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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4일 수요예배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1

예수님 주위를 맴도는 두 부류의 사람들

(누가복음 151~3, 11~32)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수요예배 새 시리즈를 시작해서 몇 주 동안 진행하게 됩니다. 수요예배 때는 몇 년 전부터 책 한 권을 정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하게 되는데, 요즘에 좋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할 수 없어, 이렇게 좋은 책들을 통해 저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이나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서 아주 뜨거운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는데, 바로 팀 켈러(Tim Keller)라는 분입니다. 뉴욕에 있는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사역하던 분입니다. 뉴욕의 뺀질뺀질한 뉴요커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데, 아주 지성적인 접근을 하면서 그들이 평소에 믿고 있던 신념이 그저 혼자의 생각이지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충격을 주고 전도를 많이 한 분입니다.

 

지난 2017년 하반기에도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책을 가지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이분이 쓰신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읽었는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며 누구나 아는 소위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귀한 내용을 쓸 수 있는지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이 귀한 내용을 언젠가 꼭 성도님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지난 번 수요예배 시리즈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에 이어, <탕부 하나님> 책을 중심으로 앞으로 몇 주 동안 함께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할 때의 탕자를 영어로 ‘The Prodigal Son’이라고 합니다. ‘prodigal’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서,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이라는 뜻과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는 그 단어를 하나님에게 붙여서 책 제목을 <The Prodigal God>이라고 썼습니다. 처음 제가 그 제목을 보고 , 어떻게 하나님을 탕자에 붙이는 단어를 써서 그렇게 부르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 너무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남김없이 다 퍼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자기를 위해 더 써버리고 탕진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다 퍼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탕부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적인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 딱 맞는 표현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다룰 내용은, 기독교 신앙을 알고 싶어 하는 VIP와 기신자, 외부인과 내부인,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둘째 아들’(동생) 부류의 사람들과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 양쪽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가장 유명한 비유라고 할 수도 있는데,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이르는 길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처럼, 이 비유의 구성과 등장인물은 아주 단순합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합니다. “아버지, 저의 분깃을 주십시오.” 이 말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시고 나에게 빨리 유산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데도 유산을 줍니다. 그래서 둘째는 유산을 받자마자 먼 나라로 가서 정욕과 쾌락을 위해 살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합니다.

 

그 후 뉘우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달려나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맏아들(그의 형)은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심한 소외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결국 이 스토리는, 동생을 함께 반기고 용서하자고 하면서 아버지가 맏아들을 타이르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 후 어떻게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며 끝납니다.

 

언뜻 보기에는 딱히 흥미를 끌 만한 게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여기에 담긴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본문보다 더 엄청난 격려와 깨달음과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부르지만, 우리는 그 명칭을 되도록 안 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 그 한 아들만을 이야기의 유일한 초점으로 떼어 놓는 건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탕자의 비유라 부르지 않으시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1)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작은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5:11)라는 말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동생뿐 아니라 형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두 아들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두 아들 중 형에 대한 말씀이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고 보입니다. (첫째 아들)은 항상 집에 있었지만 그도 잃어버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흔히 탕자’(蕩子)로 번역되는 형용사 ‘prodigal’제멋대로 구는이라는 뜻이 아니라, 웹스터(Webster) 영어사전을 보면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를 위해 다 썼고, 아버지는 아들들을 위해 다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비유 속의 둘째 아들에게 딱 맞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아주 어울리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책임을 돌리거나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반응을 못마땅해 합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물론 하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후 5:19, 21, )

 

바로 이 하나님이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이십니다. 죄과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이처럼 앞뒤 따지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蕩父), 즉 다 내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이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번 말씀 시리즈의 주제도 바로 그것입니다.

 

 

2.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1)  이야기의 타깃은 따로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우리가 이 비유를 읽을 때,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 즉 탕자에게 집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두 아들(형과 동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두 개의 다른 길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길도 양쪽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큰아들은 아버지께 잘 붙어 있으니까 신앙적인 사람을 말하고, 작은 아들은 방탕하게 있다가 돌아온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말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서 우리는 누가가 제시한 역사적 배경부터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2)

 

여기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1)입니다. 이 사람들은 비유 속의 동생’(둘째 아들)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도덕법을 지키지 않았고,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따르던 정결의식의 규율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비유의 동생처럼, 그들도 바람직한 사회와 가정의 전통 윤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한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청중은 비유 속의 ’(맏아들)이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2)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 자라면서부터 배운 전통 윤리를 지키며 유지해 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했으며, 충실히 예배하고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누가는 이 두 부류가 예수님께 얼마나 다르게 반응했는지를 아주 간략한 말 속에 포착해내어 표현합니다. 먼저, 세리와 죄인들은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습니다(1). “나아오니”(1)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미완료 시제입니다. 미완료는 동작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생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온 일이 그분의 사역에 늘 있었던 현상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은 한두 번이 나오고 만 게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보고 당황하며 분개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불만을 수군거렸다고 하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라는 말로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함께 앉아 먹는다는 것은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표시였습니다.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같은 부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말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는 어떻게 감히 이런 죄인들에게 다가가는가? 이 죄인들은 우리의 예배에 생전 나오는 법이 없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하다. 틀림없이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려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말로 누구를 향한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애초에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3)

 

여기서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수군거리니까 그들에게 대놓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작은 아들이 허랑방탕하다 돌아오고 아버지의 환영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형의 마음 상태를 잘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아버지가 신신당부하는 것에서 절정을 이루고 끝납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 본문을 가르칠 때면, 회개하는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무조건 받아 준다는 데에 대부분의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저도 처음 이 비유를 접했을 때는, 그 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듣던 사람들이 자기들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감격하고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두 팔 벌려 받아주시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감상적으로만 다루는 것이 됩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진짜 타깃은 누구입니까?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 아니라, 놀랍게도 모든 면에서 율법의 규정대로 행하고 있던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타이르시는 대상은 부도덕한 외부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내부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저를 비롯해서 몇 십 년 또는 평생 교회생활을 하는 우리를 위한 비유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될 위험히 상당히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잘 받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멀고 편협해서 자기 스스로는 의로운 줄로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자기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멸망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로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무조건적 사랑을 확신시켜주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상당히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 이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었던 사람들(1차 티깃), 이 이야기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오히려 경악하고 괘씸해하고 격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취지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존 생각들을 무너뜨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동생의 악한 자기중심성을 드러내십니다. 죄인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함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형 같은 사람들의 도덕주의적 삶도 가차 없이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뿐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도 똑같이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가 될 수 있고, 삶의 길도 양쪽 다 막다른 골목이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서도 인류가 품어 온 생각이 많은 부분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종교가 되어버린 교회

 

지금도 비유에 나오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생부류의 사람들은 양쪽 다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사회 안에 있고, 종종 한 집안에도 있고, 한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어느 집에 아들이 둘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런 경우입니다. 어느 집이든 대체로 첫째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하고, 책임감 있게 부모님의 기준에 따르며 살아가려 합니다. 반면, 동생은 조금 더 반항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유인이 되어 친구들 틈에서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둘째나 그 밑은 친구들의 인정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맏이는 자라서 전통적인 직장을 잡고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정착하지만, 둘째는 비록 허름한 방에 살더라도 집에서 멀리 떠나 뉴욕, LA, 시카고 같은 화려한 도시에서 삽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기질 차이는 근대 이후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19세기 초에 산업화의 영향으로 일어난 신 중산층 부르주아 계급은 근면한 노동 윤리와 올바른 도덕성으로 정당성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경직성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헤미안 공동체들이 나타났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앙리 뮈르제(Henri Murger)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은 1840년대의 파리가 그랬고, 런던의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이 보헤미안 스타일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뉴욕에도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비트 세대가 있고, 지금의 록 밴드, 인디밴드의 모습들이 다 그런 예가 됩니다. 보헤미안들은 관습에서 해방되는 개인적 자율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자유분방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소위 문화전쟁 속에 살고 있는데, 어느 정도는 그런 반대되는 기질내지 충동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요즘은 종교가 없거나 아예 종교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는데, 그들은 도덕적 문제가 굉장히 복잡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기관을 무조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거부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 생각이 있고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데, 자꾸만 저쪽에 있는 그룹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의 바른 삶이다.’라고 하니까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나 낙태 같은 문제를 우리는 못하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서 왜 싫어하고 반대하는가 하면 자기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하겠다는데 자꾸 법으로 제한하겠다고 하니까 그토록 반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세속 정신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보수적인 정통 종교 운동들이 더욱 성장해 왔습니다. 한쪽으로는 자유분방하고 자유주의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활개를 칠수록, 오히려 보수적인 종교 운동들이 더욱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도덕적 상대주의의 맹렬한 저항과 공격에 경각심을 느끼면서 큰일 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빼앗긴 문화를 다시 탈환하자는 목표로 뭉쳤는데, 그들이 소위 그런 자유분방한 사람들을 보는 시각은 형이 동생을 보는 것만큼이나 배타적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보는 시각처럼 적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이시겠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한 영화가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입니다. 그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Treebeard(나무수염)’입니다. 나무 같이 생겼는데 걸어다니는 요정입니다. 그 나무수염에게 호빗(Hobbit)들이 누구의 편이냐고 묻자, 나무수염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누구의 편도 아니다. 누구도 전적으로 내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절대로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대상들도 분명히 있다.”

 

누구 편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비유 속에 비슷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의 편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편도 아니지만, 종교적 도덕주의와 특권의식을 가진 것을 특히 치명적인 영혼의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기독교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종교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처음에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 당시 이웃 사람들이 던졌을 질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웃들이 이렇게 물어봤을 겁니다. ‘당신네 신전은 어디에 있어?’ 그럼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신전이 없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당신네 제사장들은 어디서 일하는 거야?’라고 물으면,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제사장이 없어.’라고 답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웃들은 바로 되물었을 겁니다. ‘당신네 신들을 기쁘게 하는 제사는 그럼 대체 어디서 드린다는 거야?’ 그럼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제사도 더 이상 드리지 않아.’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전을 끝내신 성전 그 자체이셨고, 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모신 성령이며, 모든 제사장 직분을 끝내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셨고, 또 모든 희생 제물을 끝내신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누구에게나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내용이 워낙 특이해서,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함께 분류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과 아버지가 나오는 비유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무신론자라고 불렀다는 게 너무 당연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는 바로 그 아이러니를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종교이고 도덕입니다. 기독교의 반대 개념은 일부 세계 종교를 제외하고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제3의 존재이며, 일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처음에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종교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와 같이 아주 귀찮고 성가신 심지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고, 그 반면에 종교나 도덕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께 아주 매료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신약성경 복음서 전체에서 바로 그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과 소외된 사람(7), 종교적인 사람과 인종적으로 소외된 사람(3-4), 종교적인 사람과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19)을 만나실 때마다, 소외된 사람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그런데 맏아들같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분노하고 분개하면서 적대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위가 높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21:31-32)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에, 당시의 종교적이고 스스로 율법대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미치셨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매료되고 끌렸던 부류의 사람들이 이 시대의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 안 믿는 사람에게 가장 가기가 부담스러운 곳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만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부담스러운 사람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교회에 와서 목사님을 만나봐. 장로님을 만나봐. 얼마나 좋으신지 몰라.” 제일 가기 싫은 데 가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니까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통적인 교회들뿐 아니라 가장 개방적으로 하는 교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예배인지 콘서트인지 알 수도 없는 분위기, 불이 번쩍번쩍하면서 빨갰다가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바뀝니다. 옷들은 당연히 모두 캐주얼이고, 슬리퍼에 모자에 아무 것이나 막 입고 오는 오픈된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사실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주 더러운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관습을 벗어나 있는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합니다. 우리를 피합니다.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전도와 우리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미치신 영향과 다르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둘째 아들(동생)들의 마음에 닿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첫째 아들()들의 독무대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교회에서, 목장에서, 가정에서, 개인 전도에서 영혼 구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올 마음이 우리 교회와 목장과 가정과 나 자신의 삶이 너무 ’(첫째 아들) 같아서 그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은 아닌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래서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아니 바로 우리 주변에는, 둘째 아들(동생)과 같이 방황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꺼려한다면 아버지에 대해 죄가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사실 본문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동생이 집으로 가기를 꺼려했다면,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도 있고, 누가 생각나서 못 가겠습니까? 형 때문에 못 가는 겁니다. 형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까 생각합니다.

 

그런 영혼들이 많은데, 그들이 오려고 할 때 우리가 그들을 대하면서 아버지처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형처럼 대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모두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해도,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무조건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바로 지금 그런 둘째 아들과 같이 주님께 돌아와야 하는 영혼들을 향해, 아버지의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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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창 1:1)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1 (12/8/21) admin_p 2021.12.09 819
326 분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2)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3 (12/1/21) admin_p 2021.12.02 353
325 분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1)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2 (11/17/21) admin_p 2021.11.18 406
324 예수님의 분노: 사랑하시기에 분노하시다 (막 3:1-6)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1 (11/10/21) admin_p 2021.11.11 369
323 마르다의 분노: 분노를 합리화하지 말라 (눅 10:38-42)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0 (11/3/21) file admin_p 2021.11.04 506
322 세례 요한의 분노: 진리를 위한 분노는 크리스천의 임무다 (마 3:1-12)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9 (10/27/21) admin_p 2021.10.28 300
321 삼손의 분노: 한 사람의 분노로 공동체가 망가진다 (삿 15:1-8)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8 (10/20/21) admin_p 2021.10.21 287
320 에브라임의 분노: 분노는 자기 대에서 끊어라 (삿 12:1-6)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7 (10/13/21) admin_p 2021.10.14 219
319 요나의 분노: 내가 분노할 때도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욘 4:1-11)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6 (10/6/21) admin_p 2021.10.07 1248
318 나의 결단, 하나님의 돌보심 (시 108:1-6) - 목자컨퍼런스 간증: 권성욱 장로, 장순덕 집사 (9/29/21) admin_p 2021.09.30 122
317 다윗의 분노: 억울할 때 주님께 나아가라 (시 109:1-15)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5 (9/22/21) admin_p 2021.09.23 645
3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대상 13:3-14) - 조준오 목사 admin_p 2021.09.17 190
315 모세의 분노: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에 분노한다 (민 20:6-13)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4 (9/8/21) admin_p 2021.09.09 512
314 요셉의 분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분노를 용서로 바꾼다 (창 45:1-8)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3 (9/2/21) admin_p 2021.09.02 609
313 사라의 분노: 사랑이 없으면 가족도 원수가 된다 (창 16:1-6)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2 (8/25/21) admin_p 2021.08.26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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