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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8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2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마가복음 11 27~33)


[들어가는 ]


2016 콜럼버스 연합부흥사경회가 9 마지막 (28-30) 열립니다(, , ). 이번에 오시는 강사님은 10 연합부흥사경회가 처음 열렸을 오셨던 한국의 김동호 목사님이십니다. 그때 오셨을 하셨던 이야기들 가운데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가지가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오래 한국의 어느 지역에 우리처럼 연합부흥사경회를 하면서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가셨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점심식사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대접하시는 목사님에게 “오늘 메뉴는 뭡니까? 하고 물으셨는데, 목사님은 말하기를 “아주 좋은 가서 아주 좋은 먹으니까 같이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바로 ‘보신탕’ 집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보신탕을 드시는데 그런 데로 오니 아주 난감했습니다. 먹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고 먹는 척하며 다른 분들 눈치를 보는데, 가만 보니까 다른 목사님들은 보신탕을 정신없이 먹느라 강사 목사님이 드시는지 드시는지 전혀 신경을 쓰고 자기가 먹는 바빴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시간을 넘길 있었다고 합니다. 다들 너무 먹었다고 하지만 강사 목사님은 배가 너무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대접한 목사님이 교회에 가서 그날 돈을 청구할 텐데, 무슨 명목으로 하겠습니까? ‘강사접대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말이 되는 겁니다. 정작 강사는 음식을 전혀 먹었고, 자기들만 신이 나서 배부르게 먹었는데, 무슨 강사접대비입니까? 강사를 정말 대접하려면 강사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무엇은 좋아하시는가를 미리 알아보고 강사에 맞춰서 음식을 정해야 되는데, ‘강사님도 우리처럼 음식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 겁니다. 그래서 정작 강사로 오신 분은 하나도 먹지를 못하고 굶은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도 당연히 이것을 좋아하시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주님도 좋아하시겠지.’라고 짐작을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만 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라는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역사학 교수이자 사회학자이며 신학도 공부했는데, 이분이 중에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기독교가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변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기독교는 원래 예수님이 원하셨던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뒤틀려진 기독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진리가 왜곡되고 전혀 진리가 아닌 것들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배우고 깨달아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아무리 많이 모여서 열심히 행사를 하고 사업을 벌여도, 만약 주님의 진리에서 벗어나고 뒤틀려져 버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규모와 엄청난 예산과 숫자를 자랑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상황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높은 사람들과 진리에 대해 연속적으로 논쟁을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논쟁들을 통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지, 그들이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보여주십니다.

 


1.   마음이 불편한 종교 지도자들의 도전 (27-28)


지난번 살펴본 것처럼, 종려주일 이후 월요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다음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고 중요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7)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꾀하고 있었습니다(18).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행위가 아주 못마땅했던 겁니다. 자기들의 수입이 끊어지는 손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뒷돈을 받으며 장사를 하게 해주었는데 돈줄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가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고 죽일 기회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서 아주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28)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로마 총독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꾸만 자기들의 종교 문제를 가지고 와서 재판해달라고 하니까, 로마에서는 ‘공회(산헤드린 Sanhedrin)’라는 것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요즘의 국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회는 70명으로 구성됐고 해의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유대 종교에 대한 것만 다루지, 사형시키거나 때리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십니다. 해의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집에 끌려갔다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는 , 불법적으로 밤중에 모인 모임이 바로 공회였습니다. 공회는 원래 밤에 모이면 되는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밤에 모이고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공회가 여기에 모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성을 띠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을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지난 성전에서 물건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며 그들을 쫓아내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에 대해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고 책망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성전과 관련하여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성전에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예수님을 책망하며 비난하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네 까짓 뭔데 감히 우리처럼 높으신 분들의 허락을 받고 그렇게 하느냐?’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분명하게 잘못된 일을 하면 누구든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유대사회의 ‘가장 높으신 양반들’이 결정해서 하는 잘못된 일을 감히 나서서 틀렸다고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자인 헤롯의 죄를 지적하다가 세례 요한이 잘려 죽는 일을 당했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자녀들, 특히 젊은이들의 입단속을 시켰을 것입니다. 특히 권력을 뒤에 입은 종교지도자들의 횡포가 말할 없이 컸습니다.


보통은 잘잘못에 대해 말할 있지만, 높은 분들의 죄는 쉽게 지적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감히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주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장사하도록 허락해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완전히 도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있었겠습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했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시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반대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와서 질문을 던진 것인데, 그들의 질문에는 아주 음흉한 계교가 숨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집단에 소속된 자들의 권위만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권위로 네가 이렇게 하느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우리가 줬는데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는 것이냐?”라고 물었을 , 예수님이 인간적 권위로 그렇게 한다고 대답을 하면 그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아 그가 성전을 청결케 행동은 불법이라는 것을 지적하여 잡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한다고 대답하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고, 신성 모독을 한다고 죄를 적용해서 죽일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정말로 행하려고 때에는 이처럼 때때로 반대와 핍박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을 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술술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자고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려고 들겠습니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공식적으로 선교를 하지 못하는 나라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렇습니까?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고 “가서 제자 만들라”고 하셨으니까, 순종해서 하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여 믿던 분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도 나오지만, 잃어버린 동전과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 이미 가지고 있던 동전이나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하늘에서 기뻐하며 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을 , 주님을 모르던 영혼이 주님께 나와 구원을 받을 ,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가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명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멸망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며, 어떻게든 우리가 주님을 모르는 분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을 어려움이 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잡히고, 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심한 경우에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도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고 힘들어지는가? 그렇게 하는 어떤 세력은 자기들이 동안 왔던 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들의 권위가 침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언제 그렇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지는 아니고, 내가 좋은가 좋은가에 초점이 맞춰질 그렇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데 감히 누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초점이 하나님의 마음이 뭔가보다는 내가 편한가 불편한가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것은, 어떤 사역이든 봉사이든, 매일의 삶이든, 내가 불편한 것에 따라 하고 말고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건가 아닌가 또는 취향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다가는 좋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어예배는 오전 11:15이고 영어예배는 9:45입니다. 오래 섬기던 교회에서는 영어예배가 9:30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어권 젊은이들(대학생, 청년들) 토요일 밤에 늦게 자서 그런지 주일 아침에 자꾸 늦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영어예배를 10시로 옮기고 11 한국어예배를 11 30분으로 옮겨 달라고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영어권 청년들이 당회에 예배 시간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된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11:30 예배를 시작하면 1시나 되어 끝나니까 배가 고파서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도 밤에 일찍 자면 좋겠지만, 그래도 영어권 청년들이 아침에 나와서 예배를 잘할 있도록 양보해주고 그래야지, 내가 배고프니까 된다고 하니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좋으니까 이건 된다’는 식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 이것이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불편해서 된다. 내가 싫으니까 된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배척하고 잘못된 방식을 고수하게 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가는데, 거기에 어려움이 있고 핍박을 당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도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지혜롭게 대화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함께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2.   예수님의 반응과 요한의 권위 (29-33)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생각을 너무나 아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대답하시기보다는,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되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29-30)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힌 대답입니다. 무슨 권위로 했느냐고 묻고는 어떤 권위로 했다고 대답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권위를 가지고 공습을 펴신 것은, 요한의 권위와 예수님 자신의 권위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와 사함을 얻게 하는 요한의 세례(1:4) 하나님께로부터 것처럼, 성전에서 행한 예수님 자신의 행동과 선언 역시 동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요한 이전에는 세례라는 것을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결례’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죄를 지어 밖으로 떠난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 사회 속으로 다시 들어오게 우슬초라는 풀에 물을 찍어 뿌리는 의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시켰고, 그것도 겨우 풀에 물을 찍어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아예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게 하는 세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반드시 침례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물을 뿌리는 것도 있고 잠기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건기에는 이스라엘에서 요단강이 말라 거의 물이 없는데 어떻게 물속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가 잠시 후에 있을 성령 세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의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용서의 체험을 받게 해주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형식으로 받았다고 자동으로 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회개하지 않고 세례만 받겠다고 사람들에게 요한은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메시지가 유대인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종교지도자들은 일부 외에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저런 세례를 받느냐? 그리고 내가 위에 있는 사람인데 저런 요한 같은 사람에게 무슨 세례를 받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새가족반> 하는데 시간인 “예수 영접 모임”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소개하고 믿게 하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교인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방문을 오셨습니다. 믿는 분들이었는데, 이야기를 해서 시간에 들어가시도록 했습니다. 거기에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는가 하면, 평생 자기 아들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어 아들들이 엄청난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인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갈 정도로 폭군처럼 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질문에 대해 “예,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죄가 없으니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평생 죄를 지으며 상처만 팍팍 주던 분이 “나는 죄가 없으니까 천국에 있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아들들을 보듬고 어떻게든 잘해주려 하고, 그래도 남편을 섬기려고 하던 착하고 착하신 어머니는 “저는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죄가 많아서.”였습니다. 착하신 어머니는 “저는 죄가 많아서 천국에 갑니다.”라고 하고, 폭군인 아버지는 “나는 죄가 없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일입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자기를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보다 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의 권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종교지도자라는 자리의 권위나 오래된 전통의 권위 같은 밖에는 몰랐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면 자동으로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을 해치면서까지도 자리에 올라간 겁니다.


그러나 어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서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 때문에 앞에서 굽실거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그러는 아닙니다. 특히 교회에서 그렇습니다. 직분이 있고 없고가 제일 중요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직분이라는 것은 주님이 주신 사역을 감사함으로 받고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사역을 열심히 하겠다고 겸손히 나아가는 겁니다. 자기가 직분이 있다고 뭐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아무리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도, 박사님, 판사님 하면서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것이지 교회에서는 같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따라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거꾸로 자기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모른다고 시침을 떼게 됩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1-33)


사람들이 정말 몰라서 그렇게 대답한 아닙니다. 사실은 그들도 대답을 너무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요한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라고 하면 그를 무시하며 믿었느냐고 공격을 당하게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요한의 선지자 됨을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사람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 사람들이 자기들을 공격할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의 분노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We don't know. 이게 진짜로 자기들이 정말로 무식하다고 고백하며 인정한 겁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거역하면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인지 등에 대해 진정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당장 닥친 상황을 넘기고 모면해보고자 하는 얄팍한 편의주의, 권위주의, 이기주의였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부인하는 아주 악하고 비겁한 태도였습니다.


이들만 아니라 헤롯도 마찬가지였고,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거부했고, 빌라도도 재판을 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해놓고서도 끝까지 진리를 외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현실적으로 자신이 불리하거나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솔직히 양심으로는 진리를 압니다. 속으로는 압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모른 척하거나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아는데 내가 손해를 볼까봐 거기 끼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손해 보지 않겠다고 하며 아예 들어가지도 않고 거리를 두는 태도는 악한 태도라고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옳은 일이 아닌 알면서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틀렸지만 자기가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리를 두려 하는가? 악한 일인데도 하는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정말 우리가 질문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을 해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넣을 있는 그런 (하나님) 두려워하라! 그러한 상황이 ,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과감히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느냐,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입니까,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입니까?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결정을 내립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식해서 내립니까?


요즘 소위 ‘김영란 법’이라는 것이 통과되어서 식사대접을 3 원까지만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렇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봉투를 주는 것이 너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크리스천인 초등학교 교사가 정중히 촌지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반장의 부모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머쓱해지면서, 이것이 귀하다고 생각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어서 이것이 퍼져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집에서는 세금을 속여서 보고하여 이득을 챙겼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때문에 정직하게 tax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옆집 사람은 그것을 때마다 “왜 그렇게 세상을 모르느냐? 그렇게 미련하게 구느냐?”라고 하며 뒤에서 자기를 고리타분하다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오히려 옆집 사람은 audit 당했습니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게 원인은, 진리를 지키겠다든지 진리의 거부에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이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권세와 부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가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3:1-2). 그러나 고의적으로 그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현실을 지혜롭게 사는 길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 위험하고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권력과는 너무 거리가 , 불편한, 힘든 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자기들을 위협한다고 느껴지니까,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나가는 ]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이것을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캘빈(John Calvin)도 이것을 항상 되새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예배를 드릴 때나 나가서 일을 할 때나, 하나님 앞에 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사업의 어떤 딜(deal)을 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직장에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서 적당히 할까 하는 그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그는 이것을 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태도 아니겠습니까? 현실을 지혜롭게 산다고 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는다든지, 남을 속이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사는 삶이 당장은 이득이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주님의 진리를 모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이러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거부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진리를 감추십니다. 사실은 일부러 감추신다기보다, 보여주셔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주님의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도 웬만큼은 다 느낍니다. 그런데 혹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 사람과 대화를 하든지, 일을 하든지, 어디를 운전하고 가든지, 혼자 방에 있든지 상관없이 ‘코람데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체험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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