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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4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7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마가복음 5 21-34)

 

[들어가는 ]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가는 것을 ‘신앙(믿음)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믿음) 대해 오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음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올바른 행실과 삶은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까 윤리나 율법은 필요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리켜 무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구원파’의 교리입니다. 지난 세월호 사건 드러났는데,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남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는 식입니다.

 

믿음에 대한 다른 오해는, 이것을 적극적 사고방식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기대하며 믿고 나아가면 믿음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믿음인 알지만, 사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을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한 것입니다. 결과 시대에 상당수의 교인들이 적극적 사고방식과 오직 믿음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핵심은, 축복이나 성공이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고 살면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복을 받는 비결이 사람의 신념과 긍정적인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서 주님만을 겸손하게 의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참된 믿음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서로의 말이 비슷해 보일 있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혈루증 여인의 절박한 상황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에 들렸던 사람을 치유하신 다음에 갈릴리로 다시 돌아오십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무리들이 나와 예수님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1)

 

여기서 마가는 예수님과 회당장 야이로라는 종교 지도자와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야이로는 돈이나 사회적 위치만 높은 사람이 아니라 신앙심과 도덕성도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2-24)

 

야이로처럼 지체 높으신 양반이 떠돌이 랍비인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이런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장면인데, 도대체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의 딸이 죽기 직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야이로와 함께 서둘러 그의 집으로 향해 가시는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도중에 발생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중하여졌던 차에” (25-26)

 

학자들에 의하면, 병은 자궁에 이상이 있어서 매일 하혈을 하는 부인병이었습니다. 1, 2년도 아닌 12년이나 병으로 고생을 했고,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가진 재산을 사용해가면서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병이 전혀 낫지를 않을뿐더러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돌팔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은 병대로 나았고, 치료비로 가산을 모두 탕진했고, 이상 시도할 방법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굉장한 괴로움과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매일 피를 흘리니까 피가 모자랐을 것이고, 그로 인한 빈혈 증세로 항상 어지럽고 피부도 거칠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서 항상 비릿한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게다가 12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혹시 남들이 자기 병을 눈치챌까봐 조심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고, 그래서 항상 긴장되고 피곤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고통스러운 것은 율법이 자기를 부정한 사람으로 정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월경 기간 외에 피를 흘리는 여자는 부정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15:25). 누군가를 만져서도 되고, 누웠던 자리나 앉은 자리나 손이 닿았던 모든 물건까지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회당이나 성전에 나갈 없었고, 예배도 마음대로 드릴 없었습니다.

 

이처럼 여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전에 어렸을 결혼을 했었더라도 이혼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도 자신과 함께 있어 주지 않고, 기댈 사람도 없었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외로움으로 절망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절망 속에 살던 여인의 삶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7)

 

12 동안 절망 속에 살면서 병이 심해졌던 차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예수의 소문 들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라는 분이 이전에 적이 없는 일들을 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다리를 쓰던 사람을 일으키고, 중풍병자가 뛰어가게 하고, 때부터 못하던 사람의 말문이 트이게 하고, 귀가 들리던 사람이 듣게 하는 , 놀라운 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은 이제 아무도 신뢰할 없었습니다. 동안 사기꾼들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가진 재산을 날렸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라는 분은 돈을 받고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인은 그때부터 예수를 마음에 품고 계속 그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라는 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분명 어떤 병도 고칠 있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고, 자기도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병이 나을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10:17)

 

말씀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있습니다. 물론 아무 거나 듣는다고 되는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먼저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귀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믿음은 결코 가만히 있는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은 들어야 생깁니다. 그러니까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먼저 받는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와야 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VIP 어떻게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선교지에서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던 현지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누군가 가서 말씀을 전할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야 합니까? 믿는 사람은 먼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서 데려와야 합니다.

 

여인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지나가며 들었을 있습니다. 그들 누군가는 분명 여인에게 예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심코 그냥 말한 것인지 몰라도, 여인에게는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VIP 목장에 있을 때도, 처음에는 VIP 위주로 하지만, 후부터는 서로 감사의 제목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들을 나눌 , 그들도 그것을 듣고 믿음이 생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찮아서 거부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마음에 꽂힙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나누는 내용을 듣다가 마음에 꽂히게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 얻든 전해야 합니다.

 

 

2.   여인의 믿음

 

여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로 무리 가운데 섞여 가다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가에 손을 대는데, 그렇게 합니까?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8)

 

여기서 “생각함일러라”의 헬라어 원어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동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은 한두 이야기하고 끝난 아니라,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듯이 되풀이하며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는 나음을 받을 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가가 인생에서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은 생각과 입으로 하는 말은 우리에게 소망이나 축복이 수도 있고 절망이나 저주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조심해야 하고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혼잣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혼자서 주로 무슨 말을 합니까? ‘참 아름답다’, ‘평화롭다’ 같은 말을 합니까? 사실 주로 하는 것이 ‘죽겠네’, ‘미치겠네’, ‘망했다’ 같은 말들입니다. 밖에 혼자 하는 욕설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혼자서 자녀와 배우자에 대해 하는 생각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얘 때문에 내가 아주 미쳐’, ‘이건 싹수가 아주 노랗구먼’, ‘얜 도대체 이렇게 글러 먹었어?, ‘지 애비(어미) 닮아서 하는 짓이 같아’, 이런 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아주 꼴불견이야’, ‘저걸 그냥’, ‘저런 바보 같은’, ‘야, 나가 죽어라’와 같은 말들입니다.

 

12년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 직전까지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는 나을 있어.’라고 반복해서 생각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인이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 가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끊임없이 여인은 예수님을 생각하고 나을 것을 갈망하며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슨 주문이 아니라 간절한 믿음의 기도이며 선포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시편에도 그런 식으로 것이 나옵니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42:5, 43:5)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닥친 힘든 상황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상황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고, 해석입니다. 상황을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그토록 해석이 중요한가? 상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상황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를 살펴봐야만 합니다.

 

오늘 주무시기 전에 자신과의 대화 내용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관찰해보십시오. 많은 경우, 아주 부정적인 해석과 반응을 보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자신과의 대화에 예수님을 포함시키게 됩니다.

 

12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과의 대화에 그분을 포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포함시켜 자신과 대화를 ,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 대화하고,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만나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렇게 도와주는 과정이 바로 큐티(QT) 기도입니다. 그래서 큐티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반응과 여인의 고백

 

여인의 병이 나은 것을 아무도 모르는데, 예수님은 아시고 물으십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29-30)

 

그때 제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1)

 

말은 이런 뜻입니다. “아니 주님,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하는 판에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요? 대답을 드리죠. 모든 사람이 주님을 만졌습니다. 됐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2)

 

여러분, 예수님이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을 , 누가 손을 대었는지를 알고 질문하셨을까요, 아니면 정말 모르셔서 질문하셨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만졌느냐고 질문을 하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그분을 만지는데, 오직 여인 사람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지금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여인뿐입니다. 실제로 그때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밀며 만졌습니다(24).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차이입니까? 차이는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만져도 믿음으로 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여자는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을 만지고 병이 나으면 바로 사라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사람들 앞에 서게 하십니다. 순간은 여자에게 굉장히 괴로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루병 환자가 공공장소에서 랍비를 만지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누가 자신을 만졌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굉장히 무섭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인이 사람들 가운데 앞으로 나오도록 요구하십니까? 예수님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으십니다. 아십니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지만, 조금은 미신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있을 것이라고 당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게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에는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3-34)

 

여기서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한 것이다. 이제 삶을 변화시키는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여인이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인격적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병만 낫고 그냥 가버린다면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병에 걸리게 되면 소망이 없어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치유와 함께 여인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병만 낫고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병에 걸리거나 재발해도 아무 문제가 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날 , 주님께 간구하여 문제 해결만 살짝 받고 후에도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당신의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개그 프로그램에 이런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편) 나아지셨습니까?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산을 해가며 하십니까? 그래서 삶이 나아지셨습니까? ‘적당히 정도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 하며 신앙생활을 하셔서 삶이 나아지셨습니까?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 아닙니다.

 

예수님께 가면, 내가 애초에 드리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것을 요구하실 있습니다. 조금 드리려 하니까 내놓으라고 하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이 주시려고 그렇습니다. 내가 드린 것에 비해, 내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무한히 많은 것을 주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나아오기를 주저합니까? 살짝 왔다 살짝 가려고만 합니까? 문제 해결만 받는 것이 중요한 아니라, 영혼까지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

 

어느 바닷가의 동네에 살던 친구가 함께 바다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낚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바다에 물고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던지기만 해도 여러 마리를 낚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하나가 고기를 낚아서 담는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사람은 고기를 잡으면 자기 손바닥으로 고기의 크기를 재보고는, 손바닥보다 작으면 속에 넣고 손바닥보다 고기들은 바다에 모두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낚시를 하던 친구가 그것을 보고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너는 이상하게 잡는 같다. 내가 보니까 네가 작은 고기는 잡아서 통에 넣고 고기는 다시 물속에 놔주던데, 보통 상식으로는 것을 잡아서 넣고 작은 것은 바다에 도로 놔주는 것이 아니냐? 너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냐?” 그러자 사람이 대답합니다. “, 아니야. 우리 프라이팬 크기가 손바닥만 하거든.”

 

사람이 똑똑한 겁니까, 미련한 겁니까?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것을 준비해놓고 계시는데, 나는 기준에 사로잡혀서 내가 생각하는 수준 정도만 원하며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엄청난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인데, 그것을 하지 않고 살짝 내가 원하는 정도만 들어갔다 나오려고 하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하고 초라합니까?

 

참된 믿음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제자로 따르는 삶을 비로소 속에서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알고 믿음을 맛보게 됩니다. 참된 구원의 의미를 알고 믿음을 맛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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