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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7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인 권력욕

(다니엘 44~37)

 

1.   정치에 울고 웃는 세상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의 나치는 깊은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겠다고 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이 추구하던 애국심은 아주 파괴적이고 악마적으로 변질됐습니다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였던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는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정의로운 공포정치를 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는 아주 끔찍하게 불의한 것이어서 로베스피에르 자신조차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거기서 이루어진 결과는 혁명가들이 추구하던 정의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애국심이나 민족애가 절대화되면 인종적 우월감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사랑하는 마음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적 증오와 폭력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좋은 정치적 의도를 거짓 신으로 둔갑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나 로맨틱한 사랑이나 돈이나 성공 외에, 정치 지도자를 구원자로 여기고 정치적 정책을 구원의 교리로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 활동은 일종의 종교로 변합니다.

 

이 시대에는 나라의 정치 동향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당이 선거에 이기든지 패한 쪽의 상당수가 공공연히 나라를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작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는데, 나라를 떠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한 것은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만 주실 수 있는 소망을 그들은 정치 지도자와 정책에 걸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지지하던 정치 지도자가 권력에서 밀려나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낍니다.

 

정치를 우상화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상대방의 단순한 실수조차도 무조건 악하게 보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전에는 누가 당선되든 모두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자신이 투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전임 대통령의 도덕적 결함을 찾아 징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 시대에 정치적 양극화와 적대감이 이렇게 깊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정치 활동을 일종의 종교로 삼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미리부터 꿈을 깨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나라가 바뀌고 잘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데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지옥입니다. 또 그쪽 사람들이 잡으면 내가 지옥입니다. 누가 해도 지옥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데에 너무 기대를 걸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불의에는 항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기도해주면서 잘못한 것에 대해 이슈에 따라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됐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고 다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를 절대화시켜서는 곤란합니다. 정치에 대한 지나친 희망을 갖거나 잘 안 되었다고 환멸을 경험하는 것, 또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 실권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정치를 우상화하여 권력을 신으로 삼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게 뭔가를 우상화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 삶의 주된 특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중심을 우상에 두는 사람은 우상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이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받게 되면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조금 어렵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끝장났다. 희망이 없다.’라고 소리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누군가를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에덴동산의 유혹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하나님과 같이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유혹에 굴복한 결과로 이제 그것이 우리 본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자기 인생은 자기 권한이라는 것을 악착같이 확인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하나님을 몰아내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하나님의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워보려고 애쓰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해결할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몰아낸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몰아낸 자리는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세상을 다 합쳐도 되지 않습니다.

 

 

2.   누구에게나 있는 권력욕

 

BC 6세기에 바벨론 제국은 앗시리아와 이집트 대신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곧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왕족, 귀족, 군인, 학자, 장인 등 전문직 계층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계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상 최고의 권력자이던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1)

 

왕은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정말 엄청난 꿈이었고 식은땀을 흘리며 깰 정도였지만,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정치권력을 추구합니다. 혹시 권력을 차지하려는 이유가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일단 권력을 얻고 나면 틀림없이 두려움이 따라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경쟁자의 표적이자 질시의 대상인 것을 압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찔한 추락의 가능성도 더 커지는데, 이제 잃을 게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종종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낳습니다. 꿈 때문에 표면으로 떠오른 느부갓네살의 불안함은 지독하게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20세기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니버는 이런 점에 대해 아주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그 불안을 권력의지로 극복하려 한다. 자신이 유한하지 않은 척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지배할 힘이 거의 없습니다. 인생을 결정짓는 요인의 95%는 전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생일과 장소, 부모와 가족, 유년기의 환경, 외모, 타고난 재능 등,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와 소유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한 창조주가 아니라 유한하고 의존적인 피조물일 뿐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그러한 무력함에 대하여 깊은 두려움이 있는데, 그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시도하는데, 그 중 하나가 권력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의 우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을 잡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작고 사소한 방식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동네의 불량배가 되어 약한 친구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이나, 낮은 직급이면서도 자기보다 낮은 몇 사람에게 유세를 떠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소위 요즘 많이 말하는 갑질도 다 그런 권력욕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3.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박사들은 그의 꿈을 해몽하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 출신의 다니엘이라는 궁정 관리가 왕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는 왕에게 꿈의 내용을 말한 뒤 해몽까지 내놓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2:31-35)


그 거대한 신상의 생김새는 우상화되는 인간의 권력과 성취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돌이 난데없이 날아와서 그 신상을 부서뜨립니다. 이 돌은 신상의 다른 재료들과는 다르게 손대지 아니한 돌”(34)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돌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신상의 어떤 금속보다도 귀하지 않은 돌이지만, 결국은 가장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 돌은 어느 날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2:44)


이 꿈은 느부갓네살에게 겸손을 명령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권력자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권력을 얻어 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받았을 뿐이며, 인간의 모든 권력은 결국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전해준 해몽을 통하여 그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2:37-39)


느부갓네살은 여러 왕들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왕이며 금으로 된 머리인 것은 틀림없지만, 영원히 다스리는 왕은 아닙니다. 그의 뒤에도 계속 왕들이 나오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 꿈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신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했습니다. 이교도인 그는 세상에 신과 초자연적인 세력이 많다는 다원주의를 믿었지, 단 한 분의 신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들려온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영원한 재판장이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권력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이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2:46-47)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다니엘의 하나님이 모든 왕의 주재”(47)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 최고의 권력자가 납작 엎드린 것은, 평소에 교만하던 느부갓네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에 중독되는 것은 다분히 하나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인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는 미국의 젊은 층을 지배하는 신관을 가리켜 도덕주의적 치유의 이신론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덕주의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복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치유의 신념은 삶의 핵심 목표는 희생이나 섬김이 아니라 좋은 자아상과 행복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신론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문제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 삶에 딱히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부를 때까지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관을 가지게 되면 말 그대로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 인생의 선장이 됩니다. 그리고 구원과 행복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게 됩니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치유의 이신론은 사회의 상류층이나 특권층에게서 주로 나타납니다. ‘정상에 오른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자신의 능력과 지성과 노력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과 본인의 선택 등 3대 요인의 산물인데, 그 중 두 가지는 철저히 우리의 소관 밖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서 성공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해준 요인은 다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자신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겸손해지면서 잘못된 신관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화는 깊지 못했고, 하나님의 개입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또 다른 꿈을 주십니다. 그것이 오늘 다니엘 4장 본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왕궁의 자기 집에 편안하게 있던 중 또 꿈을 꾸게 되는데(4), 이번 꿈은 번민뿐 아니라 두려움까지 주었습니다(5). 느부갓네살이 이번에는 꿈의 내용을 기억합니다. 꿈속에 아주 큰 나무가 보이는데,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아 땅 끝에서도 보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11-12).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한 거룩한 자가 그 나무를 베라고 합니다(14). 그는 나무를 의인화하며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15-16)


이 꿈을 꾸고 느부갓네살 왕은 두려워 떨며 다니엘을 불러들입니다(18). 그러자 꿈의 내용을 들은 다니엘은 낯빛이 하얗게 변하여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해몽을 들려주는데, 그 나무는 곧 왕이시라고 합니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24-27)


2장에서 첫 번째로 꾼 꿈은 어떤 의미에서 이론 공부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 권력의 속성을 알리는 일반적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진짜 실습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론을 가르쳐주셨지만 그것이 느부갓네살에게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폭군이었고, 특정 인종과 계층과 빈민을 압제했습니다(27).


그래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확실히 깨닫도록 실제 삶으로 그를 가르치십니다. 이 실습은 굉장히 혹독하겠지만, 한 가지 희망은 나무가 베어지되 그루터기는 남겨져서 나중에 다시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징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마음에 새겨 주기 원하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7)


누구든지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권력과 돈과 사회적 위치에 있어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도 사실은 지극히 천한 자일뿐이며,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복음입니다. ,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 우리 행위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2:8-9, )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그것이 구약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과도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아, 네 권력이 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안다면 너는 더 안정되어 평안하면서도 동시에 더 겸손하고 정의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지위를 네 공로와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계속 두려움에 시달리며 더 잔인해질 것이다.’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29-30)


이것을 보십시오. ‘내가 했다. 전부 내 영광을 나타낸다.’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왕국을 내려보는 사이에 교만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1-32)


그 즉시 느부갓네살은 일정 기간 동안 중증 정신질환으로 보이는 상태에 빠집니다. 너무 미쳐서 실내에서는 살 수 없어 땅에서 짐승들 틈에 섞여 살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33)



4.   주님께 삶을 맡기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그토록 높은 왕이 이렇게 낮고 천한 모습이 되었습니까? 너무 간단합니다.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큰 아이러니입니다. , 인간이 인간 이상으로 신이 되려 하면 오히려 인간 이하로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엄청난 존재가 되려고 하면 저 밑으로 내려갑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 영광과 권력을 위해 살면 이렇게 가장 짐승 같고 잔인한 행동이 뒤를 잇게 됩니다. 독재자들을 보십시오. 권력을 잡고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굴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짐승 만도 못하게 잔인한 짓을 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인격자가 아니라 약탈자가 되고 살인자가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원작의 <새벽 출정호의 항해(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가 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거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 유스터스 스크럽(Eustace Scrubb)이라는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권력욕이 있었는데, 그것을 아이 특유의 째째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남을 놀리고, 동물을 괴롭히고, 고자질하고, 권위 있는 어른에게 알랑거리는 식입니다


어느 날 밤 유스터스는 동굴 속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을 발견합니다. 신이 나서 이제부터 누릴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상상하고 있는데, 깨어 보니 끔찍하게도 자기가 추악한 용으로 변해 있는 겁니다. 용의 보물 더미 위에서 용처럼 탐심을 품고 자다가 용이 되고 말았습니다그가 용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용처럼 생각했으니 용이 된 것입니다


씨 에스 루이스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정한 약탈자가 된다는 사실, 사람은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처럼 되는 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유스터스는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유스터스는 사실 자기가 꿈꿨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해졌고 하늘도 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는 두려웠고 비참했고 지극히 외로웠습니다. 물론 그것은 권력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결과입니다. 유스터스는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겸손해졌고, 다시 평범한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교만이 사라지자 마음속의 우상숭배도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으로 변한 유스터스는 밤에 신비로운 사자를 만나는데, 그 사자 아슬란은 그에게 용의 허물을 벗으라고 도전합니다. 용케 한 꺼풀을 벗었지만 속은 여전히 용이었습니다. 계속 시도했지만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때 사자 아슬란이 말합니다. “나에게 맡겨야 껍질이 벗겨진다.” 다급했던 유스터스는 아슬란에게 자신을 맡겼는데, 그의 발톱이 깊게 와서 박힐 때 너무 무서웠고, 그가 허물을 벗길 때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사자 아슬란은 유스터스의 껍질을 벗겨냈고, 유스터스는 다시 아이로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사자 아슬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깨달은 사실을 알려줍니다. , 교만은 죽음과 실패와 인간성의 상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아주 추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으로 마음이 독해지는 대신 겸손해지면, 교만이 죽으면서 부활이 찾아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완악하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마침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4-36)


여기에 깊은 은혜의 원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34). 그러니까 거기에 계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하며 아래를 보았을 때는 추락했지만, ‘내 위에 누가 계시다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니까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를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나는 하나님처럼 높아져서 내 이름을 떨치겠다.’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저들을 위해 밑바닥까지 내려가겠다.’라고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모든 권력을 잃고 그 대신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셨지만, 그 죽음이 구원과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한없이 연약해질 때, 예수님처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라고 고백한다면, 그때 변화되고 치유되며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범과 은혜가 우리의 권력욕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느낄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부인하면서, 대신 애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부끼리도 자꾸 자기 뜻대로 배우자를 움직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꼭 자기 뜻대로 통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그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권력을 버리고 섬기심으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결국 권력욕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내 밑에 두고 내가 그들의 주인도 되어 보겠다고 하는 욕심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단 자기 인생이 망가지고,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시도하는 그 사람의 인생도 망가집니다.

 

가장 많은 경우 부모가 자녀의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은 두려움입니다. 일단은 내 인생이 잘못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고, ‘내 자녀의 인생이 잘못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맡겨야 두려움이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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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내가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 내가 주인으로 있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지금 염려되는 바로 그 부분도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그럴 때 놀라운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능력이 충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내가 가진 어떤 것이나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겸손히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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