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5 11 8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9

살리는 자인가, 죽이는 자인가

(마가복음 2 23 - 3 6)

 


[들어가는 : 안식일에 대하여]

 

이전에 어떤 목사님들이 안식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처럼 안식년을 나가다보니까 안식을 하는 아니라 이리저리 바쁘게 다녀서 ‘안식년’이 아니라 ‘안 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안식일이 ‘안 일’이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을 지켰는데,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 ‘주님의 날’이라고 하며 지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바꾼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때부터 그렇게 지켰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굳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킬 이유가 없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지키게 것입니다.

 

이미 성경에도 그런 증거들이 나와 있습니다(사도행전 20, 고린도전서 16 ). “주간의 날”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정신만큼은 계승되어야겠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 규정은 유대인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특성 하나였습니다. 본래 안식일은 단어 그대로 ‘쉬는 날’입니다. 안식일이 영어로 Sabbath인데, 단어는 히브리 동사인 ‘샤바트’에서 나왔고 ‘샤바트’는 ‘쉰다’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되고 거룩하게 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2:3). 그러니까 ‘쉼’ 때문에 생긴 날이 안식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있는 날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지겹고 예배에 가기 싫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복이 넘치는 날입니다.

 

안식일 정신이 지금의 주일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토요일 오후나 저녁쯤 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야, 내일이 주일이다. 예배가 기다려진다. 빨리 가서 예배드려야지.’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어이구, 주일이야?’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놀랍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돌아오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은 지겨운 날이 아니라 복이 넘치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휴식이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구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휴식을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휴식을 위해 만드신 날입니다. 그렇다고 안식일을 허구한 먹고 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주신 날도 아닙니다. 안식일은 당시 여러 가지 일의 부담과 압박으로 지치고 일하고 지칠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 출애굽 당시의 노예들을 살인적인 노동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한 보호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날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은 날로 인하여 유익을 얻는 인간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노동의 피곤에서 벗어나 있도록 사람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날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주신 날이 안식일이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크리스천들은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안식일과 다윗의 진설병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것으로 시비가 붙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23-24)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민감한 안식일 문제로 공격을 해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행한 일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대량으로 추수를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 이삭을 비벼 먹은 정말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을 벌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안식일과 상관이 없는 같은 다윗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셔서 자신이 일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아 행위를 정당화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함께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25-26)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다윗은 율법에 의해 문제가 만한 행위를 했습니다(삼상 21).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 왕으로서 사울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율법에 문제 소지가 있는 일이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람들을 먹였고, 이에 대해 정죄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율법을 범했다고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안식일의 전통에 위배될 있는 일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정말로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지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서 논리적으로 그들을 반박하고 야단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그런 논쟁은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다윗 이상의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7-28)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 해석에 대한 정통성은 예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보다 사람이 위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2.  생명을 죽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안식일 문제를 중심으로 바리새인의 공격이 강해지게 됩니다. 3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실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3:1)

 

그는 손이 마른 장애를 가진 사람인데, 같은 사건이 기록된 누가복음 6 6절을 보면 오른손이 마른 사람입니다. 오른손은 보통 일을 하거나, 제스처를 쓰거나, 인사를 사용되는 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지저분한 일을 보통 왼손으로 했기 때문에, 왼손을 공중 앞에 내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본문의 마른 사람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른손이 말라 있었기 때문에 사용할 없었고, 없이 공중 앞에서도 더럽다고 여겨지던 왼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어려움을 한번 마음으로 느껴보십시오. 신체상의 장애 때문에 그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우리는 짐작해 있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장애인들이 돌봄을 받습니다. 장애가 있다는 때문에 차별을 받게 되면 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대학교 work study 장애인 학생 기관(Center for Disabled Students)에서 잠깐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때 많이 배웠습니다.

 

한국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더했습니다. 보통 올림픽이 열리고 나면 반드시 패럴림픽(Paralympic), 장애인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장애인 올림픽이 열렸는데, 그것이 TV 중계되자 장애인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징그럽다고 시청자들이 항의해서 중계를 중단한 일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 서울 강남구 어느 동에서 주부들이 집단 시위를 벌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아닌데도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시위를 벌였습니다. 장애인 학교가 자기네 동네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자기들의 자녀 교육에 해롭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은혐오시설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20 년이 지난 바로 지난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중학교 내에 발달장애인 직업훈련센터를 지으려 했는데, 공사가 시작된 사흘 만에 중단이 되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애우 부모들이 무릎을 꿇기까지 하며 제발 짓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비장애인 학생들이 장애인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하면 누가 유익입니까? 비장애인 학생들입니다. 그들이 장애우들을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고 돌보려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강남구에서도 장애인학교가 들어오도록 시위를 했던 부모들도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 자녀들이 장애우 학생들과 함께 통합 수업을 듣도록 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자기 자녀들의 인성교육에 좋은 것인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잘못 대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되겠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어디에 가서 장애인 자리(handicapped parking) 비어 있다고 살짝 세우고 그러면 되겠습니다. 그런 약한 분들을 섬기고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며,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1세기의 유대 땅의 상황은 지금의 미국이나 한국과는 비교가 정도로 나빴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했고,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공중 앞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기 손에 대해 평생 수치와 열등감을 갖고 살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지금 회당에 있습니다. 그가 여기 있겠습니까?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겁니다. 그때 회당 안에는 불쌍한 사람 외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2)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를 찾기 위해서, 안식일인 마른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는지, 고치는지 보기 위해서 있습니다. 바리새파의 안식일에 관한 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 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만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전에도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김으로써 자신들을 화나게 했는데, 만일 여기서 사람을 고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며 그를 고소하려고 지금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마음에 마른 사람을 향한 자비나 긍휼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운 형편에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에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무자비하고 무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중요한 가지 면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동안 종교적인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유대 종교 체제의 가장 정상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왔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마침내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갑자기 갈릴리의 나사렛이란 형편없는 동네에서 예수라는 가난한 청년이 권세 있는 가르침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도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압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가만 보니 예수가 자기들이 싫어하는 일을 행하고 자기들의 전통을 반대하는 같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분노를 느끼고, 사람들이 그를 좇아갈 같은 위협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고소할 명분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성공과 명성만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항상 쫓기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가 성취한 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과 사랑을 주고받기보다는, 항상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들은, 삶을 경쟁으로 보면서,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남에게 짓밟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속에는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항상 피곤함을 느낍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 약점을 지적하면 위협과 도전을 받는다고 느끼게 되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감히 자기를 건드린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그를 공격하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현대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는데,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라는 목사님이 책입니다. 책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쫓겨 다니는 사람들(driven people)”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 쫓겨 다니고 항상 분주하게 지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자신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언제나 스스로 완벽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잘못인데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쫓기는 사람들은 아주 완벽합니다. 성공적인 인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싱크홀 신드롬(sinkhole syndrome), ‘함몰 웅덩이 증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싱크 홀은 플로리다(Florida) 같은 곳에서 많이 생기는데, 물이 빠져나가서 속이 비어 한순간에 무너지는 현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본질적이고 표면적인 것들, 재산, 지위, 학벌, 경력, 건강, 외모와 같은 것에 시간과 노력을 들입니다. 그러한 것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만 모든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고 그런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개의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내면세계와 외적 세계, 개인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인데, 여기에는 신경을 쓰거나 아예 쓰게 됨으로 인해 삶에 싱크홀이 생기게 되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주 싱크홀 같이 붕괴되려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교회에서, 무거운 책임들을 지고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속사람을 가꾸지 않고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가꾸는 데만 치중하게 되면, 결국 언젠가 고갈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아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게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렇게 되고 맙니다.

 

자신의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기 위해 주님과 규칙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만나는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내면세계에 질서가 잡히고 모든 면에 안정된 삶을 있게 됩니다.

 

 

3.  생명을 살리는

 

직접 마른 사람을 고치기에 앞서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3:3-4)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당연히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지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해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면 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른 손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안식일에 그를 고치는지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는데,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다시 말해, 마른 사람을 고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안식일뿐 아니라 매일의 속에서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은,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되는가 하는 규칙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위해 선을 베풀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은 해도 좋고 해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옵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필수사항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돕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일단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 생명을 구하는 것은 바로 자리에서 시작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는가를 가지고 고심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손이 회복되었더라” (3:5)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하신 뒤에 예수님은 그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시고 노하시면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마디로, 그들을 쏘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며 그를 치유해주십니다. 그가 손을 내미는 것이 사실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고 즉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3:6)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하게 되는데, 이게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족주의자이고 자기 민족을 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헤롯당은 로마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헤롯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로마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싸우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서로 대적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에 하시거나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만 기다렸다가 사람을 고치시지,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자극하십니까? 물론 예수님은 안식일 전에 하실 수도 있고 끝난 다음에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조용한 곳에 데리고 가서 아무도 보지 않을 고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즉시 그를 고치십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안식일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사람들에게 원래 뜻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러므로 사람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른 사람은 평생 수치와 열등감 속에 살면서 진정한 평화를 맛본 적이 없습니다. 일주일마다 안식일이 돌아와도 진정한 안식을 누린 적이 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안식일에 정말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의 손이 치유를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시기 직전에 사람에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3).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밀자마자 동안 말라있던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치유를 받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보는 앞에 서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 이처럼 비정상적인 자기 손을 내어보인다는 자체가 굉장히 당황스럽고 창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마른 손을 내밀고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돕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오해를 받으시면서도 사람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자리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이웃을 살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나가는 ]

 

한국에서 있었던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을 가르치던 어느 크리스천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가르치는 학생 아주 우수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가장 좋은 성적으로 들어왔다가 1 동안 계속 성적이 죽죽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성격도 반항적으로 되어 가고, 가장 모범생이었던 아이가 아주 불량학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문제아라고 취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도 점점 없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갔고, 학교 수업도 빠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부모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카드를 보니까 종교에 기독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자기도 크리스천이니까 관심을 가지고 학생을 위해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용기를 내어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부모는 이미 따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성적 문제로 의논하고 싶으니까 학교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아빠 엄마를 똑같은 시간에 오도록 했습니다.

 

부모가 보니까 자기 배우자가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에게 불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분의 아들이 잘못되어 가는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으려면 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리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분을 불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충격적인 학생의 시험 답안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학생이 시험 답안지에 답은 하나도 쓰고 낙서를 해버린 것입니다. 일종의 반항을 겁니다. 그런데 휘갈겨 낙서를 통해 진심을 선생님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선생님은 거기에 빨간 줄을 그어 놓고 부모님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누구하고 살아요? 이혼하면 누구하고 사느냐구요? 아빠 엄마, 누구하고 살아요? 아빠 엄마, 필요해요. 필요해요.”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구석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주세요.”

 

이것을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렸고 어머니도 떨어뜨렸고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두 분이 기독교 배경을 가지신 같은데,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기도할까요? 분의 손을 잡고 기도할 순식간에 자리가 통곡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들썩이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은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부는 다시 합치게 되었고 아이는 다시 일어나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사람이 기도가 끝나고 나가는데 학교를 떠나면서 서로 손을 잡고 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웃을 살리는 선생님의 귀한 도움이었습니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갔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살리는 자입니까, 죽이는 자입니까? 당연히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5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1-14) - 회복하시는 은혜 40 (12/12/2021) admin_p 2021.12.12 1502
344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 17:20-26) - 회복하시는 은혜 39 (12/05/2021) admin_p 2021.12.05 822
343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 17:9-19) - 회복하시는 은혜 38 (11/28/2021) admin_p 2021.11.28 723
342 감사와 기쁨과 확신 (빌 1:3-7) - 추수감사절 메시지 (11/21/2021) admin_p 2021.11.21 654
341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요 17:1-8) - 회복하시는 은혜 37 (11/14/2021) admin_p 2021.11.14 399
340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사람들 (요 16:23-33) - 회복하시는 은혜 36 (11/07/2021) admin_p 2021.11.07 810
339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요 16:12-22) - 회복하시는 은혜 35 (10/31/2021) admin_p 2021.10.31 716
338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의 유익 (요 16:1-11) - 회복하시는 은혜 34 (10/24/2021) admin_p 2021.10.24 504
337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 - 야외예배 (10/17/2021) admin_p 2021.10.18 735
336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요 15:18-27) - 회복하시는 은혜 33 (10/10/2021) admin_p 2021.10.10 660
335 순종과 사랑의 상관관계 (요 15:9-17) - 회복하시는 은혜 32 (10/03/2021) admin_p 2021.10.03 780
334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비결 (요 15:1-8) - 회복하시는 은혜 31 (09/26/2021) admin_p 2021.09.26 1476
333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2-31) - 회복하시는 은혜 30 (09/19/2021) admin_p 2021.09.19 1090
332 믿음, 기도, 사랑, 성령 (요 14:12-21) - 회복하시는 은혜 29 (09/12/2021) admin_p 2021.09.12 559
33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 14:1-11) - 회복하시는 은혜 28 (09/05/2021) admin_p 2021.09.05 761
330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 회복하시는 은혜 27 (08/29/2021) admin_p 2021.08.29 710
329 배신자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요 13:21-30) - 회복하시는 은혜 26 (08/22/2021) admin_p 2021.08.22 739
328 사막의 기적 (민 14:1-10) - 김현철 목사 (08/15/2021) admin_p 2021.08.17 340
327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 13:12-20) - 회복하시는 은혜 25 (08/08/2021) admin_p 2021.08.08 1356
326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요 13:1-11) - 회복하시는 은혜 24 (08/01/2021) admin_p 2021.08.01 934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