본 동기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하신 것이 제1계명인데, 이것을 어기지 않고는 다른 계명도 어길 수가 없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계명에서 10계명이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다른 것을 어긴다면 그것은 제1계명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맞는 답은 우리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답은, 우리가 각 상황에서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마음속에서 사람의 인정, 칭찬,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분별하지 않고는 문화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란 단지 예배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생활방식 전체이며, 피조물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상으로부터 돌이킬 때는 늘 그 우상이 만들어낸 문화도 함께 없애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들의 신들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여 섬기지 말 것이며,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을 본받지 말아라. 신상들을 다 부수고,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돌기둥들을 깨뜨려 버려라.” (23:24,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들의 신들을 배격하는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화를 거부하지 않고는 우상을 대적할 수 없고, 우상을 분별해서 대적하지 않고는 문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말씀을 전한 사건(17), 에베소에서 말씀을 전한 사건(19)이 좋은 예가 됩니다. 19장에서 바울이 에베소 도시의 신들을 대적하니까 새로 회심하게 된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 달라지면서 지역 경제가 달라졌습니다. 급기야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주동하여 지역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는 폭동으로 비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은, 우리 모두에게 우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우상은 모든 사람 속에 숨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우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상의 종류들이 많습니다. 이 목록을 보십시오.

 

1)  신학적 우상: 교리적 오류는 하나님 관을 심히 왜곡해서 결국 거짓 신을 숭배하게 만든다.

 

2)  성적 우상: 포르노나 섹스 중독은 친밀감과 수용을 약속만 할 뿐, 실제로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자신이나 파트너의 외모를 떠받드는 것이나 로맨틱한 이상주의도 여기에 해당된다.

 

3)  마술적, 의식적 우상: 마법과 비밀스런 의식들을 말한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일종의 마술로서, 초월적 실체의 참 질서에 사랑과 지혜로 복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힘써 반항한다.


4)  정치적, 경제적 우상: 좌파나 우파나 자유방임 등의 이념으로서, 정치 질서의 어떤 단면을 절대화해 최고의 해법을 삼는다. 자유시장을 신격화하거나 악마처럼 여기는 것도 그 예가 된다.

 

5)  인종적, 민족적 우상: 인종차별, 군국주의 국수주의 등이다. 민족적 자긍심도 적의나 압제로 변하면 여기에 해당된다.

 

6)  관계적 우상: 병적으로 의존하는 역기능적 가족관계, 부적절한 끌림, 자녀를 통해 대리 인생을 사는 것 등이다.

 

7)  종교적 우상: 도덕주의와 율법주의, 성공과 은사의 숭배, 종교를 빙자한 권력 남용 등.

 

8)  철학적 우상: 인생의 문제를 죄가 아니라 어떤 피조물로 보고,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보는 모든 사상 체계를 말한다.

 

9)  문화적 우상: 서구의 극단적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희생시켜 개인의 행복을 우상으로 삼고, 동양의 수치의 문화는 개인의 권리를 희생시켜서까지 가정과 가문을 우상으로 삼는다.

 

10)  근원적 우상: 동기적 욕구와 기질이 절대화된 상태이다.

       a) 권력의 우상: ‘남에게 행사할 권력과 영향력이 있어야만 삶의 의미와 내 가치가 있다.’

       b) 인정의 우상: ‘아무개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아야만 삶의 의미와 내 가치가 있다.’

       c) 안락의 우상: ‘특정한 쾌락과 삶의 질을 누려야만 삶의 의미와 내 가치가 있다.’

       d) 통제의 우상: ‘특정 분야에서 삶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만 삶의 의미와 내 가치가 있다.’

 

 

2.   내가 만든 거짓 신 구별하기

 

어떻게 하면 우상의 위력 속에 머물지 않고 눈이 더 밝아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가장 유익하고 건전한 결정과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우상을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기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 여기에 착안해서 시카고 Willow Creek Church의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도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Who You Are When No One’s Looking)>라는 베스트셀러를 쓰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안 볼 때 뭘 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것이 진짜 자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실제 신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이 relax하고 있을 때 저절로 흘러가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혼자 있을 때 즐기는 공상은 무엇인가? 무심코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상상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승진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수도 있고, 이상적인 집을 사는 것, 차를 사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복권에 당첨되는 것, 배우자가 아닌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한두 가지 공상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상숭배의 표시는 아닙니다. 그보다 이렇게 자문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혼자 속으로 즐거움과 안락을 얻는 대상은 무엇인가?’

 

 

2)  돈의 사용처를 점검하기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보면 자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1)

 

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쪽으로 저절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보면,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돈을 쓰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보면 내가 진짜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대상에게 지출하는 돈이 너무 많아서 항상 절제에 힘써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표시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고후 8-9),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과 자선과 구제에 정성으로 헌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무조건 많이 헌금하라고 한 게 아니라 자기 형편에 따라 기쁨과 믿음과 사랑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쓰이는 돈은 별로 없다면, 정말 사랑하는 건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옷이나 자녀를 위해, 또는 집이나 자동차 같이 지위를 상징하는 것들에 과소비를 합니다. 평소 돈의 씀씀이를 보면 우상이 드러납니다. 자기 형편에 맞게 하면 되는데, 너무 비싼 것이나 맞지 않는 것에 돈을 쓴다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이 뭔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3)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의 반응을 점검하기

 

열심히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이렇게 춥고 눈이 오는데도 여기 수요예배 나온 여러분 같은 사람일수록), 특히 유용한 우상 식별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있고(주일, 수요일, 새벽 등), 꽤 많은 성경 지식도 갖췄고,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최대한 시간을 내어 이웃을 섬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질문해보십시오. ‘일상 속에서 나는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 말고 나의 실제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닌가?’ 그 답을 아는 좋은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한 내용대로 응답이 되지 않고 희망이 꺾이며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나 서운하고 아쉬울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아픈 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낫지 않고 돌아가시면 좀 허전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잠시는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을 떨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내 인생이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한 것들은 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분노가 폭발하거나 깊은 절망에 빠진다면, 자기가 구한 그것이 실제로는 자신의 신, 즉 우상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박 넝쿨 하나 없어졌다고 막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하셨을 때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라고 씩씩거렸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분노하고 있다면 뭔가 그 안에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가장 통제하기 힘든 감정이 무엇인지 점검하기

 

고기 잡는 어부가 물이 소용돌이치는 쪽으로 가듯이, 우리 자신의 우상도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의 밑바닥에서 찾아야 합니다. 특히 좀처럼 걷히지 않는 감정(답답하거나 불안한 것)이나 뻔히 잘못인 줄 아는 행동으로 나를 몰아가는 감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뭔가가 있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만 할 것이 있는가?’

 

심한 두려움과 절망과 죄책감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내가 이토록 두려운 이유는 내 삶의 뭔가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인가? 내가 이토록 우울한 이유는 뭔가를 잃었거나 실패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 뭔가는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지금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미친 듯이 일하고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이것이 있어야만 만족과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서 자신의 감정을 뿌리째 뽑아보면 대개 거기서 우상이 고구마 줄기 딸려 오듯 쭉 딸려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을 향해 던지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네 마음의 신뢰, 집중, 충성, 섬김, 두려움, 기쁨에 대해 진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뭔가가 있느냐? 누가 진짜 주인이냐?’ ‘삶을 지속시켜줄 안정과 편안과 안전을 얻고자 네가 의지하는 대상은 누구 또는 무엇이냐?’ ‘인생에서 네가 정말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냐? 무엇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느냐? 무엇이 있으면 남들에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어디서 성공을 찾고 있느냐?’

 

이런 질문들을 통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지 우상을 섬기는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라는지 거짓 구원자에게 바라는지 결국 알아낼 수 있습니다.



3.   회개와 기쁨으로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마음의 악한 정욕을 죽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5)

 

여기에 포함되는 탐심은 심지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죽입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1-4)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땅의 것을 자꾸 없애려고 하지 말고 위의 것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 위의 것을 자꾸 생각하면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만이 아니라, 온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나 사람에게 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우상이 있음을 회개하거나 의지력을 발휘하여 다르게 살려 애쓰는 것만으로는 이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새들백교회에 갔을 때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한 말을 참 좋아합니다. “Good intentions are never good enough.” 좋은 의도는 충분히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서 돌이키려면 회개와 의지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곳이 바로 위의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고 그 일을 기뻐하며 그 안에서 안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안식하는 것이 위의 것을 찾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는 즐거운 예배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우상보다 예수님이 내 머릿속에서 더 아름우시고 내 마음속에서 더 매력적인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거짓 신이 대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납니다.

 

기쁨과 회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기쁨 없는 회개는 절망에 이르고, 회개 없는 기쁨은 얄팍해서 잠깐의 감동 외에 깊은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더없이 기뻐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를 가장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결과가 두려워서 회개한다면 정말 죄를 슬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딱하게 여기는 겁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회개, 하나님께 혼나기 전에 빨리 고치는 게 낫다고 하며 회개한다면 그것은 사실 자기연민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해서 회개하면 죄 자체를 미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죄의 매혹적인 위력은 그대로 남습니다. 벌을 안 받기 위해 죄를 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적 고난과 사랑을 기뻐하면,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치르신 대가를 보면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분이 담당하셔야 했던 죗값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가장 잘 확증해주는 것도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고, 죄의 해악을 가장 깊이 깨우쳐 주는 것도 역시 그분의 죽음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회개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지만, 기쁨에 기초한 회개는 죄를 미워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우상 자체는 거의 언제나 선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goodgreat를 막습니다. 좋은 것에 적당히 만족하며 요 정도만 하면 돼라고 하니까 위대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이나 가정을 우상으로 삼았던 사람은, 이제부터 일과 가정을 그만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훨씬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우상인 사람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훨씬 더 사랑하면,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여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그냥 일이 잘돼서 행복한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4)

 

데살로니가전서 5:16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항상 행복을 느끼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도 남에게 항상 특정한 감정을 품도록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며 그 가치를 압니다. 그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되새겨서 결국 자기 마음이 달콤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기쁨은 마음이 편해지고 안식할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그러면 여태 필요한 줄로 알고서 꼭 쥐고 있었던 다른 것들을 다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왜 기쁨을 못 누립니까? 그런 것들을 꼭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놓으며 주님께 맡길 때 기쁨과 안식과 평화를 누립니다.

 

 

4.   우상을 치우는 일에는 평생이 걸린다

 

교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둘 다 상사에게 부당하게 대접받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A는 상사를 용서하고 툴툴 털어 낸 뒤 새 직장도 잡고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B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원한과 냉소를 품었고, 그것이 그 이후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도우려고 보스가 참 나쁜 사람이네.”라고 공감해주며 격려했는데, 그럴수록 그는 그렇지. 그 사람, 나쁜 놈이지.”라고 하며 더 분노를 정당화하며 자기연민에 빠져들었습니다. “털고 일어나라.‘ 하며 직접 그의 의지에 호소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복음은 감정이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실상 나의 진짜 구원과 구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의지하여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가 만든 가짜 신이며, 내 삶이 변화되려면 그 우상을 파악해서 배격해야 합니다. 대체시켜야 합니다.

 

B는 직업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려 하다가 일이 틀어지자 저주받은 느낌이 든 것입니다. 정체성의 기초가 무너졌으니 무력감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장을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는 길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아무 진전도 없었습니다. 상사를 용서하는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무엇이 그의 구원자로 행세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자신의 문제와 갈망과 습성과 태도와 감정이 과도해져서 통제가 안 될 정도라면, 그 이면에 언제나 뭔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전까지는 참 생명과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본인도 점차 깨달았는데, B는 자신이 하나님의 희생적 은혜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믿었지만 그 진리가 그의 마음과 생각까지 파고들어 그를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 하신 말씀보다, 자기 상사의 말이 더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복음의 진리를 삶 속에서 생생히 느끼게 하여 우리의 모든 감정과 행동까지도 복음으로 빚어낼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개인 기도와 말씀 묵상, 그리고 공중예배나 삶 공부 같은 영성 훈련입니다. 훈련을 통해 지식이 심령과 생각 속에 베어지게 되면, 그 실체가 삶을 빚어냅니다. 영성 훈련은 기본적으로 예배의 여러 형태이며, 마음의 우상을 대체하는 궁극적 방법은 바로 예배입니다.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우상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실제로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만 옵니다.

 

그런데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난번에 여러 주에 걸쳐 살펴본 예수신경의 핵심이고,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예배는 사랑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3:15-16)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QT 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마음으로 나아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 쌀쌀하거나 찬바람이 불거나 인상을 쓰거나 못되게 굴 수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는 따뜻하고 푸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 형제자매들을, 특히 안 믿는 분들을 사랑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 그렇게 해보려고 애쓰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든 하나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사실 그 과정이 평생 걸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쯤 했으면 은혜를 배우고 우상을 치운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뭔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섬기는 수준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평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힘쓰는 가운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해서 점점 더 예수님에게 근접해 가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송으로 유명한 존 뉴턴(John Newton) 목사는 이 씨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경험을 말해도 된다면, 나의 평안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만 계속 바라보는 일이 내 소명 중 단연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행실에서 자아를 부인하는 일은, 의와 능력의 근원으로 행세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자아를 부인하는 일에 비하면 차라리 쉬워 보인다.”

 

무슨 말입니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과, 자신의 평안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자신의 마음을 두는 것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뉴턴이 말한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거짓 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이미 들어서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러한 사람입니다.

 

한 번 잘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매순간 해야 합니다. 인내와 사랑으로 이 길을 끝까지 걸음으로써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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