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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 수요예배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1

예수님을 의심한 세례 요한은 과연 정상인가?”

(마태복음 11 2~15)

 

오늘부터는 새로운 시리즈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시작합니다. 작년 한국에 나갔을 흥미로운 권을 보고 사왔는데, < 교회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왜곡했을까?>라는 책이었습니다. 오대식 목사님이 책입니다. 그분은 지난 오셨던 김동호 목사님이 섬기시던 ‘높은뜻숭의교회’가 개로 분리된 교회 하나인 높은뜻정의교회 담임목사입니다.

 

2010-2011년에알고 보면 재미있는 구약 이야기/신약 이야기 나누면서, 성경을 우리가 무심코 넘길 있는 내용들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관점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면에 숨어 있는 성경의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을 중심으로 하여, 먼저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다루고, 다음에는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의 중요성

 

오늘 먼저 살펴볼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것이란 예언이 구약성경 곳곳에 있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의심하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3)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치고는 엉뚱한 질문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아주 황당한 말입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보냈더니 정작 오신 분을 의심하고 있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정말 그분인지 의심했고,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은 정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미련했던 걸까요? 아니면 당시 헤롯의 고문이 너무 심해서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가요?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1 6개월이나 머물던 곳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그곳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죽으셨는지, 부활이 무엇인지를 들었고, 성령님이 누구시며 은사가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가장 힘들게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이유도 그들이 바울의 방문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인들끼리 서로의 신앙생활을 방해한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로 나뉘어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가 있었고, 심지어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파벌이 나뉘어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고전 1:11-13).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있었고, 봉사를 때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귀한 은사들을 많이 받고 엄청난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영적으로 어린아이며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없어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 3:1-4)

 

아무리 영적인 은사가 많고 엄청난 사역들을 감당하고 신앙의 연륜이 깊고 직분을 맡아 섬기더라도,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어 서로 다툰다면,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이며 육신에 속한 자일뿐입니다. 절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그런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옛날 고린도 교회의 분쟁 같은 모습들이 똑같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상황들이 나타납니까? 그런 문제는 해결이 됩니까? 사실 교회가 분열하고 싸울 보면, 초신자는 싸우는데,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권사 ,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싸웁니다.

 

하비 칵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가르쳤던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1988 <뉴욕타임즈(NY Times)>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10인’에 들기도 했던 분입니다. [세속도시]라는 유명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교회의 붕괴를 오래전에 예측하면서, 기독교의 붕괴는 과학의 발달과 산업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계기가 되었던 연구가 있었습니다.

 

번은 칵스 교수가 그리스도인 의사와 치료사 6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마태복음 9( 5, 8)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뒤에서 만지는 장면을 설명할 , 상황에서 누구의 심정에 제일 공감이 되는지를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야이로, 혈루증을 앓는 여인, 군중, 예수님 가지 보기를 제시했습니다.

 

그때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야이로라고 답한 사람이 300 , 혈루증 여인 100, 군중 0, 예수님 6, 나머지 200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칵스 교수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그리스도인 지성인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와 비슷한 실험을 후에도 계속해 나가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많은 변화가 요청되고 이루어지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관심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교회들은 커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열정적인 활동들이 이루어지지만, 곳곳에서 기독교가 몰락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과 말씀의 홍수 속에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마음을 품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목회자의 욕심이나 교인들의 세속적 관심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대의 교회가 영양실조에 걸린 힘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당신이 진짜 메시야입니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솔직히 말해 ‘다윗 시대’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억눌리고 억압을 받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대인들의 민족적 열망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와서 주변 나라들을 힘으로 정복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 그들의 민족적 소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평화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그러했던 다윗 시대가 다시 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메시야가 오셔야 했고, 메시야는 다윗과 같이 힘을 가지고 주변 나라를 정복할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성난 바다의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남자만 5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에 대해 열광했고, 모두가 예수님을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려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도의 힘이라면 로마 시대를 끝내고 다시 ‘다윗 시대’를 가져다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호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6:14-15)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수천, 수만 명이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고,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는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하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지를 가지고 서로 싸웠고,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왕이 되실 것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활동을 하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과 수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며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들의 선생님인 요한에게 보고했습니다(2). 진짜로 예수님에 의해 로마가 무너지면 요한도 죽지 않고 감옥에서 나올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소 흥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동요함 없이 오히려 차분하게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묻게 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게 무슨 질문입니까? 남들은 전부 메시야가 오셨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데, 심지어 왕으로 추대하려는 판인데,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세상 돌아가는 감이 떨어진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한은 메시야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것을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기록된 보라 내가 사자를 앞에 보내노니 그가 길을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9-10)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례 요한의 영적 통찰력이 정확했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들 자기 나름대로 원하는 메시야 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의문을 가지고 진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메시야를 제대로 이해한 세례 요한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진짜 메시야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며 엉뚱한 질문을 하다니, 이것은 정말 이상한 아닙니까?

 

예수님이 40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신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셨을 요한은 이미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부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4:12). 요한은 직접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거나 직접 그분의 천국 복음 선포를 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들어보니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그런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고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5)

 

내용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들어서 이미 아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분이냐고 묻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가?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헤롯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죄를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사명을 받은 세례요한이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진짜 왕이 오신다는 것을 외친 것입니다. ‘헤롯은 죄인이며 가짜 왕이다. 하나님은 그를 내치시고 진정한 메시야를 세우실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막상 갇히고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듣고서 실망했습니다. ?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다른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어떤 메시야를 기대했습니까?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 3:7-12, )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오시면 알곡과 쭉정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해서 악한 것들은 불로 태워버리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둔 헤롯을 심판하셔서 그를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자리에 올라 유대인의 왕이 되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종교적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썩어 있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에게 붙어서 권력이나 탐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심판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들어보니 자기 생각과는 길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과 더불어 불로 심판해야 마땅한 대상인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라는 소리도 들리고, 헤롯을 징계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자주 부딪친다는 소리는 들리지만, 그들을 심판하시는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그들이 공격하고 던지려는 것을 피해 도망 다닌다는 소리만 들립니다. 이게 어찌 일입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정말로 메시야인지 의심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내가 메시야다’ 암시하십니다. 사실 5절의 내용을 보면, 이런 기적들은 아무나 일으킬 있는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6 말씀이 해석의 열쇠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헤롯을 물리치고 요한을 감옥에서 꺼내어줄 있는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제압하여 심판하실 있고, 로마도 무너뜨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은 메시야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못된 것들을 태워버리고 징계하는 것은 메시야(그리스도)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메시야가 하는 일입니까? 회복과 은혜와 자비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회복과 관련됩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악한 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 심판 후의 회복과, 정죄 뒤의 자비와, 슬픔 뒤의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땅에서 하실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정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며 언제 하는 것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악인들을 불로 심판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남을 사람이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일을 위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하시는 일을 보며, 비록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을 복이 있게 됩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세례 요한의 질문을 가졌는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습니다. 크게 부류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능력에 열광한 군중입니다.

둘째, 군중의 일방적 반응에 휩쓸린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셋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바르게 보려는 세례 요한입니다.

 

지금의 언어로 바꾸어보면 이러한 부류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받기를 원해서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는 교인들입니다.

둘째, 그런 교인들의 기대를 함께 따라가며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세상적 복만을 이야기하는 교회 지도자들 특히 목회자들입니다.

셋째,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이게 아닌데’ 하면서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교인들이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거기에서 뭔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따릅니다. 자기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문제, 자녀 문제, 장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믿고 따르며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다 일이 풀리면 교회를 떠납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비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이 잘리게 되는, 처참하고도 허무한 죽음을 당하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결코 실패가 아니라고, 오히려 그의 삶은 하나님 시각으로 엄청난 성공의 삶이었다고 인정하며 선언해주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2)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말이 무엇이며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 말은 무엇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천국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땅의 나라에서만 먹고 살기를 원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참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가장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에 들어간 자는 그보다도 크다 하십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어떤 사람은 예수를 통해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때문에 한자리 차지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차지했던 편안한 자리도 포기하고 희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부유하게 살아가며 복을 받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게 전부가 아닌데’ 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분을 따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야가 되신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원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채워 주시기를 기대하며 따릅니까? 혹시 믿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 그래도 예수를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이 세례 요한의 질문이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 요한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세례 요한과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빵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사업을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돈을 많이 벌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내가 원하는 기도제목에 응답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바로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면서, 비록 나의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믿고 따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시며 주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따른다는 고백을 있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천국은 침노를 당하며 그런 사람들이 천국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세례 요한보다도 자라는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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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더욱 알게 하소서" (엡 1:15-19) - (5/29/19) - 황용철 장로 kpccoh 2019.05.30 213
201 "성지순례 간증" (골 3:23, 눅17:17) - 간증설교 (5/22/19) - 이기환 장로 kpccoh 2019.05.23 115
200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눅 15:28-30) - 탕부 하나님 3 (5/15/19) kpccoh 2019.05.16 312
199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눅 15:11-32) - 탕부 하나님 2 (5/08/19) kpccoh 2019.05.09 662
198 "나의 교회" (요일 3:16-18) - 간증설교 (5/01/19) - 권성욱 장로 kpccoh 2019.05.02 107
197 "예수님 주위를 맴도는 두 부류의 사람들" (눅 15:1-3, 11-32) -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 1 (4/24/19) kpccoh 2019.04.25 1145
196 "베드로의 실패와 통곡" (눅 22:54-62) - 성 금요일 예배 (4/19/19) kpccoh 2019.04.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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