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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48 ✦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열왕기하 24장 17절 ~ 25장 30절)

 

1.   시드기야의 어리석음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2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서 포로들을 잡아갑니다. 1차 때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잡혀가고, 2차 때는 에스겔과 모르드개가 잡혀갑니다. 이 2차 포로 때 그 당시 왕이던 여호야긴도 잡혀갑니다.

 

여호야긴을 잡아가면서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는데, 그가 바로 여호야긴의 숙부이며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맛다니야입니다(24:17). 맛다니야도 여호야김처럼 ‘시드기야’라는 이름으로 바꿉니다. ‘여호와는 의이시다’라는 뜻인데, 그가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불행한 왕입니다.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서 여호야김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시드기야는 11년간 통치합니다(18).

 

그런데 시드기야가 이 어려운 상황에 왕이 되어 나라를 맡았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전 왕들처럼 계속 악을 행했습니다(19). 성경에서 ‘악’이라고 하면 대부분 우상숭배입니다. 여호야김이 그랬던 것처럼, 시드기야도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대적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가 예레미야인데, 예레미야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오히려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렘 32:2-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렘 37:15-17)

 

시드기야는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물어보는데, 마치 점치듯이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늘 같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듣지 않습니다. 그때 마침 베니게, 에돔, 모압, 암몬 등 주변 나라들이 서로 동맹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시드기야에게도 함께 하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시드기야는 즉시 그 요청을 수락하고, 애굽 왕에게 바벨론을 물리칠 보병과 기병을 긴급히 요청합니다.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대적이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겔 17:15-17)

 

이것은 BC 591년에 일어난 일인데, 당시 애굽 왕은 삼덕 2세였습니다. 시드기야의 이런 움직임은 즉시 바벨론의 정보망에 걸렸고,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왕인데도 배신하니까 격분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할 때 이스라엘의 마지막 두 왕이었던 베가와 호세아가 어리석은 반 앗수르 정책을 편 것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 유다 역시 140년 후인데도 그와 똑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던 유다는, 어리석은 시드기야가 취한 반 바벨론 정책으로 인해 3차 침공을 당하게 됩니다. 시드기야도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들처럼 어리석게 애굽 쪽으로 줄을 대어서 바벨론을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그랬듯이, 이미 저물어가는 해와 같았던 그 당시의 애굽은 바벨론의 강력한 군대와 맞서면서까지 유다를 도와줄 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작은 동맹국 하나를 위해서 애굽이 그토록 무리하게 큰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가 그토록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하는데도, 왜 시드기야를 비롯한 유다의 왕들은 그토록 끊임없이 애굽을 붙들려고 했던 것입니까?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바벨론을 자극하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를 하셨는데도, 유다의 왕들은 미련할 정도로 그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다 정부의 지도자들 중에 친 애굽파 세력이 그토록 강했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공주를 후궁으로 데려오고, 첨단 군사 무기와 말을 들여오기 위해서 애굽과 교류하던 솔로몬 시대 때부터 뿌려진 씨앗이 이때까지 400년 동안이나 이어져 오고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왕을 세우시기 전에 왕이 되는 자는 말과 무기를 너무 많이 의지하지 말고, 특히 그러기 위해 애굽과 교류하지 말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기초를 다지고 부귀영화와 태평성대를 누리던 지혜의 왕 솔로몬부터 그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했습니다.

 

솔로몬이 잠언도 많이 썼고 전도서도 썼습니다. 이번에 <말씀의 삶>을 하면서 읽으며 아주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전도서의 처음부터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다 해보았는데 결론은 헛되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론은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수백 년 동안 유다의 왕실에는 친애굽파 세력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들은 왕도 어쩔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사극도 보면 당파 싸움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까?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도 그렇지만, 특히 국제 외교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아주 변화가 심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태평양 전쟁 때 서로 싸우던 미국과 일본이 지금은 가장 가까운 우방 중 하나가 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국제 정세라는 것은 늘 변화가 심합니다. 자기 나라의 생존과 이익을 위하여 끊임없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전통과 이전 방식에 갇혀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이라고 안 부르고 ‘중공’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제주도에 가장 많이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공’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중국 사람들에게 어서 옵쇼 하면서 환영합니다. 명동에 가보면 중국말로 된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조선시대 때도 이미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중요시하고 떠오르는 새로운 세력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부르면서 무시하고 자극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의 참극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조선의 대신들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친 애굽파 중신들도 그와 똑같이 어리석은 판단을 하여 이미 기울어져 가는 애굽과 계속 동맹을 맺음으로 막강한 신흥 강대국 바벨론을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실패해서 나라가 망했습니다.

 

게다가 그런 세력들에게 끌려 다닌 시드기야 역시 아주 답답하고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끝까지 시드기야를 설득해서 바벨론에게 온전한 항복을 하라고 권했는데, 자기는 외적 앞에서 항복하는 수치스러운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항복한 왕에게 가해질 적들의 조롱이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렘 38:17-21)

 

시드기야는 아무 힘도 없으면서 괜한 자존심만 살아서 끝까지 어리석은 길을 가고 맙니다. 자존심 때문에, 조롱을 당하는 게 창피하다고 그걸 못하겠다는 겁니다. 왕의 자존심도 중요하고 나라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이미 이전 왕들의 오랜 실정과 악행으로 나라의 국력이 바닥난 이때에, 적의 발 앞에 엎드려 기어서라도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를 지켜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왕이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자기도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나라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끝까지 예레미야의 충성스런 조언을 거부했고, 그에 따라 그는 곧 참담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2.   유다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비극

 

바벨론이 보기에 유다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라이벌인 이집트에 뒤로 몰래 계속 연결을 하며 반역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벨론은 그러한 유다를 이번에는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기로 결정합니다. 정복자 느부갓네살은 서두르지 않고 유다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갑니다. 먼저 라기스와 아세가를 제외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하나씩 무너뜨린 뒤, 본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포위를 시작합니다.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5:1)

 

여기 보면, 바벨론 대군이 예루살렘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사방에 토성을 쌓습니다.

예루살렘은 지형상 성 주변에 또 다시 흙으로 성을 쌓아 올리기 힘들기 때문에, 바벨론 군대가 쌓은 이 토성은 성안의 방어군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성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공격용 망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주요 공성 무기였던 것입니다.

 

역사에 보면 공성전을 벌인 예가 많습니다. 그 성경의 예가 여리고 성 공격이었습니다. 사실 공격도 안 하고 주위를 돌다가 소리를 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공성전을 보면, 너무 오랫동안 함락이 안 되니까 밖에서 공격하는 군대는 악에 받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 성이 무너지면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학살이 공성전에서 많이 벌어진 것입니다.

 

시드기야 제9년 10월 10일에 포위가 시작되어(25:1) 제11년까지 계속되었으니까(25:2), 1년 반 이상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드기야 제11년인 BC 586년 4월 9일(25:3), 1년 6개월이 지나면서 예루살렘 백성들은 혹독한 굶주림을 겪게 되고, 결국은 7월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 시드기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애굽의 군대가 유다 남쪽까지 오기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상한 느부갓네살이 그쪽으로 강한 방어군을 보내어 막으니까 애굽 군대는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 확인한 바벨론 군대의 전력은 애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했습니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애굽군 사령관은, 작은 동맹국 유다를 위해 자신의 군대 전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싸울 마음이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군대를 철군시켜 버립니다. 이로써 시드기야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구원의 희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헛된 데에다 구원의 소망을 걸었던 겁니다.

 

아무리 우방이라도 내가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지, 내가 가진 것이 다 없어지고 아무 쓸모 없어지면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세상 인맥도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를 갖고 있을 때나 나를 도와주지, 내가 가진 것이 다 없어지면 괜히 도와주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는데 왜 도와주겠습니까? 그래서 권력을 잃어버린 권력자에게는 더 이상 친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아직도 안 늦었으니까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시드기야에게 간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를 왕궁 시위대 뜰의 감옥에 가두어 놓은 채 그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판의 칼날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보급이 완전히 끊어진 예루살렘 성안에서 백성들은 차례로 굶어죽어 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예레미야의 기록을 보면,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 삶아 먹기까지 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패역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와 유다 군사들은 모두 한밤중에 ‘왕의 동산 곁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25:4)

 

이 ‘왕의 동산 곁문’은 예루살렘 남동쪽 실로암 연못 부근에 있는 성문으로, 유다의 남부로 도망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향이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목숨을 건 최후의 도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군의 포위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빨랐습니다. 오랜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극도의 공포에 시달려 탈진한 도망자들은 빠르게 멀리 도망갈 힘이 없었습니다. 지친 몸으로 도망치던 시드기야와 유다의 귀족들은 울면서 달렸을 것이지만, 바벨론의 추격 부대들은 가볍게 그들을 따라잡아서 시드기야를 붙잡아 옵니다(5-6).

 

멸망당한 나라의 왕으로 포로가 된 시드기야에게는 잔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공포에 떨고 있는 시드기야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배신자에게는 반드시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는 그 누구도 감히 바벨론을 상대로 이중 플레이를 할 생각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25:7)

 

바벨론 군사들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끌고 와서 하나씩 칼로 찔러 죽이는 겁니다(7). 유다 왕가를 계승할 왕자들을 죽여서 왕조를 완전히 끝내려고 한 것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을 아버지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행한 것은, 패배한 왕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안겨주려고 한 잔인한 일입니다. 자기 눈앞에서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아들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던 시드기야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정말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걸 하고 뼈저리게 후회했겠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승리한 정복자 왕은 대개 바벨론에 패한 나라의 왕을 데려와 앗수르가 하던 것처럼 그 턱이나 혀에 갈고리를 꽂은 후 줄을 달아서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정복자 왕이 그 갈고리의 가죽 끈을 잡아당겨 고개를 들면, 군인들이 불에 달군 시뻘건 인두로 그 두 눈을 뽑아냈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렇게 한 것은 패전국의 왕을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최대한의 모욕을 주고 절망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드기야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아들들이 죽는 모습이 자신이 생전에 자기 눈으로 본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도 뽑혀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드기야는 백성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비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죽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 군대는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13-17). 이미 2차 침공 때 유다의 금은보화들을 모두 가져갔지만, 이번에는 금속, 특히 놋으로 된 나머지 모든 것까지 다 빼앗아간 것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간 놋의 양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16). 이것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져서 바벨론의 그릇이나 무기나 갑옷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성전과 왕궁과 모든 귀인들의 집까지 다 불태워졌습니다(9). 예루살렘을 둘러싼 사면 성벽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10). 이제 예루살렘은 완전히 무기력한 죽음의 도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감히 바벨론에게 저항하거나 배신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철저히 보여준 것입니다.

 

25장 11-12절과 함께 24장 12절을 보면,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군대는 이미 2차 침공 때 모든 지도자들과 용사들과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모두 다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패전국의 유능한 인물들을 다 포로로 잡아가서 부려 먹는 것은 바벨론의 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자기들이 필요한 고급 인력을 대량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패전국에서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반란의 싹을 아예 잘라 버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쳐 끌려간 포로의 수는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트들을 다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은 ‘비천한 자들’만 유다에 남겨두어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몸이 아주 약한 사람들과 경제적인 극빈층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정복자들이 보기에 쓸모가 없고 반란을 일으킬 힘도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만 본토에 남겨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직도 유력한 사람들이 남아서 군사까지 거느리고 있으니까 그들을 사로잡아서 다 쳐 죽입니다(18-21). 그리고 절망만 남은 그 땅에 바벨론 왕은 그달리야라는 총독을 임명해서 보냅니다.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5:22)

 

느부갓네살은 적대 세력을 멸한 후에는 꼭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그 지역 출신 사람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점령지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달리야도 그런 맥락에서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유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24)

 

이렇게 그달리야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미스바에 설치된 총독부에 거했는데, 얼마 후 반 바벨론파 유다인들에게 암살됩니다.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5:25)

 

이 일 때문에 바벨론의 유다인 핍박은 더 잔혹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난과 핍박에 견디다 못한 많은 수의 유다 사람들이 대거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눈물의 디아스포라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많은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돌아가서 거대한 유다인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25:26)

 

오래 전 자유를 찾아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여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400년 역사의 유다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   소망의 빛

 

이제 세월이 흘러서 저 강력한 바벨론의 정복자 느부갓네살도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납니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지만 금방 죽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까 바벨론이 얼마 못 갑니다. 그런데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에월므로닥이 바벨론의 왕이 되어서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25:27-30)

 

바벨론의 2차 예루살렘 침공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던 유다의 19대 왕 여호야긴은 어린 나이에 100일만 다스리고 잡혀서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에월므로닥의 즉위 기념으로 37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것입니다(BC 550년).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지위를 높여주고 평생 일정한 연금을 받게 배려해준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미한 빛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았을 때, 포로로 끌려왔던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가 3차에 걸쳐 끌려온 것처럼, 예루살렘으로의 귀환도 3차에 걸쳐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 1차 귀환을 이끈 지도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 스룹바벨이 바로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오래 전 왕위에서 끌어내려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올 당시 여호야긴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끌려왔으니까 누가 봐도 비참한 것이지만, 만약 그가 유다에 계속 왕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이 겪었던 운명을 그대로 겪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친애굽파의 등쌀에 못 이기고 애굽에 붙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유다 왕조는 정말로 씨가 말라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야긴이 일찌감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당한 뒤에도 그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또 그의 자손들이 이어져서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유대인들을 이끌고 귀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포로로 잡히던 순간만 생각한다면 여호야긴의 인생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나 넓은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것이 비참한 것이었는데, 피난처로서 보호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역사가 흘러가게 인도하고 계셨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흥분하거나 실망하거나 절망하거나 분하게 여기거나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시각을 뛰어 넘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벌어졌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엄청나게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일이 잘 풀린다고 교만해서도 안 되겠고, 일이 안 풀린다고 해서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가 우리 삶 속에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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