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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Kx6kqgRM8hk?t=1662

 

2020년 5월 20 수요예배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9

고난 받는 자녀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스바냐 314~17)

 

[들어가는 말]

 

중앙아시아에 가면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들이 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도 카레이스키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도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굉장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야 했던 분들입니다. 우리 한민족인데, 만주 일대에 정착하여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갑자기 저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기차에 실어 보내버렸습니다.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그 추운 겨울에 난방장치도 없는 화물칸 같은 데에 막 집어넣어서 보냈는데, 중앙아시아 겨울이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 거기 그냥 버리고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려야 했는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혹한과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고, 중앙아시아에 버려지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 지금까지 고려인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민족의 피가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고려인들이 각 나라마다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많고, 경제적으로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전 우즈베키스탄 민다윗 선교사님을 방문했었는데, 그때 꽤 좋은 식당 주인이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민 선교사님이 거기서 추방되어 키르기즈스탄으로 옮긴 후 그곳을 또 방문했습니다. 그때 고려인 식당에 갔는데, 선교사님 본인이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리로 간 것이었고, 알고 보니 그곳이 보신탕 전문집이었습니다.

 

자기 나라가 있다는 것과 기본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경험이 있는데, 분명히 자기 민족이 있고 백성이 있고 다 있는데 주권이 없고 기본권이 없고 나라도 자기 나라가 아닌 상황이라 얼마나 비참합니까.

 

유다 백성들 역시 나라도 기본권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스바냐도 그들 중 하나로서, 요시야 왕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데, 그와 동시에 소망의 말씀도 선포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그들 가운데 계시며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1.   기쁜 소식의 선포

 

스바냐가 말씀을 선포할 당시가 요시야 왕 때였는데, 요시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이후에 가장 훌륭한 왕이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괜찮은 왕이 19명 중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유다는 그래도 19명 중에 8명이 정직하게 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왕들입니다(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그 중에서도 3(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다윗의 길로 걸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중 TOP 2가 히스기야와 요시야이고, 이 중에도 1명만 뽑으라고 하면 바로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정치적, 외교적으로 판단을 잘못해서 이집트 바로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판단 착오였는데, 그 외에는 정말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할 때가 바로 그 요시야 때인데, 그때는 요시야가 16세에 왕이 되어 아직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시점입니다. 나중에 요시야의 아들들이 쭉 왕을 하다 망하는데, 아직 한 참 남은 때입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이미 유다가 망할 것을 전제로 하여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요시야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 때 유다의 상황은 아주 나빴습니다. 권력층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면서 돈을 모으며 착취했고,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바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심판과 회복을 선언했고, 요시야는 그러한 스바냐 같은 선지자들의 영적 영향을 받아서 나중에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야 왕이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4)

 

기뻐하라고 세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라를 잃고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던 민족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특히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 포로가 된 나라들이 많았는데, 여기서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에도 유독 예루살렘에게 기뻐하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유독 예루살렘입니까? 다른 나라들은 그대로 있지만 예루살렘은 다시 주권을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포로로 잡혀 있지만, 예루살렘 출신들은 다른 민족과 달리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조국이 주권을 회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정치적, 외교적 관점이 아니라 신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5)

 

스바냐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가서 모든 기본권을 박탈당한 채 압제 하에 사는 것과, 유다 백성이 나라를 잃고 노예가 되어 전 세계에 흩어지는 것을 가리켜,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이 그 형벌을 다 받으면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처럼, 이제 유다 백성도 형벌이 끝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물론 이때는 그 형벌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데도 이렇게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이 무엇입니까? 어떤 끔찍한 사고가 나는 것?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병이나 더 무서운 불치병에 걸리는 것?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 사업이 망하는 것? 물론 그런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최악의 형벌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셨을 때 이스라엘은 가지고 있던 모든 기본권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그들의 삶의 기초였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만 하다가 망했고 유다 백성도 우상숭배를 많이 했는데, 나중에 포로로 끌려갈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우상숭배를 저 나라에 끌려가면 실컷 할 수 있다. 가서 실컷 우상숭배를 해라.’ 그런데 막상 거기 가니까 안 하게 됩니다. 참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최근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지만, 제가 오래 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요 이유들 중 하나가 철거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무허가 판잣집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무허가로 집을 지어 살아가니까,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때 그것이 보기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서 무허가 집들을 철거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가서 강제로 철거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무허가 불법 주택을 허물고 법을 어긴 사람들을 쫓아낸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거기 살고 싶어서 살겠습니까? 어려운 형편에 그런 데서 살고 있는데, 살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되니까 살 곳이 없어지고 갈 곳도 없으니 얼마나 서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기본적인 권리가 없어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정말 서러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들을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을 수 없었고, 그들은 아주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을 범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사실은 떠나셨다기보다 그들이 죄를 지으며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살 곳이 없어지고 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사회가 경쟁 사회인데, 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부 열심히 뜁니다. 그런데 뛰다 보면 내가 어디로 뛰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나,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집에서도 예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느끼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내 삶의 자리에 모셔온다는 말은, 나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리스펙’(respect)입니다. 그게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리스펙해드리는 게 예배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1-3)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붙드는 사람을 가리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아서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수백 년 된 나무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모두 물 가까이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끔 그렇지 않은 나무도 있는데, 잘 보면 뿌리가 깊이 내려가서 멀리 있는 물을 끌어오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물가에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입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습니다. 그때 서울의 온누리교회 협력전도사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트타임이었는데도 저와 또 그때 함께 인턴이었던 다른 전도사님과 함께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라고 전임 부교역자들이 아유회를 갈 때 데리고 가주셨습니다. 그때 그것을 주도해서 데려가주신 분이 바로 제가 안식월 때 오셔서 설교해주셨던 김제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수석부목사셨습니다. 그때 경기도 양평을 갔는데, 그곳 용문사에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은행나무는 무려 1,100년 이상 된 나무라고 합니다. 물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삶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금방 해결되지만 도무지 풀리지 않고 괴로움을 주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그럴 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찰싹 달라붙는 것입니다. 나무는 시냇가에 있으면 풍성해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으면 나무도 마릅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우리도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주시고 우리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런데 15절에서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라는 말은, 이제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될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은, 나중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때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됩니다.

 

그 후 헬라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 헬라가 나뉘었습니다. 그 중 특히 동쪽을 차지한 셀류코스 왕조가 있는데, 그 수도가 안디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셀류코스의 아버지가 안티오쿠스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라고 지었습니다. 셀류코스 왕조의 왕들은 전부 다 셀류코스 O세 아니면 안티오쿠스 O세입니다.

 

그리고 남쪽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 왕조가 있어서 서로 싸울 때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때가 있습니다. 마카비 가문이 하스모니안 왕조를 이룰 때의 일로서, 3대에 걸쳐 나라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거기에서 암투와 권력 투쟁이 있었고 로마가 들어오면서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유다 백성이 기대한 것은 눈에 보이는 독립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저분이 메시야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이제 저분을 통해 자기 나라가 독립하겠다는 희망으로 따라다닌 겁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봅니다.

 

1948년에 기적과 같이 이스라엘이 독립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서방의 나라들이 거기에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주었는데,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은 이 스바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성경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습니다. 유대인도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대교인도 있고 무슬림도 있고 크리스천도 있고 다 섞여 있습니다. 무종교도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입니다. 교회가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결국 교회로 이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모세의 언약을 통해서입니다.

 

그 언약의 기초는 가나안 땅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쫓겨났을 때 이미 이들과 하나님의 언약은 깨진 것입니다. 아니 그 전부터 깨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약이 필요합니다. 그 새 언약을 또 다른 예언자이며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예레미야가 선포했습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1:31-33, )

 

하나님과 이 새 언약을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거기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은 단순히 모세 언약의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언약입니다. 옛 언약(구약)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언약(신약)입니다. 땅을 보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보증으로 하는 완전한 언약입니다.

 

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정치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성경이 약속해주는 것은 땅이 아닙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언약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언약 관계입니다. 그 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새 언약 안으로 초청하시면서 너희 가운데 내가 함께 하겠다하고 약속하십니다.

 

 

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

 

성경시대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나라(이스라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역적으로 한 장소에 있었고, 또 시대별로 한 통치자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한 장소에만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고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디에 있어도 교회이며 진정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든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 중심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성령 중심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 성령이 오실 때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게 오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과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6)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은, 낙심하여 자포자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두려워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무 기뻐하시며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7)

 

1)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나 아직 완성된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천국에 갈 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2)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능히 건져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구해냄을 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면 낙심하고 점점 소망을 잃게 되다가 결국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어려움에서 건질 능력이 있으신 전능자이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몇몇 어려움에서 건지시거나 많은 어려움에서 건지시는 게 아니라 모든 어려움에서 건지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거나 잘못해서 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나가다가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뭡니까? 자기 문제입니다. 그럴 때는 빨리 정신 차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 앞에 나와 지혜와 능력을 받고, 또 해결을 위해 나가서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고 신실하게 사는데도 어려움이 온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싸우실 싸움입니다.

 

훌륭한 황 TOP 3 중에 여호사밧이 있었는데, 그 여호사밧 시대에 암몬과 모압의 엄청난 연합군이 유다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싸우러 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너희들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아라. 이 전쟁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맡아 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너희는 대열만 정비하고 굳게 서서, 나 주가 너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아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내일 적들을 맞아 싸우러 나가거라. 나 주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대하 20:15, 17 )

 

이 싸움은 내 싸움이다.’라고 하십니다. 가끔 보면 이런 약속을 주셨는데 왜 하나님이 내 삶에 아무것도 안 해주십니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려면 여호사밧처럼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다윗의 길로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봐야지,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안 해주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나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싸움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고생하고 힘들어집니다. 이기더라도 완전히 지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 나의 신앙을 점검하게 해주고,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주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줄 때, 이 문제는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싸움에서 승리를 주시는 전능자이십니다.

 

 

3)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있는 그 자체만으로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했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만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아기를 낳고 키운 분들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엄마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압니다. 내 아기가 나를 보며 벙글벙글 웃거나 가만히만 있어도 어떻습니까? 또 옹알옹알 할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너무 즐겁고 기쁘고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막 노래도 불러주고 아유, 우리 아기가 이렇게 말을 잘해?’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서 아주 를 합니다.

 

이게 바로 그 말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바로 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4)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즉 조용하게 사랑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시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모두 죽을까 봐 그러시는 것입니다.

 

아기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너무 기쁘고 좋아서 아이를 콱 껴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기가 잘못됩니다. 하나님이 너무 표현하시면 안 좋을 수 있으니까 조용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지만 조용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용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조용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어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주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면 우리가 죽으니까 사람을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나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잠잠한사랑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5)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좋으셔서 즐거워하며 노래를 부르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아기가 앞에 있으면 노래도 불러주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찬양을 드려도 부족한데,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좋아하셔서 노래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니, 이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 노래하신다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봅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도 평상시의 표현방식으로는 그것을 다 표현하시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기뻐하십니다. 나를 보기만 해도 너무 좋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거야.’라고 괜히 스스로 지레짐작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 눈에는 사랑스러운 아들이고 딸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보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습니다. 잠든 아기를 보면서 만면에 따뜻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지으시는 표정입니다. 얼마나 흡족해하시고 기뻐하시는지, 아니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며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느껴지십니까? 이것을 느낄 때 신앙생활이 감격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면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부담스러운 겁니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답답해서 편지에 썼습니다. 에베소서 같은 데 보십시오. ‘왜 이걸 모르느냐?’라고 하면서 쓴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랑의 마음을 알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삶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나를 보시며 얼마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어쩔 줄 몰라 하시는지, 그래서 얼마나 즐거워하시며 나 때문에 기쁨의 노래를 부르시는지, 그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자신도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분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복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려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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