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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30 수요예배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5

탕자의 비유에서 진짜 탕자는 누구일까?”

(누가복음 15 11~32)

 

1.  행복하지 않은 맏아들 


오늘 본문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비유를 읽을 때마다 어린이 주일학교 시절 내용을 배운 것이 생각납니다. 대부분이 주로 이런 내용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곳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탕진하고 맙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삶이 망가집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반겨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비로소 다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만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안에서 때에만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탕자의 비유를 해석할 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다일까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맏아들의 존재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같이 살았지만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정작 아버지와 함께 있는 맏아들은 전혀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5 전체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주인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비유의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에 대한 비유(1-7)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8-10) 말씀하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앞의 비유는 잃어버렸던 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주인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기뻐하는 여인을 설명하시면서 죄인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엄청난 기쁨이 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는 앞의 비유와는 조금 다른 문제를 하나 다루는데, 그것이 바로 돌아온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맏아들의 등장입니다.

 

실제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사이가 좋은 집들이 많습니다. 특히 재벌들의 경우, 형제자매들끼리 부모의 재산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그런 갈등이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단지 재벌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에는 여기저기서 부모의 재산으로 인하여 의가 상하는 형제자매들이 많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형제끼리 미워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형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면에 잘못된 형제에 대해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부모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부모 특히 아버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정 사역에 있어서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았던 깊은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라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도 형제자매나 자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의 뿌리가 형제자매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강한 불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보통 탕자의 비유에서는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불만을 드러내는 맏아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맏아들이 불만을 표현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이 무엇입니까?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5-28)

 

감히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을 떠났던 동생이 염치도 없이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야단을 치기는커녕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맏아들은 격분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달랩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

 

맏아들은 지금 공평하게 판단하지 않고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에 대해 강한 불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불만은 크게 가지인데, 자신에 대한 것과 동생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렇게 여러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마리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29).

 

둘째로, 동생에 대해서는,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고 합니다(30). 종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자기에게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다”고 했는데, 맏아들은 그를 자기 동생이라고 하고 “이 아들”이라고까지 묘사합니다. 동생으로도 보는 겁니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1-32)

 

것이 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을 보면, 아버지가 공평하게 하려고 것과, 아버지는 맏아들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맏아들이 야속하고 섭섭할 있는 상황입니다.

 

 

2.  나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을 신뢰하기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흔히 ‘자식을 낳고서야 비로소 부모님을 이해할 있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기 전까지는 헤아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철이 든다고도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가질 사건과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자식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것과 부모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른 특징은, 아버지의 계획과 결정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가장 신뢰는 아버지의 생각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입으로 효도하는 아들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비유로 말하지만, 동생과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맏아들의 이야기도 함께 말해줍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율법의 교훈을 받아 보관했던 진리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 2:17-18)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과도 같이 자신들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았고,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과 결정들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모독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고, 그들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도,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기는커녕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 1:10-11, )

 

그들은 오히려 빛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목 아래 돌로 죽이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10:31-33)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신성모독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께 신성모독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버지라 여기는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못난 둘째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벌이기까지 했다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지만, 모습을 맏아들은 불편했고 분노합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결정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화를 내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은 지금 아버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상 좋은 아들이 수가 없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집에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아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시는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지 유대인들의 잘못만을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비유에서 우리가 얻을 있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나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과 인도하심을 정말로 신뢰하는가?

 

만약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인생은 모양입니까? 남들은 사는데 나만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기도에는 응답이 없으십니까?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 ? 하나님은 정말 저를 지켜보고 계시기는 하는 겁니까? 이런 불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신성모독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우리는 모세를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여기며 좋아합니다. 모세의 믿음과 그가 행한 능력이 우리의 삶에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잉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지팡이가 움직이면 홍해가 갈라지고, 사막의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렸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믿음을 ‘능력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것은,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십니다. 최악의 살인마나 테러리스트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을 하자,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당장 부르셔서 회막으로 오라 하시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의 모습까지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모세를 비방하느냐?” ( 12:6-8, )

 

하나님께서 모세를 좋아하신 이유는 우리가 모세를 좋아하는 이유와 조금 다릅니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해서 충성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은 40 걸릴 길을 2 만에 가기를 원합니다. 반면 모세의 믿음은 2 걸릴 길을 40 동안 사막에서 헤매게 만드셨어도 하나님을 여전히 따르고 신뢰하며 충성스럽게 섬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가끔 어떤 사역을 맡아서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어쩔 없이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하기가 싫어져서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단지 교회 사역에 차질이 생겨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충성하는 사람, 신실하게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그만두는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아론과 미리암처럼 어떤 일에 대해 비난하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많아도, 모세처럼 묵묵히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좋아하셨습니다. 다윗 같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며 나아간 사람을 좋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마음을 품어야 하며,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을 신뢰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불만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래 유대인들이 범했던 못된 ,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죄를 우리도 똑같이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향해 당신의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아버지로서 끔찍이 사랑하시는 자녀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아주 섬세하게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십니다. 그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분의 결정을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 아니 너무나도 가기 싫어하는 길로 내몰기도 하십니다. 그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럴 때도 하나님을 신뢰할 있습니까? 그럴 때도 나보다 뛰어나시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를 있습니까?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 29:10-13)

 

말씀은 유다가 망할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11). 이것은 그냥 평안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절망의 순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동으로 되는 아닙니다. 분명히 평안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경험할 있는 사람은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12).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며 찾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13).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말씀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4.  누가 진짜 탕자인가? 


그런데 우리는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른 같을 ,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가야 하는 바른 , 하나님이 나에게 가기를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길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해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많은 부분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입니다. 길은 세상의 안락과 풍요의 길입니다. 세속적인 성공과 똑같은 길입니다. 그리고 길로 평생 가는 것을 복된 삶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를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녀의 길을 벗어나 세상의 풍요로운 길로 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신앙과 우상숭배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항상 같이 있었으면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사실상 둘째 아들이 아니라 바로 맏아들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 8:34-35)

 

하나님은 땅의 크리스천들이 가야 하는 길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님의 길로 따라가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7:13-1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나?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나? 그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해하기보다 세상의 마음을 많이 품고 따르는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보다 세상의 풍요로움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훨씬 같습니다. 커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많은 같습니다. 낮아지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려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버리는 일이 많아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이상 교회가 없을 것이고 크리스천은 이상 크리스천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 사이비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사이비 제자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성모독을 범하는 죄인들의 집단일 뿐입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맞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그토록 많이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로 인정하며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며, 하나님이 결정해 주신 길이 내가 원하는 길과 다르더라도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그런 자녀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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