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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6

바울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다

(사도행전 2312~24)

 

[들어가는 말]

 

몇 달 전 유럽 헝가리 다뉴브 강 크루즈 배가 침몰해서 거기 탔던 한국인 탑승객들 중 다수가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행사의 부탁으로 원래는 다른 데 타려던 승객들을 합치면서 침몰한 배에 타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원래대로 탔으면 침몰되는 배와 함께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 계획이 바뀌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그 배에 타려다 못 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음에 타겠다고 한 사람들과 그 직전에 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비행기가 연착하여 갈아타는 공항에서 원래 타려던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충격적이게도 원래 타려던 비행기가 지난 20019.11 테러로 뉴욕 쌍둥이 빌딩에 부딪쳐 폭발한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거기 탔으면 자기도 거기서 죽는 것인데 그렇게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에 가려는데 이상하게 길이 막히고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게 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경험을 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1.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맹세와 음모 (12~15)

 

1)  잘못된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

 

바울은 전날에 성전에서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하여 천부장의 지시에 따라 로마군 안토니오 요새의 차디찬 감방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바울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 특별히 그 감방을 예비해놓으신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차가운 감옥에 죄도 없는데 갇혔다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는 손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날 밤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였겠습니까? 바로 그 로마군 요새 안의 감옥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날 밤 어떤 신자의 가정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를 향해 떠나기도 전에 암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2-13)

 

날이 밝자마자 유대인 40여 명이 모였는데,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이 결성된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본문의 표현을 보십시오. 그들은 함께 당을짓고, “맹세하고, 동맹합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 40여 명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들은 물샐틈 없는 경비 태세를 갖춘 로마군대의 요새 안에 있는 바울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열심히 연구하다가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웁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가지고서, 바울에 대해 적대적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갑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4-15)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바울에 대해 공회에서 다시 조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바울을 안토니오 요새에서 다시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로 데리고 오도록 천부장에게 허락을 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로마군 요새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의 어딘가에 잠복하고 숨어 있다가 바울이 지나갈 때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천부장이 그들의 계략을 모른 채 바울을 산헤드린 공회에 다시 출석시키게 하더라도, 바울을 혼자 보내겠습니까? 반드시 무장한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호송하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암살단원들이 공회로 가는 길에 매복하며 숨어 있다가 바울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호송하는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지키려고 창과 칼을 들 텐데, 그들과 싸워서 혹시 자기들이 죽더라도 괜찮다는 죽음의 각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오직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딱 한 번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땅에서 두 번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사로 외에도 죽었던 사람 두 명을 더 살리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렸고, 저번에 보았듯이 드로아에서 바울도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은 것을 살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인생을 두 번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둔 지 나흘이 되어 시체가 썩어서 냄새까지 날 정도였는데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 외에 대부분 사람들은 인생을 딱 한 번을 삽니다.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단 한 번 삽니다. 그렇다면 한 번 뿐인 우리 인생, 하나뿐인 우리 목숨을 아무 데나 막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잘못된 일, 악한 일에 목숨을 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특히 하나님 앞에서 그것처럼 잘못된 인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열심히 하는 일, 내가 이 일에 목숨까지 걸었다고 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건 좋은데, ‘그것이 정말 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정말 인정해주실 만한 일인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까지 가져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 땅에서 내 인생이 끝날 때 다 끝나고 사라지고 말 일에 내가 목숨을 걸었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인생이 없습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인생을 걸고 나갈 때, 목숨을 걸고 나갈 때,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세례도 베풀었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에 다 같이 갑니다. 영원한 저 하늘나라에 함께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이 주님을 모르다가 주님을 믿고 저 영원한 천국까지 같이 갈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을 걸 만한 일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원한 가치를 가진 데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잘못된 맹세의 헛된 결과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대개 목소리가 크고 강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고 또 율법을 모독한 바울이 신성 모독죄로 죽어 마땅한 배교자로 보았습니다. 그런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붙은 죄목들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거짓 모함인지,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한마음이 되어 바울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 유대인들 앞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당을 지어 맹세하고 동맹한 40여 명의 암살 자원자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모셔서 열심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나온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혹시 바울을 호송하는 로마 군인들과 싸움이 일어나 죽더라도 좋다고 하며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굳은 맹세를 알게 된 유대인들 모두, 자기들이 다 같이 증오하는 바울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어놓았다는 그들에게 누가 감히 하지 말라거나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성경을 통해 아는 것처럼, 바울을 암살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들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이때 죽지 않고 나중에 로마로 호송되어 갑니다. 그 후 잠시 로마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3~4년 후에 다시 잡혀 와서, 교회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 때 목이 잘려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인데, 바울이 목이 잘릴 때 잘린 머리가 땅에 통통통 세 번 튕겼는데, 그 튄 자리들에 샘물이 솟아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에 가면 트레 폰타네(Tre Fontane)’라는 곳이 있고 거기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한참 있다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10여 년 후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사람들은 모두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그냥 굶어 죽었다는 말입니까?

 

처음에는 물론 자존심 때문에 자기들이 맹세한 대로 어느 정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하루 이틀 가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며칠씩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말한 것이 있으니까 대놓고는 못하고 뒤에서 슬그머니 먹고 마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맹세했던 그들이 뒤에서 슬쩍 먹고 마시면서 스스로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만약 자신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누가 보고 아니, 당신은 그때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입에 집어넣었다 빼면서 , 그냥 맛만 봤소.’라고 했을 텐데, 이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 이후로 그들이 어떤 큰소리를 쳐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저 사람 말이야, 그때 큰소리를 쳐놓고 사실은 뒤로 다 먹고 마셨어.’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리 큰소리쳐도, 마치 양치기소년처럼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작당과 맹세와 동맹으로 인해, 그들은 먹고 마실 때마다 항상 창피하게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갇히게 된 이유가 대부분 떳떳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로마군 요새의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로 인해 조금도 창피해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증인으로 진리를 따르다가 갇혔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두 번 모두, 즉 빌립보에서도 그랬고 여기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또 나중에 로마에서도 그랬고, 모두 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주님의 신비로운 섭리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잘못해서 고난을 받고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말씀합니다(벧전 2:19-20). 그러니까 자기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봐주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고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다면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아름다운 헌신으로 보아주십니다. 그런데 불의와 악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신앙 양심을 따라 가난하게 사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부귀영화와 성공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믿음의 길을 떠난다면, 혹시 세상에서 성공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인생입니다.

 

본문의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처럼, 바울과 같이 바르고 선하게 사는 사람을 짓밟기 위해 맹세하고 큰소리치는 일이 우리에게는 절대 없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목적으로 큰소리치고 맹세하며 나아갈 때, 언젠가 그것 때문에 자기가 수치를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눈에 대들보를 가지고서도, 누군가의 눈 속에서 가시를 뽑겠다고 하며 그 사람의 눈을 파헤치며 찌르고 있다면, 똑같은 기준으로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게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그런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이전에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남을 비난했는데, 그 똑같은 기준이 자기에게 적용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때그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했던 말들, 남을 비난했던 말들이, 그 후에 똑같은 기준으로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뉴스에 나오는 유명한 분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똑같습니다. 내가 만약 어떤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나중에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똑같은 기준이 나에게 적용되어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조카에 의해 발각되는 암살 음모 (16~22)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큰소리치며 맹세했던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는지 본문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6)

 

본문은 성경에서 바울의 친족이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길에 매복하고 숨어 있다가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던 암살단의 음모가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졌고, 바울의 조카는 곧 로마군 요새에 갇혀 있던 삼촌 바울을 면회하여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생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울의 누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누님의 아들인지 여동생의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누이의 아들로서 바울의 외조카입니다. 바울이 그에게는 외삼촌인데, 놀랍게도 그들의 계획이 이 조카에게 알려졌다는 겁니다.

 

이전에 다메섹에서 바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음모가 바울에게 알려졌습니다(9:23-25). 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 근처의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배 위에서 바울을 암살하겠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알려져서 바울은 배를 타지 않고 걸어서 북쪽 마게도냐로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조카가 유대인 암살단의 모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이고 이름은 무엇인지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순하게 그가 듣고 와서 바울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7-18)

 

이때 바울은 자기를 지키던 백부장에게 천부장에게 내 조카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가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 바울의 조카를 만납니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19)

 

조금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냥 할 말이 뭔지 묻지 않고 손을 잡고 물러가서”, 즉 조용하고 은밀한 곳에 가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게 뭔가 하면, 이 사람이 은근히 돈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는 데로 가서 물어본 겁니다. 그런데 조카는 천부장이 기대하던 것과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총독에게 쓴 편지 내용을 보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닌데 자기가 한 것처럼 꾸며서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비록 이 사람이 여기서 은근히 돈을 바라기도 했지만, 26절에 이름이 나오는 글라우디오 루시아라는 이 사람에게 바울이 잡혀갔고, 이 사람을 통해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고, 로마군인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많은 천부장들 중에 왜 하필 이 사람이었습니까? 그래도 이 사람은 그나마 양심이 있고 신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비슷했지만, 그래도 아주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고, 이 사람을 통해서 바울을 보호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0-22)

 

비록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굉장한 정보였습니다. 천부장은 자칫 잘못했으면 문책을 당할 수도 있고 잘릴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고 하며 대비책을 세웁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조카를 통해 위기상황을 알리도록 했고, 그래서 천부장은 암살단의 음모를 자세히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로마시민이라고 해도, 지금 그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고발당한 죄수 신분이었습니다.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로마시민들 중에서도 사실 범죄자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천부장이나 또 조카를 데리고 간 백부장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직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요청을 묵살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바울의 요청에 따라 그의 조카를 천부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살짝 마음을 틀면서 아유, 귀찮게 데려가긴 뭘 데려가? 됐어. 너는 가만히 조용하게 있어.’라고 하고 가서 자기 볼 일을 보면 끝나는 것인데, 그래도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바울의 조카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라는 말에 마음속으로 돈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바울의 조카라는 말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며칠 동안 살펴본 바울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천부장까지 올라올 정도면 웬만한 사람은 탁 보면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범죄자가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특히 동족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소요를 일으켰던 이집트 사람이 아닌지 오해도 했고, 채찍질도 하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로마시민이었고, 게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헬라어를 잘 구사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 전날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떨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를 변호하던 바울의 모습, 그리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과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결연한 자세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조카라고 했을 때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돈이나 선물 같은 것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들도 그렇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사용했던 그 돈 때문에 나중에 걸려들어서 수치를 당하고, 자기가 사용했던 그 권력이 오히려 자기를 옥죄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문제이지,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 자기를 지켜주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 같은 것이 아니라, 평소에 바르게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시기 때문에, 정직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방향으로 살아갈 때,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오해를 당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때, 지금 당장은 어려움이 생겨도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영광을 받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천부장의 대응 (23~24)

 

유대인들의 구체적인 음모를 확인한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이고 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책을 세웁니다.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로 데려와 달라고 요청이 올 것이라고 했는데, 아주 조심해서 철통같이 지키면서 데려가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데려가고, 유대인들의 요청이 오기 전에 바울을 빼돌려 총독에게 그대로 보내버리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당시 로마 총독의 거주지는 예루살렘에서 60~70마일 떨어진 가이사랴였습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3-24)

 

천부장은 그날 밤 제삼 시, 그러니까 지금 우리 시간으로 밤 9시에 바울을 비밀스럽게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지금은 밤에도 환하지만, 전기가 없던 1세기 당시의 밤 9시는 지금과 달리 완전히 캄캄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한밤중이었습니다.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천부장은 두 명의 백부장들에게 바울을 위해서 중무장한 보병 200, 기병 70, 창병 200명을 준비하라고 지시합니다. 바울을 태울 짐승도 별도로 준비하게 합니다. 어떤 짐승인지 여기는 안 나오지만, 나중에 보면 말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부장이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으로부터 바울을 지키기 위해, 그 한밤중에 470명의 군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경호하여 호송하게 한 것입니다.

 

천부장이라고 하면 보통 천 명의 군인을 거느리는 장군입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천부장 밑에 보통 600명이 항상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바울 한 사람을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서, 자기 밑의 군인들이 천 명이라고 하면 무려 반을, 600명이었다면 80% 정도를 동원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사안을 중대하게 여겼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인가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바울이 걸린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이 한밤중에 바울은 강력한 로마제국의 군인들 470명의 경호 속에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이 한 명을 지키기 위해 47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저 한 사람을 위해 470명이 동원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은 인생말년이 되었고 몸도 많이 아픈데, 평생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다 억울하게 요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언제 가이사랴의 총독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40여 명의 암살단원들이 길에 숨어 있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조카의 말을 듣고, 바울이 천부장에게 470명의 경호원을 붙여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또 그렇게 부탁한다고 될 일입니까? 묵살할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권력자라도 470명의 로마 군인들이 경호를 하게 된다면 요즘 말로 오버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모든 일입니다. 바울의 의도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지켜주고 계십니다. 오직 바울이 감옥에서 한 일이라고는 담대하라. 로마에서도 네가 증언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밖에서 다 알아서 해주십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기도만 하고 있었을 텐데, 밖에서 하나님이 이 상황을 다 인도해주십니다.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에 닥칠 때 자꾸 나가서 내가 누구를 만나서 해결하려 하거나,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을 맞서 싸우거나,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 앞에 꿇어 기도하는 것이 위기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꿇어 엎드려 기도할 때, 나와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다 정리해놓으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나의 상황이 슬픈 상황, 어려운 상황, 위기 상황입니까? 참담한 상황입니까? 바울 한 사람을 위해서 그 한밤중에 470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신 주님께서 바로 동일하신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바울이 차디찬 감옥 속에 있었지만 그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을 더 신뢰하며 나아가는 기회로 만들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정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과 어떤 상황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로 우리 자신을 훈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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