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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4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6

죽임 당한 야고보, 구출 받은 베드로

(사도행전 121~17)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 근처의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청소년부를 맡았는데 그 중 고등학생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아들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는데,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바로 그 여자 집사님이 혼자 계속 자리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보니까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집회 때 큰 은혜를 받아서 눈물로 기도하시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강사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자신의 간증을 했는데, “내가 이전에 암에 걸렸었는데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간절히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응답해주십니다.”라고 하셨고 교인들은 모두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 집사님의 남편이 바로 그 강사 목사님과 똑같은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그 집사님은 왜 하나님이 똑같은 암에 걸렸던 저 목사님은 살려주시고 왜 내 남편은 아이들도 어린데 그냥 죽게 하셨나?’ 하는 슬픔과 원망이 올라와서 설움에 울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분은 신실한 신앙인이어서 그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했고, 최근에 보니까 목사까지 되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도 종종 발생하지 않습니까? 나와 다른 교우가 각자 사업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는데, 나는 파산하게 된 반면 그 교우의 문제는 잘 해결이 되어서 사업이 더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인 중에 두 분이 암에 걸려서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한 분은 낫고 다른 한 분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자녀와 저 집 자녀가 둘 다 똑같은 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저 집 자녀는 합격하고 내 자녀는 떨어지는 일도 벌어집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내 친구는 너무 좋은 직장을 잡게 되고 나는 아직도 직장을 잡지 못해 쩔쩔 매는 일도 일어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왕이면 다 잘해주시지, 어떤 사람은 잘되고 잘 풀리게 해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잘 안 풀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에도 바로 그와 비슷한 경우가 나옵니다. 오늘 100% 여기에 딱 맞는 답은 아니더라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말씀을 통해 찾아보기 원합니다.

 

 

1.   베드로의 투옥과 하나님의 뜻

 

1)  야고보의 불의한 처형과 베드로의 투옥

 

오늘 본문의 배경은 헤롯왕이 통치를 하던 때입니다.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복음서에 2명이 나오고 사도행전에 2명이 나옵니다. 4명이 모두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에게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는데(2), 헤롯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분해서 베들레헴 근처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게 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 헤롯은 역사에 나오는 대 헤롯(헤롯대왕)인데 헤롯 가문의 가장 첫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복음서를 계속 읽다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예수님을 만났던 헤롯, 또 세례요한을 처형한 헤롯이 나오는데, 그는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이고, 나중에 26장에 나오는 아그립바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아그립바 1)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헤롯에 대해서는 다음에 조금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간단히 말해서 오늘 본문의 헤롯(아그립바 1)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면서 헬레니즘을 신봉하고 헬라 문화를 많이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원래 에돔 사람인 헤롯 집안에서 유대인의 피가 섞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앞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쇼를 하면서 철저한 이중 플레이를 했고 그래서 민중의 마음을 얻은 뛰어난 정치꾼이었습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굉장히 훌륭했던 사람이 여기 나오는 헤롯이었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2)

 

여기서 야고보를 요한의 형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에 야고보가 여러 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야고보서가 있는데, 그것을 쓴 야고보는 이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다른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야고보는 열두 명의 사도들 중 한 명, 특별히 요한복음을 쓴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칼로 목 베임을 당하여 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이었고(7), 사도들 중에는 야고보가 첫 순교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내용을 보면, 이것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시킬 때 절대 칼로 죽이는 법이 없고, 스데반의 경우처럼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람을 죽일 때는 자기들이 권한이 없고 반드시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만약 로마법에 따라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다면 십자가의 형틀을 이용한 사형 방법 중의 하나를 택해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로 죽였다는 것을 보면, 야고보의 처형은 유대법이나 로마법에 따라 합법적인 재판 절차 없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행한 불법적인 참수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3)

 

헤롯은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핵심 리더 중 하나인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넣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전혀 상관없이 백성의 여론에 의해서 정치를 하는 정치꾼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것이 옳은가 틀린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라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정치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어려워집니다. 헤롯은 유대 백성들이 환호하니까 정치적으로 더 큰 민심을 얻기 위해서 또 다른 핵심 리더인 베드로를 잡아서 옥에 가둔 것입니다.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4)

 

3절에서 이때는 무교절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15일부터 한 주간의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114일이었는데, 나중에 무교절과 합쳐져서 무교절의 첫날로 불렸습니다(14:12). 이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얽혀 있는 명절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로마의 여러 지역들에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구름 떼처럼 모여들게 되고, 예루살렘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가 권력자들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이때 헤롯은 명절을 앞에 두고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고, 무교절이 끝나 백성이 흩어지기 전에 처형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하루에 16명의 군인들을 동원했습니다. 유대인 출신인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팔과 왼쪽 팔에 쇠고랑을 묶고 그 쇠고랑 끝을 로마 병사의 몸에 묶은 것입니다. 도망가려고 움직이면 쇠고랑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알게 되고, 앞뒤에 보초들도 세워서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4장과 5장에서 보았듯이, 이미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두 차례 체포되었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잡아놓았는데 갑자기 풀려나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했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가 세 번째 체포되어 옥에 갇히면서 경비가 그만큼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또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예 군인들에게 쇠고랑으로 묶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놓은 것입니다.

 

 

2)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베드로

 

베드로가 갇혀 있던 안토니우스 요새는 예루살렘 헤롯 궁 서쪽의 가장 은밀한 심장부에 설치된 감옥입니다. 거기는 나라의 정치범들이 가는 곳인데, 그런 곳에 베드로를 가두었습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6-7)

 

헤롯왕(아그립바)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고 유대 백성의 여론에 편승하여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2, 3중의 보안 장치를 설치하고 감시하여 인간의 어떤 수단 방법을 통해서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아주 철저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철저히 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8-9)

 

지금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잠이 든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 급히 일어나라 하니까 쇠사슬이 손에서 벗어집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자고 있습니다. 또 천사가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니까 베드로가 그대로 따라 합니다. 천사가 또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니까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갑니다.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어리둥절합니다.

 

내일이면 사형을 당하는 베드로가 헤롯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인 안토니우스 요새 내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의 1, 2차 투옥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 넷이 동서남북 방향에서 양손이 각기 사슬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지키고, 나머지 열두 명도 거기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내일 사형당할 사람이 어찌 이렇게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잤다는 말은 여기 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하며 잠을 쿨쿨 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는 과정을 보면, 베드로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주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여기서 풀려날 것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어떻게 풀려나겠습니까? 일찌감치 포기하고 밤이니까 자자는 심정으로 잤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심문과 고문을 당해서 너무 힘이 들고 육체적으로 피로해서 잠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잠이 들었나, 어떻게 그때 잠을 잘 수 있나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천사가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우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0-11)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온 것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도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서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렇게 하십니다. 여기저기서 이런 기적의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어두움 중에 있고, 절망에 놓여 있고, 구덩이에 던져져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불가능의 벽을 뚫고 그들을 건져 내시는 사건들이 지금도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하신 일을 접하면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야고보는 막아주지 않으셨을까? 왜 야고보가 죽는 것은 막지 않으시고, 왜 베드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적을 통해 구해내셨는가? 그렇게 병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무도 모르게 나오도록 하시는 능력이라면, 당연히 야고보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이십니다. 야고보가 죽는 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런데 베드로가 살아나는 과정은 너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드로에게 천사를 보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야고보도 당연히 살리실 수 있었는데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은 모른다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초대교회 사도 중 첫 순교자로 야고보의 생명을 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답을 모르는데 모르는 것을 가볍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를 기적으로 살리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야고보가 죽도록 그냥 놓아두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유, 안 됐네.’라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죽은 사람이 안 된 겁니까, 아니면 살아 있는 우리가 안 된 겁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살아 있는 게 복이고 죽은 것이 저주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야고보는 제대로 많은 사역을 하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순교를 했지만, 지금 영원한 하나님 나라,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 가 있습니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와 고난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을 너무 단순하게 흑백논리로 생각해서 내 마음에 안 들면 다 나쁜 것이고 내 마음에 좋으면 좋은 것인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전체를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시고 전체를 알고 움직이시기 때문에, 지금 밖에 못 보는 우리의 눈으로는 이해가 안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이해하지 못하고 몰라도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어떤 이유가 거기에 분명히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악을 통해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야고보가 죽은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편안하게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지만 아주 안 좋게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강도에게 총을 맞아 죽거나 끔찍한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것을 보면 슬프지만, 그럴 때 하나님께 왜 이런지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질문할 것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죽었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왜 저렇게 안 죽었는가? 나는 왜 지금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남겨져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성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받는 구원의 과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데려가시면, 이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더 깎이고 만들어져야 할 삶의 인격적 영역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를 아직 이 땅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아직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다 이루어져서 너는 이제 됐다. 내가 하라고 한 것이 다 끝났다.’라고 하시면 그때는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사명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라고 하시는 일이 아직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내신 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미션(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아직 안 데려 가셨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 가시고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 땅에 번져 가기 시작한 교회와 그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증거 할 사명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베드로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 이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직 더 빚어지고 깎이고 인격적으로 다듬어져야 할 성숙의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나에게 아직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와 사명이 있기 때문에 나를 아직 불러가지 않으시고 이 땅에 두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꾸 아이고, 나 좀 데려가 주세요. 왜 나를 안 데려가시나?’라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불순종입니다.주신 사명이 있어서 아직 안 데려가시는 것인데 자꾸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도 불순종이고, 또 사명을 주셨는데 제대로 하지 않는 것 역시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애를 쓰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2.   기도를 통해 일어난 놀라운 역사

 

1)  예루살렘 교회의 간절한 기도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5)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당연히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모였을 때 성경은 베드로를 위한 기도의 상황에 대해서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가 하면 교회가 기도했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교회의 합심기도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역사의 무대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아주 큰 위기상황입니다. 지금 전 교회적으로 아주 급박한 상황입니다. 이미 열두 사도들 중 하나인 야고보가 끔찍한 죽임을 당한 이때에, 또 핵심 지도자 중의 하나인(어떻게 보면 가장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면, 교회의 상황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위기상황인 것입니다.

 

그때 혹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급진적인 청년들 중에 우리가 몰래 지하 감옥을 습격해서 베드로를 빼내옵시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파도 있어서 , 그러지 말고 헤롯이 돈을 좋아하니까 헤롯에게 뇌물을 갖다 바쳐서 베드로를 살려냅시다.’라고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이 의견, 저 의견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기도하자! 지금은 기도할 때다.’라며 같이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이 급박한 문제 앞의 위기상황에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하 감옥을 어떻게 습격하겠습니까? 또 돈을 준다고 풀어주겠습니까? 오히려 자기들까지 다 잡힐 것입니다. 정말 기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간절히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요즘에 보면, 사업, 직장, 가정, 자녀, 부모님, 관련된 사람들, 교회 등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너무 태평합니다. ‘어떻게 되겠지라고 너무나 태평합니다. 간절함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부흥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이 1907평양대부흥때부터였습니다. 그곳은 회개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처럼 그 진동하는 기도의 처소가 교회를 부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가 이런 기도의 간절함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부자가 되고 너무 넉넉해졌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일들이 줄어드니까 기도의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최대 문제는 말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씀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예배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 잘하는데, 애통하는 기도, 간절한 기도가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교회는 한국 교회라고 했는데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절박한 기도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위기상황만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하지만, 특히 이런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간절히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이러한 기도의 회복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다.

 

 

2)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2)

 

베드로는 이제야 온전히 깨어나 주께서 천사를 보내 구해주신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이 집은 기독교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현장입니다.

 

2장과 3장을 걸쳐서 120명의 성도들이 바로 여기에 모여서 기도할 때, 구약 때부터 약속해주셨던 성령 강림의 역사가 오순절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은 그 전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집은 처음으로 크리스천 공동체 즉 교회가 탄생하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곳에서 성도들이 교회에 닥친 위기를 놓고 모여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3-14)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나왔다가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베드로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흥분이 되어 문을 열어주지도 못하고 바로 뛰어 들어가서 우리 베드로 사도가 오셨어요!”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5)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외치고 부르짖으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인데, 정작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해서는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니까 나왔다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미처 문도 열지 못한 채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베드로 사도가 오셨어요!”라고 외칩니다. 그때 사람들은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구나!’가 아니라 네가 미쳤구나.”라고 합니다.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그래도 로데가 굽히지 않고 정말이라니까요!” 하고 우기니까 그들이 다시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베드로의 천사일거야.”

 

 

3)  간절히 기도한 성도들의 불신

 

참 놀랍습니다. 아니, 이렇게 하려면 기도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간절하게 합심해서 기도하기는 했는데 아마 속으로는 이건 기도해도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기도한 겁니다. 베드로를 위해 울부짖으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했지만, 베드로가 실제로 그 험한 감옥,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는 감옥에서 구출될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뭔가 다른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기적을 베푸셔서 베드로를 꺼내어주십시오.’라고 하기보다는, ‘제발 목숨만 붙어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베드로가 이렇게 빨리 다시 나타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막상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처음엔 그것을 믿지 못했고, 나중에 정말 베드로라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6)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요즘 말로 깜놀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으십니까? 열심히 기도해서 그 기도가 이루어졌는데, 막상 이루어지고 보니까 믿을 수가 없는 것, 아니면 기도하면서도 에이, 이건 기도해도 안 돼.’라고 하며 기도하는 적은 혹시 없습니까? 막막해 하면서 기도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지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운이 좋았다라고 하거나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생각하지를 않고, 어차피 될 일이니까 된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무슨 운이 좋거나 재수가 좋아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절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며 인도하심입니다. 사실은 기도를 안 할 때도 하나님이 해주실 때가 많습니다. 일단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노트를 만들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자님들은 목회일기를 써서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비록 이들은 자기들이 기도해놓고도 믿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기뻐하셔서 응답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것은 분명한데, 기도해놓고 믿지 못한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까? 물론 이것은 베드로를 앞으로도 계속 쓰실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살려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또한 분명한 것은, 비록 그들의 믿음이 조금 부족했을지라도, 그들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마음을 합해서 한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대로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마음을 합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응답의 역사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지만(개인으로, 그룹으로, 중보기도실에서), 그것이 당장 응답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내 문제를 알려드리고 부탁했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계속 주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믿음의 사람의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오래 전에 웨슬리 듀엘(Wesley Duewel)이라는 분이 쓴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라는 책에 나오는 실화로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파견되어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일하던 매튜 히긴스(Matthew Higgins)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케냐의 시골에서 수도인 나이로비로 오다가 마우마우라는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근처에서 타고 가던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차를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가 없어서, 그냥 차 안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이 위험한 지역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평안 중에 하룻밤을 잘 보냈습니다. 이튿날 일어나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 나이로비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거기 머무는 동안 어느 선교사가 와서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히긴스 선교사님, 마우마우 지역을 통과하던 그 밤에 열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과 같이 있었습니까?” “열여섯 명이요? 아니요. 그 밤에 우리 가족 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요? 이상하군요. 누가 와서 말해주는데, 당신이 그때 그날 밤에 열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하던데요?”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에 돌아온 히긴스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는 가운데 텍사스의 어느 협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선교 보고가 끝난 다음에 어떤 교인이 와서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몇 달 전에 선교지에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때 마우마우 지역에서 차가 고장 나 하룻밤을 지새운 기억이 났습니다. “, 그날 밤 차가 고장 나서 그냥 거기서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사실은 그날 저녁 저희 교회에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제 마음에 이상할 정도로 계속 선교사님이 생각나고 너무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 예배가 끝날 무렵 제가 광고를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상할 정도로 매튜 히긴스 선교사님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데, 아무래도 그분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라는 사인인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할 분들은 예배가 끝난 뒤에 선교실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그때 남아서 기도했던 사람의 수가 몇 명이었겠습니까? 열여섯 명이었습니다. 사실 그곳은 굉장히 위험한 지역이었고, 실제로 그때 차의 고장으로 서 있게 된 것을 본 불량배들이 습격을 하려고 선교사의 차에 접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 보니까 거기에 열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차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 깡패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들은 사람이 그 나이로비의 선교사에게 했으며, 그 선교사가 그때 히긴스 선교사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히긴스 선교사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그날 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열여섯 명의 천사를 보내셔서 극적으로 우리 가족을 보호해주셨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도 기도의 부담을 주실 때 즉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해놓고도 이루어지니까 깜짝 놀란 예루살렘 성도들보다 우리는 훨씬 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아닙니까? 기도해 놓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해주십니다.

 

 

3.   무대의 중심에서 사라지는 베드로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7)

 

이 마지막 부분을 놓고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베드로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조용히 옮기실까?’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정도의 일이 일어났다면 베드로가 더 엄청난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냥 사라집니다. 나중에 15장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는 과정이 얼마나 드라마 같은 과정입니까? 그런데 이제는 사울과 바나바의 시대가 시작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안디옥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저자인 누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성도들 중에 바나바와 사울도 들어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이때 안디옥 교회의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핍박의 사건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바나바와 사울도 거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중심적인 역할은 거의 끝나가고, 앞으로는 바나바와 앞으로 사도 바울이 되는 사울의 시대가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기 위해 준비를 시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과정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다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알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못 보는 것도 다 알고 계시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이미 하나님은 다 하고 계십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죽임을 당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 구출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번째로 투옥된 베드로를 기적으로 살려내신 이유는 베드로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5장을 보면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등장하고 사라집니다(15:6~9).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이 나와서 그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 공회를 엽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식적 종교회의입니다.

 

그 결론으로 괜찮다.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고, 이방인인 그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되고, 대신 악한 것들을 멀리 하며 주님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 하고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넘어 복음이 이방으로 확장되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사역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이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내려지도록 하는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위해 하신 일들을 간증하고 증거 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거기서 그렇게 결정된 것입니다. 바로 그 사명이 베드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감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억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그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이제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시는 것은 그의 사명과 그의 시대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이방 땅에서 있을 혼란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지막 증언자이자 책임자로서 베드로를 살려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맡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이곳에서 우리에게 이루라고 주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때가 되면 무대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죽었다, 사라진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명을 감당한다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살다가 사라져야 하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냥 이 땅에 살다 없어질 무가치한 인생을 들어 쓰셔서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사용해주시는가?’ 하는 감격과 감사가 인생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사함을 가지고 매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때가 다 되면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사라지면서부터 바나바와 사울, 특히 사도 바울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 역사의 드러남과 숨겨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우리는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은 잘나가니까 성공한 것이고, 이 사람은 고생하니까 실패한 것이다.’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누가 진짜 중심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보며 그분이 주신 사명을 다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나의 사명에 묵묵히 순종하며,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쓰임 받는 인생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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