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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7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9

예수님도 못하시는

(마가복음 6 1-6)

 

[들어가는 ]

 

요즘에는 한국도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었지만,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대학교를 선택할 여러 곳에 원서를 제출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류를 내고 나서 연락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편지의 내용은 대개 이렇습니다.

 

우리 학교에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신에게 우리 학교의 입학 허가를 드릴 없게 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학교뿐 아니라, 누구에게서든 거절을 당하면 결코 기분이 좋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경우든 거절을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압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역할 곳을 찾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섬기던 교회에서 영어목회자가 사임하여 후임을 찾았고 다른 교회도 그랬는데, 제가 뽑히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2세가 아니라 ‘영어를 못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보다 영어를 못하는 1 목사님들이나 한국에서 유학 오신 분들 중에 미국 교회에서 목회하는 분들이 있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영어를 못해서 된다고 하는 말을 듣는 분들이 미국 교회에서는 목회를 하는 것이 신기합니다. 아마 한국 교회 분들이 미국 교회 분들보다 영어를 잘하는 같습니다. ^^

 

그런데 혹시 전도하다가 문전박대 당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에게 좋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절을 당하면 ‘감히 나를 거부하다니. 내가 없어서 이러는 아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원인 하나가 거절감입니다. 아무리 거절하는 내용이 부드럽고 상냥하더라도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부드러운 말로 거절을 당하더라도 마음이 상한다면, 아주 강하고 못되게 거절을 당하는 것은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부드럽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퍅하고도 멸시하는 태도로 배척을 합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 (1-3)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과, 회당장인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건 모두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으로 가십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1)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 가장 남쪽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한참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십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사람이 받은 지혜와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2)

 

당시에는 랍비가 다른 곳에서 자기 도시를 방문할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자라나긴 하셨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이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서로 묻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사람이 받은 지혜와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의 말을 다시 자세히 보면, 그들은 결코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 인정합니다. 심지어 예수가 기적들을 일으키는 것도 그들이 보았다는 것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어디서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깎아 내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3)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던 보통 목수가 아닌가?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랍비가 되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다. 꼬마였을 때부터 알고 있다. ‘우리는 자기 동생들도 아는데, 도대체 지금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건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보고도 믿기를 거부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는 크게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시기하며 질투합니다. ‘저 예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얻었지? 나는 저런 것이 없는데,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되었지?’라고 하며 시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예수가 누구인지 너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권능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도 들었고 권능으로 일으키는 기적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구세주로 믿기는 거부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야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친근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예수를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주변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내에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너무나 아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종교적인 형식들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교회에 대해 알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오래 한국에서 친척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지난 갔을 보니까 지금은 가끔 교회를 나갑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교회 얘기만 나오면 일단 눈빛이 바뀌고 입에 거품이 올라오면서 독설과 비방을 퍼부어 댔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중에 맞는 내용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잘못된 부분만을 보다가 정작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냥 죄인들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방금 말한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진짜 핵심과 본질이 아닌, 겉모습만을 압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지식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이상한 것은, 성경은 지난 2 동안 내려오며 검증이 것인데도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다빈치 코드” 같은 소설은 흥미롭게 이전에 있던 소설을 새롭게 해서 내놓은 것인데 그게 진짜인 것처럼 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 1:10-11, )

 

말씀은 정말 진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셨지만 그의 백성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분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졌다는 것이 그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위대한 성인 하나였다고 생각을 하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믿고 따르시는 믿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것은, 주님을 믿을 생각으로 믿어서는 된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뜻을 찾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안 해온 신앙생활의 경험에 의하면 이렇다’, ‘내 생각에는 이렇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렇다’, ‘우리 교회 전통에 의하면 이렇다’, 하면서 잘못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체험이나 감정이나 생각이나 전통이 앞서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부목사로 부임을 했을 , 전의 교회와 다른 점들이 있어서 교회의 중직자 분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건 이렇게 하는 겁니까? 그러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도 몰라요. 그냥 오랫동안 해왔으니까 하는 거죠. 그러니 그냥 하세요.

 

구약 사사기의 내용을 아십니까? 여호수아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이 민족을 보내셔서 공격하여 괴로움을 당하게 하시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부르짖고,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어 구원해주십니다. 후에 다시 죄를 짓고, 다른 민족이 와서 괴롭히고, 이스라엘이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시고 하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결론이 뭔지 아십니까?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 21:25, )

 

하나님으로 자신의 기준을 삼지 않을 때에는, 각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5 복음서, ‘내가복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도의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군인 각자가 알아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장면을 상상할 있습니까? 그건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제대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 각자 개성이 강한 우리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대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반응 (4-6)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너무 안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배척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4)

 

종종 어느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어 부임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다른 곳에서 그런 경우를 보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영어권 목사님이 저와 나이가 비슷한데, 27 자기가 자란 교회의 영어권 담당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교회로 가기 전에 제가 목사님에게 농담 진담 반으로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음이 없느니라하면서 괜찮겠느냐고 물으니까 “I will be okay.”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I will be 오케이.”였습니다. 괜찮았습니다. 부임하고 나서, 거기 오래 계신 어른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목사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썼습니다. 심지어 공식석상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나쁜 의도로 그런 아니라 거기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목사님을 어느 컨퍼런스에서 만나 어떠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음이 없느니라.” 결국 되어 사임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영어권 교회 담임목사로 지금까지 십여 넘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입니까?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5)

 

이것을 보십시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없어”.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신 아니라 못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실 없었다는 말은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인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올 믿음의 결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도 사랑하시고, 믿지 않는 ,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사랑하십니다. IS 같은 테러리스트나, 철저한 무신론자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주님이 일부러 구원을 하셔서 지옥에 보내시는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구원을 받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말씀하셨는데, 그런 죄가 따로 있는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강퍅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정도로 우리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가 “너 믿어? 믿어? 빨리 믿어! 하면서 꺾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로봇이나 컴퓨터와 같이 조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강요된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거부하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일이 풀릴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불평하십니까? 그럴 자신을 돌아보며, 혹시 내가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는데도 내가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그런 아닌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는, 언제나 주님의 능력과 함께 사람들의 믿음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많이 하신 말씀이 이겁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반응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 내가 믿음으로 어떤 결단을 내리고 나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목적이 있으면 그것과 상관없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성경을 보면,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주님의 사랑 + 우리의 믿음 = 주님의 기적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기적을 베푸셨음을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나사렛에서 이상 아무런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5).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거기에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소수의 병자들이 있어서 그들은 주님을 믿고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결과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점을 주목해서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부분은, 진행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출 곳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분위기는 험악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시며 권능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나아와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면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렇고, 되면 배우자 , 가족 , 부모 , 조상 탓을 하며, 조금 나가면 대통령이 정치를 못해서 그렇고, 끝에는 사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나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때에라도, 내가 주님을 향해 온전히 나아간다면 주님의 사건이 삶에 일어나는 믿습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영적으로 서로 성장하도록 도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먼저 개인이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애쓸 때에만 가능합니다. 본인은 전혀 관심이 없는데 남들이 신앙이 좋아서 저절로 자기 신앙도 자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에 다닌다고 자기 신앙이 수준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이 성장하려면 먼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먼저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봐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주님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갈지라도 나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런 식이 되면 곤란하고,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겠지요. 저는 목회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자라갈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여러분도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기에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아무리 영적인 분위기가 좋아도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갈급하게 주님을 찾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 것을 남의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상,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들은 지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사건을 보면, 편안할 부르신 아닙니다. 당시 우상 숭배가 지역에 가득할 일어난 일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며 압제 아래 고통하던 이스라엘의 상황 가운데 모세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엘리야도, 그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고로 악한 왕인 아합과 성경에서 가장 악한 여인인 이세벨이 그의 아내였을 때입니다. 땅이 우상을 섬기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중세 시대의 암흑기 교회가 타락하니까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가고 있을 , 상황이 심히 어려울 , 불가능해 보일 , 미약해 보이는 사람의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것입니다. 사람,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교회도 전체적으로 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며 나아갈 , 더욱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매일 기도하며 힘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능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들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6)

 

예수님이 무엇에 놀라셨습니까? 그들의 믿음에 놀라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자신들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불신앙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무 기적도 행하실 없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주님을 놀라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우리가 편안해지는 것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 가운데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게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셔서 주님을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게 일어날 있는 최악의 비극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께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교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요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까? 한국에도 많고 미국에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분들의 설교를 듣고서 “야, 설교 좋다” 라고 하며 그냥 끝나면, 그러한 삶은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유명한 분들의 설교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듣는 단계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견한 예수님을 나의 속에서 매순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설교의 초점은 설교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들었으면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했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만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됩니다.

 

 

[나가는 ]

 

어떤 사람이 등산하다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고 버텼습니다. 그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위에 아무도 없습니까? 그러자 위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여기 있다. 너는 나를 믿느냐? “주님,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버티겠습니다. 빨리 구해주세요. “괜찮다. 네가 정말 나를 신뢰한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구해주겠다. 이제 네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러자 사람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외쳤습니다. “거기 다른 분은 없습니까?

 

우스갯소리이지만 요즘도 이런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만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하는데, 어디 다른 없나, 나를 도와줄 다른 사람은 없나 찾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의 선배들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란 당신이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붙드신다는 , 그가 당신을 놓지 않으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제 OMF 선교회의 전신인 China Inland Mission 창립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자신의 선교단체가 굉장히 어려웠던 때에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25센트가 있으며, 더불어 온갖 종류의 하나님의 약속들도 갖고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상급은 믿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와, 가정과, 목장과, 교회에, 이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이 가득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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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 (행 17:1-9)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2 (3/17/2019) kpccoh 2019.03.17 2712
200 상황의 역전, 교회를 향한 위로 (행 16:35-4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1 (3/10/2019) kpccoh 2019.03.10 1437
199 최악의 상황에 일어난 최고의 역사 (행 16:25-3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0 (3/3/2019) kpccoh 2019.03.03 3468
198 복음 전파의 열매와 억울한 투옥 (행 16:11-2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9 (2/24/2019) kpccoh 2019.02.24 1588
197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뻗어나가는 복음 (행 16:1-1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8 (2/17/2019) kpccoh 2019.02.17 1635
196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 (행 15:30-4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7 (2/10/2019) kpccoh 2019.02.10 6549
195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행 15:12-29)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6 (2/3/2019) kpccoh 2019.02.03 1448
194 역사적인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1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5 (1/27/2019) kpccoh 2019.01.27 2808
193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행 14:19-2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4 (1/20/2019) kpccoh 2019.01.20 2095
192 루스드라에서의 치유와 그 후의 혼란 (행 14:8-1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3 (1/13/2019) kpccoh 2019.01.13 2437
19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 (골 3:9-17) * 새해 메시지 (01/06/2018) kpccoh 2019.01.06 5904
190 송구영신 메시지: 어떤 땅으로 살 것인가 (막 4:13-20) * 새해맞이감사예배(12/31/2018) kpccoh 2019.01.01 867
189 담대히 선포한 은혜의 말씀 (행 14:1-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2 (12/30/2018) kpccoh 2018.12.30 1814
188 왕께 경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마 2:1-12) * 성탄주일 메시지 (12/23/2018) kpccoh 2018.12.23 995
187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복음의 빛 (행 13:44-5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1 (12/16/2018) kpccoh 2018.12.16 1817
186 무엇을 믿고 살 것인지 결정하라 (행 13:26-43)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0 (12/9/2018) kpccoh 2018.12.09 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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