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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4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

전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사도행전 237~47)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설문조사(survey)를 하면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인 분들은 한 번 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교회에 다닌 지 20년 이상 되신 분? 10년 이상 20년 이하이신 분? 3년 이상 10년 이하이신 분? 1년이 안 된 분?

 

우리 교회는 교회에 다닌 지 오래 된 분들이 많으신데, 그런 분들이 많을수록 교회가 정체된 것입니다. 1년 이하인 분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활력이 넘칩니다. 사실 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많아야 정상입니다. 다음에 이 질문을 할 때는 그런 분들이 가장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다닌 분들이 많으니까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 안 믿는 사람이 와서, ‘당신은 교회에 다니는데, 도대체 교회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한마디로 교회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의외로 교회를 오래 다니더라도 교회는 이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정리하여 대답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대답해보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무엇인가교회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조직도 아닙니다. 장소 개념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교회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곧 교회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콜럼버스 한인장로교회라는 지역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많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이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universal/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로만 가톨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만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공교회라는 것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 결과 무려 3천 명의 사람들이 그 날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 사건 직전의 주님의 제자들의 수, 즉 첫 번째 교회 교인 수는 단 120명이었습니다(1:15). 그때는 사실 교회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 120명이 같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날 3,000명이 들어오니까 엄청난 초대형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갑자기 우리 교회에 3천 명이 들어오면 난리날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늘어난 수를 따져보면, 2,500%의 성장률입니다. 단 하루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지상 최대 교인 수를 가진 교회는 한국의 여의도순복음교회입니다. 무려 교인 수가 48만 명입니다. 그런데 한때 남미 콜롬비아의 ICM(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보다 더 교인 수가 많은 세계 최대 교회였는데, 그 후 문제가 많이 생겨서 교인 수가 많이 줄어드는 바람에 다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최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세기 예루살렘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교인 수의 증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 최대 교회라고 해도 하루에 2,500%의 성장률을 보이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심은 그런 엄청난 수의 증가가 아니라, 그들이 교회로서 함께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바로 그 모습이 지금도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반응 (37-41)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열흘 정도 전심으로 합력하여 기도하던 120명의 믿는 자들에게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겼고, 나가서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겼으며,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말이 전 세계의 언어로 통역이 되어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기쁨만 가지고는 이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기뻐서 날뛰는 무리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나, 미국대학 풋볼이나 프로 수퍼보울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면, 또 곧 시작할 미국 대학농구에서 우승할 때 보면, 사람이 너무 기뻐서 난리를 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모습입니다. 또 아이돌 그룹 콘서트 장을 보십시오. 아주 난리가 납니다.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그런 기쁨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입에서 놀랍게도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것도 세계 각지의 언어로 선포되니까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입에서 핵폭탄 같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 술이 취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이미 오래 전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주신 것인데, 그 예수를 당신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러자 이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찔림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7)

 

여기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마음에 찔렸고,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고 찔리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도 내용이 베드로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는 사람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서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저처럼 설교자도 그렇고 복음을 전할 때도 그렇고, 반드시 성령께서 말씀해달라고 기도한 다음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VIP 분들을 초청할 때도 아무렇게나 가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한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 집회 때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초청했을 때 몇 분들이 왔습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강한 찔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다른 언어를 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인 유월절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재판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도 분명히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이처럼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찔림입니다. 왜 찔렸겠습니까? 죄에 대한 깨달음 때문입니다. ‘, 내가 죄인이구나.’ 하고 강하게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찔렸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죄에 대한 깨달음 없이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를 지을 때 이게 죄인 줄 알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건지 알면서도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물건을 슬쩍 가져올 때 처음에는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거 봐라?’ 하면서 두 번째 할 때는 심장이 조금 덜 뛰고, 세 번째, 네 번째 할 때는 더 괜찮아지면서 이래도 되나 보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까 계속 행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강한 찔림이 오는 겁니다. ‘내가 도둑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깨달음이 갑자기 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느 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실 때, 그 동안 자기가 저지른 죄악과 자기 맘대로 살아온 무지와 교만이 절실히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살아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교만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상황들을 만드셔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십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그런 식으로 하면서 돈도 떼어 먹고 하다가 갑자기 사업이 주저앉고 실패를 합니다. 그런 상황을 통해 마음이 낮아지고 가난해지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잘 나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layoff를 당하고 해고를 당합니다. 마음이 낮아지면서 주님을 전심으로 찾게 됩니다. 또 그 동안 건강하게 잘 지냈는데, 갑자기 병이 생겨서 수술을 하거나 입원을 하거나 쓰러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낮아지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찾게 됩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마음이 찔리면서 ,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하며 살았는가?’ 하고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런 힘든 순간도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순간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죄 용서를 받고 멸망을 피할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서 우리가 어찌할꼬?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설교를 듣거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나, 삶 공부를 할 때나, 말씀을 대할 때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 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찔리며 묻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나아가 행하는 것이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이때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절박하게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일체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8)

 

원어를 보면 여기서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회개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라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종종 회개하는 경우를 보는데, 요즘 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미투’(MeToo) 운동이 굉장히 불길같이 번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남자들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한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여자들에게 그렇게 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 동안은 그냥 피해자들이 쉬쉬 하거나 조용히 지냈습니다. 밝혀봤자 오해를 받고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한 영화제작자가 여배우들을 성추행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미국에서 미투운동이 번졌습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 여성들도 나도 당했다. Me, too.’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처음 이 운동에 불을 지핀 한 여자 검사가 한 TV 뉴스 인터뷰에 나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혔습니다. 그 가해자로 지목된 전 검사가 최근에 예수님을 믿고 어느 유명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며 내가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고 마침 세례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 여성 검사는 더 마음에 상처를 받고 회개는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 검사가 조사를 받는 것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정말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그 회개에 맞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도 하고, 말로도 고백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에 알맞은 열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여기고 쌓아온 것들을 단번에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까지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쾌락이나 자랑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방식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전에 죄를 범했어도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는데, 믿기는 했지만 유명한 사람으로서 피해자에게 가서 자기 자존심을 버리고 잘못했습니다하며 용서를 구하는 게 쉽겠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죄의 모든 습관들을 다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결코 우리의 힘으로 되지를 않습니다그러나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을 때 우리를 묶고 있던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자유가 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한 다음에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이 되고, 나의 모든 과거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온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내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은 사람은 이렇게 세례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예수님은 믿는데 세례를 꼭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 나가서 하는 게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자와 결혼할 때 결혼은 하겠지만 결혼식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하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배우자 될 사람이 창피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또는 자기가 귀찮아서,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안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이라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한 가정을 이룹니다. 와서 축복해주십시오. 우리 둘이 부부가 됩니다.’ 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데 세례는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서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뭔가 불편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라는 것은 믿는 자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공적인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겠습니다.’ 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자리가 세례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시는데, 하나는 죄 사함입니다. 물론 이 말은 세례만 받으면 무조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증거로 세례를 받았으니까 그 회개와 믿음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능력 있게 살도록 해주십니다. 죄 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감정이 복받쳐야 뭔가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별로 죄인이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렇게 회개하라고 하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다라고 하시면 그렇습니다라고 하고, ‘이것이 죄다하시면 그렇습니다라고 하며, ‘네가 이러이러한 죄를 짓고 산 죄인이다.’라고 하시면 , 그렇습니다.’ 하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죄인이구나.’라고 하시는데 내가 무슨 죄인이에요? 나는 죄인이 아니에요.’라고 하면 동의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는 네가 이렇다.’라고 하실 때 그렇습니다.’라고 하나님과 동의하며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핵심은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지, 눈물을 흘리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로 주어질 수도 있고 안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할 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예수님을 맞아들일 때,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어떤 종교적 특심을 가진 특정 사람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39-40)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가리키는 말 아니겠습니까? 당장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모든 먼 데 사람”, 즉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대인 중에만 부르신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든 누구든지 부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오는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은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1)

 

여기 보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지금 하루에 갑자기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정식적인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참 모습 (42-47)

 

그러면 이 사람들이 모여서 뭘 했습니까? 처음 120명이 모였을 때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게 되니까 이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2)

 

이 말씀도 역시 한국어 번역이 충분치가 않습니다. 여기 맨 끝의 힘쓰니라에 네 가지가 걸립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에 아주 힘썼다. 서로 교제하는 데 아주 힘썼다. 떡을 떼는 데 아주 힘썼다. 기도하기에 아주 힘썼다.’ 네 가지에 굉장히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가 교회가 할 일입니다.

 

<생명의 삶>을 하신 분들은 Prescription(처방)Description(묘사)이 생각나십니까? 성경에는 처방이 있고 묘사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 두 가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처방은 무엇이고 묘사는 무엇입니까? 42절은 대부분이 처방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묘사입니다.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사도인데, 사도적인 가르침은 전해져 내려오지만 지금은 사도가 없기 때문에 사도적인 전통 아래 내려온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초대 교회에는 먼저 말씀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서로 뜨거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셋째, 서로 떡을 뗐습니다. 밥만 먹었다는 게 아니라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의 성찬식과 달라서, 예배 중에 성찬을 실제로 같이 나누며 먹기도 했고, 예배 중에 간단히 성찬을 하고 예배 후에 같이 먹기도 했습니다. 싸 가지고 온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공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넷째로 굉장히 열심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가 실수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너무 교회를 멋지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건물도 멋지고, 스테이지도 멋지고, 예배도 팬시(fancy)하고, 찬양 팀이 음악을 너무 잘하고, 성가대의 음악적 수준도 높습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그쪽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교회가 해야 할 일에 약해지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모습을 단장하는 것뿐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의 가르침과 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뜨거운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오는 예배가 아니라 정말 하나 되어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하고, 전심으로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등한시하면서 겉모습에 너무 치중하지 않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prescription(원리, 원칙)을 따라서 하다 보니까 나온 것들이 바로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서로를 향한 뜨거운 봉사가 있었고, 서로 돌봄이 있었고,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3)

 

사람들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데, 사도들만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게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다 같이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사도들이 교회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을 더욱더 높여드리고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네 가지로 정리한 것처럼, 전심으로 배우는 교회였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교회였고, 전심으로 예배하는 교회였고, 전심으로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전심으로 서로 돌보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었고,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놀라운 능력이 이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목장에서도 순서 중 하나가 지난 번 냈던 기도제목이 응답을 받았는가 체크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응답을 체크하는 정보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4-45)

 

여기에도 prescription(처방, 원리, 원칙)이 있고 description(묘사)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서로 내 것 네 것 없이 물건을 팔아서 도와주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같이 쓴 것에서 공산주의가 나온 것인데, 사실은 이런 모습이 예루살렘의 첫 번째 교회에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것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런 교회들은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prescription(처방), 즉 주님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서로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다보니까 내가 가진 것이 저분에게는 없네?’ 하며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한 것처럼, 말세로 갈수록 사랑이 식습니다. 요즘 정말 사랑이 더 식는 것 같습니다. 왜 이기적으로 됩니까?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됩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지금 세상이 점점 더 자기 밖에 모르게 되는 게 사랑이 식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면, 더 중요한 가치가 들어와 있으면, 돈은 덜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됩니다.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뭡니까? 돈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최고인 게 들어오니까 더 이상 돈이 최고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새로 생겼기 때문에, 이전에 중요시하던 것이 덜 중요해졌고, 그러니까 당연히 나누게 됩니다. 특히 필요를 볼 때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서 자기 것을 나누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갑자기 많은 교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필요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헬라파로 그리스말이나 다른 말을 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다른 데서 온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임시로 왔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담요도 필요하고, 잠을 잘 데도 필요하고, 음식도 필요하고, 그릇도 필요합니다. 갑자기 3천 명이 되었으니 필요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위해서 재산이 있는 자들이, 특히 나중에 보면 바나바 같은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헌금을 했습니다.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겁니다. 또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데려와 재우지 않았겠습니까?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옷도 주어서 입히고, 물건도 내놓고, 음식도 내놓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6-47)

 

이게 참 놀라운 모습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즉 한마음이 되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것도 역시 묘사(description)입니다. 성전은 지금 없습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에 딱 하나 있었는데 다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성전 터만 있지 성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전에 모였겠습니까? 모일만한 넓은 곳이 거기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이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성전에 같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모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도 매일 모여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우리도 매일 새벽기도로 모이지만, 그게 아니라 같이 모여서 뭘 했겠습니까?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바로 그게 성경적인 원리(prescription)입니다. 이때는 다 같이 모여서 예배하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사도들이 각각 열두 그룹으로 나누어 가르쳤을 수도 있고, 시간을 바꿔가면서 가르쳤을 수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가능합니다. 같이 모여서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집에서 떡을 뗐습니다.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3천 명이 어떻게 한 집에 다 들어가겠습니까? 집집이 나누어서 우리가 목장을 하듯이 가정 교회로 모인 겁니다. 집에서 떡을 뗐는데, 같이 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성찬식을 했습니다. 예배를 하면서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형식에 딱딱 맞춘 게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찬도 나누고, 그러면서 서로 교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룹으로 집에서 모여 함께 교제도 하고 예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음식을 먹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식사를 하십니까? 특히 부부가 식사를 같이 할 때, 여기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식사하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식사하면서 그 사람 말이지라고 누군가를 욕하든지 자기자랑을 합니다. 특히 남의 험담을 많이 합니다. 남의 험담을 자꾸 하면 이것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집집이 모여 떡을 떼면서, 성찬도 하면서, 예배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교제도 하면서, 특히 음식을 먹을 때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서로 세워주고 덕을 끼치는 언어들이 많았겠습니까? 끊임없이 서로를 칭찬해주고, 서로를 격려해주고, 힘들어하는 형제자매를 일으켜주는 말을 하면서 식사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못 때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나는 먹을 게 더 있으니까, 형제님 자매님은 많이 드세요.’라고 서로 돌보면서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할 때 영적인 가족이 됩니다. 다과만 나눠서는 가족이 되지 않습니다. 식사를 나눌 때 정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또한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고, 그 결과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지탄이 아니라 칭송을 받았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세상의 지탄을 많이 받는 형편이 되어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처음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로 모인 이들은 세상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주정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런 깨끗한 교제를 보고, 정말 서로 세워주고 사랑하면서 순수하게 음식을 먹고 교제하는 것을 보면서 , 저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라고 느끼게 되었고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당신도 여기에 오세요. 우리 같이 합시다.’라고 했을 때 마음을 열고 계속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주님을 모르던 사람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게 될 때,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어느 교회가 갑자기 숫자가 막 늘어나면 흔히 저 교회가 부흥했다.’라고 하는데, 요즘 대부분은 부흥이 아니라 그냥 수적인 성장입니다. 이미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옮겨와서 갑자기 늘어난 것이지, 정말 한 분, 한 분 전도하면 그렇게 빨리 갑자기 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부흥은, 주님을 모르던 분들이 이렇게 공동체 안에 들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 돌보고, 말씀으로 함께 자라가는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이런 부흥의 역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200, 300, 500, 천 명이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한 분 한 분 끊임없이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역사,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 정말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렇듯 올바르게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다 보면 바로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또 주님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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