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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일 수요예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1

재물보다 더 심각한 율법주의의 위험

(마태복음 1916~22)

 


1.  믿음이 아닌 것

 

오늘 본문은 한 달쯤 전에 다루었던 본문인데, 오늘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려 합니다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중간에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후에 예수님은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시고, 그에 대한 그 청년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2)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의 많은 소유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한 것입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숨겨진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말 요즘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에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하는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그저 성경책을 들고 거리를 다니거나, 식당에 들어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그런 정도의 용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기는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는 용기,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포장된 잘못된 신앙과 싸우는 용기를 말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는 공부가 <새로운 삶>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크리스천은 무엇을 믿는지를 배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어떻게 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냥 삽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말씀과 기도도 다 하는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안 믿는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치관을 보면 똑같습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아이가 잘 되어야 하는 것, 사교육, 레슨 시키는 것 등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의 길을 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7:13-14, )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좁은 길로 가기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엉뚱한 길인데, 그 엉뚱한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확신하며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열심을 내면 낼수록,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앙의 본질에서 오히려 더 멀리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길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을 택해서 가 놓고는 그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고 잘못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한 경쟁을 부추깁니다. 교회도 교인들에게 경쟁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스스로도 경쟁의 길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의 핵심 이론인 적자생존(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의 원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합부흥사경회 강사로 오시는 목사님들께 매번 똑같은 질문을 드리는데, 이전에 한 분에게 목회자 세미나에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한국 교회가 굉장히 비난을 받고 있고 교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희망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강사로 오신 분들 중 한 분이 이렇게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는 교회는 더 잘될 것이고, 제대로 못하는 교회는 도태되어 없어지거나 통폐합 될 겁니다.”

 

그 목사님의 대답이 명쾌했는데 왠지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교회들도 서로 경쟁해서 더 잘하는 교회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 교회가 무너지거나 문제가 생겨서 교인들이 대거 옮겨오면 그분들을 잘 돌봐줘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너지는 교회는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사실 좀 불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논리에 바탕을 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 교회, 즉 전 세계의 주님의 교회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개교회주의에 바탕을 둔 시각입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교회가 좀 어려워도 그건 할 수 없고,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개교회주의의 안타까운 시각인 것입니다.

 

교회도 경쟁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교회가 근처에 몇 개씩 자리 잡고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한국도 있고, LA 같은 데 가보면 같은 상가 건물에 교회가 서너 개씩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많은 게 식당과 교회인데, 같은 건물 안에 몇 개씩 식당이 있으면 잘될까 의문이 들고, 교회도 그렇게 서로 붙어 있는데 잘될지 걱정이 됩니다. 옆에 있는 교회가 잘되면 우리 교회가 안 되는 것이고, 옆에 있는 교회가 잘 안 되면 우리 교회가 잘될 수 있습니다. 다 경쟁적인 마인드로 하는 겁니다.

 

세상은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힘을 부여해줍니다. 교회도 믿음생활을 잘하면 그런 세상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많은 경우 이야기해왔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실은 그렇게 반세기를 가르쳤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도 복을 주신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확실히 먹여 살려주시고 책임져주시는데, 너무 그쪽만 강조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받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것보다는 영광만 자꾸 강조하니까 반쪽짜리 복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니까 그 다음에 부활과 영광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부활과 영광의 길이지만,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좁은 길, 남들이 안 가는 길, 꺼려하는 길, 고난의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넓은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우리가 생명으로 가는 것을 막는 멸망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넓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다 보면 완전히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진정한 길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용기는 그렇게 생명의 길, 좁은 문을 택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모두가 더 풍요로워지기를 꿈꿀 때, 모두가 더 높아지기를 꿈꿀 때,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도제목이 응답되기를 바라고 있을 때, 목회자들이 더 큰 교회를 꿈꿀 때, 모두가 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말로 외치는 것뿐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좁은 길로 갈 때 비로소 커지고 강해지는 비밀을 알아야 하며, 그 비밀을 굳게 믿으면서 그 좁은 길을 고집하고 나아가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좁은 길이지만 옳은 길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하십니다.

 

 

2.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난 진짜 이유

 

오늘 본문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한 질문을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 그는 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질문했을까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킬 때 회계장부의 잔고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열심히 선행의 잔고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위험한 생각들이 깔려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의 책임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성실히 지켜서 잔고의 액수가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선행이라는 것이 정말 얼마 되지도 않는 건데, 조금 해놓고는 우리는 구원받기 충분하니까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야 한다.’라고 했으니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둘째, 살다 보면 죄를 짓거나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는데(실제로는 많은데), 그렇게 되어도 그때까지 쌓아놓은 잔고가 단지 조금 깎이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에 대한 경각심이 그만큼 약해지고 없어집니다. 죄를 지어도 또 선행을 해서 올리면 된다고 생각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우상숭배와 음란한 죄를 지은 것을 볼 때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쌓아놓은 것이 깎일 때 다시 올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잔고가 남을 경우, 그것을 남에게 주거나 혹은 다른 일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정말 자기 좋을 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은 제쳐놓고, 자기들이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 다 결정을 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17)라고 하시니까, 평소에 계명들을 다 지키며 살고 있던 그는 어떤 계명이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아주 뻔한 대답을 하십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8-19)

 

이 계명들은 자기가 성실하게 다 지킨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뭐가 부족한지 또 물으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허를 찌르는 말씀을 그에게 하십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21)

 

결국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그냥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근심하며 돌아간 것은,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보통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냥 돌아간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다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돈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면에서도 언제나 잔고가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 가지고 안 된다고 하시니까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게 만든 핵심은 내가 왜 가난한 자들에게 내 돈을 나눠줘야 돼?’가 아니라, ‘내가 왜 구원을 못 받아?’였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20)라는 그의 반문을 보면,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예수님께 찾아와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 당시 가장 (hot)랍비인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부자 청년의 재물에만 집중하며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자라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그 재물이라는 것의 밑에 더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구원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생각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자기에게 돈은 별 걸림돌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이 걸림돌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돈 때문에 그가 진짜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원관과는 다른 예수님의 구원관을 듣고 동의할 수가 없어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구약 사무엘상에 보면 나씨 가족이 나옵니다. 엘가나, 한나, 브닌나 가족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실로에 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한나와 브닌나 중 한나는 아이가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제사장이 엘리인데, 그는 말년에 자기 아들들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영적으로 둔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가 비록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간절히 기도하던 한나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처음부터 바로 알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들들이 제사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악을 행하고 여인들과 동침하는 것을 알고도 제대로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멸시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삼상 2:29, )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주님을 무시하고 제사를 멸시하며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그들을 율법대로 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야단치는 정도에서 끝냈습니다. 그 원인은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입니다. 자식들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며 백성들의 제사를 방해하는데도 엘리는 방치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망치는 것보다 자기 자식들의 기분을 안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죄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제사장이니까 봐주시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정말 자녀들을 생각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바로 서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게 정말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냥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들들이 전쟁에서 한 날에 죽고 엘리도 그 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처음엔 괜찮다가 갈수록 영적 감각이 둔해진 사람들이 그 외에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울이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물론 솔로몬은 말년에 쓴 전도서를 보면 끝까지 신앙이 있었다고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잘 나가다가 이방 여인들과 정략결혼을 통해 온갖 우상들이 나라에 다 들어오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율법을 지키며 쌓아 놓은 잔고가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노년에 짓는 죄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죄를 조금 지어도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며 남은 잔고가 자기 자녀들까지도 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였습니다.

 

 

3.  우리의 헌신은 잔고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40년은 모든 환경이 달라지는 새로운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훈련하신 기간이었습니다.

 

그 훈련 기간 동안 1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다 죽고, 20세 미만의 1.5세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만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1세대가 다 한 번에 안 죽고 40년이 걸렸는가 하면, 그들이 다 죽으면 누가 아이들을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40년 동안 서서히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이집트의 잘못된 문화가 자녀들에게 다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살면서 몸에 배었던 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는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농사를 짓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땅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유목 문화와 농경문화의 차이가 일단 많이 있지만, 특히 종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유목 문화의 하나님은 양들을 위험에서 지키시며,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계속 유목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자세입니다. 다윗이 목동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신앙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토착 신은 바알이었는데, 바알은 농경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섬겼던 신이었고, 농사를 잘 지어 풍성함을 이루게 해주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리고 풍요로워지기 위해 온갖 음란한 제사 의식을 강요했던 신입니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아세라는 여자 신인데, 제사장들이 온갖 음란한 성적 관계를 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풍요로움과 육체의 쾌락은 언제나 함께 했던 것을 봅니다. 종교학자들이 연구해보면 옛날 제사들은 전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경문화를 기초로 하는 바알 신앙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섬기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환경이 다르고 지역이 달라도 언제나 똑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대하셨고 그래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현실을 보면 농사를 지어야 했고, 때에 따라 비가 와야 했고, 결실을 많이 해야 했고, 남들보다 더 많은 곡식을 쌓아 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것이 힘이라고 생각했고, 그 힘을 길러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가만히 보면, 전부 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을 가르치셨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쌓아놓고 더 많은 힘을 갖기를 원하는 게 세상의 문화, 바알의 문화, 가나안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밭에 있는 곡식을 걷다가 남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더 많이 쌓는 게 아니라 나눠주고 희생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년은 땅이 쉬는 겁니다. 또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 동족 중에 노예였던 사람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노동력을 산 것이지, 사람을 산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신 겁니다. “너희는 사람을 산 게 아니다. 사람은 내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남기를 원하면 귀를 뚫어서 주인과 함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전부 이런 것들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바알 신앙, 가나안 문화와 반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풍요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세상적인 힘을 맛보고 사랑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풍요의 신인 바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섬긴 때가 있었고 바알을 섬긴 때가 있었는데, 대개 둘 다 섬겼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그들의 기초는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때조차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겼습니다. 한 군데를 정하여 하나님은 여기만 계시고 나머지는 내 맘대로라는 식이었습니다.

 

작년에 나가보니 한국 교회가 몰락해 간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침몰하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목회자들의 탈선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목사로서 부끄럽지만, 그렇게 틀린 분석이 아닌 것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소위 물의를 일으켰다고 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라고 해도, 가만히 보면 그 열심과 헌신이 정말 대단합니다. 아마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를 봐도 한국 교회의 헌신은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세대에 한국의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휴가나 안식년도 없이, 심지어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젊음의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했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의 교인들도 휴일을 반납하고 섬겼고,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서 평생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교회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는 좋았는데, 교회를 성장시키고 난 다음에 그것이 자기들이 이룬 업적으로 되어 버린 겁니다. 자기가 쌓은 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서는 안 될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인데, 재정을 막 쓰면 공금횡령으로 걸립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정을 자기 마음대로 영수증도 없이 막 사용합니다. 또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 담임목사직의 세습, 교회의 사유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하던 분들이고 영적인 분들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의아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지난 시절에 쌓아 놓은 공덕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에 충분하다.’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약간의 죄를 지어도 자기가 쌓아 놓은 공덕이 약간 깎이는 정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너무도 비슷합니다. 목회자도 그렇지만, 교인의 경우도 직분을 받아 생활하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교회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또 교회를 위한 자신의 헌신(봉사와 헌금생활)이 공덕(잔고)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지난날의 잔고를 생각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 들어와 있는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값을 장부의 잔고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한국 교회를 위기로 몰고 있는 것이 다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열정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정말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라기보다는 바알 신앙과 같은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바알을 품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섬기는 이유가 세상의 복을 받으려는 심리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더 커지려고 노력하고, 커지는 것이 부흥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커지면 힘이 생기고 돈이 생기며, 주변에서도 좋은 교회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성공한 목회자, 유능한 목회자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교계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영향력이 생깁니다.

 

보십시오. 작은 교회 목회자가 사회에서 교계 원로라는 우대를 받으며 대통령에게 영적 조언을 하는 자리에 불려 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들이 불려 갑니다. 큰 교회의 목회자는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는 책을 써도 무시를 당하고 잘 안 팔리는데, 큰 교회의 유명한 목사는 출판사마다 서로 설교집을 내자고 경쟁을 벌일 정도입니다. 또 큰 교회의 재정위원장은 은행에서 굽실거리며 서로 자기 은행에 헌금을 유치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이런 것은 교회와 목회자에게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가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이 그런 축복을 약속한다고, ‘하나님을 잘 섬기니까 이렇게 힘도 있고 돈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은혜와 성령 충만과 순종과 섬김을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마음입니다.

 

결국 그렇게 될 때, 커지기만 하면 성공한 교회,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것은 곧 힘이 되고 그 힘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 성장의 기준이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7:9-10)

 

 

4.  가짜 부흥과 진짜 부흥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일관되게 말해 줍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와 맘몬주의의 바알 신앙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삶은 사실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좁은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고, 주님께서 마시라고 하신 잔은 희생과 낮아짐의 잔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어떻게든 자기가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다투던 제자들을 향해,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바알 신앙을 가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0:25-27, )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그렇게 살게 되면 아주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바알 신앙을 따라가고 율법주의로 포장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그렇게 가르치고 목회하면 교회가 잘되고 소위 부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은 가짜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동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주님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진짜 부흥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의 삶 속에서 걷고, 주님께서 하신 희생과 섬김을 우리도 하루하루의 생활 중에서 실천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당연히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매일이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살 때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진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가끔 들을 때 가슴이 철렁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전에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는 좀 쉬어도 된다.’라는 말입니다. 성경공부이든 봉사이든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전에 너무 많이 해서 이제는 안 해도 괜찮을 만큼 많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전의 공덕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신앙생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 많이 동행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기를 멈추지 말고 매일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며, 오직 주님만 섬기는 참된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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