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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7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4

씨의 신비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 26-34)

 

[들어가는 ]

 

제가 우리 교회에 지도 어느덧 10년이 훨씬 넘어 11년이 되어 오는데, 우리 교회에 오기 전에는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그곳과 이곳은 교회들이 서로 같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오하이오와 미시건의 미국장로교 소속 한인교회들은 여름에 목회자 수련회로도 같이 모입니다.

 

요즘은 뜸하지만, 여기에 온지 얼마 되었을 때에는 이전에 섬기던 교회 분들과 서로 만날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교회 교인들 중에서 특히 자녀들이 비슷한 때에 태어난 가정들이 있었는데, 오랜 만에 만나면 서로 깜짝 놀랍니다. 아이들이 전에 봤을 때에 비해 몰라보게 컸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이가 여기 때는 기저귀 차고 왔는데, 그곳의 어른들이 아이를 보면 많이 컸다고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매일 자녀와 같이 사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자란 것이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매일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만에 사람은 조그맣던 아이가 이렇게 자란 것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얼굴도 변하고 목소리까지 변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의 짧은 본문에는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OO 같다.’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비유들과 하나님 나라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 깜짝 놀랄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놀랄 일이 없을 것인지,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   스스로 자라는 씨의 신비 (26-29)

 

예수님은 4 앞부분에서 가지 토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씨를 땅에 뿌리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사람이 땅에 뿌린 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6-27)

 

뿌려진 씨는 가만히 있는 같았지만,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며 자라서 마침내 결실에 이르게 됩니다. 결실의 때가 이른 것을 ,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을 거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28-29)

 

여기서 강조되는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씨앗의 생명력과 활동의 현재성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미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생명력은 결실할 때가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러한 생명력으로 스스로 자라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는 것이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란 후에는 피할 없는 추수의 낫이 다가옴을 보게 됩니다. 심판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은 씨가 감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항상 감춰진 채로 머물지 않고 언젠가는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갑작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것입니다. 심판이 갑자기 임할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판 앞에서도 놀라지 않을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뿌려진 씨의 활동의 현재성을 주목할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씨가 자라 싹이 나고 이삭을 맺고 곡식이 되는 활동 과정을 평소에 살피며 살아간다면 놀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심판이 두려우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평소에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깜짝 놀랄 것이 없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이시는 날인데 무엇이 갑작스럽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평소에 주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평소에 주님을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날은 깜짝 놀라는 날이고 무서운 날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 나라의 씨는 매일 자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며 사느냐, 무시하고 사느냐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여러분, 지금 자신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나의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돈을 쓰고 있는가를 보면 그것을 있습니다. 괜히 없는 데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살게 되면, 결실의 날이 갑자기 다가오게 되어 낭패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매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2.   겨자씨의 신비 (30-32)

 

번째 비유에서 씨의 숨은 생명력을 강조하는 비해, 겨자씨 비유에서는 씨앗의 작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겨자는 자라면 크기가 보통 10-12 feet 되지만, 겨자씨는 색깔이 까맣고 0.5mm 펜의 점보다도 작으며,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씨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는 겨자씨다.”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겨자씨 알을 심기 위하여 손에 집으면 너무 작다는 느낌을 정도로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겨자씨를 가리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0-31)

 

말씀을 그냥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알과 같다’라고 하는 말로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겨자씨와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는 천국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어느 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2)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늘에 깃들일 만큼 커진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풀’은 먹을 있는 채소를 말하는데,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이지만, 일단 자라고 나면 그런 채소와는 비교도 되게 나무가 아니라, 새들이 그늘에 깃들일 정도로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기를 원하셨던 교훈을 바로 파악하려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어떤 이들은 질병이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었고,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물리쳐줄 것에 대한 기대를 갖고 왔습니다.

 

예수님에게 동기는 모두 다르더라도 그들에게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사렛 예수를 따르면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같은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내게 무엇을 주는가? 그런데 오늘 겨자씨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해서 오는 유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엄청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아주 미약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로 땅에 오셨을 아주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신 아니라 말구유에서, 그러니까 더러운 밥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국의 메시야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도 그분은 젊은 목수로서 일하다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그를 따른 제자들도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라 어부와 세리와 열심당원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상류층에 속한 지식인들과 정치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배척했고, 수도인 예루살렘은 그분이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은 갈릴리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움직임에 대해 스파이들을 파견해서 이미 파악하여 알고 있었는데, 보니까 위험하지 않고 별로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의 삶은 화려한 VIP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나 나는 머리 곳이 없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는 고위층과 교류하는 높은 인물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 같이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야이신 주님은 왕이 되는 대신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너무 미약해서 세례 요한 같은 훌륭한 사람도 오해했습니다( 11).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혼란스러워서 “당신이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한 자기들의 기대와 달리 너무나 무기력하게 잡히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아예 죽여 버리라고, 십자가에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엄청난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러한 천국의 위대한 모습이 나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11:15)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 그리고 용이 모두 못에 던져진 후에( 19-20), 만물이 새롭게 되어 하늘과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천국이 나타나게 됩니다( 21-22).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없을 정도의 무리가 천국 백성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천국은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늘에 깃들이는 나라가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뛰어난 사람의 마음속에서가 아니라 가난한 어부들과 역사의 무대에서 아주 낮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기 시작했고 세계로 번져나갔습니다.

알의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질 거기서 씨가 자라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나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묻어두신 말씀의 작은 씨앗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갑자기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최고의 민족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점점 자라다가 나중에 영광스럽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에서, 겨자씨 속에 이미 겨자나무가 들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나무의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거나 교회 역사를 보면, 정말 겨자씨 비유대로 것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목수였던 예수가 죄수로 처형되는 아주 미미하다 못해 비참한 시작으로부터, 예수님의 부활과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으로 연결되는 겨자씨의 성장과정이 나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룟 유다는 배신하고 죽고, 나머지 11명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자기들도 잡힐까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그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성령을 받았습니다. 한꺼번에 3 명이 믿게 되고, 다른 5 명이 들어오면서 불어났고, 마침내 당시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놀라운 속도로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국은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11:15) 데까지 성장하게 것입니다.

 

처음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이 보이던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거대하고 엄청난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때까지, 성장하는 방식은 열심당원들이 하는 것처럼 칼과 창과 몽둥이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뿌려서 뿌려진 씨앗들이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뿌리를 내리며 결실하는 과정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때도 하나님 나라는 아주 초라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미약한 시작에 실망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겨자씨 비유는 엄청난 위로를 주는 동시에 도전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너희들의 눈에 하나님 나라가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겨자씨 알만한 것으로 아주 작게 보일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겨자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확실히 성장하여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시작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이 겨자씨 비유를 들었을 천국의 시작이 아주 작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최고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천국의 시작이 미약해도 마침내 겨자나무처럼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며 인내해야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겨자씨가 겨자나무로 확실히 성장하는 것처럼, 그보다도 더욱 확실한 완성된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천국의 성장이 지금 당장 눈에는 보이더라도 그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중요함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악한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고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일이 풀리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죄악이 넘치고 악한 영들이 날뛰며 사람들의 심령이 더욱 악해져 갑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매일 나쁜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너무 악한 일들이 많습니다.

 

한국 뉴스를 보면 60-70% 전부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남을 등쳐먹는 소식입니다. 요즘 IS(이슬람국가) 테러를 하며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저번에 리비아에서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참수시키기도 하는 ,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파리에도 테러가 일어났고, 후에 프랑스가 보복을 하겠다며 가서 폭격을 하고 여러 나라들이 IS 돈줄을 끊겠다고 시설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결코 인간이 악해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는 너무 약해 보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성장하며 마침내 창대해진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실망 대신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 초라해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할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절망스러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초라하고 미약한 것인가? 하며 갈등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좌절을 극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3.   비유로 가르치심 (33-3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33-34)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한다면 의미와 흥미를 잃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다고 설교할 한국말은 조금 하고 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새로운 > 나오는 것처럼, “여러분, 우리는 함께 ‘오이코스’인데 서로를 향해 ‘오이코노모스’로서 ‘오이코도메오’해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한다면, 여러분은 흥미를 잃게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살이 아기가 있다고 하면, 아기에게 엄마가 “그대는 밤새 평안하고 무탈한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되겠습니까? 아이와 대화하려면 수준을 낮추어서 “맘마 먹자! 응가 하자!”라는 식으로 해야 의사소통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지만, 천국의 언어로 말씀하시면 아무도 알아들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들을 있도록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복잡하게 해석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주제는 단순 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하여, 흥미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들을 있을 , 공개적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파악하기 위해 사도로서 필요한 것들은 사적으로 은밀하게 들었습니다.

 

제자들과 일반적인 무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열두 제자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여인들도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여 들은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냥 어쩌나 번씩 와서 들은 무리도 있었다는 겁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과, 어쩌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가는 ]

 

1637년에 (John)이라는 영국의 젊은 청교도 목사가 신대륙에 대한 꿈을 안고 미국 땅으로 왔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며 살아보자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되어 그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자신의 재산을 헤아려 보니, 가진 별로 없었고 다만 책을 좋아하던 그에게 300 정도가 있었습니다. 책들을 어떻게 할까 기도하다가, 그는 자기가 살던 도시에 새로 설립된 뉴타운 칼리지에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300권을 기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책을 기증하면서 장의 기증서를 보냈는데, 그것은 그의 유언이라고 수도 있고 신앙고백서라고 수도 있는 기도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땅에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금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법률과 과학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학자, 법률가, 과학자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같습니다. 제가 땅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후학들을 통하여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대학에 제공하는 책들을 통해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과학자, 훌륭한 법학자들이 길러져서 땅을 풍성하게 하고 인류에 공헌하는 위대한 거인들이 나타나게 것을 기대합니다.”

 

편지를 받은 학교 이사들은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성을 따서 학교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학교는 뉴타운 칼리지에서 하버드(Harvard) 대학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존의 네임은 하버드(John Harvard)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존의 꿈은 대학을 통해서 열매 맺게 되었고, 그의 비전대로 하버드 대학교는 미국을 이끌어 가고 미국을 넘어 세계를 이끌어 가는 학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학생이라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부모라면 자기 자녀를 가장 보내고 싶어 하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놀라운 성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면 볼품없는 씨이고 작은 겨자씨입니다. 그러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것들 중에 ‘씨’를 이야기하셨겠습니까? 씨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들어 있고 복음의 능력이 담겨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작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갈 , 마침내 세계를 뒤엎는 놀라운 영적 거목들로 성장해 가게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얼마나 전도를 하셨습니까? 자신만 봐도 거의 못했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가면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게 와서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당신 때문에 여기 있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당신을 알지도 못합니다. “예, 당신이 지원한 선교사님이 제게 복음을 전해서 제가 예수님을 믿어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풍성히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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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비결 (요 15:1-8) - 회복하시는 은혜 31 (09/26/2021) admin_p 2021.09.26 1510
333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2-31) - 회복하시는 은혜 30 (09/19/2021) admin_p 2021.09.19 1117
332 믿음, 기도, 사랑, 성령 (요 14:12-21) - 회복하시는 은혜 29 (09/12/2021) admin_p 2021.09.12 573
33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 14:1-11) - 회복하시는 은혜 28 (09/05/2021) admin_p 2021.09.05 793
330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 회복하시는 은혜 27 (08/29/2021) admin_p 2021.08.29 731
329 배신자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요 13:21-30) - 회복하시는 은혜 26 (08/22/2021) admin_p 2021.08.22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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