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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4일 수요예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4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는가?”

(누가복음 131~9)

 

1.  무화과나무 비유의 배경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참석할 때 불편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죽는다’, ‘지옥 간다와 같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주 받는다라고 하면 묘한 심리적 불안감을 주면서 사람을 옭아맵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철저히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처럼 가르쳐 신앙생활을 부자유스럽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일종의 위협또는 협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인들의 신앙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부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데 자유가 없습니다. 뭔가 교회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고 큰일 날 것 같다는 부자유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런 가르침이 무슨 얼토당토않거나 누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성경 말씀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이 정말 그런 뜻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어느 시점부터입니까? 언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저와 같은 모태 신앙인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례나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다름 아닌 회심(conversion)의 순간입니다.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거듭남에 이르게 하는 아주 중요하고 본질적인 시작점입니다. 그 회심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회심하면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은 눈물을 쏟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죄인이라고 하시면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동의하는 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감정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정말 회개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것이 회개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회개의 순간을 가장 중요한 시작으로 보고, 회개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삶을 이해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일회적인 체험만이 아닙니다. 회심은 일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회개는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회개는 처음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될 때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는 신앙 입문의 시작점인 동시에,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생명력입니다. 즉 계속되는 회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지고, 나아가 더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천은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또 회개하고, 편하겠다.”라고 하는데, 사실 죄를 짓고 회개를 안 하면 더 큰일 아닙니까?


가장 최근에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하고 형편없는 모습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통회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린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시간이 오래되었을수록 자신의 신앙에 적신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할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 특성상 항상 심판과 연결되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표현이 아주 긴박하고 무섭게 나타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생명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수술실의 규율이 엄격하고, 사격장의 군기가 엄한 것처럼, 생명을 다루는 일은 언제나 엄격하고 살벌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살리고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3:10)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9-20)

 

이 말씀들은 다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해 벌하실 것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이라도 내릴 것 같은 실감을 더하기 위해, 예수님은 막연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당시에 일어났던 엄청난 참상들을 예로 드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더 확실하게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때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은 물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이 물을 공급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들이 여러 문서들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사람은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다른 자들에 비해 그렇게 악랄한 통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예루살렘 주민들을 위해 정책을 많이 폈고, 특히 예루살렘에 물을 대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물을 다스리는 수리 정책에 있어서만은 전임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최상의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빌라도는 우선 예루살렘 한쪽 구석에 있던 실로암이라는 연못을 재정비해서 더 깊이 파고, 또 망대를 쌓아 그곳으로 물을 끌어들이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것은 통치자로서 옳은 선택이었는데, 왜냐하면 목이 말라 물을 찾는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마어마한 공사에 필요한 예산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대공사의 재원을 어디에서 충당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성전의 돈으로 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돈을 긁어 모아 쌓아놓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유대인들과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빌라도가 성전의 돈을 건드리면서, 유대인들은 실로암을 확장하는 일이 자기들에게 꼭 필요한 공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빌라도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로암 공사 도중 쌓았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큰 사고가 터지자 화가 난 유대인들은 성전의 돈을 강제로 가져다 그 돈으로 벌이는 이 공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 비교적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북쪽의 갈릴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빌라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비밀리에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정보가 빌라도에게 들어갔습니다. 스파이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빌라도는 시위를 막기 위해 군인들을 변장시켜서 성전으로 들여보냈고, 결국 그들은 시위의 주동자인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주동자들의 피를 성전의 희생 제물로 쓰는 동물들의 피와 섞는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1)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3장은 이렇게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사회의 혼란 중에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언뜻 보면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과 무화과나무 비유의 말씀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뒷부분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위해 당시에 일어난 사건을 실제 예로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두 가지 말씀은 하나의 교훈을 향하는 것입니다.

 

 

2.  죄가 없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6-9)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회개인데, 예수님의 오늘 본문 말씀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주인은 하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각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때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끼로 찍힘을 당하기 전에 빨리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비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든 각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든, 보편적으로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회개하여 화를 면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기 전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라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많은 경우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저주가 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헌금하라고 하며 더 많은 헌금을 내게 하고 더 많이 모이도록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또 이런 말씀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신앙생활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얽매였고, 신앙생활을 통해 평안보다는 불안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회개하지 않으면 죽습니까?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벌을 받고 저주를 받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정말로 망합니까? 성경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죽은 것을 가리켜 뭐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2-5)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보다 죄가 적거나 더 의인이라서 살아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20041226, 인도네시아 근방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하여 쓰나미가 일어나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등 인도양 주변의 나라들에서 모두 28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재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당시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이 그 재앙에 대해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휴양지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라고 설교해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교회의 비리가 발견되고 그랬는데, 그럼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 교회에는 왜 쓰나미가 안 왔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정말 맞습니까? 정말 그들이 주일에 놀아서 벌 받았습니까? 사실 안 믿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놀지 무슨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그들이 남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지금 죄가 없어서 또는 적어서 살아 있는 것입니까?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주일예배를 드렸더라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소중하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살아 있고, 그때 죽은 28만 명은 죄인이니까 죽은 것입니까?

 

저희 가족이 2015년 안식월 때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바로 그 해 11월에 파리에서 테러 공격이 있었습니다. 만약 저희가 방문했을 때 테러가 났다면 저희도 총을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테러로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은 별 볼 일 없거나 죄인이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요즘은 한국에도 지진이 많이 일어나지만 일본은 늘 지진의 공포 속에 있습니다. 2011년에 일어난 대지진과 쓰나미 같이 일본은 언제든지 큰 지진이 날 수 있습니다. 4만 명이 죽은 2008년 중국 쓰촨 성 지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대지진이나 엄청난 쓰나미 중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브라질 축구 팀이 축구대회 결승전을 위해서 콜롬비아로 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다 죽었는데 네 명인가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 죽었고, 살아난 사람들은 의인이라 산 것입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죄가 많으면 죽는 것이고, 선하고 의로우면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이나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또는 회개해야 산다와 같이 회개와 죽음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면하기 위해,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회개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죄가 있고 없고에 따라 죽는다면, 우리는 죄를 짓자마자 진작 죽었어야 마땅한데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와 은혜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한 해를 또 살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인생이 몇 달 안 남은 시한부 인생이건, 1년 남았건, 10년 남았건, 30년 남았건 상관없이, 그 남은 시간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작년에 만 50세가 되면서 가만히 따져보니까, 앞으로 목회를 할 날이 65세에 은퇴한다고 하면 15년 남은 것이고, 70세에 은퇴한다고 해도 20년이 남았습니다. 그나마 해가 바뀌었으니까 1년이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에 가면서 전도사가 되어 교회 사역을 시작한 것이 1990년이니까 벌써 27년이 되었습니다. Full-time을 한 것으로 따져도 1995년부터 했으니까 22년입니다. 우리 교회에 온 것도 어느덧 3월이면 12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오던 것보다 더 짧은 시간이 남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 땅에서 행복한 인생을 오래 더 즐기며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만약 지금 이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부족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아서, 제 인생을 만회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 우리는 지금 당장 죽으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오래 살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단순히 오래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이 세상에서 장수의 복을 누리며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은 아닙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만회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지은 죄들, 열매 맺지 못한 게으른 순간들, 아무 의미 없이 보낸 시간들, 낭비해 버린 기회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만회할 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전에 형편없었고 부끄러웠던 순간을, 또 야망과 욕심을 위해 살아왔던 삶을 만회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부끄러운 삶을 살거나 여전히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오래 살면서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잘못한다면, 더 비참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삶을 만회하기 위해 건강하게 또 오래 살면서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사망률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100%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영원한 것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상을 주실까?’ 하는 것이 궁금할 정도로 이 땅에서 지금 후회 없는 최선의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살아오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남은 시간을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솔직히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에만 집중하다가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천국에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 학벌, 성공, 높은 위치, 심지어 교회에서의 직분도 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는 삶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1-15)

 

여기서 공적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천국에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것, 영원히 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 중 어떤 것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바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에는 결국 사람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돈이 가고 학벌이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함께 갑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남는 겁니다. 천국에 갈 때는 어떤 물질이나 업적도 함께 가지 못합니다. 사람만이 함께 갑니다. 나의 기도와 섬김 때문에 한 영혼이 주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았다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자라갔다면, 그것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3.  남은 인생은 만회를 위한 시간이다

 

어떤 목사님이 오래 전 인도의 제4대 도시인 첸나이를 방문했는데, 그 도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도마가 교회를 7개나 세우고 순교한 곳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곳에서 도마의 손가락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는 교회의 지하 창고를 갔다고 합니다. 가서 만져보고 싶어서 갔다고 합니다. 시체는 썩는 법인데 손가락이 어떻게 아직도 남아 있나 하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기 때문에 그 손가락만 안 썩었다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손가락을 만져보려고 갔는데 지키는 가드가 있어서 안으로 못 들어갔는데, 그냥 가기가 너무 아쉬워서 돈도 주며 사정사정을 해서 간신히 들어갔다고 합니다. 들어가서 보기만 하겠다고 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그 손가락을 살짝 만지는데, 가드가 달려와서 안 된다고 하며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이 미국에 방문했을 때 다른 목사님들이 전부 다 그 목사님과 악수하려고 줄을 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도마의 손가락을 살짝 만진 목사님과 악수를 여러 번 한 목사님과 악수를 여러 번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저와 늘 악수를 하고 계십니다. 이건 완전히 전설이지요. ^^

 

그런데 도마는 왜 그렇게 먼 인도까지 간 것입니까? 도마는 의심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이해력도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늘 질문을 했고, 부활을 믿지 못해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도 들은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4-6)

 

그 유명한 요한복음 146절 말씀은 도마가 엉뚱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0:27-29)

 

도마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는데도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랬던 도마가 왜 이처럼 먼 이국 땅 인도까지 갔던 것입니까? 그는 분명히 자신이 이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아 변화된 다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가장 먼 인도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교회를 일곱 개나 세우고 평생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서쪽으로 갔는데 도마만 동쪽으로 갔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도 그토록 로마를 가고자 했고, 당시 땅 끝이라 여겨지던 스페인도 가려고 하다가, 결국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갔습니다. 남들은 다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말리는데, 그는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0:22-24, )

 

바울은 왜 그토록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던졌습니까? 도마는 왜 그토록 먼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만회를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이전에 너무 제대로 살지 못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났고 받은 사명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물론 열심히 그렇게 산다고 이전에 잘못했던 것이 메워진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주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드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의미에서 만회라는 것입니다.

 

요즘 큐티 본문이 디모데전서인데,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그게 진짜 고백입니다. 이전에 진짜로 자기가 죄인의 우두머리로 사람들을 이끌어서 스데반도 죽이고 그리스도인들을 마구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항상 그에게는 그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최선을 다해 살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살겠습니까? 더 편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더 성공하려고 살겠습니까? 인터넷 하고, 스마트폰 하고, 드라마 보고, 여행 다니고, 더 즐기기 위해 살겠습니까? 더 큰 집에 살고 더 고급스런 자동차 몰기 위해 살겠습니까? 또 언제까지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불편해 하며 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도끼가 지금 뿌리에 놓여 있는데, 언제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무슨 고민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일단 오래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무의미하고 열매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만회하는 열매를 맺기 위한 시간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해야 망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인데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해줍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의 참 의미는, 우리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남은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주님을 기쁨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정말 기쁨과 감격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날을 바라보며, 하루하루의 삶을 최선을 다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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