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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9

단계에 걸친 시력 회복

(마가복음 8 22-26)

 

[들어가는 ]

 

제가 유일하게 보는 한국 티비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뉴스입니다. 생방송으로 뉴스가 요즘 잘 나오기 때문에 틀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 외에 또 보던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거의 못 보지만, 유일하게 보던 한국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개그콘서트>라는 프로였습니다. 제가 뭔가 하나를 본다고 하니까 ‘역사 스페셜’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걸 상상하셨을지 모르겠는데, 아닙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개그콘서트>를 보라고 하셔서 봤는데, 유머감각을 배우기 위해 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인기가 많이 떨어졌지만, 이전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로그램입니다.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시절인 2007년에 여러 코너들 중에서도 아주 인기를 끌었던 코너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면 바로 “같기도”입니다.

 

“같기도(道)”라는 제목은 “A 같기도 하고 B 같기도 하다”는 식의 말에서 나왔습니다. A를 하다가 슬그머니 B로 동작을 바꾸면서, A도 아니고 B도 아니라고 하며 애매모호함을 주면서 웃음을 주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중간쯤 서서는 “이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니여!”라는 식입니다.

 

한 번은 모자 달린 옷을 뒤집어 입고 나타난 ‘같기道(도)’ 명인 사부를 보고 제자들이 혼자만 따뜻하게 입느냐고 불평하니까 사부가 뒤로 돕니다. 자세히 보니까 모자 달린 후드 티를 입은 게 아니라 팬티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입고 있습니다. 그때 사부가 말합니다. “이건 후드 티도 아니고 팬티도 아니여~!”

 

‘같기도’를 수련하는 제자들이 또 한 번은 가수 박진영의 “날 떠나지 마”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그러다 노래가 그치니까 그와 비슷한 개다리 춤으로 바꾸며 말합니다. “이건 박진영도 아니고 배삼룡도 아니여~!”

 

별로 안 웃으시는데 실제로 보면 굉장히 웃깁니다. 그런데 개그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태가 꼭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그 ‘같기도’ 생각이 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느 정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있었으니까 따라갔던 것인데, 막상 삶의 자리에서는 전혀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난 번 본문의 누룩 사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8절)

 

제자들이 주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확실히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어정쩡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개그맨들이 제자들을 보고 표현을 했다면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여~!”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가끔 저도 생활을 하다가 마냥 퍼져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야, 나는 목사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여~”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여~!’

 

그런데 이런 대화 직후에 예수님이 한 맹인을 만나시고 치유해주십니다. 단번에 고칠 능력이 있으셨지만 이상하게 이 사람은 두 번에 걸쳐 고쳐주십니다. 처음에 안수하셨을 때는 그의 상태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는 그를 완전히 치유해주십니다.

 

 

1.   두 단계로 치유하신 이유

 

그렇다면 오늘 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닌 상태를 거쳐 고쳐주셨을까? 그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이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시각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도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하시고 두 번째로 안수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깨끗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것 같긴 한데 삶을 보면 또 안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안 믿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확실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면 그런 상태의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안 믿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확실히 믿는 모습도 없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 기도해주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을 때, 이 사람은 정직한 상태를 말했습니다. 확실히 보인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안 보인다고 한 것도 아니고, 보이기는 보이는데 정확히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이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었는가? 먼저는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2절)

 

물론 이 말씀만 보고 이 사람이 원치 않는데 나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앞이 안 보이는 그를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자기가 강하게 원해서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고침을 받겠다, 구원을 받겠다고 하며 나왔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끌고 나왔습니다. 자기 의지로 강한 사모함을 가지고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심각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귀찮아하며 나왔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기적을 일으키실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임합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의 믿음이 더해져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올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을 통해 일어난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서 이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일단 만져는 주십니다. 확실치 않다고 하면서도 그 사이에 이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점점 변화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안 믿는 상태로 나왔을지 몰라도, 이제 주님을 경험하고 보니까 믿는 상태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한 상태에 있다가, 나중에 아주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까지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여기서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한 번 삽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도 확실하게 해야지, 그냥 대충 하다가 가겠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고 확실하게 주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말씀 중에 마태복음 7:7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4:2-3)에서도 왜 받지 못하는가 하면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구해도 왜 못 받는가? 그것은 잘못된 정욕으로, 욕심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먼저는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뭔가 역사하실 것 같다면, 여기에 주님의 은혜가 있다고 느껴지면 간절히 사모함으로 매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주체는 항상 주님이십니다. 모든 다른 종교를 보십시오. 다 자기가 뭔가 수련을 하고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해서 뭔가 경지에 오른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주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은 내가 열심히 해서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구원을 해주시지만 나의 믿음이 거기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실 때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게 믿음입니다. 선물을 줄 때 받는 것을 행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노력을 해서 선물을 받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받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주님을 향한 열망, 주님이 주신 은혜를 내가 감사히 받겠다는 그 마음이 필요합니다. 구원을 받겠다는 마음,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적이 일어납니다. 또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확실히 주님을 고백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탁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시는데, 그래서 밝게 영적인 눈을 비춰주셔서 이전에 알지 못하던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뭔가 깨달아지는 상태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확실하게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아, 예수님이 이런 분이신가?’ 하며 점점 눈이 열리고, 마음이 좀 더 끌리고 그러다가 결단을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십니까? 분명히 예배를 하니까 믿는 것 같기는 한데, 또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전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또 와서 믿는 것 같고, 그런데 나가면 또 안 믿는 것 같고, 여기서는 분명히 크리스천인 것 같은데 나가 보면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게 믿는 건가, 안 믿는 건가?’ 하고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나오고 있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내 삶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새가족반>을 하다 보면 세례를 이전에 받은 분들이 많은데 “나는 사실 안 믿었는데 군대에서 받으라니까 받았다.”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믿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받았는데 지금은 정말 예수님을 믿으니까 다시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침례교나 어떤 교파들은 다시 세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교는 기본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고 이단이 아닌 다음에는 그냥 다시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의미 없이 받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미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다 보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것, 그 주님의 만져주심이 이제는 느껴진다면, 너무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2.   인격적 관계를 원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심에 있어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는 것뿐 아니라, 삶 속에서도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큰 문제, 작은 문제 다 많습니다.

 

“하나님, 이것만 해결되면 그 다음에 내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이게 해결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게 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해서 잘 믿을 수 있을 때가 없습니다. 그 문제 가운데 나를 인도해주시는,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는 크리스천들도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남들이 겪는 인생의 문제들을 다 겪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 때문에 문제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날 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서로 간절히 위해서 기도할 때 바로 응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얼마나 신이 나고 기쁩니까? 그런데 항상 그러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병이 낫기를 기도했는데 낫지를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생겨서 간절히 기도하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포기합니다. 믿음을 떠납니다. ‘아, 믿어도 소용이 없구나.’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거기 계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더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내 문제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주님도 하실 수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한 번만 기도해도, 아니 기도를 안 해도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문제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나는 그게 해결되기를 원하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뭔가 주고자 하시는 선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은 재앙이 아니고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가?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못 보는 선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성숙도이고 영적인 눈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 번만 기도했는데 해결되었다면, 그 다음에도 한 번만 기도했는데 또 해결되었다면, 이런 것이 계속되면 내 신앙이 계속 성장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멀어집니다. 참 이상합니다.

 

세상에서도 “하나님, 이거 꼭 되게 해주십시오.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렇게 되어서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해서 바빠지니까 신앙을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기도를 하자마자 즉각 해결해주시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냥 해결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필요하면 찾는 해결자입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놓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신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다 필요 없을 때는 안 갑니다. 필요하면 갑니다. 이런 게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형상으로 만들어서 한군데에 우상으로 만들어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상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필요할 때만 찾고 필요 없으면 안 찾고 그러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필요하든 필요 안 하든, 내가 그렇게 느끼든 안 느끼든 상관없이 늘 동행하시며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길을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가장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해결되면 인격적인 관계가 성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쌓여서 관계가 깊어집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이 어떻게 진실한 친구간의 우정이 생기겠습니까? 부부사이에도 오래 살아가면서 서로를 향한 지식과 신뢰가 점점 더 늘어가는 겁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바로바로 해결된다면 문지르면 나오는 요술 램프처럼 하나님을 취급할 수 있고, 마치 무슨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물이 나오는 식으로, 예수님을 문제 해결자로만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상의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종교(religion)’가 아니라 ‘관계(relationship)’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식이나 율법을 지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 관계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안 주실 때가 많습니다.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을 고치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어떻게 고치십니까?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3절)

 

먼저 예수님이 이 사람의 손을 잡고, 또 거기서 바로 고치시는 게 아니라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가 놀림감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 구절이 지난 7:31-37 사이에 나오는 ‘에바다 사건’, 즉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던 것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도 데리고 온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가 없는 데에 가서 고치신 것도 똑같습니다. 또 침을 뱉으신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병행 구절입니다.

 

이 맹인은 그 동안 얼마나 어둠의 생활을 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자기를 잡습니다. 일단 거기부터 따뜻함을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분이 예수님이시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 따뜻한 감촉을 느끼면서 이제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데 조용한 데로 갑니다. 거기 가서 예수님이 침을 뱉어서 안수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겁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위생적인 차원에서 더럽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침에 의학적인 효험이 있다고 알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는 방식으로 접근해주신 겁니다. 그 다음에 안수하며 기도하셨는데,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합니까?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4절)

 

마을 밖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있었는데, 뭔가 사람들이 보이긴 하지만 나무 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자세히 안 보이고 희미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있는데 걸어다니네요.”라고 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5절)

“그래, 뭔가 보인다고? 그럼 내가 다시 기도해줄게.” 그러시면서 눈에 또 안수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완전히 보였습니다.

 

이 말이 뭔가 하면, 예수님이 “야, 나 바쁜데 왜 이런 사람을 데려왔냐? 그럼 빨리 와. 빨리 고쳐줄게. 자, 나아라. 이제 가라. 나도 간다.”라고 비인격적이고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과의 관계를 정말 원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이 사람을 만지지 않고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안 데려와도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라고만 했어도 멀리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데리고 왔을 때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두 번에 걸쳐 만지시면서 고치셨다는 것은, 이 사람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셨는가를 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인격적인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무시하면서 “너는 그런 거 안 돼. 무조건 내 방법으로 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조금 거부하는 것 같으면 조금 틈을 주시고, 그러다 마음이 열리는 것 같으면 다가와서 또 해주시고, 그런 분이십니다. 어떤 폭군과 같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자상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3.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주님

 

만약 이 사람이 첫 번에 뭐가 보이느냐고 했을 때 “나무 같은 게 보입니다. 그런데 확실치가 않네요.” 하면서 “에이, 제대로 고칠 줄도 모르네” 그러면서 갔다면, “놔두세요. 난 이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했다면, 또는 반대로 “이 정도라도 만족합니다. 이제 됐습니다.” 하고 그냥 갔다면 완전한 치유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 곁에 붙어 있기만 한다면, 반드시 치유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왜 두 번에 걸쳐 치유해주셨는가? 단지 제자들과 우리만의 영적 교훈을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한 번에 안 됐다고 실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한 번 다시 다가오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제 2의, 제 3의,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다시스를 향해 도망을 갔습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북쪽의 모술이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가라고 하셨는데 스페인으로 배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니까 끌어다가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 밖에 쓸 사람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게 하기까지 다시 쓰셨는가? 하나님이 쓸 사람이 없어서, 아니면 요나만 필요해서가 아니라, 요나를 키우시는 겁니다. 바로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제 2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요한만 돌아와서 십자가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내가 죽더라도 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죽음은커녕 그냥 어떤 여자아이가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라고 하니까 벌벌 떨며 아니라고 합니다. 세 번을 저주까지 하며 아니라고 합니다.

 

솔직히 제가 예수님이라면 그런 사람을 왜 다시 보겠습니까? 뭐 하러 다시 쓰겠습니까? ‘너는 그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그냥 그러고 살아라’ 하고 다른 사람을 쓰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부인했으니까 세 번을 물어보시면서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 얼마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는데,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가까이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힘드니까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잤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야, 너희들이 무슨 제자라고 이러고 있냐? 당장 꺼져라!’라고 할 텐데, 예수님은 역시 저 같지 않으십니다. 그게 참 감사한 일입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막 14:40). 그러니까 깨우시는데 또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중엔 그냥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포기하신 게 아니고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회복될 때가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려주시는 주님, 다시 다가오시는 주님! ‘너는 왜 맨 날 그 모양 그 꼴이냐? 나는 다른 사람 쓰겠다.’ 하고 포기하시는 게 아니라, 끝까지 기다리시면서 나를 고쳐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리고 때가 찰 때 마침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이 주님의 사랑과 인내와 은혜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그게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뭐라고 합니다. 그러면 ‘에이, 다시는 저런 사람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라고 하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나는 벌써 가망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아주시고 인내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해보기 위해 애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기 싫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나를 기다려주셨는데...’ 하면서 나도 기다려주는 겁니다. 나도 인내하는 겁니다. 나도 기회를 다시 주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찍혔다고 그냥 끝이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겁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나의 신앙을 보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야’라고 하신다면 참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뜨는 데도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유형은, 디모데 형입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고 뭔가 잡히지 않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인가부터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생생하게 다가오고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믿었지만, 그냥 다니고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벌 받을까봐 다녔는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살아 계신 주님과의 생생하고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너무 놀라울 정도입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진작 몰랐나?’ 하는 순간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갑자기 주님을 영접하여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바울 형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 형이 있고 바울 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좋습니다.

 

오래 전에 저와 같이 사역하시던,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목사님이 있었는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무 세상에서 사업하고 그러다 실패도 하고 여러 쓴맛도 많이 보았는데, 나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늦게 콜링을 받아서 이렇게 목사가 되었다. 내가 진작 당신처럼 그렇게 젊은 나이에 제대로 주님을 만나서 헌신하고 진작부터 쓰임 받았으면 얼마나 더 기뻤겠느냐? 그게 아쉽다.”

 

물론 아쉬울 수는 있지만, 그건 나쁘고 어릴 때부터 죽 한 것만 더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느 게 더 나쁘고 좋고 한 게 아닙니다. 둘 다 좋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각각의 사람을 향한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나음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고치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을 붙들고 나가는 믿음이지, 언제부터 믿었나, 얼마나 오래 믿었나, 갑자기 믿었나, 천천히 믿었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각자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서서히 눈을 뜬 사람인가, 아니면 갑자기 눈을 뜬 사람인가? 같은 맹인이라도 바디매오 같은 사람은 한 번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유형인가, 아니면 천천히 눈을 뜨는 유형인가? 우리가 천천히 눈을 뜨는 건 좋은데, 천천히 눈을 안 뜨는 방향으로 나가면 곤란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는데, 저 사람은 전혀 하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변해서 시끄럽고 뜨거워지니 왜 저러나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갑자기 뜨겁게 너무 좋아서 막 나아가는 분들은 오래 조용히 또 천천히 가는 분들을 보고 저게 믿음인가 하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무시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이고, 그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매일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맹인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고쳐주셨는가 하면, 제자들이 믿는지 안 믿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게다가 시비 걸기 위해 왔던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눈이 감긴 영적 맹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못 봅니다. 그런데 이 바로 다음 본문에 베드로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이제 곧 옵니다.

 

우리도 지금은 혹시 아직 확실히 않더라도,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더라도, 이제 곧 주님을 알게 될 때가 올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가족 가운데 아직 나오지 않는 분들을 보면서 너무 절망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에이, 이 사람은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분명히 하실 것인데 그 때가 아직 안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늘 그분을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또는 우리 주변의 안 믿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별 움직임이 없다 할지라도 분명히 주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섬겨야 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과연 확실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상태인가, 아니면 믿긴 믿는데 거의 잘 안 믿는 것과 비슷한 상태인가? 우리가 이것을 돌아보며,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그 주님을 강하게 붙들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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