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9130일 수요예배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12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 신망애의 삶과 재림의 소식

(데살로니가전서 11~10)

 

1.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한국 교회 선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고 잔인했던 때가 20077월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분당 샘물교회의 단기선교 팀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어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았던 아주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그때 단기선교 팀의 리더인 배형규 목사와 팀원이었던 심성민 형제가 순교했고, 나머지 21명이 무사히 돌아옴으로 사건 발생 42일 만에 끝났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교회로 하여금 단기선교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샘물교회 단기선교 팀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위험한 곳에 자원해서 갔는데도 왜 나라의 세금을 사용하여 그들을 풀어주도록 돈을 주었느냐고 욕을 했습니다. 동시에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해서도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교계 내에서도 무리한 단기선교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때 사실은 가짜뉴스들이 많이 돌았습니다. ‘나라에서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억지로 갔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전혀 가지 말라고 한 적이 없고 저지한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고 보니까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비난하고 욕을 하겠지만, 교계 내에서도 많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무리한 단기선교는 중단해야 한다고 하는 소리들을 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단기 선교는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런 위험이 있는데도 이슬람권 선교를 계속해야 합니까? 답은 그렇다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단기선교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슬람권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와 사랑의 실천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땅 끝은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이슬람권도 포함되기 때문에, 결국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선교지에 들어가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선교를 중단했다면, 오늘 한국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고 우리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들이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돈과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저 멀리 해외로 가야 하느냐?’

 

만약 그 논리대로 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19세기 말은 미국에서 조선으로 가기 어려웠을 때인데, 많은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 땅이야말로 사실은 아주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쇄국정책도 있었고, 외국인 선교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테러의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위험했던 땅이 조선이었습니다.

 

사랑이 고난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중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은 정말 삭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인하여 고난이 올 때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지혜롭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랍 같은 사건을 통하여 위험하니까 중단해야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하고 지혜로운 선교 방향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건 이후 내릴 수 있는 가장 나쁜 결정이 바로 선교를 그만두는 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한국 국적으로는 못 들어가니까, 미국 국적을 가진 선교사님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도 미국 국적을 가진 분들이 몇 년 전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가 바로 단기선교의 결과로 나온 편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1~2주에서 2~3년까지를 단기선교라고 부르는데,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 AD 52년에서 53년경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3주에 걸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루디아나 빌립보 감옥 간수 같은 사람들이 믿어서 교회가 세워졌고, 그 후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이동한 것입니다. 지금도 데살로니가가 아테네 다음으로 그리스 제2의 도시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테살로니키입니다.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17:1-2, )

 

갈라디아 사역에서는 어디에나 유대인 회당으로 갔지만, 빌립보에서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강가로 갔다가 루디아 등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큰 도시라 유대인들이 많아서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토론을 하는데, ‘세 안식일이니까 3주 동안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최소 3주에서 최대 7개월까지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짧은 기간의 단기선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놀라운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5)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졌는데, 그냥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도 전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8)

 

마게도냐(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를 말하고 아가야(아카이아)는 남부를 말합니다. 북부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남부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여기 보면 이렇게 복음이 짧은 기간 안에 전해졌는데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까지 다 들렸다는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

 

그렇다면 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은 어떤 복음이었습니까?

 

1)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는 복음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9)

 

진정한 복음이 가져오는 첫 번째 삶의 변화는, 우상을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이런 하나님과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우상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되신데, 우상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것은, 더 이상 죽어 있고 거짓된 것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복음보다 우상을 붙들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대표적인 우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은과 금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135:15-18)

 

우상은 죽은 것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호흡도 없고, 한마디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기는 사람도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우상의 본질이 바로 이런 물질에 대한 탐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5)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바로 그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일체의 탐심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경우에 역시 돈이 우상이 됩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왔다고 3차 전도여행 후 잡혀 있을 때 바울을 불러다가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가 막힌 것은, 벨릭스가 왜 바울을 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이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죄수로 잡혀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뭔가 돈을 받을까 해서 불러다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를 빼달라고 뇌물을 주지 않을까 하며 불러다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러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심판과 절제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벨릭스는 돈이 없어서 돈을 바란 게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이상하게 욕심이 있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탐심입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돈이 많은데도 돈을 바랍니다. ? 그냥 욕심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사람은 만족할 것 같지만 만족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억만금보다 우리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아무리 갖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탐심을 가지는데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나 인기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성취나 쾌락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고 허상입니다. 우상이 우리를 배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상이 거짓된 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붙드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버리고 복음 앞에 돌아오는 모습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몰려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수적 성장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복음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버리지 않고 우상을 가진 채로 온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어떻게 부흥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흥이라는 찬양곡을 부르지 않습니까? 고형원이라는 분이 쓰셨는데, 진정한 부흥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사도 바울의 단기선교 사역을 통해 바로 이러한 부흥이 데살로니가에 임한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사람들 사이에 마구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일행이 나오는데, 1절에 나오는 바울, 실루아노(실라), 디모데입니다. 2차 여행 시작 때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져서 실라를 데리고 다소를 거쳐 더베로 가고 그 다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도 거기서부터 동행한 것입니다. 2차 때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2차 때 함께 한 실라와 디모데의 이름도 1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해서 데살로니가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바울을 잡으려 했는데, 거기 없으니까 믿게 된 야손을 잡아서 끌고 가 시청 관원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17:6)

 

영어성경 NRSV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se people who have been turning the world upside down”. 그러니까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천하를 뒤집어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욕으로 한 말이지만 엄청난 칭찬입니다.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

 

복음은 지금도 동일한 역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면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 선포하면 바로 이런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2)  성도들로 하여금 , , 의 삶을 살게 해주는 복음

 

신망애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신덕, 망덕, 애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살펴본 골로새서에도 나오고, 성경 곳곳 특히 바울의 편지에 이 세 가지가 늘 언급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누리는 삶의 특권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결과로 우리는 믿음의 삶, 소망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3)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데서 그치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세계관을 변화시킵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우리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3절은 믿음을 말할 때 그냥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역사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 NIV에는 “your work produced by faith”(믿음으로 만들어진 여러분의 사역)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그냥 내 생각, 내 방식, 내 뜻대로 일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3절에서 사랑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 사랑의 수고라고 합니다. 이것도 NIV를 보면 “your labor prompted by love”(사랑으로 촉진되는 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어떤 경우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합니다. 직분자니까 어쩔 수 없이 또는 체면으로 수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자기가 사랑에 빚진 자인 줄 알기에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억지로 하거나 의무감에서 하거나 체면 때문에 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하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바로 이 변화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소망의 인내를 갖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입니다. 다른 데가 아니라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내가 언젠가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버티는 인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고 심판하실 그분을 믿기에 우리가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믿음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수고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변화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삶입니다. 복음은 정말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게 해주는 소식입니다. 지금 믿음을 상실한 이 시대에, 참 사랑을 잊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쉽게 희망을 포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이 복음을 우리도 매일 붙들고 살아야겠습니다.

 

 

3)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해주는 복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17:3, )

 

이것도 유대인 회당에서 말한 것이기에 구약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고, 그분의 부활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실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전하는 이 메시지를 통해 복음의 영역을 죽음과 부활에서 조금 더 확장하여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그분의 재림까지도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0)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영원히 건져 내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마귀가 활동하고 죄의 세력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사는 남은 자이며 소수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도 안 하고, 다 관두고,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가만히 있으면서 재림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상의 일을 도피하는 핑계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금방 다시 오실 텐데 일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많았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이렇게 꾸짖습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하고 거듭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살후 3:10-12, )

 

단순하게 게으르면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재림이 올 텐데 뭐 하러 일하느냐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재림의 소망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렇게 무절제하고 게으르게 살면 안 되고 날마다의 삶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음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급이 되어 주실 그분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열심히 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만날 예수님의 재림, 그래서 영원히 들어가 살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됩니다.

 

샘물교회 단기선교 팀이 탈레반에게 잡혔을 때,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가 몇 명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서 다른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우리 중 한두 사람을 죽일지 모릅니다. 아마도 선전 효과를 위해 비디오를 찍으며 총살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가장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저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핍박과 조롱을 견디시며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저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때 팀에서 가장 연장자였고 원래 장로였다가 늦게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유경식 전도사(당시 55)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순서를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살 만큼 살았습니다.” 그때 배형규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디 전도사가 목사 자릴 넘봅니까? 저는 어차피 나중에 선교지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813일 탈레반이 두 명의 여자를 먼저 석방하겠다고 했을 때 이지영이라는 자매가 김경자라는 자매에게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은 탈레반까지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나중에 풀려나서 모여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국적군들은 이지영이 누구냐?’ 하고 찾아와서 다른 팀원을 살리기 위해 자리를 양보한 이지영 자매에게 한국군 준장을 통해 사랑과 존경의 뜻으로 목걸이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유경식 전도사는 2011년 무렵 그리스에 아프간 난민이 많다는 소식을 접했고, 4월에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현지로 갔습니다. 거기서 아프간 난민을 위해 현지에서 무료급식소 사역을 하고 있던 어느 선교사님이 휴식하는 4개월 동안 대신 사역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 경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었던 아픔을 섬김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2월에 그는 샘물교회 선교사가 되어 아테네에 정식 파송되었고, 아프간 난민 사역에 전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2015719일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아가페 센터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는데, 공교롭게 719일이 자기들이 피랍 당했던 날과 같은 날짜여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고 합니다.

 

유경식 목사는 이국땅에서 언어 문제로 힘겨워 하는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정규 영어 강의를 개설하고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난민들이 목사나 비즈니스 선교사가 되어서 현지 사역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한편 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20177월에는 난민 쉼터를 열기 시작해 4개를 완공했고, 아가페 센터 교인은 70여 명으로 늘어서, 난민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유경식 선교사 자신은 새 교회를 개척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 보고를 위해 잠시 파송교회를 방문했던 201712,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20142월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열린 파송식을 담은 영상에서 그는 아프간 난민들이 사는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화 하는 게 저희가 하려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이 단기선교 팀이 아프간에 심고자 했던 복음의 씨앗은 그 땅에 희망의 꽃이 되어 다시 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협력하는 이라합 선교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선교사님이 뿌린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재림의 소망입니다. 이 동일한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져서 데살로니가에 전해져서 그 도시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복음을 들고 다시 나아갈 때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12 가인의 분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분노한다 (창 4:1-7)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 (8/18/21) admin_p 2021.08.19 815
311 번제단과 물두멍: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의 회복 (출 38:1-8) admin_p 2021.08.12 705
310 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자리 (출 38:9-2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8 (8/4/21) admin_p 2021.08.05 362
309 널판: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세우는 예배자의 삶 (출 26:15-3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7 (7/28/21) admin_p 2021.07.29 316
308 휘장: 삶을 뒤덮는 영광의 자락 (출 26:1-1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6 admin_p 2021.07.22 295
307 분향단: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 (출 30:1-1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5 (7/14/21) admin_p 2021.07.15 707
306 등잔대: 영혼을 밝히는 은혜의 빛 (출 37:17-2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4 (07/07/2021) file admin_p 2021.07.08 867
305 상: 하나님이 차려주신 영혼의 식탁 (출 37:10-16)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3 (6/30/21) admin_p 2021.07.01 329
304 증거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생각 (출 25:10-22)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2 (6/23/21) admin_p 2021.06.24 857
303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 25:1-9)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6/16/21) admin_p 2021.06.17 1115
302 말라기(언약의 기도):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 2:1-9)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5 (6/9/21) admin_p 2021.06.10 796
301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슥 3: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5/19/21) admin_p 2021.05.20 479
300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 1:1-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5/12/21) admin_p 2021.05.13 850
299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습 1:7-1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5/5/21) admin_p 2021.05.06 657
298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 1:9-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4/28/21) admin_p 2021.04.29 1072
297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 6:6-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4/21/21) admin_p 2021.04.22 902
296 요나(의탁의 기도):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욘 2: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9 (4/7/21) admin_p 2021.04.08 1573
295 그 사랑 때문에 (눅 23:32-38) - 성금요일예배 (04/02/2021) admin_p 2021.04.03 799
294 오바댜(맡김의 기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갚아 주소서" (옵 1:1-21)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8 (3/24/21) admin_p 2021.03.25 882
293 아모스(긍휼의 기도): "사하소서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나이다" (암 7:1-6)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7 (3/17/21) admin_p 2021.03.18 705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