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d2xMzxZLkE?t=1565

 

 

2020429일 수요예배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6

문제로 인하여 앞길이 안 보일 때 기억할 것

(에베소서 115~23)

 

[들어가는 말]

 

지난 3월부터 한 달 반 이상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우리 삶이 아주 단순해졌습니다. 사실은 이 미국 생활이란 게 단조롭지 않습니까? 원래도 비슷한 일들이 매일 반복되는 삶이기 때문에 단순했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만 있으니까 더욱더 단조로워지고 단순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고난이 많기 때문에 때로는 질병이나 가난이 찾아오기도 하고, 실패를 겪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자칫 잘못하면 문제라는 늪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단조로운 삶 속에서, 또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한 고달픈 인생 속에서도 활력이 넘치는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상황

 

먼저 에베소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잡혀서 로마로 간 다음,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더불어 소위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본문을 볼 때, 먼저 에베소 교회가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지금의 터키 지역인데, 그 당시 아시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많은 민족들이 모여 장사를 하고 또 해외무역이 활발했던 굉장히 바쁜 도시였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는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 왔고, 그 안에 수많은 사제들이 있어서 아데미 여신을 위한 제사도 지냈습니다. 바로 그 근처에는 5만 명 정도나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Amphitheater)이 있었고, 야수들과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신나게 즐기던 스포츠 센터도 있었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랬지만, 에베소도 로마의 주요 도시였기 때문에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1세기 당시의 에베소는 지금으로 하면 뉴욕과 비슷한 곳으로서, 아주 번성하고 화려한 동시에 죄악도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에베소에 바울을 보내셔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중요한 동역자가 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거기서 2년 정도 사역을 한 바울은, 그들과 함께 고린도를 떠나는데, 고린도의 외항인 겐그레아에서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고 떠납니다. 그 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에베소에 놓아두고 자신은 금방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에 있는데, 거기서 배를 타고 지금의 터기 지역에 있는 에베소로 가서 그 부부를 두고 자신은 떠났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에베소에서 복음의 전초기지를 세우고 사역하고 있으라고 했던 것인데, 실제로 그 부부는 거기서 열심히 사역했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뛰어난 말씀사역자인 아볼로를 훈련시켜서 아가야(고린도)로 파송을 합니다.

 

그 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로 다시 와서 3년 정도 사역하며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큰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일들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데,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에게 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에베소에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은돈 5만에 해당되는 마술 책들을 불사르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또 골로새에서 에바브라와 빌레몬 같은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골로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중에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에베소에는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합니다. 대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만 밀레도로 불러 고별설교를 했습니다(20). 그 내용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느껴집니다. 그 후 시간이 더 지나서 로마로 호송되어 간 다음,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가 에베소서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5)

 

이 말씀을 보면,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확실했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의 열매를 사랑으로 피운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었지만, 에베소 교회에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4장을 읽어 보면 이 교회는 서로 간에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5장을 보면 아직도 옛사람을 따라 살고 있는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는 안 그랬는데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 것을 보면, 술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6장을 보면, 어두움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 싸워야 할 문제도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영적전쟁에 대해 쓰지 않았는데, 에베소 교회에게는 영적전쟁에 대해 썼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결코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환경도 어려웠고,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아직도 옛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때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어디로 갈 수는 없지만, 기도는 세계 어디나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2.   바울의 기도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6)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니까 아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네 가지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하여 기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의 가장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이 다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의 최우선적인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기도하는데, 지혜와 계시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핵심적이고 우선되는 목표 역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거나 그분에 대해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지식적으로 아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남이 경험한 것 말고 내가 경험하여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애매모호한 추상적 지식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변화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고, 껍데기만 있는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 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있는데, 본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그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십니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무엇보다 자녀는 아버지에 대하여 모든 권리를 가집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자녀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십대가 되면 자기 프라이버시에 대한 의식이 높아집니다.

 

아까도 제가 아들 방에 들어갔더니 내 방에 왜 들어왔냐? 나가라.’라고 해서 알았다고 나가서 생각해보니 가만있어, 이게 내 집인데. 내가 빌려준 방인데 얘는 자기가 왜 큰소리치나?’ 그게 자녀의 권리입니다. 자녀는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책임을 져줍니다. 그게 아버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자녀는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 아버지라는 호칭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모든 책임을 다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아버지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난, 역경, 실패, 가난, 질병이 올 때, 고아같이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서는 결코 참되고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든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고, 생각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벌어지는 현상들도 생각해야 하고, 좋은 책들도 읽어야 합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12:24, 27)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들에 핀 백합화에 대해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까마귀를 생각하라.”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단순히 까마귀가 뭔가, 왜 저렇게 나나, 백합화가 뭔가를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별것도 아닌 존재들, 동물과 식물도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고 길러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자녀 된 우리는 얼마나 더 철저히 책임져주시겠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늘 생각하고 기억한다면, 불필요한 근심과 불안의 노예로 사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도록 기도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18a)

 

부르심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가리켜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위해서, 즉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을 사명’(miss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이나 사명을 같은 의미로 많이 쓰는데, 부르시는 순간 바로 사명을 주시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써도 됩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 바로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여러 어려운 일들과 상황으로 인해 힘들고 괴로움을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바로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제 틀렸어. 이젠 새로 뭔가를 하기에는 늦었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는 나는 너무 어려서 안 돼.’라고 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나이라는 벽 속에 갇힙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나이를 굉장히 따집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이 나보다 위인지 아래인지를 먼저 따집니다. 몇 년생인지 알아내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동갑이면 좋아하기도 합니다. 나이라는 개념이 너무 강한데, 그러다 보니까 나이에 따라 몇 살에는 이래야 되고 몇 살에는 저래야 된다고 하는 것이 너무 고정되어 있습니다.

 

70대나 80대 이상이 되면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무것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바로 고정관념이고 선입견입니다. 고정관념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고정관념을 고장 난 관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시작하면 됩니다. 특히 기도하고 말씀 묵상은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눈이 잘 안 보이면, 틀어놓고 읽어주는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안 해서 그렇지, 너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혹시 그것을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깨닫고 그러한 소망 가운데 주신 사명에 합당한 삶을 지금 살면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도록 기도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8b)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라고 할 때의 기업이 아니라, ‘상속또는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유산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속해주실 유산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풍성한 유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말을 하는 분들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상속받을 유산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빚만 떠안았다.’라는 경우도 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받을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실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뭔가를 남겨주고 싶은데 남겨줄 게 없어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로서 나에게 올 유산이 없다고 너무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또 부모로서 남겨줄 게 없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제일 중요한 유산은 믿음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믿음으로 잘 키워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유산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몇 천억 달러를 벌어도 지옥에 떨어지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게 살았어도 영광의 천국으로 들어간다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이 가장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런데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저 천국에 예비해놓으신 엄청난 유산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기서 부모님에게 받을 유산이 아무것도 없어.’라고 하더라도,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엄청난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너무 엄청나서 정확히 뭐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해주셔도 우리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냥 엄청난 게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종착점은 하늘의 유산입니다. 분명히 받습니다. 꼭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우 이 땅 위의 얼마 안 되는 재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유산을 우리 앞으로 준비해두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돈이 많고 부자가 계시더라도, 아무리 부자라도 여러분이 빌 게이츠(Bill Gates)보다 더 부자입니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워렌 버핏(Warren Buffett)보다 돈이 많으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유산은 그런 것과 비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갑부들의 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유산이 우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앞으로 탁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땅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앞으로 받을 것이 별로 없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유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속을 받아도 세금이 있습니다. 그것을 안 내려고 숨기고 몰래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얼마나 불안합니까? 발각될까 봐 불안에 떱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천국에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엄청난 유산은 세금도 없습니다. Tax free! 얼마나 대단합니까?

 

바울은 바로 이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바울이 그저 무미건조하게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잘 모르니까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아니, 하나님이 성도에게 상속해주시는 유산이 얼마나 엄청난데 그걸 모르냐? 그걸 좀 알기 원한다.’ 하고 흥분하며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업(유산)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로 맛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2-4)

 

에베소서는 고린도후서보다 늦게 쓰인 책입니다. 고린도후서는 3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쓰고 조금 후에 고린도로 내려가서 로마서를 썼는데, 에베소서는 로마 감옥에 갇혀서 썼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을 썼을 때를 기준으로 그때로부터 14년 전에 바울은 셋째 하늘”(천국)에 갔다 왔다고 말합니다. 물론 자기라고는 하지 않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은 자기를 가리킵니다.

 

그때 천국의 모습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엄청난 영광을 체험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엄청난 유산을 받을 상속자로서 천국의 영광을 그렇게 미리 맛보았기 때문에, 얼마 후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7-18)

 

그것을 맛본 사람이니까 이렇게 쓰지 않았겠습니까?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장 칼뱅)도 죽음을 맞이하여 바로 이 로마서 말씀을 외우면서 마지막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고 눈을 감았다는 겁니다. 우리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침상에서 바로 이 말씀을 말하고 눈을 감는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좌절하고 피곤하고 지친 채 살아가는 때가 많습니까? 왜 고달픈 인생이라고 하며 앞길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이 유산의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모르니까 기대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너무 좁고 닫혀져 있습니다.

 

자신의 눈을 열어 그 엄청난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바로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하늘의 유산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달으며, 그 소망 가운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혹시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만 천국은 안 보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실제 눈으로는 당연히 안 보이지만,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 이런 약속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조금 전 찬양의 가사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리라라고 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4)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도록 기도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

 

두 번째로 기도한 것이 부르심의 소망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의 소망의 내용이 세 번째로 간구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에서 출발해서 풍성하고도 영광스러운 기업을 차지하는 것으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막을 내리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어떤 표현을 쓰는지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 위력, 역사하심, 능력, 지극히 크심등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흥분하는 게 느껴지십니까? 이것을 쓰면서 막 흥분하며 쓰고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이 보면, 바울이 뛰어난 학자이었으면서도 문법이 안 맞는 데가 있다는 겁니다. 또 한 문장이 한 장 길이가 되는 것도 있다는 겁니다. 너무 흥분해서 쓰다 보니까 길어지고 틀리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바울은 자기 머리에 들어 있는 단어들을 총동원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기도제목이 새번역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능력의 크심을 말하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극히 크다는 말은 아주 압도적으로 크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비교가 될 게 없다는 겁니다.

 

힘의 강력, 역사하심, 능력의 압도적인 크기, 이 엄청나게 큰 능력이 바로 지금 우리의 삶 속에도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유산을 차지하도록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데, 그런 엄청난 능력을 베풀어주고 계신데, 왜 그것을 모른 채 낙심하고 좌절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답답한 일입니다. 지금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 엄청난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그런 능력을 맛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런 원리입니다. 컵이 있어서 바로 들고 있으면 능력을 받는데, 거꾸로 들고 있으니까 받지 못합니다. 바로 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차역의 역무원이 창밖을 내다보니까 한 사람이 짐을 들고 선로 위를 걸어오더라는 겁니다. 그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그 사람에게로 가서 말했습니다. “이거 보시오,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합니까? 여기 있다가는 기차가 올 때 그대로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지금 철도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저쪽 역에서 선로 위를 걸어갈 수 있는 권리를 샀는데요? 여기 보세요. 여기 있습니다.”

 

역무원은 하도 기가 막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선로 위를 걸어가라는 티켓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가라는 티켓입니다.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티켓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열차가 오니까 그것을 타고 가시면 됩니다. 다시는 위험하게 이 선로 위를 걸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티켓을 주시고, 최종 목적지인 우리가 받을 저 유산을 향하여 여행을 가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파워라는 열차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힘으로 그 위를 걸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티켓으로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믿음으로 그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선로 위를 짐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티켓을 받았으니까 그 좋은 열차를 그냥 타고 가면 됩니다.

 

 

3.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누리라

 

19절에서 말하는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이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 조금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0-21)

 

하나님은 이 엄청난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하셨는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 보좌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것의 통치자로 삼으신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을 정복하신 이 부활의 능력, 또 만물을 지배하는 통치의 능력을 그리스도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했는데, 놀랍게도 이 능력이 우리와도 상관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 즉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머리와 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다스리시는 것에 있어, 부활의 능력과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능력과 생명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큰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예수님에게 임한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한 것을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미 받았으니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금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답답하십니까? 문제가 있어서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려움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죄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패잔병 같이 무기력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상속해주시는 엄청난 천국의 유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꼭 생각하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폭발적인 능력, 예수님에게 임했던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통과 실패와 고민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끝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터널은 시작이 있고 반드시 나가는 데가 있습니다. 금방 끝이 나고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어려운 과정을 지나가면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붙들며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환경을 뛰어넘어 정말 놀랍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아름답고 놀라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5 갈등의 원인을 발견하라 (마 20:20-28) - 우리는 왜 일하는가 9 (11/8/23) admin_p 2023.11.09 98
394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마 4:18-22) - 우리는 왜 일하는가 8 (11/1/23) admin_p 2023.11.02 107
393 영성은 매일의 삶 속에서 빚어진다 (창 39:11-23) - 우리는 왜 일하는가 7 (10/25/23) admin_p 2023.10.26 126
392 시기심은 관계를 잃게 만든다 (삼상 18:6-9) - 우리는 왜 일하는가 6 (10/18/23) admin_p 2023.10.19 93
391 일을 통해 사람을 얻는 지혜 (삼하 23:13-17) - 우리는 왜 일하는가 5 (10/4/23) admin_p 2023.10.05 110
390 일과 삶의 균형 맞추기 (막 6:41-46) - 우리는 왜 일하는가 4 (9/27/23) admin_p 2023.09.28 128
389 일을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눅 14:25-33) - 우리는 왜 일하는가 3 (9/20/23) admin_p 2023.09.21 102
388 무슨 일이 가장 중요한가? (마 6:25-34) - 우리는 왜 일하는가 2 (8/23/23) admin_p 2023.08.24 252
387 왜 이렇게 일이 많은가? (창 1:26-28) - 우리는 왜 일하는가 1 (8/16/23) admin_p 2023.08.17 290
386 영생을 믿습니다 (요 11:17-27)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4 (7/26/23) admin_p 2023.07.27 145
385 목자 컨퍼런스 간증 및 나눔 (딤후 2:24-25) - 박태경 장로, 윤정숙 집사 (7/19/23) admin_p 2023.07.20 80
384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 (고전 15:42-44)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7/12/23) admin_p 2023.07.13 154
383 용서받은 은혜와 용서하는 능력 (엡 4:30-32)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2 (7/5/23) admin_p 2023.07.06 135
382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엡 2:19-22)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1 (6/28/23) admin_p 2023.06.29 122
381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의 의미 (요 16:7-15)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0 (6/21/23) admin_p 2023.06.22 131
380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 (살전 4:13-18)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9 (6/14/23) admin_p 2023.06.15 178
379 하늘에 오르시어 통치하시는 주님 (엡 1:20-23)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8 (6/7/23) admin_p 2023.06.08 166
378 부활 신앙 (고전 15:12-20)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7 (5/31/23) admin_p 2023.06.01 171
377 우리가 믿는 고난의 십자가 (고전 1:18-24)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6 (5/24/23) admin_p 2023.05.25 138
376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마 1:18-25)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5 (5/17/23) admin_p 2023.05.18 119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