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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1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6

고침과 사함

(마가복음 2 1-12)

 

[들어가는 말]

 

요즘 크리스천 작가들 중 요즘 말로 아주 Hot한 분이 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쓴 <왕의 십자가>라는 책에 보면, 뉴욕 일간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 지에 글을 기고한 신시아 하이멜(Cynthia Heimel)이라는 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만족할 줄 모르는가, 불만족이 얼마나 자기에게 손해인가 정확히 꼬집은 글을 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이멜은 식당 일과 영화관 매표소 직원으로 먹고 살면서 배우의 꿈을 키우다가 유명해진 배우들을 많이 알고 지냈습니다. 그들은 무명 배우 시절, 나중에 유명해지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명성을 얻고 인기를 얻게 되자, 오히려 짜증과 불안감과 우울증이 찾아왔고, 이전보다 더 불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명시절에 그토록 원하던 것을 이루었지만, 자기들이 원하던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이멜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심한 장난을 치고 싶을 때는 그의 커다란 소원을 이뤄주시는 것 같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즉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중풍병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병 고침을 받고자 한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에게 심한 장난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구한 것보다 더 큰 것,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사랑과 믿음을 가진 자들 (1-5절)

 

권위 있는 가르침과 병자들의 치유와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능력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인기는 매일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큰 무리가 주님을 따랐고, 1장 45절을 보면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어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주님 계신 곳으로 찾아 나올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던 때였습니다. 그분에게만 가면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데 누가 안 나오겠습니까? 이제 온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기적들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십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1절)

 

마가복음 2장부터 3장 6절까지 연속으로 다섯 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서 “수일 후에”라고 나온다고 해서 1장의 사건 후 바로 며칠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인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셨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머물고 계시던 집으로 쳐들어옵니다. 그렇게 막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2절)

 

사람들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3-4절)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 있던 보통 집은 그 크기가 최대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번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가버나움에 가보니까, 회당 터가 있고 집들의 터도 있는데, 어떤 집 위에 예배당을 지어놓았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집일 것이라고 추정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만하지 않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지역에서 발굴해 낸 집들 중에서 가장 큰 집의 폭이 18 feet(약 5.5m)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식으로 따지면 400 square feet 도 안 되는 사이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남자만 5천 명이 왔으니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하면 2만 명 이상이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사역 초기이지만 수천 명이 몰려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과 문밖이 모두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밀고 당기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난 안식월 때 유럽을 갔는데, 유명 관광지들마다 정말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파리의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에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 했습니다. 특히 ‘모나리자’가 있는 앞이 정말 사람이 꽉 차서 난리였습니다. 저도 밀고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나왔습니다. 한국도 출퇴근 시간에 한국의 지하철은 정말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푸쉬맨’까지 있지 않았습니까?

 

2절을 보면, 이때는 사람이 워낙 많이 몰려들어서 집안은 물론이고 문밖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고쳐달라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데 침상에 메고서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포기하고 갈 텐데, 그들은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합니다. 다급하게 고민하던 이들은, 아주 특이하고 창조적인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냅니다. 가만히 위를 보니까 지붕 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게, 어려울수록 밑을 보지 말고 위를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통해 중풍병자를 위에서 아래로 달아 내리는 것이 가능함을 생각해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기발한 발상이고,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할 아주 창조적인 아이디어 아닙니까. 물론 그들도 고민했을 것입니다. 남의 집을 그렇게 부수면 물어줘야 하고, 고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그 위로부터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있는 바로 저 아래를 향하여 중풍병자를 달아 내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예수님이라면,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니 흙이 떨어지고 먼지가 막 나면서 천장에 구멍이 뻥 납니다. 고전적인 한국말로 이것을 ‘빵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뭔가가 내려오는데, 한 사람이 누운 침상이 끈에 달려 내려옵니다. 이런 희한한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특히 그 집주인은 굉장히 열이 났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1절을 자세히 보면 ‘집에 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은 예수님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을 하셔야 되었습니까? “뭐야, 이거? 이게 어떤 집인데 이것들이 이젠 집까지 부숴? 빨리 물어 내!”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절)

 

예수님은 화를 안 내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그 전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그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이런 식으로 남의 집 지붕을 부수고 구멍을 내는 것이 믿음인가?

 

그리고 여기서 몇 명이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침상 네 귀퉁이를 네 명이 메고 왔지만 그 전에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는데, 천정을 뚫고 달아 내리는 것이 믿음이라면 믿음은 아주 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지붕에 올라가 확 부수고 “이것이 믿음이다. 죄 사함 받았다.” 얼마나 괜찮습니까? 물론 그런 뜻으로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죄 사함을 받도록 만듭니까? 그 사람들도 다른 사람 집을 부수는 것이 나쁘다는 것 다 압니다. 지붕을 뜯었으니 수리비를 물어줘야 한다는 것도 왜 몰랐겠습니까?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심지어 잡혀가서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지붕을 뜯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기에는 단 두 가지의 답만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중풍병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신뢰입니다.

 

먼저, 이 사람들은 몇 명이었든지, 중풍병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중풍병자의 가족들이었을 것이고 친구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만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사실 사랑을 해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들은 또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고 믿지 않았더라면, 남의 집까지 망가뜨리고 부수면서까지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면 아예 중풍병자를 여기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붕을 뚫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병자를 주님 앞으로 가도록 만듭니다. 이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 사람의 죄까지 용서해주신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이 믿음에는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참한 모습, 몸을 쓰지 못하여 침을 질질 흐르고 뗏국물이 흐르는 그런 모습을 누가 사람들 앞에 보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리고 주님을 신뢰할 때, 이런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까? 일단은 사랑이 부족해서일 것이고, 또 사랑을 해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믿는다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도, 지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죄인을 살리는 믿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과 주님을 향한 믿음은 이처럼 언제나 같이 갑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이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주님께로만 데리고 오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서로를 위해 잘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주님을 믿긴 믿는데 왜 기도를 안 할까? 요즘에는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잘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도 있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라면 교회의 교인이라면, 당연히 교회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눈, 코, 입, 내장, 위, 심장 등 많습니다. 우리가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를 한 교회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완벽한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교회는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처럼 몸을 못 쓰고 마비되어 있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이 사람 꼴 좀 보라. 얼마나 비참하고 더러운가. 보기에 영 좋지 않다.’ 하며 그의 병 때문에 그를 비판하거나 방관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병은 이렇게야 낫는다. 용한 의원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를 사랑해서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간단합니다. 그를 사랑했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리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사랑이 있는가? 서로를 향해 그런 사랑을 품고 있는가? 체크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심을 정말 믿으십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실 수 있다고 정말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가?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걸 믿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주님께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을 못 보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주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우리의 문제들을 능력의 주님 앞으로 가져올 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기도로 주님께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올려드릴 때, 우리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5). 이 중풍이라는 것이 어떤 건인가? 요즘 아주 많은 병이 뇌졸중(stroke)입니다.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몸이 마비되어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을 흘리고, 말도 정확히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을 봤는데, 참 힘듭니다. 가까이 가기도 힘든 게, 냄새가 너무 안 좋습니다.

 

5절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향해 “작은 자야(son)”라고 하시는 것으로 봐서, 그는 젊은 사람입니다. 어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또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젊은 또는 어린 나이에 중풍병자가 되어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약혼녀가 있었어도 병에 걸린 다음에 파혼 당했을 수가 있습니다.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남이 안 돌봐주면 먹고 살 수도 없습니다. 일은커녕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도 없습니다. 혼자 음식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은 멀쩡합니다. 그러니 그런 자신을 보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자책하고 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살아왔겠습니까?

 

이 중풍병자는 삶의 의미를 잃고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이 딱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서 들은 겁니다. 다리를 못 쓰는 불구자를 일으키시고, 눈을 못 보던 맹인을 보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저주 중의 저주를 받았다는 나병환자까지 고치시되 그냥 고친 것도 아니고 만지면서 고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들었을 때, 그 분이 자신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권할 때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도록 허락한 겁니다.

 

몸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자기표현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오래 전 신학교 시절 병원 실습으로 학교 근처의 Veterans Hospital을 갔습니다. 마침 정신병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신도 온전치 않지만, 몸이 이렇게 불편한 분이 있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냄새도 얼마나 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사람들이 다른 데로 옮기려고 하니까 얼마나 요동을 치며 거부하는지 아주 힘들었습니다.

 

이 중풍병자도 원하지 않았으면 요동을 치며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허락한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 앞에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또 지붕을 뜯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들은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발견한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역사를 보아도 왕들의 자존심 때문에 전쟁이 난 것을 아십니까? 폭력조직들끼리도 쓸 데 없는 두목들의 자존심 때문에, 상대가 자기를 째려봤다고 기분 나빠서 싸움이 나는 것을 아십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전쟁도 나고 싸움도 납니다.

 

기분 나쁘다고 자존심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안 나오겠다는 것이 없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께로 오려고 하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모처럼 마음을 잡ㅈ고 주님께로 가까이 가려할 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 믿어보려는 분들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처럼 예배를 가려고 하는데, 다른 때는 전혀 전화를 안 하던 친구가 전화를 해서 날씨도 좋은데 야외로 나가자고 합니다. 모처럼 교회에 참석해보려고 하는데 평소에 안 좋아하던 사람이 그 동안 한 번도 참석을 안 하다가 하필 이때 교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지를 못합니다. 이제 나도 성경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하는데, 부부싸움을 하고 기분이 잡쳐서 안 읽게 됩니다. 기도도 해보려 하니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어떤 상황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나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 앞에 나가기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주님께로 나아가는 다른 길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실 때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이때 그의 병이 나았습니까? 아직 병이 안 나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죄가 용서를 받았어도, 영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상태가 되었더라도, 아직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아니, 그 말씀 말고, 빨리 병을 낫게 해주세요. 이게 급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 주님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육체적인 질병보다 더 큰 문제, 인간에게 정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병 낫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육체적인, 물질적인, 정신적인, 감정적인 문제들을 모두 다 해결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모든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엄청난 액수의 로또에 자동으로 당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면, 즉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졌다면,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해결이 되었으면 감사한 일이고, 아직 안 되었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제목들을 보십시오.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이가 좋은 학교에 가게 해주십시오. 좋은 직장 잡게 해주십시오. 좋은 배우자 만나게 해주십시오.’ ‘사업이 잘되게 해주십시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내가 이번 이 일만 해결되면 모든 게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이 일이 해결되면 그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결된다고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요것만 해결되면 내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 그것이 착각이라고 하십니다. ‘이 병만 고쳐주시면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병만 나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러다가, 두세 달만 지나면 ‘내가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또 불평, 불만, 원망, 저주로 살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안 세워진 상태에서 문제만 해결되었다고 그게 진짜 해결된 게 아닙니다. 진짜 불평, 불만, 원망의 원인을 해결해야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장 중요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아직 이 죄 사함을 받은 관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관계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면, 빨리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최고의 복을 이미 받았는데, 다른 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영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모든 것을 다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 (6-10절)


이처럼 예수님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이었는데, 거기 앉아서 이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라기보다는, 예수가 위대한 선생이라는데 그가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기적을 행한다는데 정말인지 지켜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 때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할렐루야!’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6-7절)

 

이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 두루마리를 필사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당시의 통념으로는 선하고 착한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한 사람이 잘못된 쪽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저 사람은 예수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그런데 그건 우리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착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놀랍게도 주님의 반대편에, 잘못된 쪽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8-9절)

 

이들은 속으로 생각한 것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아셨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굉장히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고 다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보십시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쉬운 게 없습니다. 둘 다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더 쉽습니다. 속으로 진짜 죄 사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책임 없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또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죄를 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던 예수님은, 죄를 사할 권세도 있으셨고 병을 고치실 능력도 있으셨습니다.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이 그냥 병만 고쳐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죄도 사하여 주시고 병도 고쳐 주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0절)

 

다시 말해, “내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다. 메시야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고,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을 가진 자신이 바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사랑과 믿음의 결과 (11-12절)

 

이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중풍병자는 자신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고 일어나 기쁨과 감격에 넘쳐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런 일은 이전에 본적이 없다. 너무 놀랍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면 이처럼 먼저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건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려면, 누가 영광을 받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있는가, 아니면 어느 특정 개인이 관심을 받고 있는가?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토록 사랑하고 애쓰면서 지붕까지 뜯어 내려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을 못 받았더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최대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병의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죄 사함까지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영적 축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랑의 공동체, 이런 믿음의 공동체!

 

우리가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사랑하고 용납하며 서로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공동체!

 

특별히 어떤 지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믿음으로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간절히 중보기도로 함께 나아가며 서로를 케어해주는 공동체!

 

또 나에게 문제가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쉬쉬 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을 향해서 “저를 좀 주님께로 이끌어주십시오. 제가 지금 갈 힘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때, “예, 우리가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나아가는 공동체!

 

그렇게 남을 도와주던 분이 어려움에 처하면 또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는 공동체!

 

바로 이런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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