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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4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가복음 1 40-45)


[들어가는 ]


오래 제가 미국에 이민을 와서 대학교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느 크리스천 단체의 성경공부에 가게 되었는데, 모두 미국 학생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영어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보니까 자기들끼리는 서로 아니까 이야기도 잘하는데 저에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제대로 건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있는데, 리더인 대학원생이 와서 어디서 왔느냐, 이름이 뭐냐 물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제가 미국 온지 1년도 되었다고 하니까, 나중에 식사나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다가, 여학생도 싱글이니까 당신도 언젠가 결혼할 아니냐는 뜻으로 Will you marry?”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결혼 프러포즈를 Will you marry me?”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Will you marry?”라고 했더니 여학생이 Yes, I will marry, but not you.(내가 결혼은 텐데 너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이 쓰는 중에 ‘왕따’라는 것이 있습니다. 크게 따돌린다는 뜻으로 ‘왕따’라고 같습니다. 일본에도 이지메라는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이것이 특히 청소년층에서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심지어 폭행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데 나를 알아주지 않고 무시하고 따돌릴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누군가가 다가와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심지어 버림받은 동물들도 슬픈 감정을 나타냅니다. 저희도 집에 작은 개가 마리 있는데, 지난 안식월 동안 2개월을 밖에 갔을 가정이 돌보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와 보니까 우리 개가 삐졌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버리고 갔다고 그런지 삐져서 오다가 나중에 다시 되었습니다.

 


1.   나병환자의 믿음 (40)


오늘의 본문을 보면 우리는 사람을 발견하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고립된 장소에서만 살아야 되는 사람,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이전에는 나병을 ‘문둥병’이라고 번역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병(한센병)과는 다릅니다. 전염성이 아주 높고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피부병도 있고, 치료가 가능한 피부병도 있고, 이런 모든 다양한 병들을 포함하여 성경에서는 나병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병이 정확히 어떤 병이었는지 그것을 우리는 수가 없습니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우리는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사람은 아주 괴로운 상황 속에서 살아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하여 문둥병자를 부정한 자로 취급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것이요, 있는 동안은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 13:45-46)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문둥병자는 자기에게 오면 된다는 표시로 자기 윗입술을 가린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나는 더러운 인간입니다. 나에게 가까이 오면 됩니다.”라고 외쳐야 하는데, 사람이 자기와의 접촉을 통해 부정해지는 것을 방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돌에 맞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그가 그곳을 지나다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냥 나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알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남들처럼 내놓고 알아볼 없으니까 숨어서 알아보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오면서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옷으로 몸을 가리고, 혹시 들키면 어떡하나 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겁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토록 용감한 행동을 있었겠습니까? 당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그는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멀리서 따라 다니며 모든 것을 듣고 보며,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나병환자라는 사실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데 있어 걸림돌입니다. 만일 사실이 발각되면 고침을 받기는커녕, 그는 당장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과연 내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자니 돌에 맞을 같고, 가자니 이대로 살아야 하고.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태로 사느니 용감하게 예수님께 가서 고침을 받자.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돌에 맞아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 나는 고침을 받고 싶다. 그렇게 자신을 고칠 있는 예수님께 오려고 결정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괜찮은데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결단을 하고 예수님께로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있나이다” (40)


사람이 얼마나 고민하며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시대에도 교인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고민하는 같은데, 고민의 종류가 다릅니다. 사람은 가야 되는 알겠지만 갔다가 맞아 죽는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고민한 것이지만, 요즘은 유혹이 너무 많으니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우리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나아가겠다는 결단이 매일 필요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무리를 뚫고 나타난 나병환자의 등장으로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은 놀라면서 그에게서 피하며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부정한 나병환자가 감히 나오는가? ‘어떻게 저런 더러운 놈이 우리가 있는 곳에 오는가? ‘빨리 녀석을 끌어내야 . 저런 나쁜 , 우리까지 전염시키려고 하나?


사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온갖 욕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둥병자도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를 압니다. 바로 다음 순간 자기가 돌에 맞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셨는데 제가 어릴 논산훈련소(연무대) 참모장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릴 학교 가기 전에는 개월씩 있었습니다. 그때 소위 ‘문둥병자’들이 거리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놀다가 그런 사람들이 몰려오면 집에 있던 분들이 빨리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주로 구걸을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오는 겁니다. 제가 여섯 정도 밖에 되었기 때문에 집으로 도망을 치는데 제가 달리기가 느립니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혼비백산해서 도망간 기억이 납니다.


요즘 좀비 영화 광고가 나오는 것을 봤는데, 이상하게 생긴 좀비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런 광고를 보았습니다. 마치 그것과 너무 비슷했습니다. 제가 후에 며칠 동안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빨리 도망가서 문을 닫으려 하는데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그는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주실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구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만일 하실 있거든 고쳐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고칠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심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과연 고칠 있을까, 없을까 하지 않습니다. 고치실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능력은 의심하지 않지만, 예수님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부정하다고 하는 자기와 같은 나병환자를 과연 고쳐주실 마음이 있는지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고치기를 원치 않으시면 결과 그는 돌에 맞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그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창피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 전혀 알지 못한 ,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로 와서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깨끗케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아온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나병이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1-42)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자리에 나병환자가 사람 혼자였을까요? 자리에 병자가 사람 명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리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고 숨어서 나병환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의 치유 사건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필요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며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만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들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명(The Great Commission)’에서 주님은가서 제자를 삼으라하셨습니다( 28:19-20). 그런데 시대에는 제자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군중만 늘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주님의 제자는 요즘에 별로 없고 그냥 많이 모여 있는 군중만이 교회들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자리에 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제자가 아니라 군중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없고, 간절히 믿음으로 나아오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체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 사건이 일어날 , 특히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서 이처럼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 반드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적의 공식(miracle formula)’이라고 부를 있겠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 + 은혜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반응 = 하나님의 기적 >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대부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믿음과 신뢰가 만날 하나님의 기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든 작든 문제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몸에 병이 났다는 것은 뭡니까?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리가 목장에서 감사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항상 똑같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몸이 힘들고 피곤하고 병들어 아프고, 그래서 감사할 제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이 걸렸다는 말은 죽었고 살아 있다는 아닙니까? 오늘도 생명을 주셨다는 , 오늘도 날을 주셨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죽을 정도로 힘들다는 ,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가 뭡니까? 우리에게 괴로움이 있고, 병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런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있는 , 주님께 나가는 ,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아니면 나아오더라도 너무 안일하게, 전혀 간절한 마음이 없이 나와서 그냥 군중이 되는 ,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어려움이 생기면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같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간절히 나아가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나의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려움은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뭡니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를 도와줄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은행을 찾아가고, 그러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갈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의 죄를 지었을 ,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하니까 회개하고 지은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51:17)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리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이렇게 상한 심령으로 애통해하고 회개하며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명한 ‘산상설교’, 중에서도 처음에 나오는 ‘팔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5:3-4)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이것을 해결해줄 분이 없으십니다. 하며 나아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의 시간이 있습니다. ‘위기’라는 속에 위험하다는 뜻도 있지만 기회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삶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불평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나올 있게 되고, 그럴 위기가 축복으로 바뀔 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능력의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가? 요즘 기도생활이 어떠십니까?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까? 만약 간절하지 않고 대충 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 하나님 말고도 다른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믿을 데가 있는데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겠습니까? 오히려 그쪽으로 간절히 붙어야지요. 그것은 자신의 능력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지위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믿는 구석으로 삼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간절해질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께 일단 구해보고 구해도 되면 내가 방법을 써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간절한 마음을 갖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일이 뭡니까? 의지할 만한 어떤 다른 것들을 자꾸 쌓아놓고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인간은 그렇게 시도합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해 있는 것들을 자꾸 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많이 모으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님을 찾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예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얼마나 마음을 다하여 드리고 있습니까? 기도할 , 찬양을 드릴 , 갈급한 심령으로 하는 겁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예배에까지 나왔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된다. 받고 가야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야 된다. 이런 절박한 마음이 우리에게 오늘 필요하지 않습니까? 편안하게 믿으려고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간절함 없이, 사모함 없이, 자기 유익만 따라서 다닐 아무런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없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기도제목을 살펴보십시오. ‘내가 이거 잘되게 해주십시오. ‘내 아이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주로 이런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아니라, 내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만, 잘되어서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잘되어서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이 바른 기도이겠습니까? 내가 건강해서 못된 짓을 잘한다면 바른 기도이겠습니까? 우리 아이가 잘되게 해달라고 ,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간절하게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삶에 있습니까?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그것을 없애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것을 없애버리심으로 우리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계시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시에는 괴롭고 힘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가 맘대로 짓고 다니는데도 가만히 놓아두시면, 이것처럼 저주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면서 뭔가 일을 일으키시고 괴롭게 하신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나갈 있게 되니, 이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나병환자와 같이 “주님이 원하시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있습니다.”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 (41-42)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여러분,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낄 있으십니까? 주님은 나병환자가 얼마나 어렵게 이곳까지 왔는지 아십니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직접 만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사람이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이 시간을 끌면서 한참 다른 사람들도 살펴보다가 이상 흘러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만지시면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지는데, 예수님은 전혀 지체하지 않고 그를 바로 만지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람을 만져야 고치실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얼마든지 고치실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거리에서도 고치시고, 심지어 병자를 보지도 않고 고치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멀리서 고치셨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신하의 아들은 보지도 않고 고치셨습니다.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 다른 데에 있는데도 말씀으로 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지면서 고치셔야 합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부정하고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나병환자를 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서 썩어 문드러진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어릴 때의 기억이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되어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균이 신경에 파고들어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피부는 금방 병균에 감염이 되고, 따라서 썩기 시작합니다. 신체의 일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고름이 나오고 심지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얼마나 끔찍한 모습입니까.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그렇게 징그럽고 더러운 나병환자는 절대 만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말로 고쳤을 겁니다. 말로도 있는데 하러 만집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사람을 만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내가 나병환자였다고 가정하고, 그의 입장에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지금 예수님 앞에 왔고 돌이 날아오기 직전입니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엎드려 고개도 들고 있습니다. 뭐라고 하실까, 그냥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가 뭔가가 몸에 닿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까, 그분의 사랑이 가득한 눈길, 그리고 인자한 음성,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잔잔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 이런 분이 있나!’ 하고 놀라고 있는데 놀랍게도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더럽고 까맣던 피부,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피부가 깨끗해졌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껏 내가 나병환자라고 사람들이 나를 만지기는커녕 내게 가까이 오지도 않았었는데, 이분은 오셔서 나를 만져주셨습니다. 이런 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감격과 감동이 몰려오며,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이 쏟아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사람을 굳이 만지며 고치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터치(touch)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41절을 다시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역사의 몇몇 믿을 만한 초기 사본들에는 부분이 “예수님이 분노에 가득 차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노하셨겠습니까? 나병환자에게 분노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가 사역 중간에 끼어들었다고 분노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분노하셨던 것입니까? 분노는 인간의 본성을 망가뜨리는 악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인간이 이토록 망가진 대한 분노, 그리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나병이라는 때문에 무시당하고 격리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지금까지 나병환자로서 수많은 세월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설움을 당했을지, 부정한 자로 정죄되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외로움의 나날을 보냈을까, 그러한 사람의 상한 마음이 느껴지시면서 불쌍히 여기셨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번도 사람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한 그를 직접 만지며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때는 상대방 위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베스트셀러 책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의 사랑의 언어로 남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부간이라든지, 부모와 자녀 간에, 상대방도 그건 알고 자신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렇지가 않은 겁니다. 예를 들어, 선물을 받는 것이 사랑의 언어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물은 주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느낍니다.


아내는 돌봄을 받는 것이 사랑의 언어이고 남편은 칭찬을 듣는 것이 사랑의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계속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뭐라고 합니까? ‘보여 다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다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아내가 보는 앞에서 설거지도 하시고 청소도 하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자기 식으로 하려고 하니까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정확히 아시고, 그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 바로 이런 배려의 사랑, 끝없는 사랑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까? 나병환자와 같이 더럽고 추한 우리를 만지면서 고쳐주신 주님은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분기별로 교회 건물에 벌레를 죽이는 약을 치러 옵니다. 그런데 죄악을 때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죄인이라고 하며 살충용 분무기를 뿌려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향수 분무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악취가 나는 것도 향기롭게 바꿔주어야 하겠습니다.



[나가는 ]


성경의 유명한 구절들 중에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로마서 8 28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에게는 나병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께 나온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구절에서 “모든 것”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금 나의 문제를 넣어 보십시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넣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분명히 이렇게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통해 경험해야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그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셨는가, 그리고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그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셨다는 것을 느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걸음 나아가 사랑을 입은 자로서 다른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베풀겠다는 결단을 하며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것을 선포하며 살겠다는, 복음을 전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하면서 나아가야 하니다. 그것이 성만찬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역사가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 이어지는 우리의 가운데 충만하게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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