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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6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5

공회 앞에 선 바울

(사도행전 231~11)

 

[들어가는 말]

 

지난주일 설교 때 언급한 술꾼을 기억하십니까? 지난주 못 오신 분들을 위해 재방송(?)을 하겠습니다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자신을 걱정해서 그를 아끼는 은사가 술이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한 책을 주었고, 그는 그 책을 밤새 읽고 나서 이제는 정말 끊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됐습니다, 책 읽기를.

 

그 후 그 은사가 그를 찾아와 만나서 간곡히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면하며 또 다른 책을 주면서 이것을 읽고 거기에 적힌 대로 실행해보라고 했습니다. 비록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였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은사가 직접 찾아와서 주고 간 책이기 때문에 그것을 또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정말 굳은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이제는 정말로 끊어야겠다, 저 선생님과의 관계를!’

 

그 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술을 많이 마시던 그는 결국 위에 구멍이 나고 간이 나빠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 은사는 병원으로 그를 문병 왔습니다. “자네 결국 이렇게 되었구먼. 이제는 정말 정신 차리고 술을 끊어야 하네.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정말 끊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지 몰라.” 은사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히 그에게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그 술꾼도 병상에 누운 채로 은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조금 후 은사가 병실을 떠나고 나서 마침내 그는 큰 결단을 하게 됐습니다. ‘더 이상은 정말 안 되겠다. 이러다 내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돈이 아주 많이 들더라도 실행에 옮겨야겠다.’ 그리고 그는 그 병원에서 제공하는, 가격이 아주 비싼 술 끊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특실로 옮겨서, 자기가 허락하지 않은 한 절대 아무도 방문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냥 술을 끊으면 간단한 것을 왜 이리도 어렵게 삽니까? 자기를 사랑해서 술을 끊으라고 권면하며 그토록 도우려 애써준 선생님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고 보지도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물론 이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겠지만,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과 아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 복음에 접했을 때 마음을 열고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닫고, 그 다음에는 더 닫고, 그 다음에는 아예 닫아버리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1.   바울과 대제사장 아나니아 (1~5)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날이 새자 천부장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소동을 일으키며 바울을 죽이려 했는지,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합니다. 70명 또는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요즘의 우리 국회와 비슷합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였고,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이 자꾸 종교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해달라고 하니까, 종교문제는 자기들이 다룰 수 있도록 공회를 만들게 허락해주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에 관련된 사건을 재판하고 사형 판결도 내릴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확정하는 데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사형 집행은 로마 당국(총독)의 승인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도록 해놓았습니다.

 

지난 2230절에서 천부장이 바울의 결박을 풀어 주었는데, 아직 범죄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 바울을 자유인의 신분으로 이 산헤드린 공회에 데려갔다는 말입니다. 그 유대인 공회에 선 바울이 먼저 무슨 말을 합니까?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1)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바울은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공회에 니고데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새 무덤에 안치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우상을 숭배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눈으로 바울이 이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존경하는 공회원님들이라고 하지 않고 바울은 그냥 여러분 형제들아라고 하며 정말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첫 마디는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하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고 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 자기는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이때 바울은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볼 때 이미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가난 속에서 박해를 견디며 살아온 것, 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러 차례 예언을 받았던 그 예루살렘에 그가 목숨을 걸고 찾아 온 것도 다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책임감에 따라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침상 또는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 가는 그 길에 어떤 고백을 하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변에 모여 있는 가족들과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지금까지 모든 면에 걸쳐 믿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작은 일이 쌓여서 지금 나의 인생이 된 겁니다. 특별이 영적 습관을 바로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 꾸준히 예배하는 습관, 예배에 늦지 않고 일찍 오는 습관, 예배에 오면 앉아서 기도하는 습관,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습관, 특별히 격려하고 세워주는 말을 하는 습관 등.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여서 우리 인생이 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쌓였을 때 마지막 순간에 내가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살고 있는 것들이 쌓여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말에 대해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2)

 

그 당시의 대제사장 이름이 아나니아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당시에 그 전 해에는 안나스였고 그 해에는 가야바였는데, 이때는 아나니아입니다. 이 사람은 주후(AD) 47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아주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드린 십일조를 횡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이었는데도 폭력과 암살까지 일삼던 아주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폭력을 행하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정적을 살인교사하고 죽이는 악한이었다는 것입니다한마디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득만 챙기는 악독한 종교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그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입을 치는 것은, 최대의 인격 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데가 아니라 입을 치라고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게 함으로써, 신앙 양심을 따라 자기가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바울의 인격을 짓밟아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저런 자의 말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3)

 

바울도 이때 굉장히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자기 입을 치라고 하며 인격을 모독했다고 화가 난 게 아니라, 여기 있는 공회원들이 유대인들의 지도자이고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율법을 어기면서 자기 입을 치라고 하니까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눅 들지 않은 채 아나니아를 향해 회칠한 담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심한 욕입니다. 욕을 한 겁니다.

 

예수님도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23:27). 당시 유대인들은 우기가 끝난 후 길가에 버려진 가난한 사람들의 무덤에 하얗게 횟가루를 뿌렸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게 아니라, 시체가 있는 무덤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지나가다가 하얀 횟가루가 칠해진 것을 보고 거기가 무덤인 것을 알고 쉽게 피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에 하얀 횟가루를 뿌리면 겉으로는 굉장히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시체가 썩어 있어 아주 더러운 무덤인 것처럼,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그렇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아나니아를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라고 외친 것도 같은 뜻입니다.

 

율법에는 반드시 두세 증인들의 증언이 있을 때에만 사람의 범죄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19:15). 그 전까지는 누구든 무죄로 인정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것이 무죄 추정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따른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것도 대제사장인 아나니아가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처음부터 바울의 입을 치게 하여 바울을 아예 처음부터 죄인으로 확정하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얗게 회칠한 담이 깨끗해 보이지만, 그 담 너머에서는 온갖 더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에 빗대어서, 아나니아의 이중성을 회칠한 담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뭐라고 합니까?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4-5)

 

원래 대제사장은 공식석상에서 입는 의복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옷만 봐도 대제사장인 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변 사람들이 대사장에게 어떻게 욕을 하느냐고 말해줄 때까지 바울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는 말은, 그날의 산헤드린 공회가 천부장에 의해 갑자기 소집된 임시회의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자기 의복을 갖춰 입고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평상복을 입고 참석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지난 20년 이상 세계를 다니며 전도여행을 했기 때문에 본토 유대교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제사장이 된 아나니아의 얼굴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에 대한 바울의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을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그들의 아첨의 표현이었을 뿐이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정말 욕하고 저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은 사실 아나니아의 불법 행위에 대한 정확한 지적입니다. 물론 약간의 감정도 들어가 있었겠지만, 그것은 정당한 비판이며 경고였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출애굽기 2228절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너의 백성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율법을 따르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율법을 거스르고 도리어 폭력을 명령한 사람이 설마 대제사장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 중 한 명이 그랬어도 놀라운 일인데, 가장 높은 대제사장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공회원도 그렇지만, 특히 대제사장이라면 이런 공회 석상에서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때리라고 폭력을 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인용한 것은 자기가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에 따라 자기가 대제사장을 비방하지 않는 것처럼, 대제사장도 율법에 따라서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죄인처럼 처음부터 다루면 안 된다.’라는 항의였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 70(또는 71)이 바울 한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일제히 바울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율법에 근거해서 해야 할 말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게 하여서 바울의 인격을 짓밟아 버리려고 할 때, 만약 바울이 같이 흥분해서 절제력을 잃고 바울 역시 비인격적으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배교자라고 낙인을 찍고 바울을 못 죽여서 안달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은 당연히 만장일치로 율법 모독죄, 성전 모독죄, 대제사장 모독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부장은,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의 종교법을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아무리 로마 시민이라고 해도 공식석상에서 비인격적인 언행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그를 더 이상 보호해줄 명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공개적으로 자신의 인격이 짓밟히는 모독을 당했지만,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거기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무엇을 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바울이 한 말입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만약 제가 어디서 이상한 짓을 해서 어떤 사람이 저를 가리키면서 나는 그가 목사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라고 한다면 상당히 뜨끔한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으십니까? 특히 우리 가운데 직분을 맡으신 분들? 만약 내가 장로인데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나는 그가 장로인 줄 알지 못했다.’ 안수집사라면 나는 그가 안수집사인 줄 알지 못했다.’ 그 말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목사로, 장로로, 안수집사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는가? 저런 사람이 무슨 목사, 장로, 안수집사인가?’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이걸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 이분은 정말 장로님이시죠.’ ‘이분은 정말 안수집사님이시죠.’ ‘이분은 정말 목사님이시죠.’라고 하는 우리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나는 그가 목사인 줄, 장로인 줄, 안수집사인 줄 몰랐다.’라는 삶이 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큰일이 아니라 작은 일, 작은 영적 습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습관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특히 직분자일수록, 교회 리더일수록 그렇습니다. 말씀, 새벽기도, 십일조, 예배, 공 예배 참석, 예배시간에 졸지 않는 것, 예배시간에 늦게 오지 않는 것 등은 사실 보통 크리스천도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안수 직분자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가 장로인 줄, 안수집사인 줄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이 말이 바로 나를 향한 말이구나.’ 하고 깨달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아휴, 다행이다. 나는 장로로, 안수집사도 아니니까 괜찮겠지.’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저 사람이 크리스천인 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면 큰일입니다. 누가 나를 봐도 저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지. 이 사람처럼 예수 믿어야 돼!’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바울과 바리새인들 및 사두개인들 (6~10)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6)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70(71)의 의원 대부분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만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신학적인 위치와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완전히 서로 반대에 있었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주전(BC) 2세기경,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제사장들이 성전 관리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사두개파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바울 시대의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의원들 같이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기득권을 지닌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제사장들이 대부분 이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권위만 인정하고, 시편이나 예언서와 같이 다른 구약성경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기만 하셨을 뿐, 우리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나 부활과 영생과 같은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 세계였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살고 끝나는 겁니다. 내세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다 잃어버린 물질주의자들, 현실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룩해야 할 성전의 제사의식마저 악한 장사꾼의 상거래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은 일반 유대인 시민들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혹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주전(BC) 4세기경 유대교 개혁에 앞장섰던 하시딤의 후예답게 누구보다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 비율법적인 것들, 불경한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스스로 분리된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바리새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명칭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부 다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또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고 하는, 자기 조상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전통을 다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 그리고 부활과 영생을 다 믿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유대교를 잡고 있는 것에 반대하면서,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한 바리새파는 서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거룩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들이 위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전통을 더 따르며, 문자 그대로 따르면서 그것을 안 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거룩한 척, 남들에게 잘 보이는 시장 어귀에서 거룩하게 옷을 입고 나와 손들고 기도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었지만 예수님은 저건 거룩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진짜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신학적으로도 완전히 다르고 삶도 달랐기 때문에, 평소에 두 진영 사이에 늘 다툼이 있었습니다. 공회에도 사두개인들이 있고 바리새인들이 있으니까 항상 싸우는 겁니다. 요즘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어서 계속 싸우는 것처럼, 그들도 계속 싸웠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보니까 사두개파도 있고 바리새파도 있는데, 공회에서 자신은 원래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밝힙니다. “나는 바리새인이다.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일뿐 아니라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바리새인이 복수로 되어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 대에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바리새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계속 바리새파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곧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나뉘어 원래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을 놓고 다 함께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가 바울이 자기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니까 바리새파가 돌변합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7-8)

 

이 다툼의 원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리새인은 천사와 영과 부활과 영생을 다 믿는데 사두개인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 두 진영 사이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서로 이 차이로 인해서 싸워왔는데, 그것이 여기서 드러나서 싸운 겁니다. 그들은 원래 한마음으로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고 죽이려 했는데, 바울이 언급한 부활 때문에 두 진영이 원래 분열되어 있었던 것처럼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때도 그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인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디바(안티파스)가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님을 죽이는 일로 하나가 되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이 사람들도 원래 싸우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는 일로 하나가 되었는데,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입니다.’라고 했더니 이제 바리새인들은 그를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 부활을 막연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부활은 그냥 막연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이고 바리새인이고, 모든 유대인들이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들이 신성 모독죄로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고 바울이 자꾸 증언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지금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이 사람은 우리 바리새인이다. 보호해야 한다.’라고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앙숙이었던 사두개인들과 맞서서 갑자기 바울의 변호자들이 되었습니다.

 

크게 떠들 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9)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리새파 사람들도 저 놈 죽여라! 성전 모독죄를 범한 놈이다. 죽여라!”라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바뀝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 편이라는 겁니다. ‘우리 편이니까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하여간에 괜찮다. 우리 편이다. 보호해야 한다. 착하다.’ 조금 전까지는 죽여라였는데, 지금은 우리 편이니까 착하다입니다.

 

이것이 진영논리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영논리를 우리가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편이면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상대편이면 어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것이고, 우리 편은 어떤 나쁜 일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만히 있을 사두개인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0)

 

천부장이 볼 때 바울이 찢겨질지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큰 분쟁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력을 동원한 다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치고받고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회원들 같이 고상하신(?) 분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그들에게 붙은 추종자들도 치고받고 싸우며, 무력으로 밀고 당기고 치고받고 주먹을 날리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흥분하면 나뉘어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국회라든지 그렇게 하고 있고, 옛날에도 다 그랬습니다.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찢겨지다라는 말이 산산조각 나다, 박살나다라는 뜻인데, 가만히 놓아두면 바울의 몸이 다 찢겨지고 박살나고 죽을 것 같아서 천부장이 빨리 가 구출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요새로 다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처럼 천부장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처음 잡혀왔을 때 말할 기회를 주었고, 로마시민인 것이 밝혀지자마자 정중히 대하고, 지금도 바울이 죽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천부장이 이 위기를 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분명히 인간들이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역사하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그냥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항상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다툼 속에서 위기에 처한 바울을, 천부장을 통해 구해내신 것입니다.

 

 

3.   바울과 주님 (11)

 

왜 구해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1)

 

이때는 그 날 밤즉 엄청난 위기에 처했던 그 날의 밤입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천부장이 영내로 들어가서 안에 가두어놓았는데, 그때 바울 옆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날 위기를 모면했다고 해서 무슨 높은 분이 와서 자기를 돌봐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때가 노년인데, 바울이 그 동안 굉장히 고생해서 몸도 안 좋고 나이도 많아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아주 찬 감방에서 밤을 맞이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밤,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그 밤에 주님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이 안전한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 황제의 황궁보다 더 좋은 곳이 이곳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곳에 가보아도, 제일 럭셔리한 곳, 엄청나게 비싼 곳, 아주 화려한 곳에 가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잠깐 좋고 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곳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은 곧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뿐 아니라 담대하라하셨습니다. 왜 담대해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네가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생 말년에, ‘이제는 내 할 일을 다 했나싶은 시기에, 새로운 사명을 또 주시는 겁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자기가 로마로 가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한 번 이 차디 찬 감방에서 확인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막막한 밤이어야 했을 그 밤이, 놀라운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밤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편안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만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왜 그런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그 방향에서 어느 정도 넉넉하고 성공하고 뭔가 이루고 안전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정말 재앙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이런 죽음의 위기에 닥친다 할지라도, 그곳에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천국이고 바로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이 어디이든지 바로 이러한 소망과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장소가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한 주 동안 우리가 살아갈 때 매일 매순간 지금 나는 주님과 함께 하는가묻기 원합니다. 사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나를 지켜주시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주님의 이 뜻 앞에, 겸손히 주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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