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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0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5

이혼, 어떻게 것인가

(마가복음 10 1-12)


 

[들어가는 ]


교회 내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어려운 말, 금기시되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 것 같습니다. 저번에 다룬 지옥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이 설교하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십일조도 괜히 설교했다가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해서 꺼려지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혼’입니다. 이혼에 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없으실 겁니다. 저도 이혼에 대한 설교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딱 걸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탁 떠오른 성경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순서대로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하면 안 됩니까, 아니면 할 수도 있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아주 열띤 토론이 열릴 것이고, 어쩌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것은 교회 내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보통 크리스천은 이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조사에 의하면 비기독교인과 크리스천이 별로 이혼율에 차이가 없다는 통계 조사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직접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가족친지 중에 이혼한 사람이 있는 경우가 요즘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목회자 가운데 이혼한 목사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가끔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지금 꽤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이 오래 전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마침 그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보니까 괜찮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서 “괜찮으세요?”라고 했습니다. 사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 괜찮겠어?” 그러면서 “이혼은 종이 두 장에 풀을 묻혀서 붙였다가 그것이 다 마른 다음에 떼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풀이 마른 종이를 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뗄 수도 없고 떼어도 갈갈이 찢어지고 맙니다. 제대로 떼어지지 않습니다. 이혼이 그런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힘들고 마음이 갈갈이 찢겨지는 것이 이혼이라는 그분의 고백이었습니다.

 

간혹 가다 지옥 같은 가정에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학대당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과 사는 경우, 그럴 때는 이혼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혼을 금지합니다. 이혼을 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게 지옥 같은 가정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아닌 것으로 들립니다.

 

사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옥 같은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옥 같은 가정에서 벗어나라고 하며 벗어날 길을 보여주는 게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복음의 말씀이 담긴 성경은 그런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합니까? 물론 우리는 성경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복음의 메시지임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죽을 길이 아니라 살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과연 이혼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내 생각과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 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불행을 주는 이혼

 

이혼을 하게 되면 불행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세상의 학문에서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토머스 홈스(Thomas H. Holmes)와 리처드 라헤(Richard H. Rahe)가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비율표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지 100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 매긴 표입니다. 이 표에 의하면, 100에 해당하는 최고의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배우자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 장례식에서 위로를 하게 되는데,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 괜찮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할 게 아닙니다. 본인이 그렇게 느낄 때까지 옆에서 도와줘야 합니다. 가장 큰 스트레스가 배우자의 죽음입니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경우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러나 한국에도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도 그 스트레스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 바로 이혼입니다. 100을 기준으로 73의 스트레스를 준다고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질병입니다. 또 직장을 잃으면 어떡할지, 실패하면 어떡할지 하는 것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이혼입니다. 죽음이든 이혼이든, 배우자와 이별하는 것은 그처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이혼이 스트레스를 준다고 해도, 보기 싫은 사람과 억지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실제로 한국의 통계 조사에 의해도, 이혼한 사람의 3/4 정도가 이혼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또 미국에서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오래 전에 저도 봤습니다. 영화에서 중간 중간에 이혼한 사람들이 나와서, 이혼한 후에 두 번째 사람과 만나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인터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치가 나오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혼의 내막을 다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은 결국 ‘나는 옳고 네가 문제’라고 하며 싸우다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후회한다고 쉽게 말하겠습니까? 만약 이혼을 후회한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곧 이혼해서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혼의 결과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8년 전의 어느 미디어의 취재에 따르면, 이혼한 부부들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고, 여성의 경우 6개월 동안 매일 밤마다 울거나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혼은 해체된 가정을 만들고 자녀들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이혼의 불행한 결과가 3대까지 내려간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자기 몸 돌볼 힘도 없는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 손녀를 어렵게 키우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이혼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녀도 불행하게 만들고 자기의 부모도 불행하게 만든 본인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2.  성경에서 이혼이 불행하다고 하는 이유

 

왜 이혼이 그토록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나옵니다. 물론 당시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지금 21세기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2절)

 

가끔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바자회가 열렸는데 교회 광고가 애매하게 났습니다.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오십시오. 남편과 함께 오십시오.” 마치 남편이 안 쓰는 물건이니까 갖다 버리라는 것처럼 잘못 광고가 나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 분들은 왜 남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것을 질문하느냐고 불편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 상황이 그랬습니다. 당시는 뭐든지 남자 중심이라, 여자는 당시 숫자를 셀 때도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님께 갑자기 이혼 문제를 던진 것입니까? 여기에서는 그들이 “시험하여”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시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해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많은 문제들 중에서 이혼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 안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양대 학파인 힐렐 학파와 샤마이 학파에서 이것을 놓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시험하러 온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3-4절)

 

율법을 그토록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물어보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그토록 신봉하는 율법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모세가 버리라고 했다는 것은 신명기 24:1의 인용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신 24:1)

 

여자 분들은 이 말씀이 불편하게 들리실 겁니다. 그러나 당시 남자들에게는 이게 복음(?)이었습니다. 살기 싫은 아내와 언제든지 헤어지고 새장가를 드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그 “수치 되는 일”이 도대체 뭐냐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학파는, 아내가 결혼 전에 순결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반면 자유적인 학파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발견하는 마음에 안 드는 모든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이혼해도 좋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혼의 문제를 던진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이거라고 하시면 저건 왜 안 되느냐, 저거라고 하시면 이건 왜 안 되느냐 하고 눌러 버리려고 온 것입니다.

 

왜 예수님 당시 이혼 문제가 중요한 율법적 문제였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남자들이 그랬습니다.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조차도 자신들이 철저히 따르는 율법에 비추어서 괜찮기만 하면 이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경건하다고 아내도 저절로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율법을 악용한 겁니다. 그래서 이혼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혼할 때 변호사를 통해서 하는데, 결국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그들이 듣기에도, 또 지금 우리가 듣기에도 썩 편한 말씀은 아닙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6-9절)

 

예수님의 결론은 한마디로 이혼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혼이 안 되는 이유는 이혼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혼을 불행하게 보신 이유는 심리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혼의 원리와 신비 때문에 이혼은 불행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식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결혼은 단지 인간이 육신의 필요나 생활의 필요 때문에, 아니면 나중에 노후대책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의 갈빗대에서 뽑아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것을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쁘다(bad)는 의미가 아니라 ‘불완전하다(incomplete)’라는 의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하고 독신으로 혼자 살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보면, 독신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 때문에 독신의 은사를 주신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결혼해서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본문은 이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한 몸”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래 전 미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갔는데 그때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이 밤에 자고 아침에 깰 때 옆을 보면 ‘에휴’ 하고 한숨부터 나오십니까? 이렇게 바꾸십시오. ‘더 나빴을 수도 있는데 감사하다.’” 물론 그것은 농담이었습니다. 그런데 맞는 말입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한탄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나빴을 수 있는데 이 정도인 것이 감사하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한다고 해서 두 사람의 몸이 무슨 로봇처럼 합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똑같이 각각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단지 성적 결합을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6)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합한다’는 말은 성적 결합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의미 이상을 말합니다.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창녀와 합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6:15).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은 육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성적 연합은 단지 육체만의 연합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연합을 말씀합니다. 영적 결합은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의 영이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한 영적 결합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로마서 6장이나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이 이처럼 깊은 영적 신비를 가진 것이라면, 그 신비로운 결혼을 파괴하는 이혼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창 2:23). 여러분, 수술을 하여 몸에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낼 때 얼마나 아픕니까? 그것이 이혼의 아픔입니다. 이혼이 본인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영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데도 억지로 나누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3.  이혼을 하는 이유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불행해지는 이혼을 왜 하려고 합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이혼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의 통계에 따르면, 이혼 부부가 말하는 이유 1위는 ‘성격 차이’입니다. 거의 반 정도가 그렇습니다. 그 다음 순위가 경제적인 이유와 가족간의 불화입니다. 이혼 사유로서 정말 절박해 보이는 배우자의 불륜이나 정신적, 육체적 학대는 오히려 적습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배우자와 한 집에서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행했기 때문에 이혼을 결정했을 겁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혼을 결정했겠습니까? 우리는 이혼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기적이거나 인격이 부실해서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밖에 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인데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아무렇게나 확 결정해버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불행한 상황을 불쌍히 여기며, 격려와 위로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혼하려 합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5절)

 

이혼은 “마음이 완악함”으로 생긴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혼한 사람의 마음만 완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이혼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혼과 또 다른 유혹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완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함”에 해당하는 원어는 원래 한 단어로, 아주 딱딱하게 굳어서 구부러지지 않는 마음을 뜻합니다. 전혀 부드럽지 않고 딱딱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수용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맞춰주며 부드럽게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리가 딱딱한데 그것을 구부리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탁 부러져서 날카로워지면서 손을 찌르거나 해서 위험합니다. 그런 유리도 원래 만들 때는 뜨겁게 열을 가하여 액체 상태에서 모양을 만듭니다. 딱딱한 유리라도 원래는 부드러웠기에 뭔가를 만들 수 있듯이, 우리도 부드러워야만 하나가 되어서 뭔가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서로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맞출 수 있는 부드러움이 없는 것, 그 마음의 완악함이 이혼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혼만 아니라 모든 관계 단절의 원인입니다. 이혼이 잘못된 것은, 이혼에 이르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고 고치려 하지 않고 망가진 현실을 아주 크게 만들어 어쩔 수 없이 파국을 맞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 이혼이 해결책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이혼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게 이혼을 해도 결국 그게 얼마나 평생 마음에 남겠습니까? 특히 자녀들의 마음에 얼마나 크게 남겠습니까? 불행한 삶을 끝내기 위해 불행을 택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일을 끝낸다고 또 다른 불행한 일이나 더 불행한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꾸 이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곤란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하다보니까 이혼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약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자기가 불행하니까 칼을 들고 나가서 아무나 보는 대로 찌르고 때리고 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가 행복해지는가? 내가 불행하니까 이혼을 하고, 자살을 하고, 살인을 하고, 마약을 하고, 술을 마시면 행복해지는가? 문제는 그대로 있습니다.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불행한 해결 방식이 어떻게 불행을 끊고 행복을 만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성경이 이혼을 허용하는 게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음행한 이유”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배우자의 불륜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따라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는 혼전 성관계라든지, 결혼 자체가 될 수 없는 근친 간의 동거 등을 말하는 단어가 “음행”입니다.

 

신약에 와서 바울도 근친간의 동거를 금지하며 갈라서라고 명했습니다(고전 5장).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고, 결혼했어도 이혼을 명령했습니다(에스라 10장). 신약의 사도 바울은 불신자 배우자와 이혼하라고 명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원할 경우 이혼을 허용하라고 하기도 했습니다(고전 7:15).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닌 한, 이혼이 불가하다는 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도 용서하고 사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그런데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한 번 깨어진 관계가, 용서했다고 금방 정상으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1-12절)

 

이렇게 부당한 이혼을 한 사람의 재혼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겠다고 하는 극한 상황이라도 성경은 이혼을 허용하지 않고, 그 대신 이혼의 상황을 만든 원인을 찾아 제거해서 아름답게 시작한 결혼을 끝까지 아름답게 마무리하라고 명령합니다.

 

 

4.  이혼에 대한 해결책

 

그렇다면 성경은 정말 이혼 밖에는 답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즉,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단지 성적인 부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달라서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경우, 배우자 중의 한 명이 안 믿어서 서로 다른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만 합니다. 배우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옆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추구할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애쓸 때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역시 예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의 모델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선한 삶을 추구하면서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도 생각하는 것, 이것이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자기 유익을 추구하다가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삶이 아닙니다. 나에겐 좋지만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된다면 안 할 줄 아는 것, 오히려 나는 좀 힘들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때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살아가는 겁니다. 내 가족만 위하고 우리 집만 잘되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 때문에 옆에 있는 다른 가정들까지 복을 받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빚어 가는 것, 감정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 같이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같이 여행 다니는 것이 좋은 겁니다. 감정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미국에서 유명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누구라고 하면 다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주 인기가 높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명합니다. 그 남편도 유명한 기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였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었다면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할 텐데 이들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여자와 이혼한 전 남편은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겠다. 나에게 가장 잘 맞고 적합한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하며 인터넷에 광고도 내고 사람들의 추천도 받아서 많은 여자들의 리스트와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 가운데 자기와 가장 잘 맞고 어울리는 사람들을 순위별로 1위부터 10위까지 리스트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위를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놀랍게도 그 순위 중 가장 적합한 결과로 나온 1위의 여인이 바로 자신의 전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아내를 바꾸면 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혼에서만 아니라, 상대방이 아니고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이혼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우리는 뭐가 잘못될 때 상대방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바뀌면, 내 남편이 바뀌면, 내 아내가 바뀌면, 좀 더 내 가정이 좋아질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바뀌면 내 교회가, 내 직장이, 내 사업체가, 이 사회가 바뀔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하면 이 나라가 바뀔 텐데’라는 말이 어느 정도 맞기도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정 변화되고 바뀌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이 무엇입니까? 또 가장 괴로운 기억은 또 언제였습니까? 아마도 가장 아름다웠던 것도, 가장 괴로운 것도, 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였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아름다운 관계로 나아가면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추억으로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틀어진 관계에 대한 가장 괴로운 기억 역시 아주 오래 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정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정말 진리입니다. 이 관계가 인생의 핵심입니다. 특별히 사랑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신 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추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픔을 당한 지체를 보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돌보아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모든 분을 자세히 다 알지 못하는데, 혹시 이전에 가정생활에서 실패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혹시 ‘나 저 사람과 더 이상 살기 싫어’라는 마음을 한 번도 안 품은 분이 계십니까? 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이혼은 안 하고 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살고 있는 그런 상태에 계십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이 위기를 이겨내고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뜻을 함께 받들어드리는 부부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내가 혹시 이전에 실패했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치유가 임합니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 실패했던 그 상대방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혹시 부부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위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기에 너무 힘든 상태에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갈등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 십자가 아래 여러분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못이 박힌 자국이 여전히 선명한 그 예수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에게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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