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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10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0

아합의 탐욕으로 인한 범죄

(열왕기상 21 1-29)

 

[들어가는 ]

 

요즘 진행되고 있는 미국 대선후보 경선 뉴스를 보면 그 열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경선에서 1등이 되는 것뿐 아니라, 2등과 3등이 누가 되느냐에도 열기가 뜨겁습니다. 그토록 힘들게 고생해서 정치를 하고 권력을 손에 쥐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힘을 갖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비슷한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런 정도인데, 절대군주 체제의 왕정 시대에 왕이 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힘이 클수록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왕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탐욕을 채우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과 나라 전체를 불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권력자가 주어진 힘을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재앙이 올 수 있는지를 아합이 잘 보여줍니다.

 

 

1.   아합의 탐욕과 범죄

 

1)  근심하는 아합

 

지난 본문에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는데도, 아합은 회개하지 않은 채 그냥 근심하고 답답해하며 분노하기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으로서 아합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가진 사람일수록 욕심이 더한 법이라, 아합은 자신의 궁전과 이웃해 있는 이스라엘의 포도원이 무척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인 나봇에게 그것을 팔라고 요구합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1-2절)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기를 원했던 데에는 별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 궁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서 채소밭을 삼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훨씬 더 좋은 포도원을 주려고 하고, 그게 싫으면 충분한 값을 치르겠다고 합니다. 아합은 왕의 제안이고 이 정도의 조건이면 나봇이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나봇은 왕의 제의를 단번에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3절)

 

원래 이스라엘의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개인이 함부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크기와 필요에 따라 직접 지파별, 부족별로 나눠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파 자손대대로 물려주는 땅은 개인이 함부로 사고 팔 수 없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이 사실을 아합도 몰랐을 리가 없었지만, 아합은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더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뜻입니다. 아합에게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나봇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다 우상을 섬기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감히 왕의 요청을 거절한 나봇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 땅을 팔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합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볼 수 있고, 나라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인 왕과도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도 나봇은 굴러들어온 절호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절대 권력자인 왕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는 물론 온 가문이 모두 멸망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합은 정상적인 왕이 아니고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며 그 아내인 이세벨 역시 최고 악질인 것을 나봇이 몰랐겠습니까? 이러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봇은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합의 요구를 거절한 나봇의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나봇에게는 경제적인 이득과 정치적인 성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만큼 믿는 것이다. 믿으면 순종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고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진짜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7-19)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신 말씀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까지는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금 내게 미워하는 사람이나 불편해 하는 사람 또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씀을 믿고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쉬워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 어렵습니다. 자존심 상하고, 하기 싫고, 그 사람을 보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순종합니다. 주님의 명령인데도 내가 싫어서 안 한다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아버지의 뜻대로는 행하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자들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면으로 볼 때 나봇의 용기 있는 결단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훨씬 쉬운 문제 앞에서도 쉽게 타협하고 맙니까? 크리스천이라면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을 다 알지만, 주일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질 때, 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직장도 좋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신랑감인데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미신을 섬기는 집안일 경우, 신앙의 집안이라도 눈 딱 감고 타협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붙이는 이유는, “네가 가서 전도하면 된다.” 그러나 정말 전도하기 위해서 결혼시키는 게 아니라 배경이 그 이유 아닙니까?

 

이런 일들은 더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정말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생길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겠습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그건 현실을 잘 모르는 이야기라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정말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텨 보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나봇은 목숨을 걸고 왕의 제안을 거절하자, 아합은 다시 근심하며 궁으로 돌아옵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4절)

 

아합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침상에 누워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아합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정말 낙제점입니다. 왕이라면 근심하는 내용이 백성들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껏 한 사람의 재산을 탐내다가 그것이 자기 소유가 안 되니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근심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과 사를 전혀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근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삶 때문에 근심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이유 때문에 근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악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이세벨

 

이 한심한 남편에게서 사정을 들은 악한 왕비 이세벨은 아주 악한 일을 꾀합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7절)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왕이라는 말입니까? 일개 백성의 포도원 하나 마음대로 못 하고 그 일 때문에 식사도 안 하며 근심하다니, 참으로 한심하군요. 내가 다 해결해드릴 테니 어서 일어나 식사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가지세요. 에이, 쯧쯧...”

 

아합은 적어도 나봇의 대답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근심이라도 했는데, 이방 여인이며 우상 숭배자였던 이세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 상황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활한 계획을 세웁니다.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8절)

 

이세벨은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써서 왕의 도장을 찍고 나봇이 사는 성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편지도 한 장이 아니라 “편지들”을 여러 장 보냅니다. 그만큼 치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9-10절)

 

먼저, 성읍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모으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큰 죄를 범했을 때 모두를 다 모이게 하는 비상사태를 의미했습니다. 거기서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높이 앉히고, 불량자 두 사람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바로 분위기를 몰아 나봇을 끌어내서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세벨의 계획은 재빠르게 실행되었고,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나봇은 순식간에 악을 행한 자로 몰려 돌에 맞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11-13). 이세벨은 나약한 남편 아합 왕의 이름으로 계략을 꾸며 성실하고 결백한 국민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고 죽게 했으니, 참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잘못된 길을 가면 바로잡아주어야 할 국가 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국민을 사형시켜버렸습니다. 게다가 이세벨은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도 공범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금식을 선포하는 것이나 두세 증인을 세우라는 율법에 따라 불량배들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워 나봇을 모함하여 죽인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의 사악한 계획에 악용한 무서운 범죄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세벨은 두고두고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가 되어 요한계시록에도 언급되는 저주 받을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0)

 

이세벨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따른 장로들과 귀족들은 권력 앞에서 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한 일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행해야 마땅한 지도자들이 악한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썼지만 그들은 그것이 이세벨의 명령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합이 아니라 이세벨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4절)

 

이세벨의 명령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것을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악한 지시를 따랐고, 결국 아무 죄가 없는 나봇을 억울한 죽음으로 모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열왕기하 9:26을 보면,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은 이세벨의 지시에 따라 나봇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까지도 다 죽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서는 상속자들까지 제거하여 화근을 없애야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을 비롯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나봇을 죽인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악한 명령을 거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겁했고, 이세벨과 아합의 권력 앞에 굴복하여 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상황이 어려워서 타협하여 죄를 지었을 때,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신앙이라는 것이 목숨을 걸고 믿는 게 아닙니까?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했다는 변명은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악한 일인 줄은 알지만 내가 손해보고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봇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 죽임을 당할 때 그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나봇이겠습니까, 아니면 아합이나 이세벨이나 성읍 장로들과 귀족들이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눈앞의 상황만 보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자신의 계획대로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이세벨은 아합에게 그것을 알리고, 가서 나봇의 포도원을 접수하라고 합니다.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15-16절)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합의 태도입니다. 그는 나봇이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세벨이 손을 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나봇의 죽음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제 그 포도원을 자신이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을 뿐입니다.

 

한 집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게 된 사실만으로 좋아하며 단숨에 일어나 달려가는 아합의 이런 모습은 최악의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으며, 이제 곧 무서운 심판의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2.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에 대한 심판의 선포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이스르엘로 내려가는 아합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아합에게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19절)

 

이세벨의 간교한 계략대로 나봇이 죽자 아합은 소원대로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원래 주인이시며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행위를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라는 말씀은, 이세벨의 계략대로 이루어진 이 모든 악행의 책임은 결국 아합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네 아내가 죽이고 빼앗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합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물론 아합이 직접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아닙니다. 이세벨이 계획하여 지시했고, 성읍 사람들이 충실하게 그대로 수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결코 “이건 전부 다 내 와이프가 한 일입니다. 아랫사람들이 죽인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아합은 이 일에 충분한 원인을 제공했고, 이세벨이 악한 계획을 세울 것을 알고도 그냥 방치했으며, 일이 다 벌어진 후에도 아무런 조사 없이 그냥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왔습니다. 아합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벌어진 악행이기 때문에 아합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시 7:9)

 

하나님은 마음을 다 꿰뚫어 보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포도원을 드디어 차지하러 온 아합은 욕심을 채웠기에 언제 근심을 했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띄며 의기양양하게 포도원으로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앞에 엘리야가 나타나자 가슴이 덜컥하며 입에서 독설이 나옵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0-22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향하여 “내 대적자여”라고 부르는 아합의 말은 평소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왔느냐?”(새번역) 이 말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살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를 거북해하며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자신의 범죄 현장에서 이 엘리야를 딱 만났으니 또 뭔가 무서운 말이 전해질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예상대로 직설적으로 아합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아합의 집안이 완전히 망하고, 아합 집안의 남자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씨도 남기지 않고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심판입니다.

 

아합이 이런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20).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22). 아합은 자기만 죄를 지은 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리더가 잘못하면 자기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고 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판도 몇 배로 무섭습니다. 그래서 리더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책임이 무겁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도 그렇고, 특히 목사는 더 큰일입니다. 직분자들이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직분자이면서 말씀과 기도생활을 제대로 안 하게 되면 불순종의 길로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만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을 때 욕하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분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목회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담임하는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 그리고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합에 대한 심판에 이어서, 아합을 충동질하여 죄를 짓게 만든 악한 왕비 이세벨에게도 무서운 심판이 선포됩니다.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3-24절)

 

이 예언은 아합이 죽고 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신하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진 이세벨의 시체가 개들에게 먹힘으로 두골과 발과 손 외에는 남은 것이 없게 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사람들 앞에서는 권세 있는 왕과 왕비였을지 몰라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혹합니다.

 

“자기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말려든 아합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렇게 악한 일을 하여 자기 목숨을 팔아 버린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눈앞에서 쫓아내신 그 아모리 사람이 한 것을 본받아서, 우상을 숭배하는 매우 혐오스러운 일을 하였다.” (25-26절, 새)

 

 

3.   아합의 겸비함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회개를 하지 않았던 아합이, 이제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나서 겸비함으로 나아갑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7절)

 

이것은 죄를 애통해하며 뉘우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합의 이런 행동들이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29절)

 

그렇게 악한 죄인인 아합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회개하니까, 딱 한 번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연기해주십니다. 그래서 아합에게 선포된 심판은 그의 아들 요람 대에 가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 동안 저지른 아합의 죄악을 생각하면 그는 용서를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습니다. 갈멜 산에서의 분명한 하나님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람과의 싸움에서 두 번이나 기적의 승리를 주셨지만 불순종하여 아람 왕을 살려줬습니다. 죄 없는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탐욕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표현으로도 아합은 ‘자신의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는 자’(20)였습니다. 끔찍한 죄를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적으로 밥 먹듯이 범한 아합이었지만, 아합처럼 악을 행한 자가 또 없다고 하실 정도의 악인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애통해하자마자,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어 심판을 연기해주십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는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하셔서 결정을 바꾸시면 어떻게 공의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벌을 받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인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18:23, 31-32, 새)

 

어찌 아합만이겠습니까? 사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 아닙니까? 우리도 다 한 꺼풀만 들춰 보면 차마 드러내기도 힘든 더러운 죄가 있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아합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것이 나라고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합이나 나나, 모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죄를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불순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회개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항상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죄를 보면서 전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귀한 길로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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