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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8일 수요예배

탕부 하나님 2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누가복음 1511~32)

 

[들어가는 말]

 

2주 전부터 새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제목이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뉴욕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아주 귀한 사역을 하다가 은퇴한 팀 켈러 목사의 책인데, 최근에 나온 비슷한 제목의 <방탕한 선지자(The Prodigal Prophet)>라는 책도 있습니다. 요나서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지난 2017년 하반기에도 수요예배 때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책을 가지고 했었는데, 이분의 책은 웬만하면 다 좋습니다. <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팀 켈러의 기도>,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말하다><답이 되는 기독교>VIP 분들이 가질 만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주는 책들입니다.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1.   타산하지 않는 사랑

 

유명한 비유이며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에 있어,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 가장 걸맞은 명칭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일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전체 2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1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고, 2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맏아들입니다.

 

먼저, 짧지만 충격적인 둘째 아들의 요청으로 1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1-12)

 

예수님의 이 비유를 처음 듣고 있던 사람들은, 둘째 아들의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경악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들이 재산의 일부를 자기 몫으로 바라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은 다른 자녀들보다 두 배로 유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상속자가 두 명이면 재산을 3으로 나누어서 맏아들이 2/3를 가져가고 나머지 1/3은 둘째에게 돌아갔습니다. 자녀가 4명이면 5로 나누어 맏아들이 2/5를 가져가고 나머지 아들들은 각각 1/5씩 가져가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가 하면,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지금 당장 달라고 한 것은 완전히 무엄하고 패륜적인 행위였습니다. 그 당시 문화로 볼 때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청중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도 유산을 달라고 하는 말은 곧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원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둘째 아들이 한 말은, ‘나는 아버지의 재산만 원할 뿐이지, 아버지는 싫습니다. 빨리 죽으세요.’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효자식입니까? 이런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 그에게 아버지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관계마저도 지겨워졌고, 따라서 그는 빨리 집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는 감히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제 내 몫을 내게 넘기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보다도 더욱 충격적입니다. 1세기 당시는 아주 심한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어른들 특히 자신의 부모에게 품는 경의와 존경이 더없이 중요한 사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의 전통적인 아버지가 당연히 보여야 하는 반응은, 이런 못된 자식을 호되게 꾸짖은 다음에 집안에서 쫓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호적에서 파버리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러기는커녕 그냥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12)습니다. ‘각각 나눠주었다는 것은 큰아들에게도 나눠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본문에 살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비오스가 본래 생명을 의미한다는 단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재산을 가리키려면 더 구체적인 단어를 쓸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시고 살림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아버지의 재산은 주로 땅(부동산)이었을 것이니까, 그의 순자산의 1/3을 떼어 내려면 가지고 있던 토지의 상당 부분을 팔아서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굉장히 이동이 잦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사를 아주 많이 다닙니다. 같은 도시에서도 다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많이 다닙니다. 한국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평생직장 개념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도시 문화에 살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과 땅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이 자기들에게 속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땅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의 개념을 보면,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은 개인에게 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은 비성경적인 행동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정체성 자체가 장소와 땅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이 굉장히 중요했고, 자기 민족과 나라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땅의 일부를 잃는 것은 곧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되었습니다. 지역사회 내에서 땅을 잃어버린 사람은 지위가 크게 축소됐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모든 것을 갖추며 살아가던 회사 사장(CEO)이 갑자기 병에 걸린 자기 자녀나 배우자를 돌보려고 사업을 전부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주 똑같은 예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한 일이 그와 비슷합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은 아버지의 목숨(생명)을 찢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실제로 살림’(생명)을 나누어줍니다. 아들을 사랑해서 그가 원하는 그대로 해줍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당시 한 가정의 가장이 그런 식으로 반응을 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이런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뿐 아니라, 아주 처참한 명예 훼손까지도 참고 견디는 겁니다. 대개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거부당하면 화가 나서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거부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최대한 거둬들여 자신의 상처를 줄이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주 배은망덕한 이 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사랑하면서 아들이 준 괴로움을 그냥 견딥니다.

 

 

2.   인간의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 얻어낼 수 없는 은혜

 

이제 이야기는 12장으로 넘어갑니다.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면서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나온 이 패륜아 둘째 아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3)

 

둘째 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즉 급히 서둘러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며 방탕한 생활을 즐깁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방식 때문에 전 재산을 날려버립니다. 그는 순식간에 아주 비참한 처지로 전락합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4-16)

 

전 재산을 다 날렸는데 하필 그때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듭니다(14). 그래서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이나 치며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15). 자기 신세가 말 그대로 돼지와 같아지니까, 그때 그는 무엇을 합니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

 

그는 스스로 돌이켜혼잣말로 앞으로의 계획을 짭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8-19)

 

그가 여기서 계획을 짰는데, 첫째, 아버지에게 돌아가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겠다고 생각합니다(18). 둘째, 스스로 아들의 자격을 잃었음을 인정하리라고 생각합니다(19). 셋째, 아버지에게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라고 부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그 당시 종은 주인의 집에 같이 살면서 일했지만, “품꾼이라는 것은 인근 마을에 살면서 부잣집에 가서 일하여 품삯을 벌던 일용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겁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집안은 물론 지역사회 전체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들이 있으면 그 아버지도 엄청난 수치를 당하는 것이고, 그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가리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24)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둘째 아들의 경우처럼 지역사회의 규범을 어긴 사람은 사죄만으로 안 되고 배상까지도 해야 됐습니다. 완전히 사회 규범을 어긴 게 아닙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받아 떠났으니, 이런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둘째 아들이 여기서 아버지에게 하려고 계획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다시 집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꾼들 중 하나에게 저를 제자로 붙여 주시면, 일을 배우고 품삯을 벌어서 조금이나마 아버지에게 빚을 갚겠습니다.”

 

이것이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에 살면서 이 대사를 연습하면서 외웁니다. 드디어 그는 아버지를 만날 준비를 마치고 일어나 귀향길에 오릅니다.

 

여기서 1막은 극적인 마지막 3장에 이릅니다. 둘째 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갑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0)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당시 중동의 기품 있는 어른(특히 한 집안의 가장)은 절대 이렇게 달리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여자와 젊은 남자는 달려도 됐지만, 지역사회의 점잖은 어른이자 이처럼 대농장의 소유주인 가장은 아이처럼 겉옷을 들춰 올려 다리의 맨살을 드러내면서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렇게 합니다. 막 달려갑니다. 아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입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때 이 둘째 아들은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당황해서 어어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늘어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말을 막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1-22)

 

아버지는 아들이 연습한 대사를 묵살합니다. 전에 어떤 분이 이 부분을 말씀을 전하면서, 아들이 자기가 연습해온 대로 안 하고 슬쩍 빼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슬쩍 빼먹은 게 아니고, 대사대로 외워서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막아서 못한 겁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그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면 아버지의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가 됩니다. 아들은 그 집의 종도 못 되고, 그냥 근처에 살면서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버는 품꾼 정도로 여겨달라고 하고 왔는데, 아버지는 무슨 소리냐? 종도 아니고, 품꾼은 당연히 아니고,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하며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뼈 빠지게 노동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아니, 기다릴 수 없다! 네 힘으로 일하여 자격을 얻어서 이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가 너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지위와 명예의 옷으로 너의 가난하고 헐벗은 몸과 누더기를 덮어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버지가 무엇을 명령합니까?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3)

 

이제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해서 축하 파티를 열어 살진 송아지요리를 내놓게 합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 식으로 표현을 해보면 아버지의 이 말을 살진 송아지가 아주 싫어합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 사회에서 평소 끼니때는 고기가 없었습니다. 고기는 값이 비싼 진미라서, 대개 특별한 행사나 잔치 때에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기 중에도 이런 살진 송아지보다 더 비싼 것은 없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는 최고급 요리입니다.

 

이 정도의 잔치라면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 벌어졌을 것이고, 분명히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초대가 된 것입니다. 어느새 말이 퍼져 나가 금세 잔치의 흥이 무르익고 풍악과 춤까지 곁들여집니다(25). 이 모든 것은 자기 집과 동네와 지역사회로 살아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물론 2막이 시작되면, 2막에서 아버지는 맏아들의 훨씬 더 복잡하고 해로운 영적 상태를 다루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맏아들의 사고방식에 도전을 가하는 깜짝 놀랄 만한 메시지가 이미 1막에도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용서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떻게 살아 왔는가는 상관없습니다.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인자라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아들이 돌아온 것은 굉장히 낮아진 마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굉장히 건방진 마음으로 떠났는데, 굉장히 낮아진 마음으로, 즉 종도 아니고 품꾼으로 여겨달라고 할 정도의 낮아진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중요한 것은 돌아온 것입니다. ‘창피하다. 자존심이 상한다.’라고 하며 안 돌아왔으면 안 되는데, 돌아왔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죄를 지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17)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양식만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자비도 풍족하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지 못할 만한 악은 없고, 아버지 은혜에 맞먹을 만한 죄도 없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이 비유의 1막에는,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시리즈 제목이 <탕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알려주신 것처럼, 아버지가 사랑으로 둘째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그 아들이 자신의 변화된 마음을 증명하기 전이었습니다. 말도 다 안 했는데 아버지가 끌어안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외워 두었던 참회의 대사조차 다 말하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회개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죄인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한이 없습니다.

 

 

3.   맏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다

 

그러나 1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만으로 이 비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학자들은 1, 즉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 이 비유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여기서 속죄가 언급되지 않는다.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를 필요가 안 나온다. 나님은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모든 사람을 받아주시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가 있다.”

 

만약 이 비유의 메시지가 그런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십니다. 1막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보여주었다면, 2막은 그 은혜의 값비싼 대가와 또 이 이야기의 진짜 절정을 보여줍니다. 사실은 맏아들 이야기가 진짜입니다. 맏아들은 종들로부터 어떻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신분을 회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

 

이 말을 전해들은 맏아들은 격노합니다. 이제 그가 아버지를 욕되게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베푼,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잔치이자 이런 공적인 행사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

 

맏아들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남아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현합니다. 아버지가 맏아들과 말하려고 부득이 안에 있는 잔치 자리를 뜨고 밖으로 나온 것, 손님들을 두고 밖으로 나온 것은, 큰 잔치의 주관자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습니다.

 

여기는 간단히 나와 있지만, 아들이 거기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도 엄청나게 무엄한 일이고, 아버지가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서 큰아들에게 들어가자고 타이르지만, 그는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

 

맏아들이 이토록 격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특히 이 모든 일에 뒤따를 손해 때문에 아주 속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한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런 놈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주십니까?”

 

여기서 동생이라고도 안 하고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자기 동생이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했는데, 그 먼 나라에서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탕진한 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파악했는데도 데려올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런 놈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시는가?’라고 했습니다.

 

물론 살진 송아지는 상징에 불과합니다. 아버지가 취한 행동에는 송아지보다 훨씬 더 큰 대가가 따릅니다. 둘째 아들을 집안에 도로 받아들여줌으로써, 아버지는 그를 다시 상속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미 1/3이 줄어들었는데, 남아 있는 2/3 중에서 또 다시 1/3에 대한 권리를 준 것입니다. 맏아들의 계산으로는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죽도록 일해서 내 몫을 벌었지만 이놈은 한 일이 없으니 번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쫓겨나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퍼 주시다니, 도대체 우리 집에 정의는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형은 자신의 이력을 내세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오랫동안 일했고,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권리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나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혼자서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시면 안 되죠!”

 

왜 떠났던 둘째를 함부로 막 받아주느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형은 홧김에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서 불러야 했고, 특히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더했습니다. 단순히 겉으로 체면치레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존경심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아버지여라 하지 않고 그냥 보소서!”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보소서라는 말이 안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과 NIV를 비롯한 영어 성경을 보면, 29절 맏아들의 말 앞부분에 보소서(Look)”가 들어갑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이거 보세요!”와 같은 말입니다.

 

어른을 공경하며 복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그 당시 문화에서 이것은 아주 발칙하고 무엄한 행동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런 행동도 둘째 아들 못지 않게 말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들이 책을 쓰는데, 비리가 없는 아버지의 비리를 꾸며서 폭로하여 평생의 이력과 명예를 짓밟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마침내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 이릅니다. ‘맏아들의 공공연한 반항에 대해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시대의 유대 남자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이처럼 배은망덕하고 무례하게 나온 맏아들과의 부자의 연을 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역시 이 아들도 호적에서 파버리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이번에도 놀랍도록 자애롭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1-32)

 

여기서 라는 말은 내 아들아”(my dear son) 하는 말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이 잔치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너를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을 듣고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가자. 물론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

 

듣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아버지의 인자한 호소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분명히 던졌을 것입니다. ‘이 집안은 결국 사랑으로 하나 되어서 다시 뭉칠 것인가?’ ‘두 형제가 화해할 것인가?’ ‘아버지의 너그러운 제안에 대해 맏아들의 마음이 누그러져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런 모든 생각이 스칠 바로 그때 이야기가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그냥 끝내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과를 들려주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이 맏아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2)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그들에게 이 메시지에 제대로 반응할 것을 촉구하시는 겁니다. 이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예수님이 지금 밝히시려는 핵심 요지가 무엇인지 다음번에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됩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너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잃어버린바 된 상태와 구원의 올바른 의미를 예수님이 알려주시면서 청중,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기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해서, 잃어버린바 된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VIP 분들을 열심히 찾아서 전도하자고 하지만, 과연 그들만 잃어버린 상태인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대로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이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천국에 간다.’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정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는 이 모든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도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과연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면서, 아버지의 조건 없는 그 사랑 앞에 손들고 나와 그 사랑을 충만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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