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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일 수요예배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8

갈라디아에 전해진 복음: 믿는 자는 성령으로 산다

(갈라디아서 11~12, 31~9)

 

1.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제목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열 받는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 아이가 상을 타 왔다네

   나쁜 소식, 옆집 아이도 타 왔다네

   열 받는 소식, 아이들 기 살린다고 전교생 다 주었다네

 

   좋은 소식, 살다 보니 남편이 처음으로 꽃을 가져왔네

   나쁜 소식, 그런데 국화꽃만 있네

   열 받는 소식, 알고 보니 남편이 장례식장 갔다가 아까워서 가져온 것이라네

 

   좋은 소식, 싼 가격에 성형수술 했다네

   나쁜 소식, 수술이 시원찮아 다시 해야 한다네

   열 받는 소식, 뉴스에 보니 그 의사가 돌팔이라 잡혀 갔다네

 

   좋은 소식, 남편이 진급했다네

   나쁜 소식, 새 비서가 엄청 예쁘다네

   열 받는 소식, 근데 둘이 다음 주 외국으로 출장 간다네

 

별로 유머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실제로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고, 열 받는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지금의 터키 지역이며 1세기 당시 소아시아 남 갈라디아로 불리던 지역 사람들에게 바울이 AD 48년경 예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가 주일예배 때 다룬 것처럼 사도행전 13-14장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같이 소위 남 갈라디아로 불리던 지역에서 적지 않은 복음의 결실을 거둡니다.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여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그들을 함께 말씀으로 양육하고 세우면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13:48)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얻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한 뒤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고,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14:21-23, )

 

사도행전 14장에서 루스드라를 거쳐 조금 더 떨어진 더베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그 후 온 그대로 돌아갑니다. 동쪽의 더베에서 조금 서쪽에 있는 루스드라로, 또 동북쪽에 있는 이고니온으로, 그리고 더 서쪽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도시들에는 자세한 사정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베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믿는 사람들 중 리더들을 장로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한 다음 주님께 맡기고 떠난 것입니다.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을 할 때는 동쪽에서부터 같은 도시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연도가 있는데, 성전을 보며 와 하고 놀라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AD 70년입니다. 로마 군대가 와서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때부터는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로 다 흩어지고 더 이상 나라를 이루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다가, 1948년에 거기에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세워진 겁니다.

 

그런데 AD 50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Jerusalem Council)가 열립니다. 이전에는 학자들이 데살로니가전서가 가장 먼저 쓰였을 것이라고 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가장 먼저 쓴 편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왜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유대주의자들이 아직 많이 있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좋지만 그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믿고 할례도 받은 다음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까지 와서 어지럽히니까,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와 있던 바울과 바나바와 그런 사람들이 서로 부딪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문제를 결론짓기 위해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엽니다


그것이 AD 50년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갈라디아서는 그 종교회의 이전에 쓰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AD 50년 전에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그런데 AD 48년쯤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나쁜 소식을 접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리더들까지 세우고 주님께 맡기고서 떠난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더더욱 열 받는 소식은 그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조차 의심한다는 소식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입니다.

 

그러면 애초에 갈라디아에 전해진 복음의 본질, 갈리디아 성도들이 결코 떠나지 말고 붙들어야 할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2.   갈라디아에 전해진 복음

 

1)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고 그 은혜 안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편지를 시작하며 그가 사도 된 것은 스스로 되거나 인간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말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1)

 

여기 보면 바울은 자기가 사람이 시켜서 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된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 나 바울이 쓴다고 하는 정도인데 여기는 왜 이런 말을 쓰는가 하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세히 보면 편지마다 약간 다른 내용들이 있습니다. 다른 데는 영적 전쟁에 대해 안 나오는데 유독 에베소서에서는 영적 전쟁에 대해 나옵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악한 영들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합니다. 에베소에서 큰 영적 전쟁이 있었고 영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런 편지를 쓴 겁니다.

 

바울이 편지들을 똑같은 내용으로 대충 쓴 게 아니라, 그 교회에 꼭 필요하고 맞는 말씀, 그 당시 상황에서 꼭 주어야만 하는 말씀을 가지고 썼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문안을 합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2-3)

 

다음으로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임한 은혜의 결과로 전달받은 복음의 핵심을 다시 그들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1:4)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분의 대속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그런데 나쁜 소식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러한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하며 옛날의 죄의 종 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그들을 찾아온 유대적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유대주의에 심취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 밖에도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여러 계명들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며 갈라디아 성도들을 잘못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은혜의 감사를 잃어버리고 다시 율법의 종, 죄의 종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이 편지를 빨리 쓴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빨리 이런 편지를 썼고, 2차 전도여행 때는 급하니까 그곳부터 간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전한 것은 한마디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6-7)

 

2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러한 율법주의자들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어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2:3-5, )

 

왜 율법주의가 나쁘고 잘못된 복음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폐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2장에서 강하게 선포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6, )

 

그러면서 이렇게 2장의 결론을 맺습니다.

 

“19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2:19-21, )

 

이 내용은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진리와 타 종교의 차이를 보여주며, 참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2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것이고 괜히 죽으셨고 헛고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안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안 했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행함으로 율법을 깨트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는 겁니다. 혹시 100% 순수하게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더라도 태어난 직후부터 그렇게 삽니다. 태어나자부터 아빠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참 안타까운 상태인데 그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미 나는 나의 어떤 최선의 행위로도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그런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셨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믿으면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다른 복음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혹은 갈라디아에 전해진 다른 복음의 위험성이며 함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행위를 의존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복음을 변하게 하며 변질시키는 것이 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값없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데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2:8-9, )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은혜 안에서 감격하고 감사하며 그 안에 머물러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 은혜 안에 머물러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핵심의 첫 번째입니다.

 

 

2)  성령의 역사에 의해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살게 된다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시작하여, ‘성도의 삶이 율법적인 행위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질문을 다룹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의 행위를 만드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여기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새로운 삶과 행위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우리는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며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새롭게 되어서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과 살 수 있는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율법주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율법폐기주의나 무율법주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1-2)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듣고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은 우리 안에 행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따라 살게 됩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5)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믿는 사람 안에서 능력으로 행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가야겠다. 오늘 말씀을 묵상해야겠다. 정말 기도해야겠다.’ 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그런 마음을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그것에 순종하여 결단하며 나아갈 때 그렇게 됩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을 마디로 정의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5:24-25, )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결코 율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3-4, )

 

여기서 육신이라는 것은 내 욕심, 내가 원하는 것,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동일한 진리를 가지고 다시 권면합니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5:16, )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살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서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며 살아가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시는 삶의 결과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5:22-23, )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면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삶은 옛 언약인 구약의 율법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옛날 자기 욕심대로 살면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그 앞에 바울이 죽 써놓았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같은 것들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님이 인도해주려고 하시는데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면 그런 더러운 것들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이런 더러운 것들이 일어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우리가 성령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평생에 걸친 성화의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잘했다고 나중에도 자동으로 잘하는 게 아닙니다. 계속 잘해야 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받는 구원의 과정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가 바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바로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전해준 복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 해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또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일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드디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마침내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받을 구원으로서 다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공사 중이고 불완전하지만, 성령님께서 이 공사를 완성하실 날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작년(2018) 2월에 그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99세 지나고 10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노스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 NC) 출신인데, 거기 가면 빌리 그레이엄 라이브러리(Billy Graham Library)가 있습니다. 그 입구에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작년 2월에 돌아가신 남편 빌리 그레이엄보다 11년 전인 2007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루스 그레이엄(Ruth Bell Graham) 여사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에는 한자로 ()’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한자로 의는 ()’이라는 단어와 그 아래 를 뜻하는 ()’가 합쳐져 완성된 글자입니다. ‘내가 어린양 밑에 있으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루스 여사는 원래 중국 의료 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 글자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만이 나의 의가 되신다는 것이 루스 여사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다시 영어로 “The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공사 끝. 당신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루스 여사는 생전에 항상 공사 중이던 자신의 동네 길가에 세워져 있던 “Under construction. Sorry for inconvenience“(공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간판이, 어느 날 보니가 갑자기 공사 끝. 그 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내 무덤에 저 글을 써주세요.” 그래서 거기에 이 문구를 새겨 넣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계속 공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공사는 작아서 봐줄 만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대형 공사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다 공사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계속해서 살다 보면, 어느 날 루스 그레이엄 여사의 공사 끝. 당신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갈라디아에 전해진 복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공사 중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관대하고 사랑의 눈으로 봐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해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갈 때는 공사가 끝난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삶을 얻은 사람은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산다는 것이 갈라디아에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의 삶은 완성될 것이며,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흰 옷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지금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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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모세의 분노: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에 분노한다 (민 20:6-13)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4 (9/8/21) admin_p 2021.09.09 520
314 요셉의 분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분노를 용서로 바꾼다 (창 45:1-8)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3 (9/2/21) admin_p 2021.09.02 612
313 사라의 분노: 사랑이 없으면 가족도 원수가 된다 (창 16:1-6)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2 (8/25/21) admin_p 2021.08.26 395
312 가인의 분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분노한다 (창 4:1-7)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 (8/18/21) admin_p 2021.08.19 829
311 번제단과 물두멍: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의 회복 (출 38:1-8) admin_p 2021.08.12 727
310 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자리 (출 38:9-2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8 (8/4/21) admin_p 2021.08.05 366
309 널판: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세우는 예배자의 삶 (출 26:15-3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7 (7/28/21) admin_p 2021.07.29 330
308 휘장: 삶을 뒤덮는 영광의 자락 (출 26:1-1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6 admin_p 2021.07.22 300
307 분향단: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 (출 30:1-1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5 (7/14/21) admin_p 2021.07.15 730
306 등잔대: 영혼을 밝히는 은혜의 빛 (출 37:17-2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4 (07/07/2021) file admin_p 2021.07.08 881
305 상: 하나님이 차려주신 영혼의 식탁 (출 37:10-16)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3 (6/30/21) admin_p 2021.07.01 337
304 증거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생각 (출 25:10-22)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2 (6/23/21) admin_p 2021.06.24 863
303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 25:1-9)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6/16/21) admin_p 2021.06.17 1141
302 말라기(언약의 기도):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 2:1-9)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5 (6/9/21) admin_p 2021.06.10 801
301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슥 3: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5/19/21) admin_p 2021.05.20 498
300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 1:1-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5/12/21) admin_p 2021.05.13 871
299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습 1:7-1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5/5/21) admin_p 2021.05.06 665
298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 1:9-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4/28/21) admin_p 2021.04.29 1076
297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 6:6-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4/21/21) admin_p 2021.04.22 912
296 요나(의탁의 기도):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욘 2: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9 (4/7/21) admin_p 2021.04.08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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