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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wi3fbA9pomo?t=1861

 

 

2020819일 수요예배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6

빌립: 신중하지만 결단할 줄 아는 사도

(요한복음 143~45)

 

열두 제자는 대개 복음서에 네 명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져 기록됩니다. 그 중 첫 번째 그룹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첫 번째 그룹이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예수님과 가장 친하고 그분이 특별히 쓰셨던 그룹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 그룹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자들인데, 바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마태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그룹은 작은 야고보와 다대오 유다, 시몬과 가룟인 유다입니다. ‘작은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와 혼동할까 봐 설명된 수식어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세배대의 아들들인데, 작은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대오 유다는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 역시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설명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이 열두 제자 그룹에서 제일 앞서서 나오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그룹의 지도자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제자들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장에서 살펴볼 빌립은 두 번째 그룹에 속한 제자 중 맨 처음에 등장합니다. 두 번째 그룹에서는 빌립이 리더의 역할을 했다고 보입니다.

 

빌립은 한마디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신중하면서도 결단할 줄 아는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완벽주의자 경향도 있었는데, 아마도 빌립은 우울질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1.   빌립의 이름과 회심

 

빌립은 ()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무렵에 빌립이라는 이름이 굉장히 유행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전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빌립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에는 유명한 사람들을 본받기 위해 같은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는데, 빌립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아주 강력한 정복자이자 리더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과 헬라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유대에서 아주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주인공의 이름이 빌립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의 집안은 아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대인 집안 출신이 아니라, 외부의 문화나 흐름에 잘 융화되며 상당히 개방적인 배경을 가진 집안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방성이야말로 어쩌면 빌립으로 하여금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 하나의 배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빌립에 관하여 한 가지 암시를 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벳새다 사람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가 먼저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게 되었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전제를 가정하면서 빌립이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 것을 매우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순간적인 결단에 의존되어 있는 것처럼 기록합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3)

 

그냥 따랐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따라간 것 같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다나엘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여러 선지자가 구약에 기록한 그분을 만났어! 우리가 그렇게 기다려 왔던 그분,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주며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메시아, 바로 그분을 만났어!” 이러한 고백으로 볼 때 그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빌립은 상당히 신중한 사람으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그렇게 쉽게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겁니까? 그래서 안드레나 베드로를 통하여 이미 예수님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빌립을 다루시는 방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신중한 사람에게, “너 나 따라올 건지 안 따라올 건지 잘 생각해 봐!” 하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빌립은 평생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각 사람을 그의 기질에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만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각 제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다혈질의 베드로는 열정도 있지만, 쉽게 좌절하고 상처받고 낙심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만났을 때의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를 장차 게바라 하리라!” 그가 장차 반석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희망과 소망을 주는 메시지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따라오자, “너희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어디에 사십니까?” 하고 묻자, “와서 봐라. 가서 나와 교제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친근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제의 장으로 초청하셨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경우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만나자마자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따라와!”라고 하십니다. 상당히 단도직입적이지만, 잘 따지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접근 방법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평생 생각만 하다가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빌립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따라 나선 것은 빌립의 인생에 있어 새 여행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2.   빌립의 기질과 성격

 

그의 기질과 성격을 알면 예수님이 빌립에게 접근하셨던 방식이 쉽게 이해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오.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나오고 그 현장에 빌립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빌립이 예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6:5-7, )

 

그때 그 들판에 모여든 사람이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최소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2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먹이려면 몇 개의 떡을 만들어야 합니까? 저 같은 경우는 이런 것을 잘 계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있어도 부족합니다.”라고 계산을 합니다.

 

빌립은 수치가 정확하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다 해도 부족할 것 같다는 말은, “그만큼의 떡이 있어도 이 사람들을 다 먹이지 못할 텐데, 어쩌자고 떡 이야기를 꺼내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정확하지만 조금은 부정적인 빌립,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우울질 기질의 특징입니다.

 

우울질의 사람들은 아주 정확하고, 신중하고, 사려 깊고, 분석적이고, 깊이가 있습니다. 또 예술가들도 우울질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을 맡겨 놓으면 또 철저하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후 빌립은 요한복음 12장에도 등장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12:20-21, )

 

그리스 계통의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12:22, )

 

만약 그들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베드로 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면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이랬을 겁니다. “그래요? 이리로 따라오시오.” 그러고 나서 주님, 이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데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혈질적이며 충동적이고, 약간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기질의 베드로는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빌립은 직접 예수님 앞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안드레와 상의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의논한 다음, 안드레와 빌립이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상당히 신중하며,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깊이 생각한 후 확인하고 행동하는 빌립의 기질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또 다른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 장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14:6-7, )

 

내가 길이다. 나를 통해야 아버지께로 갈 수 있어.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거야.”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누가 질문합니까?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14:8, )

 

빌립은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간접적으로만 이야기하지 말고, 아버지를 한번 보여 주세요! 확인하고 싶습니다!’ 실증주의적인 성격, 과학자처럼 실제로 만지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빌립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3.   빌립의 사역과 죽음

 

요한복음에 나타난 몇 개의 사건을 제하면 빌립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빌립이 나오는데 그 빌립은 일곱 집사들 중 하나인 집사 빌립이고, 복음서에 등장하는 빌립은 제자(사도) 빌립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나중에 사도 빌립의 사역 무대는 소아시아(지금 터키)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와 골로새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교회 전승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삼각형 모양으로 위치한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이 세 도시는 금방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지역에 가면 파묵칼레’(Pamukkale)라는 유명한 온천 도시가 있는데, 하얀 석회암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도시 전체가 마치 눈에 덮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바로 이 지역에서 빌립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갈라디아 지방까지 진출합니다. 갈라디아도 역시 터키 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프랑스 골(Gaul)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습니다.

 

빌립은 갈라디아에서 전도하다가 다시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지역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체포당해, 십자가를 지고 히에라폴리스 언덕에서 순교합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사도 빌립 순교 교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찾는 순례자들이 성터처럼 남아 있는 그곳에서 경건히 무릎 꿇어 기도하면서 사도 빌립이 걸었던 인생의 발자취를 추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빌립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면서 그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바쳤던 것입니다.

 

 

4.   빌립의 삶의 교훈

 

빌립을 묵상하면서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긍정적인 교훈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모든 기질에는 약점과 강점이 있지만, 약점을 극복하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강점을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울질이 가진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의 귀한 제자로 아름답게 순교하면서 그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비밀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가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좋은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빌립을 혼자 언급하지 않습니다. 빌립은 늘 누구와 더불어 같이 있다든지 같이 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그 이야기를 누구와 나눕니까? 나다나엘과 나눕니다. 자신이 예수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분이 메시아 같다는 내용을 가지고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는 누구와 함께 대화합니까? 안드레와 함께 대화합니다. 아마도 이런 대화 혹은 우정이 우울질의 전형적인 소심함을 극복하면서 그가 믿음에 도달하고 그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게 한 어떤 비밀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좋은 믿음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었고, 대학 때도 귀한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자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사귀십시오. 물론 교회 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2)  의심이 있어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질문하는 자세

 

의심이 든다고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립에게도 여러 가지 의심이 있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다니며 교훈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질문합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바로 이런 질문이 그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같은 이유로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훌륭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많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신중하지만 결단할 줄 아는 태도

 

빌립은 아주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결단할 필요가 있을 때는 단호히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셨을 때 바로 따라갔습니다.

 

혹시 여러분, 자신이 결단하기 힘든 성격이라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런 성격이야.’라고 합리화하며 미루지 말고, ‘한 번 여기에 내 인생을 걸어보자.’ 하는 결단하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결국 결단입니다. 결단이라는 말은 결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정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이 바로 결단입니다. 지금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과거의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역사책에 나와 있으니까 압니다. 그러나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따질 수 있는데, ‘, 이건 확실하다.’ 하고 내가 믿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결국 신앙도 결단입니다.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가짜인데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60~70% 확실하다면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전도자 빌리 그레햄(Billy Graham)의 자서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20대에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수를 만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며 다른 것도 있다는 견해를 듣고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경 묵상도 잘 안 되고 전도도 당연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끼고 학교의 자그마한 동산으로 들어가 한참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가만 있어 봐. 내가 알아야 얼마나 알겠는가? 이 세상의 똑똑한 사람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사람의 지혜란 무엇인가? 사람의 이성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나보다, 우리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능치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뭐가 어렵겠는가?’

 

그러자 한 동안 의심했던 성경의 기적과 같은 사건들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말씀 위에 제 인생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살겠습니다.” 이후 슬럼프를 벗어난 그는 말씀을 통해 자기 인생을 만들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빌리 그레햄의 설교를 들어보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The Bible says...”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선포자로서 쓰임 받는 놀라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순간의 결단이 그를 전도자로 세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의 결단을 하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수요예배까지 함께 하신 분들이시라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결단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이 되고 구원받을 때만 결단하는 게 아니라 매일이 결단입니다. ,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로 믿어 천국행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셔야 내 삶이 질서를 잡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지금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것은 내 뜻대로 하고 싶다고 주저하거나 결단을 못해 갈등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빌립을 본받기 원합니다. 빌립처럼 결단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신 주님의 음성 앞에 그대로 주님을 따라 순종하며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아가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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